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 윤영훈
원제 : A History of Christianity
출판 : 기독교문서선교회
출간 : 2013.09.14
일단, 종이가 얇다. 1권과 3권 중 어느 쪽부터 읽을까 고민하다 현대사가 포함된 3권을 선택했다.
저자는 서두의 추천사에서처럼 종교적 관점에 매몰되지 않고 적절한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당시의 정세와 외부적 영향을 고려한) 기독교의 역사를 서술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가기 때문에, 이 한 권으로 모든 그림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세계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듯 하다.
(기본적인 세계사의 틀 위에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 간 변화와 영향이 그려진 기름종이들을 겹쳐 본다고 생각하면 적절할 듯 하다.)
'기독교'라는 표현 안에 개신교, 정교, 카톨릭, 안식교, 유대교 등등 히브리 신에서 (예수는 대부분 포함되지만 반드시는 아니다) 기원한 모든 종교가 포괄되어 있다는 확고한 인식 하에 이루어진 접근이라 정말 방대했다. 개신교 쪽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지만 저자의 저술부터 어느 한쪽에 크게 치우치지 않은 역사서였다. 역대 교황들의 계보가 정리된 책을 읽고 읽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운대로 즐겁게 읽었다.
- 오랫동안 교회사를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들은 하품과의 전쟁을 치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대체 게르만이 이동하고 서로마가 멸망했는데 왜 로마 교황청은 더 발전을 하게 되었는지, 대학의 교수들은 왜 수업료를 직접 받았는지, 로마가 아닌 엉뚱하게 파리의 대학이 왜 신학의 본산이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별로 주욱 나열해놓고 이걸 이해하고 게다가 외우라고 하니 졸음이 쏟아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더군다나 교회사와 교리사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마냥 혼란스러웠다.
- 책은 사상의 창고다. 중동에서 기원한 위대한 세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은 거룩한 책에서 자신들의 실천의 근거를 찾기 때문에 흔히 책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 이 전쟁은 1914년 두려움과 야망이 뒤엉킨 복잡한 외교관계로 인해 유발되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동기는 다른 전쟁들의 양상과 유사하다. 이 전쟁은 네 국가의 기독교인 통치자와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황제들(kaisers)과 러시아의 차르(Tsar), 영국 국왕(King-Emperor)이다. 이 통치자들은 서로 전쟁하면서 자신들의 공통된 믿음을 무시해버리곤 했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이 이전의 발칸 정복자들끼리 주도권을 다투다 점차 분열되어갔다.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지나가자, 이제는 유럽 국가들 간에 전쟁에 임하게 된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ian)의 왕족인, 프란시스 페르디난트(Francis Ferdinand) 대공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역사적 교회당의 복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들 부부는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에 해당하는 합스부르크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에서 살해당했다. 그 암살자들은 더 강대한 세르비아(Servia)를 세우기 위해 정교회 신앙으로 일어난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지역은 종교적으로 매우 다원화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종교적 상황 이외에 정교회 신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II)와 인종적으로 독일인이며 개신교도인 조지 5세(George V) 사이의 정치적 권력 다툼도 뒤엉켜 있었다. 또한 반교권주의 성격이 짙었던 프랑스의 제3 공화국(Third French Republic) 과의 외교 협상에도 난항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표방했던 독일제국의 야망에 대항해 국가 방위 체제를 발효하였다. 당시 독일제국은 세르비아를 압박하며, 그 후견 국가였던 러시아와 대결하기 위해 합스부르크와 제휴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들의 종교문제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잠재적 영향 가운데 있었다. 독일 황제는 프랑스-러시아 동맹(Franco-Russian alliance)을 분쇄하고자, 1830년대 중립국가를 표방하며 세워졌던 벨기에 (Belgium)를 침공하였다. 벨기에 국민은 대부분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명목상으론 1839년 벨기에에 세워진 중립권 보장을 수호하고자 전쟁에 참여했다.
- 영국에서 존중받는 예배 장소는 가톨릭 '성당'이 아니라 '교회'(Church) 또는 '채플'(Chapel)이라 불리는 장소이다. 물론 양자는 모두 개신교 개념이다. 혼동스러운 앵글로-가톨릭 주의와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잉글랜드 국교회는 자기 길을 가게 되었다.
- 1977년 지미 카터의 대선 승리가 미국의 정치와 종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면, 그 다음해인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갑작스런 즉위 역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즉위는 직전 교황인 요한 바오로 1세가 재임한지 불과 한 달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급작스런 교황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다(당시 바티칸이 이 비극적 사건을 부적절하게 진행하면서 이에 대한 여러 황당한 음모론이 왕성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 4세기 동안 오직 이탈리아 출신 감독들에게 독점되어 오던 교황직에 폴란드인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선택되었다. 이는 가톨릭 교회 안에도 이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846년 선출된 교황 피우스 9세 이후 가장 젊은 나이에 교황에 즉위하였고, 이로 인해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랜 기간 교황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교황에 오르기 전 카롤 보이티야는 두 번의 포악한 독재정권에 대항해 살아남은 영웅적 인물이었다.
