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3천년 기독교 역사 1 - 고대사

일루젼 2021. 10. 22. 01:15
728x90
반응형

저자 :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 박창훈

원제 : A history of Christianity-the first three thousand years
출판 :  CLC
출간 : 2013.09.14  


 

3권을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1권도 수월하지 않을까 했는데, 교조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자니 꽤 버거웠다. 서문이나 후반 그림 자료는 완전히 동일해 실제 읽은 페이지는 훨씬 적은데도 묘하게 잘 안 읽혀서 좀 고생을 했다. 

 

입력과 출력은 비례 보다는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 하다.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입력을 밀어넣으면 별다른 출력이 나오질 못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읽었다 정도로 마친다.  

 

 


   

 - 이 로고스는 단순히 '말씀' 그 이상을 의미한다. 로고스는 오히려 이야기 자체이다. 로고스는 기독교 메시지에 표현된 역동성과 긴장의 의미를 반영한다. 로고스는 단순히 이야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부이거나 이야기 배후의 사상이며, 여기에서부터 그 의미는 대화, 내러티브, 명상, 동기부여, 설명, 보고, 소문, 심지어 주장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된다. 

 

- 개신교들은 일반적으로 마카비서 (Book of Maccabees)와 친숙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마카비서가 16세기 종교개혁 때 성경에서 벗어난 저작으로 여겨지고, 외경이라 불리며 사소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매우 다른 시각으로 이 저작을 취급하여, 유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위치시킨다. 예를 들어, 마카비서는 대 하누카(Hanukkah) 축제의 중심 작품이다. 기독교 신약성경에 실려 기독교 예전에서 많이 사용되는 2개의 찬송, 마리아 송가(Magnificat)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감사(Benedictus)는 마카비와 관련된 승전가를 약간 각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마리아의 처녀성에 대한 관심은 70인 역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을 인용한 마태복음에 중심을 둔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은 이사야가 사용한 원래 히브리어의 의미를 변경하거나 고친 것이다. 선지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고, 아들을 낳을 것임을 말한 것인데, 70인 역은 '젊은 여인'을 그리스어 '처녀'(parthenos)로 번역하였다.

 

- 우리가 살핀 것처럼, 이 지도자 가운데 중요한 사람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였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기원후 62년 유대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야고보를 처형하자, 그의 자리는 주님의 또 다른 인척 시므온(Simeon)에게 맡겨졌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 추종자들의 모임이 유대교의 주류가 되고자 했다면, 그들은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 그 도시와 팔레스타인의 종교생활 가장자리에 소수의 무리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 곧 십자가 나무 유물이 급증했다. 그리스어 '물고기'(ichthys)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그리스어 문장으로 경건하게 변형 및 해석될 수 있었기에, 이전에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인 상징은 물고기였다. 이제 물고기는 새로운 제국의 키(Chi), 로(Rho) 합성 문자와 십자가에 의해서 압도되었다.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이전에 기록 본문 외에 공적인 기독교 예술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제 보석의 장식에서도 발견되었다. 

 

-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복잡한 연합의 중심에 에티오피아 문학작품, <케브라 나가스트>(Kebra Nagast, Book of the Glory of Kings)가 있다. 시기 추정이 어렵고 특징이 복잡하지만 이 책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스바(Sheba)의 여왕의 '연합'을 에티오피아 왕국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타나크는 이 예멘(Yemeni) 왕국의 전설적인 통치자, 스바 여왕이 호화스런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을 기록하였다. <케브라 나가스트>의 설명에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생각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즉 첫 에티오피아 왕 스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아들 메넬릭(Menelik)이 언약궤(tabot)를 가지고 에티오피아로 가져왔고, 그리고 지금까지 악숨의 예배당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에티오피아 교회는 그 성소 안의 언약궤에 대한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악숨의 언약궤가 에티오피아 예배에서 중요하게 된 시기에 대하여 상당한 논쟁이 있다. 그 혼란과 부분적인 증거를 고려하는 현대의 역사가는 그것을 16세기 정도로 늦게 잡는데 이때에는 이슬람의 파괴와 범기독교 세계와의 불편한 접촉이 에티오피아 교회로 하여금 더욱 그 특성을 강조하고 유대인 전통을 풍성하게 만들도록 하던 때였다. 

 

- 그리스인들에게, 삼위일체의 이 '심리적인' 형상은 궁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들을 연결짓는 사랑 혹은 의지로 성령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과 이해(즉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그의 묘사에서 비록 그것들을 즐기거나 사용하는 것은 의지에 의존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포용하고 있다고 한 점을 지적해야 한다. 

    

 

더보기

-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그리스 단어인 그리스도(Christ)를 만난다. 이 사람의 매우 평범한 유대 이름인 여호수아/예슈아(Joshua/Yeshua, 영어식 표현 Jesus는 그리스어 형태에서 온 것이다)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두 번째 이름으로 '그리스도'(Christos)를 추가했다. 미리 선택된 특별한 구원자의 특징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히브리 단어인, '메시아' (Messiah) 즉 '기름 부음 받은 자' (Anointed One)의 그리스 번역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 사실이 중요하다.  

 

- 유대 베들레헴의 마구간이 아니라 왜 그리스에서 시작하는가? 왜냐하면 처음에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 요한의 복음은 성탄절의 마구간 대신 오히려 찬양과 찬송으로 시작하는데 그 찬송의 가사 중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 였다. 요한은,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고 인간의 육체가 되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말한다. 

 

- 4복음서 모두 꽤 드물지만 예수에 대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가장 초기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두 번만(9:41과 15:32, 후자는 냉소적인 말로 사용됨)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복음서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정되는 타르수스 사람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 플라톤에게 있어서 진정한 신성은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이다. 플라톤이 하나인 것으로부터 명시적으로 결론을 끌어내지는 않았지만, 신은 또한 완전함을 나타낸다는 명제를 드러내고 있다. 최고신은 완전하기에 정열이 없다. 왜냐하면 정열은 하나의 감정에서 다른 감정으로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완전한 본질은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열이 없는 완전함은 정열적이고, 동정적이며,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대조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신관과 히브리 민족의 신관은 모두 초월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신이 어떻게 우리가 사는 변화하고, 불완전하며, 복잡한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는지, 또 의미 있는 접촉을 갖는지 아는 것은 어렵다. 피조된 형상계 전체도 최고 영혼인 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가장 적절하게 창조되었다. 아마도 최고 영혼의 이미지는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화편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플라톤이 기능공이나 장인(demiourgos, 여기서 영어 'demiurge'가 나왔다)으로 묘사하는 이미지이다. 창조는 신성의 최고 실재로부터 유출되는 위계질서에 의해 신으로부터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 영원히 간헐적인 전쟁의 상태에서 전선을 유지하거나 확장해야 하는 국가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사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로마의 확장은 왜 그렇게 분명한 성공을 거두었을까? 다른 많은 국가도 극적인 확장을 이루었지만, 단지 몇 세대만 유지되었고 기껏해야 몇 세기만 지속되었다. 로마제국의 서쪽은 1200년 동안 생존했고, 로마제국의 동쪽은 그 후 1000년을 더 존재했다. 그 대답은 아마도 그리스와의 또 다른 대조에서 찾을 수 있는데, 로마에서는 인종적 배타성이 매우 적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격이 되는 외국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자격이라 함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대가로 줄 수 있는 이들을 의미했고, 자발적인 감사의 협력인 경우에 한정했다. 때때로 전 영역에 시민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노예조차도 행정관 앞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통해서나 소유주 의지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시민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 결국 야곱을 이기고 그에게 또 다른 새로운 이름 즉 '하나님과 겨룬 사람'이라는 뜻의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을 줄 수 있었던 신비한 사람과의 밤을 샌 씨름 이야기로 끝난다. 

