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일루젼 2021. 8. 30.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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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고은 
출판 :  민음사
출간 :  2013.10.11


현실적이다. 이 책을 과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놀라움과 충격보다는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부터 든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현대의 도시는 타자와의 분리가 극도로 진행된 사회이다. 보기 싫은 것들은 차단해 버릴 수 있고, 원하는 것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사람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도 내가 지정한 공간에 놓여지게 할 수 있다. '나'로만 이루어진 삶 속에서는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들을 철저히 사물로 분리시켜 버릴 수 있다. 

 

이런 토양 위에서 재난은 시한성을 가진 체험 상품이 된다. '나'라는 주체와는 분리되어 있기에 철저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이벤트로만 남을 뿐이다. '내'가 그 지옥도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 약간의 오싹함이라는 장식을 더해주는 '상상'으로만 존재한다.

실제 삶에서는 절대 일어날 리 없는, 그래서 막연함으로 남는 것에 대한 '안전한' '상상' '체험'. 

나에게는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니까. 

 

Paul, Foul, Fall. 

한국어로 파울-폴이라고 칭해지는 단어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막연한 3자의 이름은, 내 현실에서의 나타나기 시작한 옐로카드가 될 때, 추락과 붕괴의 전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단절적이다. 

 

나의 비극은 나만의 것.

너의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 것.  

 

내가 앉게 되는 자리가 누구의 추락으로 생겨난 것인지, 지금 내가 누르는 버튼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붕괴 직전까지도 타인의 것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남겨진 스케치북은 요나의 환상일 뿐이었을까?

과연 그 아이는, 정말 한국으로 돌아갔을까?


 

- 업무 영역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옐로카드의 한 형태일지 몰랐다. 옐로카드의 존재에 대해서는 입사 초기부터 알고 있었다. 옐로카드는 경고의 의미라기보다는, 균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음에 가까웠다. 한번 옐로카드를 받으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큰 사건이 생기지 않는 한 그때부터 시작된 추락은 막을 수 없었다. 요나는 진짜 노란색 카드가 우편이나 메일로, 혹은 인편으로 날아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옐로카드는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고 교묘하게, 그러나 분명 당사자로서는 회사 생활에 위기를 느낄 만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거였다.

 

- 송년 파티에서 화재가 나면 시체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장소가 보통 외투 보관소라고들 하지 않는가. 단순히 습관 때문인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외투 보관소로 몰려들었고, 결국 그들 대부분은 압사했다. 불이 나면, 땅이 흔들리면, 경보음이 울리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대로 튀어 나가야 한다. 외투를 찾아든다거나, 가방을 챙긴다거나, 노트북의 데이터를 저장한다거나, 휴대폰을 누른다거나 하는 사소한 행동들이 결국 생사를 가른다.

 

-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내 삶에 대한 감사→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단계까지 마음이 움직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 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


- 사람들은 과거형이 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반듯해지고 용감해진다. 그러나 현재형 재난 앞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것 이재 난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방관하거나, 인식하면서도 조장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싱크홀은 저편 사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 이 계획에서 직접 누군가를 칼로 베거나 구덩이에 밀어 넣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희생되는 사람들은 정보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을 구덩이에 매몰할 것이었다. 그 일에 대해 사람들은 침묵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누군가가 말한 대로 학살 의한 형태였으나, 학살의 책임자는 없었다. 모든 것이 분업화되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열중했다.  

 

- 쾌락원칙에 의하면 우리는 재난이나 고통을 원해서는 안된다. 즉 지독한 가난이나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 고문으로 사지가 찢긴 신체나 가혹한 폭력은 외면해야만 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백각형'이라는 사진을 통해 이 아이러니에 접근했다.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잔혹성에 눈을 뺏긴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여기서 전도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다. 그가 말하는 에로티시즘은 고통이 주는 강한 삶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 속에서 살아갈 힘, 에로스를 얻는다. 고통은 망막에 새겨졌을 때 강력한 이미지로 인식된다.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웃을 이미지로 확인할 때, 사람들은 값싼 우월감을 구매한다. 어마어마한 재난 지역을 뉴스로 보며 사람들은 감히 체험키 어려운 숭고를 접한다. 직접적 체험으로서의 재난이 위대한 자연의 숭고를 깨우쳐 준다면 렌즈를 거친 재난은 흥미로운 스펙터클과 다를 바 없다.

 

- 재난 여행이란 허구는 이곳의 현실보다 더 개연적이며 때로 핍진하다.

 

- 여행사 직원 요나가 여행 예약을 취소하려는 고객의 요구를 거부하는 장면을 보자. 지독하리만큼 환불 불가를 반복하는 요나는 녹음된 약정을 읽는 ARS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요나의 '자리'는 해독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독하지 않아도 정글은 잘 돌아간다. 아니, 해독하지 않을수록 정글은 잘 유지된다. 입력된 코드를 송출하는 기계에게 맥락은 필요 없다. 그러므로 이미 요나에게 현실은 곧 재난이며 하루하루의 삶은 생존의 전쟁이다. 재난이 성장 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신이라면 요나에게 미래는 이미 재난이다. 아니, 윤고은은 우리의 삶을 이미 '재난으로 선포한 셈이다. 
 