- 지옥 교리의 실종은 19세기 영국 개신교에서 은근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온유한 성품을 가진 신학자 모리스(F. D. Maurice)는 유니테리언 주의자였다가 잉글랜드 국교회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개념은 성경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1853년 자신이 봉직하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의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이와 유사한 사상은 놀랍게도 전천년주의 복음주의권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상상력이 풍부했던 에드워드 어빙 (Edward Irving)과 그가 잉글랜드국교회 안에 머물면서 별도로 조직했던 영국 제자회(English disciples)의 토마스 벅스(Thomas Rawson Birks)와 에드워드 비커스테드(Edward H. Bickersteth)와 같은 인물들이다. 이 신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칼빈주의에 공감을 표하고 있음을 주장했지만, 지옥 화염의 온도를 낮추면서 자신들의 사상을 펼쳐 갔다. 이들은 여전히 전 세계 TV 전도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아울러 마지막 재를 처분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양한 새로운 방식들이 고안되었다. 이는 개인화된 예식(Ritual)이 되었다. 예를 들어, 한 플로리다의 불꽃놀이 열성자의 장례는 화장된 후 시신의 재를 로마 촛불을 사용해서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으로 행해졌다. 또는 무인위성을 통해 시신의 재를 지구 밖으로 멀리 올려 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신학적 의미도 매우 중요하다. 이제 죽은 자의 시신은 위생적으로 안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화되면서, 장례 방법은 현 소비사회에서 전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택의 몫이 되었다. 이로서 교회는 이전의 가장 강력한 역할을 강탈당했다. 즉 교회는 짧은 인생의 주기에서 대중들의 신앙적 삶을 형성하도록 강조할 수 있는 예식의 기회를 상실하며 당황하게 된 것이다.
- 본서는 결론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는 달리, 계몽주의 이후 서구 세속주의 전통에 서 있는 역사가들은 인간의 이야기에 결정적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 역사서는 우리의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말하며 한 가지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기독교라 불리는 종교 안에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 이와 함께 지은이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근자에 소위 '번영의 복음' (Prosperity Gospel)을 강조하자 많은 교인이 세속적 성공과 정치사회적 헤게모니를 추구해 왔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 책의 끝 부분에서, 지은이는 “(요즘의 시대사조에서) 종교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 사회를 향해, 종교가 중요하다고 깨우쳐 줄 수 있는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러한 세속화 상황에서 지은이는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신비의 회복'에 관하여 자각했다. 그 신비의 비밀은 종교적 신비주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새겨듣는 가운데서 깨달아 알게 된다고 말했다.
- 이로 인한 원주민들의 '화물 숭배'(cargo cults)는 지금도 멜라네시아(Melanesia) 군도에서 계속되고 있다.
- 대신 그런 경험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단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사랑과 분노 속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대단히 인격적인 신인 동시에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플라톤의 철학에 나온 최고의 신, 즉 완벽해서 결코 변하지 않으며, 감정(이것 또한 변화를 의미한다)에 사로잡히지 않는 분과 매우 달랐다. 제1세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 엘리트 문화 속에 살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화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생각들을 적절히 결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질문에 대해 만족스런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 에른스트는 그의 초현실주의 동지들과 더불어 중세시대에 공식적 기독교 신앙 이면에 전승되어 온 비행소년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그림은 초기 몇 세기 동안의 기독교 교회들에 떠돌던 외경 "복음서들"(Gopels)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외경들은 신약의 정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주 소소한 정보를 확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야기는 중세의 시가문학을 통해 전승되었다. 일부 외경 속에서 우리 주님의 유아기 비행들은, 비록 이후 자기 생명의 회생을 통해 그 허물을 덮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상당히 불경스런 일들로, 어린 시절 친구를 살해한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어린 예수를 벌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당연한 도리로 여겼을 것이며, 이런 모습이 새겨져 있는 돌판과 나무판이 발견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이미지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 따라서 마르텐 반 도르프(Maartenvan Dorp), 베아투스 레나누스(Beatus Rhenanus), 빌리발트 파르크 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은 스스로 은둔적인 삶을 살았고, 이로 인해 이들의 명성은 이제 소수의 지성사 연구의 전문가들에게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비록 종교적인 논쟁점들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틴 루터나 가톨릭 교회가 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과는 구별된 종교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법을 보여주는 문서들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러한 제3의 관점들은 여러 밀서들, 신플라톤주의 서적들, 유대교 신비주의를 반영한 카발라(Cabbala)와 같이 성경과는 별도로 은밀히 전해져 온 고대 문서들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독일의 학자로서 아주 박식했을 뿐 아니라 16세기의 가장 독특하고 기괴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카발라를 찬미하였고, 이후 보편적으로 지칭되는 "파라켈수스적” 탐구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이는 불경한 주술적 시도와 연계된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비전통적인 개신교인들, 특히 종교개혁을 오랜 거짓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간주했던 급진적인 개신교 학자들에게 매료되었다. 또한 많은 주류 개혁주의 개신교인들도 파라켈수스의 비전과 열정을 공유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은 언약 개념처럼 유대교 경전 타나크(Tanakh)의 주제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히브리 지혜 전승에서 유래된 것으로 새로운 개념을 논리적으로 조명하기에 적합하였다.