 

- 히브리어 경전은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첫 인류로 바로 거슬러 올라가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 자세한 내용과,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이해된 역사에 대한 관계는 경전의 '신뢰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쟁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 역사성에 대한 논쟁은 미묘한 문제이며, 당연히 많은 사람이 그것을 재구성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성경의 첫 책, 창세기는 족장으로 알려지게 된 지도자들에 대해 설명하여 아브람(Abram)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현재의 이라크 지역 우르(Ur)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이주해 왔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이 그 땅을 받을 것이라는 반복되는 약속을 받았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Abraham), 즉 '열방의 아버지'로 상징되었다. 

 

- 그러나 이집트와 탈줄 이야기의 핵심에는 어떠한 이스라엘 신비가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을 요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난처한 일이기 때문이다. 탈출의 영웅이며 지도자이고, 오경 자체를 쓴 장본인으로 제시되는 인물은 유대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이집트인이었던 모세였다. 

 

- 출 3:14은 종종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로 번역된다; 출 3:4, 15을 비교하라. 그 자음과 함께 'Yahweh'의 발음은 원래의 것을 현대적 추측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히브리어에는 중세 맛소라 학자들이 모음을 더하기 전까지는 그 알파벳에 모음이 없었다. 그전까지 유대인들은 존경의 표시로 YHWH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않았기에, 그 단어의 모음의 모든 재구성은 추측이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저서에서 그 단어 기록의 기초가 되었다.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Yahweh라는 형태, Jehovah는 중세 말 그리스도인들이 히브리어 YHWH 자음에 모음을 채우려다 만든 잘못이었다. 이것은 이 자음들이 존경의 뜻으로, Adonai, 즉 '주님'으로 대체된 전혀 다른 단어의 모음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유대인 본문 전통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 19세기 이후로 줄곧 발견되는 고대 중동의 문헌이 밝히듯이,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이 주요 역할을 한 그 지역 유일의 고대 사회는 아니었다. 오래전, 기원전 18세기에 예언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 왕국인 마리(Mari)에서 발견되며, 그들은 또한 유대인들의 동시대 적국이었던 아시리아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의 특별한 환경과,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예언자들에 의한 또 그들에 관한 문헌의 보존으로, 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의 역사에서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에서 특별하고도 지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스스로를 주류 유대교의 진정한 대표로 간주한, 이전의 포로들과 바빌론에 남은 포로 공동체의 목소리는 '제2 성전' 기간에 추가된 성경의 늘어난 책 안에서 들을 수 있다. 그들의 집착과 새로운 경험의 산물은 영원히 유대종교의 색채를 결정지었다. 예를 들어, 포로의 배경이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에 놓인 바빌론이었다는 사실은 족장 아브람이 티그리스(Tigris)와 유프라테스 강의 하구에 가까운 도시인 우르(Ur)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을 소중하게 간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중동에 잘 알려진 홍수 이야기 같은 고대의 이야기를 배웠고, 자신들의 고대 이야기와 조화시켰다. 바빌론에 아직 남은 유대인들은 별과 행성에 관하여 관찰하고 연구하는 바빌로니아의 오랜 전통에 관심을 갖고, 그 주제에 대한 자신들의 사상을 제안했다. 더 심오하게는,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의 성전이 파괴되도록 하였고, 자신의 백성들과 맺은 약속을 명백하게 번복했는지를 고민했다. 하나의 대답은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한 존재를 상정함으로 하나님을 이 올무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인데, 그 존재는 대적자, 하사탄(Hassatan)으로 불렸다. 히브리 문헌에서 그는 분명히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지만, 후기 유대 문학, 특히 강력한 악마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다른 종교문화에 의해 영향받은 작가들 가운데 서서히 등장하였다. 

 

- 권위와 특권을 가진 본문의 전체 모음집은 히브리어 타나크(Tanakh)로 알려졌다. 이것은 실제로 모음집이 포함하는 3개의 범주, 즉 율법, 예언, 성문서의 히브리어 단어 3개의 첫 글자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두음 문자이다. 마지막 범주는 역사, 시, 그리고 잠언 등을 포함하는 문학작품으로 다소 모호하게 두루뭉술한 개념이며, 각 범주들은 개념어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를 주로 다루는 책들은 예언서와 성문서에서 발견되는 반면, 욥기와 코헬레트는 안전하게 성문서에 속했다. 그것들이 성문서의 지혜문학, 예를 들어 잠언과 같은 작품으로 대표되는 일상의 일을 다루는 상식적인 조언에 비해서 예언자적인 투박함이 있지만 말이다. 

 

- 성경적 존경의 측면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의 시기에 다양한 많은 책들이 외경 이외에도 더 있었다. 기독교 학자들이 '중간기 문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약과 구약이라 부르는 사이에 해당하는 책들은 유대인 전통에서는 분명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 문학들 가운데 마지막 날들, 즉 현재 이스라엘의 초라함과 고통에 영광스러운 보상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해지는 때에 대한 이야기에 심취한 것이 있다. 이러한 책의 장르는 '묵시'(apocalyptic, 그리스어 '계시')라 불렸으며, 타나크는 그에 대한 한 묶음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곧 다니엘서의 한 부분이다. 

 

- 기원후 4세기에 몇 기독교 주석가들에 의해 의심이 제기되었고, 이들은 여기에 '외경'(apocrypha, 숨겨진 것들)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16세기 서구 교회의 종교개혁 때, 개신교도들은 성경으로 알려진 '경전'이라는 개념에서 이것들을 배제하기로 확실한 결정을 했다. 개신교도들에게 이것은 교황과 외경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교리들에 여전히 충실했던 서구 교회들이 간직했던 다양한 교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용한 효과를 가져왔다. 마틴 루터는 당연히 성경의 전체 모음에서 이 예외적인 책들을 제거했으나, 1534년 독일어 성경의 부록으로 유지했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이것 중 몇 개를 공중 예배에서 읽도록 허락했으나, 다른 개신교도들은 완전히 빼버렸다. 

 

- 예를 들어, 여러 책들이 족장시대를 넘어, 무드셀라의 아버지, 에녹의 저작성을 주장한다. 이 책들에 대한 고대성이라는 요행수는 기독교 역사에서 값을 치렀다. 에녹 1서는 명백히 유다라 불린 무명의 작가에 의해 인용되었는데, 그의 서신은 신약 경전에 들어왔다. 에녹 1서는 또한 에티오피아 기독교회에서 영감 있는 주요 성경으로 다루어진다. 흥미롭고 다양한 기독교 전통과 전제는 이러한 책들 위에 기초를 두었는데, 주요 기독교에서는 크게 잊혀졌지만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세대에서는 정신적 유산의 일부였다. 