 

    

 

더보기

 - 재난이 한 세계를 뚝 끊어서 단층처럼 만든다면, 카메라는 그런 단층을 실감하도록 돕는 도구였다. 카메라가 찰칵, 하는 순간 그 앞에 찍힌 것은 이미 인물이나 풍경이 아니다. 시간의 공백이다.

 

- 요나가 듣든 말든 호텔 직원은 베트남 사람들은 오토바이 타는 자세로 연인인 지부부인지 친구인지를 구분한다고 말했다.

 

- 세상에는 하인리히 법칙을 믿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의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는 작고 작은 수백 가지 징조가 미리 보인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재난의 발생에 주목한 것일 뿐, 재난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규칙이 있을 리 없다. 재난은 그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 "모든 재난이 눈길을 끌 수는 없잖아요. 이슈가 되는 재난들은 따로 있어요. 보통 이 세 가지 요소를 충족시켜야 하죠 일단, 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은 될 것. 지진이라면 적어도 6.0 이 상, 화산이라면 폭발 지수가 3등급 이상. 웬만해서는 이제 큰 뉴스도 못 돼요.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야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동정하고 주목해 준다 그겁니다. 세상이 너무 자극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관심이란 건 정직한 거니까요. 둘째로는 새로운 지역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꾸 반복되는 지명은 재미없어요. 뻔한 곳이니까요. 아주 강도가 크지 않은 이상, 새로운 지역, 덜 알려진 지명이 언급되면 사람들은 주목하게 되죠. 생각해 보세요. 화면에 폭삭 무너진 거리가 잡혔는데, 그게 늘 보던 문자로 된 간판이나 신호 체계, 또 뭐랄까, 늘 보던 사람들이나 옷차림이라면 좀 식상하지 않겠어요. 연민에도 권태가 올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색다른 세계가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면, 지금까지 자극받지 않았던 새로운 세포가 마구 자극을 받으면서 사람들은 신선한 아픔을 느끼겠죠. 마지막은,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바로 스토립니다. 재난이 벌어진 후에 사람들이 신문을 뒤적이는 건, 재난의 끔찍함을 보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 만신창이 속에서 피어난 감동 스토리를 찾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죠. 그건 우리가 자주 잊고 사는 거거든요."

 

- 재난 여행을 준비할 때는 어느 각도로 칼을 들이대도, 누구나 감동하고 슬퍼할 만한 재난의 단면들이 나타나도록 고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동공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강렬한 이미지다. 특히 매스컴으로 재난을 마주하는 경우, 이미지가 재난의 실체를 지배한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규모 로터진 몇 건의 재난을 보면, 피해 규모와 성금 혹은 관심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도시는 뉴스 몇 줄을 장식하고 금세 잊히는가 하면, 또 어떤 도시는 보다 농도 짙은 관심과 많은 성금을 얻었던 것이다. 그건 폐허가 된 도시를 잘 녹여 낸 몇 장의 사진과, 그 사진의 주석 같은 사연들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기에 더 슬프고 돕고 싶은 쪽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되려면 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 해졌는지가 드러나야 하고, 가장 좋은 건 피폐한 삶 속에 공감하는 경우였다.

 

-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억하는 대사가 없었다. 연습한 대사도 없었다. 특별한 사연도 없었다. 리허설도 수당도 없었지만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듯, 이야기들은 바다로 흘러나왔다.

 

- 저뒤 어딘가에서 탑을 내리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무뿌리가 바람에 시계추처럼 흔들리지만 않았다면 그것은 영원히 그 자리에 걸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안전을 위해 그 나무를 탑에서 내리기로 합의가 되었고, 탑도 그 땅에서 뽑혀 나갔다. 고민의 시간은 몇 달을 지나왔으나, 나무를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탑과 나무 사이에서, 몇 구의 시체들이 다 익은 열매처럼 툭툭 떨어졌다. 그러나 거기에도 요나는 없었다. 

 

- 글을 쓰는 동안 어떤 달뜬 감정에 사로잡힐 때도 있는데, 그 감정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건 역시 온도다. 그 감정은 적당히 따뜻하고 나른한 형태여서 내게 일종의 광합성 효과를 준다. 카페에서도 내가 선택하는 자리는 주로 벽을 등지 고통 유리 창을 멀리서 바라보는, 양지보다는 음지에 가까운 위치인데 이상하게 글을 쓸 때는 온 피부가 다 태양열 집 열판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피부가 다 태양열 집열판이 되면, 세상에 자극 아닌 것이 없고, 관계없는 것이 없다. 한때 나는 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꿈꾸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건 외피 안에 숨어 적당히 둔감하고 싶어서였는데, 쓰다 보니 오히려 그 반대가 되고 말 았다. 말 그대로 아무 보호막 없이 덩그마니 놓인 태양열 집열판, 그러니까 나는 외피 안에 들어간 게 아니라 외피 그 자체가 된 거다.
<밤의 여행자들>을 쓰는 동안 계절이 두 번, 혹은 세 번쯤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스쳤던 수많은 '삶'의 여행자들께 감사한다. 
2013년10월 윤고은
  

- 그들이 '거기'의 삶을 꿈꾼다는 것은 '지금, 여기'의 삶에 결핍이나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윤고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이곳에 있을 공간이나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고작 가로, 세로 120센티미터 안팎의 좁은 책상 하나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이는 그들이 월드 와이드 웹의 창문 너머로 훌쩍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책상은 좁지만 모니터 너머로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은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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