- 1680년경에는 네덜란드에서 또 다른 파격적 저술이 발표되었다. 이 책은 익명의 저자가 쓴 <세 명의 사기꾼에 대한 보고서>(Treanise of the shre impostor)인데 그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1719년까지는 출판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본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읽혀졌고, 그 저자가 스피노자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 책은 불어로 쓰였고, 아마도 그 저자는 프랑스로부터 추방된 위그노 배교자인 것으로 주정된다. 이 책에는 스피노자의 논문, "신학적 정치학에 대하여"의 메시지를 보다 반종교적인 색깔로 서술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난다. 또한 그 저자는 홉스(Hobbes)와 다른 여러 회의적 작가들의 사상을 수용하고 이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세 명의 사기꾼'은 바로 모세, 예수, 모하메드이다.
- 1740년경 잉글랜드 국교회, 스웨덴의 루터교,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 성직자들의 설교 메시지에는 이런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고, 고백적 신앙과 종교적 일치가 두드러졌던 스웨덴에서도 곧 이와 같은 흐름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 또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주제들은 현격히 감소되었고, 대신 성직자들은 국가의 부와 영광, 시민의 자유를 강조하였으며, 개인의 행복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물론 그들은 국가의 선한 행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상에 대해서는 계속 언급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런 시대의 축복으로 간주되었다.
-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혐오했다. 1920년대 초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두 개의 주, 오클라호마와 테네시에서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시험대가 1925년 테네시 주 데이튼(Dayton)에서 열렸고, 이 사건은 곧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젊은 생물 교사 존 스코프스(John Scopes)는 자신의 수업에서 실제로 진화론을 가르쳤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의 검사를 맡은 사람은 관록 있는 민주당 정치가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am Jennings Brian) 었다.
- 이는 오늘날 전형적인 형제단 예배의식으로 알려진 더욱 오랜 영성 전통이며, 여성적 종교성을 더욱 반영한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의 "경건한 모임"(colligia pietatis)에서는 하나님과의 내면적 만남을 강조하는 영성 수련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공식적인 루터교 예배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영성 수련을 별도로 수행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경건주의자들은 이전의 종교개혁시대부터 존재했던 여성 지도자들의 문서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런 관심은 이전에는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일이다.
- 하지만 디드로의 작품은 많은 지식에 대한 광범위한 항목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편집도 존재의 서열이 아닌 당시 유행하는 방식대로 알파벳 순서로 배열했다는 점에서 매우 돋보이는 과업이다(하지만 알파벳 순서는 그의 작품이 무려 28권에 이르는 대작업이었음을 고려할 때 매우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18세기에 본격화된 알파벳 순서 배열은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류방식을 뒤엎는 것으로서, 당대의 계급구조를 타파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시도였다. 백과사전의 각 항목의 글에서도 그 주제에 대해 매우 생소하고 기형적인 소수 의견으로 시작해서 공식적 의견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 프랑스 대혁명은 영국처럼 국왕이 다스리는 국가, 또한 그것은 신성한 것이라는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전복시켰다. 그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곧 민족국가(nation-state)의 탄생이다. 이 제도는 통치권을 왕의 심복이나 지방 영주가 아닌 중앙집권적 정부에 두고, 모든 국민은 한 국어를 사용하며 국가를 따르는 이상을 추구한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이 제도는 그들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었다.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nationalism)라고 불리는 이데올로기이다.
- 민족국가라는 사상은 19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원동력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유럽 각지는 이전에 이와 유사한 정치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위한 어떤 공유문화(common culture)나 집단의식(mass consciousness)이 아직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민족주의 국가 형성을 저지하고자 했던 전통적 정권과도 갈등을 겪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19세기의 민족주의는 정서적으로 종교를 대치하는 것이었다.
- 이런 상황 가운데 이사벨라의 동생 매리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예언하기 시작하였고, 곧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또한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기도 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성령의 은사'(gifts of the Spirit)에 대한 소식은 아름다운 시골마을, 앨버리(Albury)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통해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 신자들 모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저명한 활동가인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앨버리 집회의 정기적 참여자가 되었는데, 그는 곧 예언 활동을 하며 영적인 순례의 삶을 시작하였고, 이후 이 운동은 전 세계에 크리스찬 처치(Christian Church)란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캠벨 자매와 어빙의 체험과 사역은 현대 오순절운동(Pentecostal movement)의 숨겨진 전조일 것이다.