 

- 유대 안에는 유대교를 위한 적어도 4개의 독자적인 집단, 사두개인, 바리새인, 에세네파, 젤롯파와 아마도 많은 소수 종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관용했지만, 스스로를 가장 본질적인 유대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겼다. 

 

- 우리는 이 사건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 불렸던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 의해 저술된 기독교의 '신약' 네 권의 책에서 배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네 개의 다른 강조점을 드러내는데,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네 개 모두는 아마도 그의 죽음 이후 반세기는 지나서 쓰였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합쳐 복음이라 불렸는데, 그 단어는 '좋은 소식'(evaggelion)이라는 그리스어로서 시작되었다. 중요하게도, 첫 라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에서 정확한 동의어를 찾지 못했고, 단순히 그 단어를 불분명하게 라틴식의 억양으로, 에반겔리움(evangelium)이라 발음하였다. 현대의 많은 언어가 라틴어로부터 다시 차용하였는데, 영어에서는 '전도자'(evangelis)와 '복음주의'(evangelical) 등이 그 예이다. 

 

- 마태와 누가는 예수를 위한 두 개의 족보를 제시하는데, 관련된 인물이 거의 일치하지 않으며, 각각의 특징적인 형태로 보건대 매우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곧 이렇게 서로 다른 가계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소위 계보학적 모자이크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설명들을 만들어냈는데, 우리는 그것을 3세기 초 학자인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ficanus)의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누가와 다르게 마태의 기록은 유례없이 여성들로 인해 독특한데,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성적인 상황과 연관되고, 또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면 비유대인과 관련이 있다.

 

- 또 다른 특징은 예수가 엄숙한 선언을 하기 전에, 자주 그리고 분명히 전례 없이 단호하게 히브리어와 아람어 외침인 '아멘'을 사용하는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말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리스어 성경 본문에 원래의 형태로 보존되었다. 그런데 16세기와 17세기의 영역본에서 "진정으로"(verily)라고 바뀌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을 습관적으로 두 번 반복하여, 공관복음보다 더 특별하게 발전시켰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는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적인 구원자로 칭송하는 관점을 부각하기 위해 사족을 붙인 것이다. 그 효과는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박사가 특별히 마지막이나 결정적인 언급을 할 때, 그의 유명하고 특징적인 구절 "틀림없습니다. 선생님. …"과 같다. 그것은 화자의 고유하고 개인적인 권위를 강조하려는 것이고, 타나크에서 많이 사용되는,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보고식 구성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그 자신의 권위를 갖는다. 결국 그는 '아바'라는 친밀한 말을 붙잡고, 하나님께 말할 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 이러한 침묵으로 인해, 복음서에서 예수의 보고된 말에서만 배타적으로 나오는 '인자'는 아주 충격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의 때보다 200여년 앞선 작품인 다니엘서의 "인자 같은 이"라는 구문의 반복인데, 여기서는 물리적 세상의 사악한 왕국을 대체하여 영원한 통치를 하실 분에 대한 언급이었다. 

 

- 기도하는 사람은 하늘의 아버지께 직접 나아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청원을 한다. 이것은 그리스어이지만, 복음서의 초기 자료층에 속하는 것 같은데, 이 청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형용사이며 그리스어에서도 매우 드문 단어인 '에피우시오스'(qpiousios)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단어의 난해한 특성은, 아주 평범한 요청, 즉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하는 일반 영어 번역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에피우시오스에는 '일용할'이라는 의미가 없고, '추가적인 물질' 또는 '내일까지', '단번에' 등의 뜻이 있다. 16세기 말, 라틴어 불가타 성경(Valgate)에서 '주기도문'을 영어로 번역하려고 로마 가톨릭이 처음 시도할 때 그 문제를 알았지만, 라틴어에서 '초물질적인'이라는 단어를 차용함으로 문제를 비껴갔다. 당연히 "오늘 우리에게 초물질적인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문은 일반 대중에게 결코 이해되지 못했다. 우리가 에피우시오스에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도래하는 나라의 새로운 때를 지적하는 것이리라.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배가 고플 때 새롭게 제공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내일의 양식이 지금 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곧 올 것이기 때문이다.

 

- 예수는 모국어로 아람어를 사용했다. 가나안 여인과 만났다는 것은 그가 필요하다면 시장에서 사용하는 그리스어를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어 신약성경 안에 여과된 그의 이야기에서는, 어디에서도 그러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예수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 정부의 학대에 대해 고민하면서, 신학자 요한은 기독교 이전 묵시전통 유대 저술가들에게 친숙했을, 로마제국의 붕괴에 대한 전망을 보며 기뻐한다. 그는 로마를 압제 권력에 대한 유대적 축약형인 '바빌론'으로 묘사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신학자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 거리낌 없이 그리고 무조건 '왕'이라는 도발적인 칭호를 사용한 유일한 신약성경 기자이다. 하나님 나라, 또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또는 이스라엘의 왕 등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은 많지만 이 모든 것이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왕이라 부른다면 로마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두려워했는데, 결국 예수는 바로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십자가형을 당했다. 그래서 나머지 신약성경은 그 생각을 거의 피하려는 듯하다. 

 

- 반란의 결과는 결국 피치 못했다. 로마인들은 이 지중해 모퉁이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우연이든 계획적이든, 거대한 성전 건축물은 불길에 휩싸였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아 그 터는 수백 년 동안 황무지로 남았다. 지중해 세계의 가장 유명한 제단 중 하나가 아주 이상하게 파괴된 것에 대해 유대인들의 증오가 쌓여, 132-5년에 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제 로마인들은 지도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고의적인 무례함으로 새로운 유피테르 신전으로부터 따왔는데, 로마의 카피톨 언덕(Capitoline Hill)에서 숭배하는 로마 만신전의 수장 신의 명칭이었다(성전은 분명하게 예수의 십자가형과 매장 장소를 포함하는 지역인데, 이것은 우연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는 그리스 도시로 의도된 것도 아니었으니, 그것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 복음서에 반영된 발전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유대 민족의 어느 분파라도 예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사두개인들의 성전체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의 가르침과 모습에서 바리새인들과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종종 예수의 입을 통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복음서들이 첫 세기의 마지막 10여 년 동안 수집되었을 때, 바리새인들의 후손들인 얌니아의 지도자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다른 살아있는 권력이었고, 많은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반영하여 요한이 찬양하는 그리스도는 그의 정체성에 관한 유대인들의 감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요한의 그림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과는 어떤 유기적인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자주 그리고 종종 위협적으로 예수 주변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천사나 인격화된 하나님의 지혜 같은 초자연적인 실재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념했지만, 유대교에서 이런 것은 전통적으로 선례가 없던 것이었다. 게다가 초기 단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날에 주요 예배를 드렸으니, 유대인의 안식일 다음날이었다. 많은 기독교 문화에서 그것을 이교도 로마식 이름인 일요일이라 부르지만, 복음서 수난 이야기의 설명에 따르면 그날은 주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날로 영어 외의 많은 언어에서 주님의 날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예배의 중심에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식사가 있었다. 마침내 2세기 초반, 이것을 안디옥(Antioch)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이며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lgnatius)는 '성만찬'이라 부른다. 