- 슐라이에르마허는 죽음을 앞두고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가장 훌륭한 사상들을 연구해왔소. 그것들은 내게 가장 친밀한 종교적 감정(sensation)과도 같구려." 따라서 인간은 뭔가에 대해 단지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되고, 모든 만물의 궁극적 근원을 의식적으로 찾아나가야 한다. 그 근원은 바로 거룩하고 신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17세기 이후 서방 기독교에서 부상하여 전 세계의 신앙운동이 공유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종합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열매로 모든 종교성의 근원이 된다. 이 기독교 고유의 신앙적 특성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으로,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완전한 하나님 인식으로 드러낸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있어 성경적 구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 인식에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의식은 그리스도에 기인한다. 그분은 자신 안에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신다."
- 영국에서 옥스퍼드 운동은 사람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심미적이고 감상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물려받은 수많은 아름다운 중세시대 교회 건물들이라는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3세기 동안 이 교회 건물들은 다방면으로 잘 개축하여 개신교회에도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당시 영국 사회는 여전히 중세 문화에 대한 낭만적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복원하여 고교회와 연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교회 건물에 걸맞는 중세식의 예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 기원했다. 이러한 노력은 로마 가톨릭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공회 자체 예배 방식대로 장엄하고 기품 있게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스스로 자신을 앵글로-가톨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중도적인 입장에서 호의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 스트라우스 이전에 성경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적 분석은 구약성경에 집중되어 왔다. 헤겔이 기독교를 상징적으로 접근했던 방식을 적극 수용했던 스트라우스는 이런 비평적 분석을 신약성경에도 적용하기 원했다. 그 결과로 그는 1835년 독일어로 축약된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예수의 삶>(Leben Jew)을 출판하게 된다. 이 책의 영역본은 자유주의 사상가이며 소설가인 매리언 에반스(Marian Evans)에 의해(우리에겐 그녀의 필명인 조지 앨리엇(George Eliot)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비평적으로 분석한 예수의 일생>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스트라우스가 묘사한 예수님은 위대한 유대 랍비였다.
- 이런 회의 속에 인간은 그 안에 가장 신성한 성품, 즉 최고의 도덕으로서의 사랑의 마음에서 점차 자기중심적인 모습으로 진화되어 간다. 이는 곧 도덕성과 자애심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여전히 모든 기원(Origin)의 최초 동자라고 선포한다 해도, 물리학적 원리(axiom)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점차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세상에 함몰되어버린다는 생각은 위대한 서구 사상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이어졌다.
-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기독교와의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며, 동아시아 종교들에 큰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관심을 "신지학"(Theosophy)이라고 새롭게 지칭하였는데, 이는 영적인 지혜에 대한 탐구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신지학은 1890년대 이후 영어권 사회의 중산층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신지학은 오늘날 서구 사회의 중요한 종교적 형태인 소위 '뉴에이지'(New Age) 영성의 모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여러 종교적 회심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고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인물은 전 잉글랜드 국교회 교구 목사의 아내였던 애니 베전트(Annie Besant) 여사일 것이다. 그녀는 전국세속주의협회(National Secular Society)의 회장이었으며, 1889년 자신의 세속주의 동료들과 더불어 신지학으로 개종하였다.
- 또 다른 기독교인들은 흑인 노예에 대한 정당성을 또 다른 자료에서 찾았다. 이는 서방 기독교 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창세기 4:1-16에 대한 시리아어 역본인 페쉬타(Peshita)에서 기인한다. 이 시리아어 역본에서 흑인들은 가인의 후손들이며 하나님이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것에 대해 벌하시며, 그의 몸에 새긴 살인자의 '표징'은 그의 피부를 검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표징은 이후 자연스럽게 그의 후손들 모두에게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적 접근은 모두 흑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해석은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해석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우선 노예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은 양심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 나 같은 새로운 방문자에게 그것은 너무나 황홀한 광경이었다! 놀라웠다! 그녀의 가슴은 열광적인 기도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녀의 발은 기뻐 춤추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기묘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내 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양이랍니다."
-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책이다. 그 책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기사와 이적이 가득한 성경이다. 아프리카인들에게 그러한 기적을 바라보는 것은 일상적이다. 그들에게 신앙은 영적인 언어를 말하고 세상의 기원과 창조의 신비에 대해 증언하는 것으로, 이는 그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기독교 성경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그 결과는 이집트에서 성공회 선교회에 의해 설립된 복음주의적 학교들의 성취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이집트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다닌 학생들은 그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입학 전에 이미 기독교인들이었다. 반면 인도에서는 학생들 가운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학생들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그들은 이 학교에서 서구 문화를 학습하고자 하는 목적만 있을 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인도에서 기독교인들의 침략과 종교적 위협은 힌두교도들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유산에 대해 더욱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기독교 대학에서의 훌륭한 교육은 서방 기독교 세계 안에서 인도인들이 더욱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키우도록 독려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 1865년 선교의 침체기에서 벗어나고자 테일러는 직접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하였다. 이 선교회는 중국 본토가 그 본부이며 어떤 외부의 지원도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기대하였다. 테일러는 자신의 선교회가 끔찍한 아편무역에 동조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였다. 그의 선교회는 선교사역을 위해 절대 빚을 지지 않을 것이며, 모금을 위해 구차한 캠페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소속 선교사들은 중국 현지인의 의복을 입었다. 특히 유럽 여성들에게 중국 여성복은 매우 불편한 복장이었지만 그들은 진정한 선교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였다. 이 선교회의 학교들은 병원과 함께 오늘의 옌타 (Yentai)라 불리는 치푸(Chefoo)에 건립되었다.
- 19세기 미국에서 환상을 보며 예언하는 많은 소녀들 가운데 앨런 하몬(Allen G. Harmon)이 있었다. 그녀는 얼마 후 재림주의자(Adventist)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10년 이상 미국 안에 어수선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저렴해진 인쇄 비용은 화이트 여사의 시급한 캠페인을 널리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본 2천 회 이상의 환상에 대한 기록은 모두 출판되어 사람들에게 보급되었다. 여기에는 그녀의 두드러진 식이요법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 추종자들은 곧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Seventh-Day Adventism, 우리나라에서는 간단히 안식교라고 불린다-역주)란 이름으로 알려지며, 다시 한번 미국에 묵시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전의 제7일침례교(Seventh-Day Baptists)처럼, 이 운동도 유대교의 안식일을 따라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을 성일로 지켰다. 이전에 영국의 급진적 복음주의자들이 준수했던 채식주의를 지키는 사람들은 오늘날 화이트 여사의 후원자이며 동업자인 존 켈로그(John H.Kellogg)에게 많은 식품을 구입하고 있다.
- 1827년 조셉 스미스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 그에게 흰옷을 입은 천사 모로니(Moroni)가 신비하게 방문하기 시작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모로니는 오래전 미 대륙의 거주자였으며, 그에게 금판에 새겨진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이 금판을 실제로 본 사람은 오직 스미스 뿐이었다. 그 금판이 이후 사라지게 된 것은 그것을 발굴한 것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다.
- 당시에는 '잃어버린 종족'(lost race)과 관련된 장르의 소설들이 있었다. 한 세기 후 톨킨(J. R. R. Tolkien)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 이야기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스미스의 작품과 유사한 영국 가톨릭 판타지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톨킨의 문장이 훨씬 흥미 있고 쉽게 읽혀지긴 하겠지만, 톨킨의 이야기는 그 전개에 있어 모르몬경과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브리검 영은 말년에 자신이 "무덤을 염원했다"(desired grave)고 회고하였다. 그는 1843년에 처음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그에 대해 중립적 입장에서 기록한 한 전기 작가는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에 위치한 "그의 집은 겉보기에 험악한 무채색의 옷을 입은 한 명의 부인 대신에 19명의 아내가 있었다는 것을 빼고는 뉴잉글랜드의 대가족 집안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미스의 생전에 그의 비밀스런 많은 부인들을 용납하며 참아냈던 엠마 스미스(Emma Smith)는 남편을 잃은 후 비모르몬교도와 재혼하였다. 1890년 모르몬교의 중심 교회들이 일부다처제를 폐지했지만, 많은 모르몬교도들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전혀 알지 못했다(일부는 지금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고, 그들은 여전히 유타와 애리조나에서 은둔적인 삶을 살고 있다. 유타는 1896년에 미국의 공식적인 주가 되었다).
- 남북전쟁이 끝나고 몇십 년 뒤, 미국의 종교와 문화가 하나로 연계되어 나타난 새로운 운동이 부상하였다. 그것은 바로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이다. 오순절 주의자들이라는 명칭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한 사건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주요 절기인 오순절에 사도들과 많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여 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사건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다양한 지역 출신의 많은 군중은 이들이 자신들의 출신지의 언어를 말하는 것을 듣고 크게 놀랐다. 하지만 미국의 오순절운동의 뿌리는 너무나 다양한 미국 개신교 신앙으로부터 복합적으로 기인한 것이지, 어느 하나의 기원을 꼽을 수는 없다. 오순절운동은 켄터키 야외 집회에서 벌어졌던 경련과 울부짖음, 펄펄 뛰는 '행위들'을 연상시키며 자신의 감정을 외향적으로 분출했던 모라비아 교도들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오순절운동에는 훨씬 더 많은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 한편 1917년 한 기독교 제국이 전쟁이 발발한 후 몰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곳은 오랫동안 스스로 제3의 로마(Third Rome)라고 자부하던 러시아 정교회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II)는 온화하고 경건하며 선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는 명석하지 못한 독재자였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그가 몰락하기 전에 그에 대하여 "술에 취한 그리스도의 얼굴"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황제는 자신이 직접 러시아 군대 총사령관에 취임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로 인해 그는 전쟁에서 점차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따라서 로마노프(Romanov) 왕조와 함께 러시아의 몰락이라는 대재앙을 가져왔다. 러시아 제국 내정은 황후 알렉산드라(Tharina Alexandra)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참혹한 결과를 남겼다. 대중의 격분은 치유의 성자,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에게 향했다. 그는 왕실의 후손이 앓던 혈우병을 치유하면서, 황제와 왕후의 신임을 받아 큰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선풍적인 대중적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는 1916년 그가 격분한 귀족에 의해 암살당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양면적인 행적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도보로 시베리아(Siberia)에서 아토스 산(Mount Athos)까지 순례하였고, 사회적 지위를 자랑하며 오만한 행동도 보였다. 일부 나이 든 성직자들이 그를 존경한 데 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혐오하였다. 심지어 그는 술주정꾼에 성 문제에 있어서도 난봉꾼이었다.