 

- 가장 두드러진 여인의 이름은 세 복음서 모두에서 맨 앞에 등장하는데, 바로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갈릴리 '막달라 출신')이다. 그녀는 예수의 공적인 사역에서 그의 가까운 동료였고, 다음 세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다양한 동기를 촉발하는 매력을 계속 발산했다. 과욕적인 현대의 몇몇 주석가들과 2류 소설가들은 그녀를 (타당한 고대의 증거도 없이) 예수의 아내의 지위로 격상시키기까지 한다. 

 

- 신약성경 이외의 여러 모방 복음 가운데, 그 내용과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시기가 4복음서와 가장 닮은 도마복음(the Gospel of Thomas)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베드로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서 예수는 그녀의 편을 들어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사이의 논쟁에 대한 주제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복음(the Gospel of Mary)은 약 2세기경의 '영지주의'(gnostic) 문서인데, 비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과 꽤 차분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 레위(Levi)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그녀를 가치 있게 여기셨는데, 그렇다면 그녀들 대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확실히 주님은 그녀를 매우 잘 아신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신 이유이다"라고 외친다. 

 

- 유대인들이 어떻게 인간 예수가 또한 하나님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신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의 저서를 읽는 사람들인 그리스인들에게는 더 어려웠다. 어떻게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사형틀에서 고통의 울부짖음 속에 죽은 자가, 변화와 욕정이 없으며 완전하기에 실체의 분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신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여러 다른 대답이 있으며, 많은 이가 진리에 대해 자기만의 특별한 지식(gnosi)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2세기 말 이미, 주류 기독교를 정의할 지도자인 리용(Lyons)의 감독 이레니우스(Irenaeus)는 그러한 대안적인 기독교들을 그노스티케 하이레시스(gnostike hairess, 대안적인 지식)라고 불렀는데, 그 추종자들을 "그노스티코이(gnostikoi)"라 불렸다. 17세기 캠브리지의 학자인 헨리 모어(Henry More)는 이것을 영어단어, "영지주의"(gnosticism)로 바꾸었다. 적의에서 생긴 이름을 받아들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다양한 경향을 함께 토의하는 것은 여전히 유용하다. 영지주의는 교회의 대안적 미래를 대표했다. 2세기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은 어디서나 이레니우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 꽤 많은 사람들이 그노스티코이라고 불렸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 적대적인 '주류' 기독교 주석가들은 아마도 영지주의자 사이에서 실제로 정당화되는 것보다 더 그와 같은 방종을 추측했을 것이다. 그들의 외설적인 언급은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4세기 정력적이고 엄격한 키프로스의 감독이며 이단 사냥꾼이었던 에피파니우스/에피파니오스(Epiphanius/Epiphanios)는 영지주의 의식을 설명하면서, 성찬에서 정액과 월경혈을 사용하는 것으로 놀렸다. 사실 영지주의 안에는 그 어떤 음탕함보다는 엄격한 금욕적인 부담이 더 확실하게 발견되는데,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주류가 된 기독교의 대안으로 영지주의 신앙을 더 관대하고 덜 권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영지주의 신앙을 여성신학 의원형으로 보려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못하다. 육체에 대한 영지주의적 중오는 성적 권력의 해방에 대한 현대적인 강조나, 여성신학에서의 여성성에 대한 육체적 기념과는 불편한 만남이 될 것이다. 

 

- 이것은 이제부터 기원에 있어 유대나 기독교적인 주류에서 벗어나, '복음서,' '묵시록,' '행전' 등의 형태를 취한 많은 저작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오래된 몇 개의 문서는 '외경'이라는 2차 문헌으로 인정되었으나, 경전에서 달리 발견할 수 없는 좋은 이야기나 기억할 만한 이미지와 정보들을 제공할 경우에만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에 들어왔다가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마리아의 어머니이며 예수의 할머니인 안나 또는 앤(Anna or Anne)이라는 이름은 배제된 책들 가운데만 있는데, 그 첫째는 "야곱의 원복음" (Infancy Gospel <Protevangelium> of James)이다. 마찬가지로, 아마도 초기에 상실된 외경을 반영하는 것일지라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예수의 탄생에 등장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소와 나귀들은 8-9세기 정도로 늦은 본문에만 나타난다. 바울의 참수형과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언급도 같은 식이다. 외경인 <베드로행전>(Acts of Perter)에 따르면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주님의 죽음보다 더 낮아져야 하기 때문에 거꾸로 십자가형을 치룰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이 사라진 문서들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기독교 예술을 계속 자극해서 생생한 그림들을 통하여 유지되었는데, 소와 나귀의 경우 현대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캐롤로 전해졌다. 

      

- 서방교회 예배에 남아있는 그리스어가 있다. 그리스어 기도문은 (성경본문에서 발견되지는 않지만) 너무도 존경받아서, 로마교회가 라틴어로 바뀐 후에도 서방 회중은 이 기도문을 계속 암송했다. 삼중창인 "키리에 엘레이손, 크리스테 엘레이손, 키리에 엘레이손"(Kgyrie Eleison, Christe Eleison, Kyrie Eleison), 즉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는 정교회 예전에서 너무도 열정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 반복적 사용은 주문(mantra)처럼 들린다. 반면 서방교회에서는 보다 제한적으로 나타나지만 성찬을 준비하는 부분에 고정되어 있고, 수세기 동안 거룩한 음악적 영감의 일부였다. 그것은 지중해 전체에서 '가톨릭' 교회가 공통의 언어로 연합되어 있었던 시대를 강력하게 떠올리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미 3세기에 로마 감독은 서방교회에서 특별한 명성을 얻기 위한 역할을 강화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교황'(papa)이라는 칭호의 현존하는 첫 사용은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 감독 시대 로마의 한 카타콤에 있는 그의 집사 세베루스(Severus) 비문에서 나타난다. 결국 두 사도의 매장장소를 주장하는 다른 어느 서방교회도 없었고, 순례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로 이끌기 시작했다. 

 

- 교회는 군주적인 감독과 삼중직이라는 한 가지 권위 위에 정착하고 있었다. 몬타누스파는 그것에 반대하여 무작위적인 예언의 은사를 강조했다. 두 가지 모델은 이후 기독교 세기에서 오랜 갈등의 역사를 이루는데, 몬타누스파 이야기의 중요성은 처음으로 그 충돌이 일어났다는 데 있다. 후에는 로마에 대항한 첫 개신교 반란, 개신교를 넘어선 급진주의자들, 메소디스트와 밀러 주의자들 그리고 오순절과 아프리카인들이 주도하는 교회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들 모두를 만날 것이다. 

 

- 그는 신성에 관해 논의할 때, 플라톤주의자, 스토아철학자, 그리고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이라는 유대인 학자의 영향을 받은 헬레니즘화 된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공통의 개념을 이용했다. 그것은 바로 말씀(logos)이었는데, 이미 요한복음에서 아주 낭랑하게 시작하는 찬송의 중요 주제였다. 유스티누스에게 있어 하나님 아버지는 플라톤의 최고자(Supreme Being)의 논리와 상응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이 최고신이 물질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주류 기독교와 함께하기를 원하여 로고스를 중재자로 봄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 로고스는 히브리 예언자들에 의해 파악되었으나 플라톤 같은 대철학자들에 의해서도 파악되었기에, 그의 이름은 기꺼이 기독교 증언자 가운데 오른다.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존재이지만, 그분으로부터 완전함과 친밀함을 소유한 채 나오셨는데, 이는 마치 한 횃불에서 다른 횃불로 불이 옮겨 붙는 것과 유사하다. 횃불에 관한 유비는 현재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라 불리는 4세기 교리문에 담겨있다. 