- 1918년 말 전쟁의 종결은 유럽의 다른 전장지에서 세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첫 번째 몰락은 신성로마제국의 두 후신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이다. 여기는 종교적으로도 개신교와 가톨릭교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동유럽 민족주의로 인해 분열되었다. 두 번째 몰락은 독일의 왕위이다. 서방에서 독일의 갑작스런 항복이 이어지면서 빌헬름 황제는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세 번째 몰락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22년 그는 자신의 궁전에서 추방되었고, 칼리프 제도 역시 2년 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이제 유럽의 모든 제왕 가운데 계속 그 자리를 지킨 제왕은 오직 영국 황제뿐이었다.
(나는 목록에서 한 명의 황제를 생략하였다. 그는 불가리아의 황제(Tsar), 보리스 3세(Boris III)인데, 다른 황제들과 비교하기에는 매우 미미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 이들의 침략은 '부르주아'(Bourgeois) 농장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증오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탐욕과 필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광기 어린 행동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메노나이트 교도들이 폭행을 당해도 저항하지 않는 도덕관 때문이었다. 수많은 남성들이 살해되었고 여성들은 능욕당했으며, 모든 소유를 빼앗겼다. 이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그들은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격하여 폭력으로 복수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메노나이트 이상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다른 재침례교 공동체와 형제회 신자들의 분노를 샀다. 결국 러시아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북미주로 이주할 기회를 얻어, 그곳에서 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논쟁을 잊을 수 없었다.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악감정과 논쟁은 캐나다의 조용한 목장지에 지금도 남아있다.
- 1900년 동안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였고, 그 이전에도 1000년 동안 그리스 문명을 꽃피웠던 도시가 이제 불타버린 것이다. 1923년 체결된 로잔 조약(Treary of Lausanne)은 이전의 세브르 조약에서의 협약을 뒤집어 버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난민들이 에게 해(Acgean Sea)를 따라 두 갈래로 흩어졌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언어가 아니라 종교에 따라 나누어졌다. 이는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이 국가 정체성보다 우선하였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언어에 상관없이 그리스로 귀속되고 마찬가지로 모든 이슬람교도가 터키로 편입되었다.
- 도시에서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살해되고, 여성들은 강간당했으며, 남아있는 대부분의 정교회 교회당들이 파괴되었다. 이 일로 인해, 1924년 약 300,000명, 1934년 111,200명이었던 그리스인 인구는 2,000명 이하로 감소되었다. 정교회 세계 총대주교는 이제 자신의 파나르에 고립된 신세가 되었다. 그는 존경받는 국제 정교회의 수장이었지만, 이제 그 후계자들은 터키에 거주하는 극소수 의원 주민 정교회 신자들에 의해 선출되는 직책이 되었다. 또한 이제는 성직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신학교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제2의 로마라고 불리던 정교회의 사멸은, 제3의 로마인 모스크바의 몰락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 남 베를린 교외, 마리엔도르프(Mariendorf) 시에 위치한 마틴 루터 기념교회 (Martin Luther Memorial Church)는 세계에서 가장 추한 교회 중 하나이다. 이 지역 교회는 1920년대 독일 민족주의 루터교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이후 나치가 권력을 잡고 강성 독일 건설 계획을 수립할 당시, 나치에게 인수된 교회이다(그림 48). 이후에 조심스럽게 제거되었지만, 이 교회에는 나치의 십자 문장과 히틀러의 흉상 같은 상징물이 있었고, 이 교회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은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에서 처음 연주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 루터교인들도 그 후에 이 끔찍한 예배당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운명의 장난처럼, 연합군의 포탄이 그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을 때, 이 교회당만은 그 폭격에서 살아남았다.
- 나치가 점령하며 그 중독적 영향은 폴란드인과 이제 막 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된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의 구별을 가져오게 된다. 이로 인한 끔찍한 결과는 그리스 가톨릭과 정교회로 나뉘어져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이 연합하여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폴란드인들에 대항한 것이다. 지난 3세기 동안 미움과 화합 속에 노력해온 역사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폴란드의 영토로 귀속된 논쟁 지역, 볼히니아(Vollynia)에서는 폴란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집단 살육이 자행되었다. 특별히 이는 폴란드인 가톨릭교도들이 우크라이나 신자들(정교회와 그리스 가톨릭 모두) 보다 더 이른 크리스마스를 지킨다는 관습 차이에서 온 갈등으로 발생하였다.