 

- 아마도 삼위일체(Trinitas)는 그가 발명하지는 않았을지라도,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술에서 처음 발견된다. 그의 논의는 주로 프락세아스(Praxcas)라 불리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에 대항하여 쓴 전형적인 독설적 문서에 나온다. 프락세아스는 2세기 기독교에서 단일신론(Monarchianism)이라 불리는 중요한 학파를 대표하는데, 이는 유스티누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로고스'라는 말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었다. 유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기에, 로고스를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과 다른 이'로 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바로 그가 "수(number)에 있어서이지 마음에 있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라고 덧붙임으로 스스로를 변호하려고 하였을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그와 같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유일성이라는 기본적인 기독교 사상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비난에서 그를 구원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유일성을 강조하는 그 '단일신론자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차이점을 상실하는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 깊이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테르툴리아누스만이 아니었다. 

 

- 유대인들, 그리스인들, 이집트인이 수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여기서 자연스럽게 영지주의가 번성하였고 기독교와의 경계에서 투과성이 높았다. 클레멘트는 그의 경쟁자들로부터 그노시스(gnosis, 지식)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것에 거의 부끄러움이 없었고, "이해력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영지주의자다"라는 주장을 변호하고 기독교적인 생활이 "완전하고 영지주의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후의 비동정적인 저술가들의 눈에는 그와 오리게네스가 정통적인 기독교의 경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수많은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의 저서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복사를 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 어느 특별한 영역에서 하나의 수기만이 유일한 자료로 남아있다가 먼지로 쉽게 없어져버릴 수 있는 시대에, 교회의 검열은 이 위험하고 대범한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을 사본 하나 없이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오리게네스의 성경연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하여 존중받아야 할 헥사플라(Hexapla)의 대부분이 소실된 이유를 검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다. 헥사플라는 6개의 다른 칸에 나란히 있는 타나크의 6중 번역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본문으로 시작하여, 그것의 그리스어 음역과 70인 역을 포함한 4개의 다양한 그리스 번역이다. 이러한 칸의 배열은 공적인 문서에서는 선례가 있으나 책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으며, 타나크의 성경 본문의 의미에 관해 여전히 진행 중인 유대교와의 신학논쟁에서 사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왜 타나크에 대해 다른 그리스 번역들이 있어야 했던 것일까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으나, 하나의 가능상은 2세기 어간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70인 역을 습관적으로 이용하자 성경의 70인 역 그리스어 번역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본문을 보면서, 그때까지 그리스 학자들에게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자적인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클레멘트를 따라 '우의적인'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것이 학식있는 그리스인들이 호메로스를 읽는 방법이었고, 필론 같은 학식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타나크를 읽는 방법이었다. 성경에 대한 우의적 독서는 그 안에 몇 개의 의미층이 있는 것으로 본다. 한쪽의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 배후에 숨겨진 가장 중심부의 의미는 가장 심오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파악된다. 우리는 클레멘트에 게서 이미 조우했던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엘리트주의를 다시 한번 만난다. 성경에 대한 우의적인 접근은 기독교 전반에 매우 영향력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을 생각하게 하거나, 아주 오랜 사상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명백한 의미 너머의 근거에서 나온 그들의 신앙으로 적용시키기에 아주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 아주 일관성 있게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을 유대가 전임자들이나 고대 세계의 다른 사람들처럼 두루마리라는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라 우리의 현대 책(기술적인 라틴어 이름이 코덱스(codex)이고 그에 상웅하는 그리스어가 없다는 것은 그 기원에 대해 중요한 것을 말해준다)처럼 양피지나 종이의 여러 장을 모아 기록했다. 왜 그렇게 기록했는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코덱스 사용을 보편화시키기 전에 코덱스 형태는 하급관리들이 메모용 공책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처음 복음서가 이러한 형태로 기록되었기에 주님의 말씀이 엄숙하게 반복되던 예전에서 코덱스에 특별한 지위가 부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가능성 있는 설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복음은 예언자들의 고대 문서에 예언되었다는 기독교 주장에 있다. 예언에 대한 언급은 복음서 본문 자체에 내재되어 있고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저작들에 있는 기독교 변증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극은 한 본문과 다른 본문 사이에서, 즉 복음서와 예언서 사이를 쉽게 오갈 필요를 요청했고, 이를 위해서는 두루마리보다는 옆에 두고 펼쳐볼 수 있는 작은 코덱스들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두루마리 종교인 유대교와 책의 종교인 기독교 사이의 대조는 성경의 코덱스가 찬송 본문으로 사용되었던 예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초기 성경 본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신성한 단어를 말하는 일정한 약자의 형태이며 가장 흔한 것은 숭배되는 이름 '예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이러한 약자(신성한 이름이라 알려진, nomina sacra)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야 했을 것인데, 이는 그런 것이 다른 문학 작품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본문이 예전적으로 찬송될 때, 그것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불렸을 것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입교하지 않은 자들이 질투심을 일으킬 정도로 세례와 성찬 의식을 방어했다. 사실 기원후 1세기의 남아 있는 문하(대개 신약성경)이 세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성찬에 대해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이하다. 1세기 중반 바올이 고린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성찬에 대해 묘사한 것과 복음서에 있는 병행구 이후에 2세기 초반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작품들과 <디다케>(Didache)를 제외하고는 성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결국이 의식들은 지적이고 민감한 로마인 관찰자들에게 철저히 오해받았다. 기독교인들의 애찬식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근친상간을,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으로부터 식인을 한다는 보고가 생겼다. 그런 것들이 회심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많은 적대적인 외부인들은 기독교의 성공은 그러한 관능적인 마법의 결과이며 그것은 비그리스도인들 남편으로부터 아내들을 떼어놓을 만큼 강력한 것이라 확신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수많은 순교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죽는 것을 그의 남편이나 약혼자를 떠나는 여인으로 묘사했다. 기독교를 너무도 싫어한 2세기 아프리카의 희극 작가인 아풀레이우스(Apuleius)는 음탕한 그리스도인 아내를 그녀의 부당한 취급을 받아 화가 난 남편의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다시 돌아가는 늙은 마녀로 묘사했다(그러나 그 계획은 잘못되어 살기 등등한 유령이 그 불쌍한 남자를 자살로 몰아갔다).

 

- 이러한 격정적인 마주침은 기독교에 있어 특징적인 긴장의 순간이다. 즉 한 가지 형태의 권위가 어떻게 다른 권위와 관련되며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만 불복종한 것이 아니라 후에 그녀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린 제도적인 가톨릭 교회에도 불복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몬타누스파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아주 주목할 만한 문장은 그녀가 감옥에서 꾼 꿈과 경험한 환상에 대해 두 번, 세 번 거듭하는 그 묘사에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고 7살에 암으로 죽은 남동생 디노크라테스(Dinocrates)를 보았는데 그는 매우 뜨겁고 갈증이 나는 어둔 곳에 있었으며 시원한 물이 거의 닿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세 번째 꿈에서 그녀는 그가 물을 마시며 "어린아이들처럼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있던 암 종양이 녹아 없어졌다. 페르페투아는 이러한 해방의 환상에 관해 딱히 설명을 하지는 않는데 그녀가 예상한 당시의 독자층으로 보자면 그녀가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기도를 통하여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예언'에 대한 믿음으로 죽은 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디노크라테스에게는 자신들의 부족함을 성례전의 은혜로 채워서 치료하는 제도적 교회나 성직자가 필요 없었다. 