- 한편 역설적으로 비쉬 정부는 현대 가톨릭 예배 음악의 최고의 진수라고 평가받는 모리스 뒤뤼플레(Maurice Duruflé)의 레퀴엠(Requiem)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단선율(plain song) 멜로디를 가진 추모 미사(Requiem Mass) 성가로서,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화려하고 사랑받는 합창곡이 되었다. 이 작품은 비쉬 정부가 독실한 가톨릭 작곡가에게 의뢰해 만들어졌다. 그 악보의 출판사는 비쉬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오랫동안 뒤뤼플레의 작품의 기원은 감춰져 알려지지 않았었다.
- 세계 곳곳에는 이 번영의 복음도 함께 전해졌다. 특별히 이 메시지는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공동체에게 더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들은 기도로 이 모든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증거하였다. 특별히 남한에서는 이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정치적 파급으로 이어졌다(그림 68).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말씀'을 통해 많은 희망과 도전을 얻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공산주의는 악마의 계획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 이 전례 없는 모임에서 참석한 가톨릭 지도자들은 교황의 개회연설을 들으며 매료되었다. 교황은 전 세계의 인류들에 대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질서"를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라고 강력하게 연설하였다. 또한 그는 세상에 대한 고압적 가르침을 넘어서. 이러한 변화를 "반역이며 파멸"이라고 규정하였던 소위 "불행의 예언자들"(prophets of misfortune)을 강력히 비판했다. 사실 이 연설을 경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어서 발표된 라틴어 문서는 곧 무단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공의회가 개신교 관객들을 초청했고, 그들도 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당시라면 이들 개신교도들이 감히 로마에 발을 디딘다면 즉각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또한 일부 가톨릭 여성들, 주로 수녀들도 이 회의에 초청되었다. 이들은 회의에 표결을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이들의 참석 자체는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인 폐쇄성에서 벗어나 외부와 소통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일 것이다. 이를 반대하는 모든 안건이 교황청에 의해 기각되었고, 완전히 다른 문서들로 대체되었다. 두 건의 의결 문서는 이 공의회의 유산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일부 가톨릭교도들에겐 실천 동기로, 다른 이들에겐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국어로 진행되는 미사와 함께 가톨릭 교회에 음악적 변혁도 일어났다. 20세기 초 가톨릭 교회는 고전적 교회 음악인 단선율 찬트를 적절하고 경건하게 수행하기 위한 음악적 또한 학문적인 열심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열심과 시도는 바로크식 예배에 넘쳐났다. 또한 회중 안에서 이러한 음악은 각 지역 자국어로 수행될 것을 요청받았다. 사실 사제들은 자신들의 회중들에게 음악을 교육할 수 있는 역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 하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심은 라틴아메리카의 교회 구조 환경 속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남미 태생의 백인들인 크리올 특권층 문화와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정치적 입장도 여전히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풍토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와 입장이 달랐던 패 많은 성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경우와 같은 대중적 가톨릭교를 주도하며 평신도 군대를 조직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들은 남미 전역에 평신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Medellin)에서 역사적인 주교회의가 열렸다.
- 1950년대에, 시민권 운동가들은 남부의 인종차별에 대항한 캠페인을 시작하였고, 이를 지지하며 현실화시키기 위한 여론이 고조되었다. 미국 시민권 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 침례교 목사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 있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버지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받은 영감으로 자신과 그의 아들의 이름에 종교개혁자의 이름을 차용하였다. 젊은 마틴 루터 킹은 시민권 운동을 전개하며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비폭력주의에 대한 주장은 두 뿌리가 있다. 첫 번째는 성경이며, 두 번째는 그가 인도에 방문하며 영향받은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의 캠페인이었다. 킹 목사 안에서 남부 복음주의적 뿌리와 사회복음이 함께 만난 것이다. 킹 목사는 미국 '사회복음' 운동의 지도자이며 저명한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hur)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고 그를 깊이 존경하였다. 니버는 개혁주의와 루터교 신학전통과 자유주의 개신교 의사회 인식을 공유한 인물이었다.
- 또 한 명의 뛰어난 성공회 사제는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였다. 그는 인권투쟁의 제2세대 지도자로서 훗날 케이프타운(Cape Town)의 대주교에 오르게 된다. 아마도 그는 성공회의 가장 위대한 20세기 주교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어릴 때 허들스턴 신부를 만난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때 투투가 바라본 허들스턴은 검은 모자와 하얀 성직 의복을 입고 앵글로-가톨릭 신부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있었으며, 투투의 어머니에게 영국 신사다운 품위를 보였다. 나는 그 백인 신사가 교육받지 못한 한 흑인 여성에게 모자를 벗어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습은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후에도 나는 그 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왔다." 남아프리카 인종분리 반대 투쟁과 그 철폐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마도 존 콜린스(John Collins)일 것이다.