 

- 기독교가 생긴 성지는 이집트의 경계가 되는 시나이 사막으로부터 아르메니아(Armenia) 고원을 막고 있는 타우루스 산맥 (Taurus Mountains)에 이르는 7백마일 이상 뻗어있는 셈족 문명 지역의 최남단에 해당한다. 북쪽 지역에는 두 개의 큰 강, 티그리스(Tigris)와 유프라테스(Euphrates)가 가로지르는데 두 개의 강은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강 사이의 땅)에 비옥함과 번영을 가져다주며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나간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그 전 지역을 '시리아'(Syria)라 불렀다. 오늘날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북이라크, 동터키 등 정치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러한 현재의 긴장상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건너고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두 강의 하류를 바라보는 것은 항상 그 지역의 경제적 행운과 정치적 불행이었다. 

 

- 현대 그리스도인이 기대하는 대표적인 것,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표현한 십자가상은 없는데 이는 5세기 이전 기독교 문화에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초기 교회 예술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이나 새로운 생명을 보여주는 존재이지 후대 서방교회의 예술에서나 나타나는 십자가상과 같이 죽음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다. 

 

- 서쪽의 발전한 가톨릭교회와 더욱 마찰을 일으킨 이는 2세기 후반 타티아누스 이후 한 세대 다음인 바르다이산(Bar-Daisan, 그리스어로 Bardesanes)이다. 그는 타티아누스처럼 자신만의 복음서 형태에 신뢰를 했고(지금 그것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마르시온에 대한 혹독한 반대자였지만 그도 역시 후기 저자들에 의해서 이단으로 비난받았다. 바르다이산은 후대의 기독교 교리가 된 육체와 영혼의 부활을 분명히 부정했고 그 연장선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육체적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4세기 자의식이 강한 정통 시리아 신학자인 에프렘(Ephrem)이 바르다이산을 '마니의 스승'으로 회상했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프렘은 한 가지 아주 중요한 면에서 그의 이단적인 선배를 신뢰했다. 에프렘은 그 아름다움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끈다'는 이유로 바르다이산의 찬송으로부터 리듬과 멜로디를 빌려와 거기에 새롭게 신학적으로 올바른 가사를 붙였다.

 

- 이것은 시리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모습 가운데 하나를 드러낸다. 그것은 교회 음악, 찬송, 성가 곡목을 만드는 데 선구적이었다. 에프렘의 적의에 찬 여과를 통한 것을 제외하고는 바르다이산의 선구적인 찬송의 어느 것도 거의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찬송들은 시기적으로 2세기인 듯한 솔로몬의 송가(Odes of Solomon)로 알려진 모음집 안에 시리아에서 보존되었다. 거기에는 성경을 제외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동정녀로 기록하는 최초의 기록이 있으며 선구적으로 성령도 여성형으로 언급하는 것도 포함된다. 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에 당황스러워서 기원후 400년경 자의적으로 그 단어의 문법적 성을 남성으로 다시 바꾸었지만 문법적으로 결국 성령을 언급하는 시리아어 '루하(ruha)'는 여성형이다. 에프렘 자신은 교조적으로나 영적으로 그의 저서의 주요 부분에서 운율을 성공적으로 사용했고 성경의 찬송을 보완하는 예배에서 자주 불리는 수백 편의 찬송을 썼으며 그것들은 다른 동방교회에서도 초기부터 넓게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여기 그가 부유한 자들에 대한 반란, 환대, (마치 예수가 자신 앞에 있는 것처럼 대담한) 거친 약탈 등의 이미지로 성탄 찬양을 노래한 것이 있다. 

 

- 감독제 그리스도인들과 마니교도 사이의 관계는 긴장감으로 넘쳤지만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한 역할에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조적으로 조로아스터교는 기독교 계시와 그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를 경멸적으로 보는 고대 종교였다. 조로아스터교는 마니교처럼 이원론적 신앙을 갖고 있지만 마니교도와 영지주의로 하여금 세상과 물질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게 한 이원론은 아니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투쟁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었고, 조로아스터교는 주장하길 '지혜의 신', 즉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창조자와 비창조의 '악령', 즉 아리만(Ahriman) 사이의 투쟁의 장소라고 했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에 있어서 세상에서 겪는 경험은 신성으로 가득 차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동물 희생을 정했고 불을 숭배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마니교도들의 금욕주의를 경멸했는데 이것은 사산 왕조가 권력을 잡았던 바로 그때 시리아에서 발전했다. 

 

- 306년은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서방의 수석 황제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가 에보라쿰(Eboracum) 또는 요크(York)의 브리타니아 군대 본부에서 사망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그런 일을 겪은 두 번째 로마 황제였다). 그곳에서 군대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를 황제로 선포했다.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보다 효과적으로 경영하고 안정시키길 바라면서 그의 지도력 아래에 동방과 서방에 각각 수석 황제와 부수석 황제로 구성된 네 명의 황제를 한 팀으로 구성했다(이를 4두정치<Tetrarchy>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305년 은퇴하자 4두정치는 내전을 촉발했다. 복잡한 공격이 이어졌고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며 자신이 로마로 진군하는 데 장애가 되는 밀비우스(Milvian) 다리에서 경쟁자인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대에 맞서도록 그의 군대를 인도했다. 콘스탄티누스에게 결정적인 승리가 된 그 시기, 그의 군대는 새로운 기독교 상징, 키(Chi)와 로(Rho)를 방패에 그려 넣었는데 이는 그리스어에서 그리스도(Christ)라는 이름의 첫 두 글자를 합성한 것이었다. 성경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통에도 선례가 없는 이 놀라운 고안물은 이제 제국 기독교 전체에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고 황제가 다스리는 전 지역의 백성들의 지갑에서 짤랑거리는 제국 주화들의 작은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 콘스탄티누스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여, 원수는 사랑받아야 하며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받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자비로운 예수가 아니다. 그는 전장의 신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에게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승리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는 "태양 위 하늘에 빛의 십자가와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글씨"의 환상이었다고 고백했다. 태양과 십자가의 연결은 우연이 아니다. 추상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군사 지도자이며 무자비한 정치가인 콘스탄티누스는 적어도 처음에는 보편적인 태양 숭배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사이의 차이를 아마도 잘 몰랐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 목회자들에게 특권을 퍼붓기 시작할 때 그들 가운데 다수는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기 전에 황제가 신학적 반대 심문을 받아야 하는지를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콘스탄티누스를 흥미롭게 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었다. 그가 정치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환심을 사야 할 가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숫자를 세더라도 그들은 제국에서는 절대적인 소수였고 군대나 서방 귀족 등 결정적 권력 집단에서는 분명히 약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관용을 베푸는 것만으로도 학대받는 교회에는 충분히 기쁨이 되었다. 

 

- 설계도는 제국교회 내내 분명하게 통일된 형태로 적용되어 실제로 초기에는 에티오피아에 있는 교회에까지 멀리 경계를 넘어 적용되었다. 첫 번째 변화는 가능한 한 '건물의 방향을 동쪽을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긴 축을 서에서 동으로 위치시키고 동쪽에 앱스 끝이 있어 감독 의자 뒤쪽에 성찬상이나 제단을 두었다. 생명나무로 이끄는 에덴동산의 동쪽 입구(창 3:24)에서부터 동쪽에서 일어나 선택된 자들에게 안전한 길을 제공하는 요한계시록의 천사에 이르기까지(계 7:2) 동서의 방향에 대한 성경적 정당성은 많다. 그러나 성경이나 그러한 성경의 언급에 대한 집착에 관계없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단순한 사실이 없다면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인 건축학적 효과는 아니라고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두 번째 변화는 긴 벽면에 입구를 두는 대신 바실리카의 서쪽 박공 아래에 입구를 둔 것이다. 그로 인해 건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길이를 따라 감독의 의자와 그 앞의 제단을 바라보게 된다. 그 제단은 박해의 영웅 시기로부터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의 유해들을 점점 더 품기 시작했다. 

 

- <도마행전>(Acts of Thomas)으로 알려진 한 본문은 16세기까지 기독교의 거룩한 문학에서 수용의 경계를 오갔는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는 (정당하게 자기 의지로) 그 책을 이단적인 것으로 내몰았다. 그 본문이 그리스도의 원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도마의 생애를 적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도마의 시대보다 훨씬 후대이며, 소위 도마복음보다도 늦은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마행전>은 1세기 말의 영지주의 작품과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시리아어로 기록되었던 것 같으며 시리아 신학자 타티아누스가 금욕과 내핍 생활을 찬양하였던 것과 유사하다. <도마행전>은 도마의 인도 선교 모험에 대한 설명 가운데 강력한 독신을 추천하는데, 그 사도의 첫 주요 활동은 두 신혼부부에게 성적인 관계를 삼가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 수도원과 수녀원을 기독교의 전통적인 모습이라 받아들이는 현대 기독교 연구자가 은자라는 개념 수용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수도원 운동의 기원이 단순히 미심쩍고 아마도 영지주의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은자의 '정통성'은 그의 삶의 형태만으로도 교회가 만들어진 기초, 즉 감독이 주관하는 성만찬 공동체를 거부하기 때문이었기에 교회는 이 '조용한 반항'을 위협으로 보았을 것이다. 사실 그런 걱정은 동방교회 권력자들에 의해 어렴풋한 위협, 즉 '메살리아니즘' (Messalianism)으로 해석되었는데 이것은 교회의 성례전에 가치를 두기보다는 금욕주의에서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독특한 열광주의였다(메살리안은 시리아어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뜻한다-역주). 그리고 '메살리안'의 혐의는 초기 금욕주의자와 금욕주의 공동체에 자주 붙여졌다. 안토니우스는 어떻게 사막에서 성찬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감독의 권위와 연관되었을까? 게다가 그는 도시 교회의 주도적인 그리스 문화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이집트 원주민어인 콥트어(Coptic)를 사용했다. 파코미우스는 심지어 더 비천한 콥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안토니우스는 처음에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동안 자신의 독거생활을 떠나 알렉산드리아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함으로 교회 권력자의 눈에 충분히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 

 

- 시리아의 몇몇 금욕주의자에게 채택된 가장 독특한 실천 가운데 하나는 바위 기둥에 특별하게 건설된 꼭대기에서 수년을 끝까지 지내면서 현대의 열기구의 바스켓 같은 나무 평상에서 사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헌신은 5세기 초 또 다른 시메온이 시작했는데 그에게는 '주상 고행자' (Stylite, 기둥에 사는 사람들)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문에 의하면 일단 자신의 기둥에 거처를 지으면 죽기 전에는 거기서 결코 내려오지 않았다. 그 기둥은 60피트 정도 높이 정도였기에 아마도 특별한 부대장치들이 딸려있었을 것이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이 기둥과 그 뒤를 이은 다른 기둥들에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함으로 하나의 분명한 실제적인 의문이 풀렸다. 한편, 시메온의 검소한 생필품은 땅에서부터 그에게 음식을 올렸던 열렬한 숭배자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그의 기둥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터키의 현재 국경이 보이는 알레포 너머 시리아 언덕에 크게 파괴된 바실리카에 둘러싸여 있다. 기둥은 그 헌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먹었'는데 그들은 수세기 동안 작은 조각을 떼어내서는 가루로 갈아 치료의 목적으로 삼켰다. 원래는 60피트 정도의 기둥이 이제는 먹고 없어진 막대사탕처럼 되었다. 

 

- 에바그리우스라는 이름은 둘째치고라도 그의 영적 삶에 대한 묘사는 존중은 못한다 하더라도 무시되지는 않았으며, 무시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후대의 수도사들의 경험에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내적인 탐험에서 시작했다. 그것은 금욕주의자들이 투쟁과 고통에 맞서는 방식으로 평정(apatheia)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진정한 영적 거장에 의해 성취되는 최후의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것에 에바그리우스는 영지 (gnoss)라는 단어를 과감하게 다시 사용했다. 이 모든 것에서 에바그리우스는 훈련 프로그램을 처방하는 내과의사처럼 영적 진보를 위한 기본적 인골 격을 제시했다. 구성된 수도원 생활에서 매일의 규칙, 즉 순서에 짜인 다윗의 시편 암송과 그 후의 짧은 시간의 침묵 기도(그의 경우는 하루 100번), 기도가 성장할 수 있는 모관이 되는 성경에 대한 묵상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관대함과 자비를 받아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봉자였다. "우리는 모든 덕의 씨를 품고 사는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눈물 흘리며 그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보편주의를 반복하면서 지옥 기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조차 사멸하지 않는 덕의 씨를 간직하고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교회가 그는 위험하다고 결정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그렇다면 여기 아리우스의 그리스도가 있는데(사실 오리게네스와 다른 초기 저술가들이 말하려 했던 것처럼) 그는 아버지보다 열등하고 종속적이며 아버지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여러 면에서 아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계승자였고 알렉산드리아 세계관을 가진 신학자 가운데 하나로 생각되어야 한다. 아리우스가 단순히 논리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과 같았으며 선한 의도로 인간의 갈등 속에 참여했던 구세주의 모습을 보이려는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의 그리스도는 창조된 질서의 일부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아리우스는 확실히 평범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 가운데 애정 어린 추종자를 발견했는데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사상에 관한 노래를 가르쳤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건 318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드로스(Alexander)를 포함한 격렬한 반대를 촉발시켰다.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부주교들 중 하나가 교회 교육에 있어서 자신보다 더 예리한 사상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일한 감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감정은 아리우스가 이전에 엄격주의자 리코폴리스의 멜레티우스 분열과 관련 있었던 것 같다는 사실로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 361년 콘스탄티우스가 40대에 갑자기 죽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아리미눔의 유사본질파 정식이 교회를 통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촌인 카이사르 율리아누스(Caesar Julian)에 대항하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는데 콘스탄티우스가 죽음으로 율리아누스는 제국 왕좌에 유일한 황제로 추대되었다. 기독교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후에 비난하면서 '배교자' (the Apostate)라 이름 붙인 올리아누스가 갑자기 기독교 신앙을 버렸을 때 혼란에 빠졌다. 그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교육 아래 그리스도인으로 자랐으나 그 스스로 모순적 주장이라 여기는 기독교에 싫증이 났고 매우 조심스럽게 신플라톤주의와 태양 숭배의 깊은 매력에 빠졌다. 그는 아마도 미트라(Mithras) 의식을 접했을 것이다. 