- 이 새로운 가족관은 교회에겐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교회는 늘 건강한 가족을 위한 종교적 수사를 강조해왔으나, 이제 새로운 가족관은 신자들의 교회 활동을 가로막는 경쟁 상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 변화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는 사람들의 교회 출석이 크게 증가하였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례로, 1947년 영국 중부 더들리(Dudley)의 한 명석한 부목사(curate)는 새로 이 지역에 집을 마련한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그들은 "젊은이의 선택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을 꺼려하였다.
- 성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79년 회합을 열고, 자신들의 분노를 반영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기관을 발족하였다. 그 기관의 이름은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이다. 난관이 많았던 카터의 집권 말기에 그는 복음주의 유권자들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1980년 그들은 카터를 거부하고 대신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을 선택했다. 역설적으로 로널드 레이건은 공화당 후보였고, 이전의 남북전쟁에서 남부를 격퇴한 정당에 속한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모호한 종교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 자유론자(libertarian)였다. 또한 그의 부인은 정기적으로 점성술사를 찾았다. 무엇보다 레이건은 경건한 남부 민주당원인 카터에 비교할 때, 분명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산물이었다.
- 교회 권위자들이 Birmingham에 있는 Newman의 무덤에서 그의 유해를 옮긴 것이 도화선이 되어서(그는 죽기 전 그의 시신은 그의 평생의 동반자인 Ambrose St. John의 시신과 함께 매장시켜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Newman 추기경은 뜻밖에도 대중들 사이에서 게이의 상징이 되었고, 이것이 그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유가 된 것은 아니다.
- 그는 놀랍게도 아프리카계 브라질인들의 혼합주의 종교인 칸돔블레(Candomble)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1980년 교황은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칸돔블레 사제(pai de santo)가 주재하는 정화의식을 허용하기도 했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일에는 관용을 베풀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관용을 학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까지 허용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는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오랜 재위 기간 중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의 계획이 있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시작된 변화들 중 다수를 다시 원래대로 복원하고자 하였다.
- 폰 발타자르는 매우 흥미롭고 창의적인 철학적 신학을 추구하였다. 특히 그는 음악과 미술, 문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스위스 출신 신학자로서 당대 자국 가톨릭 교계에 만연되어 있던 자유주의에 대항하였다. 그는 또한 같은 스위스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과도 차이를 두었다. 사실 그 역시 나치에 대항했고,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바르트와 많은 부분 공통점이 있었다. 폰 발타자르는 신학생 시절 예수회 교수들의 강좌를 접하며 그 학술적 내용들에 귀를 닫고 있었다. 대신 그는 지속적으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을 탐독했었다. 그는 예수회뿐 아니라 베네딕트 수도회의 삶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교수직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가까운 친척이자 두 번 이혼 경력이 있었던 아드리안 폰 스피어(Adrienne von Speyr)는 신비주의자로서 성직자들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제기했다. 폰 발타자르는 폰 스피어의 의견에 큰 공감을 표명했고, 이로 인해 그는 교황 피우스 12세의 교황청의 미움을 사기도 했었다. 그는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도 차가운 비평을 했는데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 사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자문으로 초청받지 못했었다(이는 아마도 신학적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 계몽주의 이후 서구 사회의 의문점 중 하나는 대부분(거의 모든)의 가장 위대한 교회 음악이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음악가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는 뉴먼 추기경의 시에 맞추어 영국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위대한 종교적 오라토리오라 할 수 있는 "게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inus)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이 초연될 때만 해도 엘가는 "하나님은 예술을 반대하신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에 엘가는 그 어떤 기독교 신앙도 상실해버렸다. 마이클 티펫(Michacl Tippett)은 그의 작품, "우리 시대의 아이"(A Child of Our Time)에서 흑인영가에 나타나는 고난 받는 인간의 고뇌를 표출하였고, 그의 다른 작품, "아우구스티누스의 비전"(The Vision of St. Augustine)에서는 마치 그가 오스티아 정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직자의 아들이었던 본 윌리암스(Ralph Vaughan Willams)는 불가지론자였음에도, 영어로 된 훌륭한 찬송가집인 <영국 찬송가>(Ther English Hymnal)를 편집하였다.
- 그림 56. 1408년 비잔틴 이민자 출신의 그리스 화가, 데오파네스(Theophanes)의 작품. 러시아의 패레슬라블잘레스키에 위치한 현성화 기념 성당(the Cathedral of the Transfiguration)의 벽화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14세기 그리스 수사들이 일으킨 신비주의 분파인 해시카스트(Hesychast) 영성 전통의 중요한 상징이다. 이 그림에서 사도 요한과 야고보는 잠들어 있고 베드로는 막 잠에서 깨어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다가올 수난에 대해 대화하는 그리스도를 두렵게 바라보고 있다(눅 9: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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