 

- 많은 동방 지도자들에게 문제는 '우시아'(ousia, 본질)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암시에 관해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걱정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은 '우시아'와 거의 다르지 않게 사용된 다른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위격)를 선택하여 두 개의 다른 단어(즉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에 두 개의 다른 기술적인 의미를 할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어의 협력으로 "삼위일체는 한 본질(ousia) 안에 세 개의 동등한 위격(hypostaseis)으로, 즉 세 개의 동등한 인격들(Persons,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본질(Essence 혹은 Substance, 삼위일체의 신성)을 공유한다"고 말해질 수 있었다. 

 

- 아마도 가장 혐오스러운 경우는 415년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의 죽음일 것이다. 그녀는 뛰어난 학식으로 존경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남자들이 탁월하다는 일반적인 선입관을 극복했다. 그리스도인 군중들은 그녀가 이집트 행정 장관을 부추겨서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와의 논쟁을 끝내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설득당했고 곧 그녀를 마차에서 끌어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고문한 뒤 살해했다.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이것은 키릴로스의 감독직에 대한 영원한 오점이었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역사가들은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할 마음이 없었다. 

 

- 아타나시우스가 썼다고 생각했으나 (비참하게도) 실제로는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의 작품이었던 신학서적에 고취된 키릴로스는 그리스도의 위격과 본성을 의미하는 두 단어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이를 위해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위격)와 '퓌시스'(physis, 본성)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대조적으로 그리고 키릴로스의 귀에는 무례하게 테오도레와 그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physeis)을 이야기했으며 극장의 가면을 의미하는 '프로소폰'(prosopon)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하나의 위격과 두 본성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 로마는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모든 정치적 변화를 '레오의 서'에 얼마나 경의를 표하느냐로 측정하였고 기독론 문제를 생각할 때 동방 황제들을 좌우하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고려를 교황은 좋아할 수 없었다. 결국 482년부터 519년까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공식적인 분열에 있었는데, 왜냐하면 비잔틴 황제 제노(Zeno)와 그의 감독 아카시우스(Acacius)는 수도에서 단성론자들과의 공식적인 결합 즉, '헤노티콘'(Henorikon)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쉬운 대상이었던) 네스토리우스를 새롭게 정죄하고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한 키릴로스의 핵심 문서들을 찬양하는 것이었으며, 에베소의 찬성론자들이 취한 방법, 즉 '레오의 서'에 대해 침묵함으로 로마에 모욕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518년 황제의 태도 변화로 헤노티콘과 '아카시우스 분열'은 끝났다. 

 

- 가산 왕조의 전사 전통은 게오르기오스와 같은 또 다른 군인-순교자에게 매력을 느끼게 했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세르기우스(Sergius)였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대박해 동안 시리아에서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그에 대한 격렬한 숭배를 발전시켰고 세르기우스는 아랍인들 사이에서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에 대한 숭배는 비잔틴제국 전체에도 퍼졌고 유스티아누스도 후원을 장려했는데 그는 이 대중적인 순교자를 위한 교회건축에 투자함으로써 동방 백성의 존경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다. 세르기우스는 관습적으로 그의 동료 군인-순교자 바쿠스(Bacchus)와 함께 우호적으로 그려지는데 '애인'의 연합같이 묘사될 정도로 가까워서 그 가능한 암시를 탐구할 정도로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동방 기독교에 동성애라는 흥미로운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조로아스터교 군주이며 잔혹한 사산 왕(Shah) 쿠스라우 2세(Khus-rau II)도 자신의 정복을 서쪽으로 비잔틴 기독교 영역까지 확대하려고 할 때 성 세르기우스에 대한 존경을 보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스라우는 세르기오폴리스 (Sergiopolis)라는 가산 왕조 시의 세르기우스 제단에 두 번의 제물을 바쳤다고 알려졌는데, 처음에는 591년 비잔틴의 군사적 지원으로 정적으로부터 왕좌를 되찾은 후 그리고 자신의 비잔틴 아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그 감사로 바쳤다. 그는 또한 단성론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그 제단이 불탄 후에도 그것을 다시 지었다. 

 

- 에티오피아 신학에서 중심으로 남아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육신을 입으신 구세주의 인성과 신성의 연합(tawahedo)이다. 그러나 의장감독의 결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 교회는 콥트파의 특징은 없었다. 셈족 세계와의 연결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이미 에티오피아 언어와 티그레이(Tigray)와 에리트레아(Eritrea)라는 해안지역의 지명을 통해서도 분명하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예전적, 신학적 언어가 된 셈족 언어 가운데 하나가 게에즈어(Ge'ez)인데 이는 현재도 다르게 사용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단성론 신앙의 도래는 또한 셈족 세계와 연결되었는데, 거의 시리아 배경을 가진 '9인의 성인' 전설과 연관되었다. 그들은 5세기 말에 칼케돈 박해로부터의 피난민으로 와서 에티오피아 수도원 체계를 세운 자들로 여겨진다. 

 

- 13세기 정도의 초기 외부문서에는 그 교회가 한때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그 언약궤의 소유를 주장했다고 기록한다. 언약궤가 십자가로 장식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만약 이것이 진품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1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되므로 이 기원에 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 동방교회는 서쪽의 잘못 인도된(misguided) 기독교와는 다르다는 점을 기뻐하였다. 가는 곳마다 (성경에서 가장 명백하게 재미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요나 선지자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여겼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낸 것 때문에 부활의 상징으로 요나에게 존경을 표하지만, 동방교회는 그 큰 물고기 뱃속에 머문 것은 요나가 앗수르인들의 혐오스런 도시 니느웨(Nineveh)에 구원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회피하려는 잘못된 시도 때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제 요나의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해 니느웨에 동방교회의 그리스도인 감독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한 신학은 동방교회로 하여금 인성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라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레의 가르침의 강조점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에게 진정한 모범이 되었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성결을 본받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믿음으로 시리아 전통의 수도사들은 그와 같은 본받음(imitation)을 이루기 위해 특별한 자기 징벌을 수행했지만 인간가치에 대한 기독교의 신뢰의 다양성에서 낙판적인 위치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면 인성은 선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모는 인성은 나중에 타락했을지라도 선하게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의 원죄의 장조를 추종하는 라틴 서방 기독교로부터 자주 등장하는 가차 없는 비판주의와는 대조된다. 

 

- Sebastian Brock은 영적 스승으로서 에바그리우스에 대한 동방교회의 깊은 존경에도 불구하고 오리게네스가 무책임하게 (안디옥에서 유래된 문자적인 성경학에는 낯선) 우의를 사용하는 것에 관해 비난하고 그의 우주론적인 사유를 위험한 것으로 보면서 에바그리우스에게 영감을 준 오리게네스를 비난한다. 

 

- 동방교회는 서쪽과 비잔틴제국으로도 유망한 이동을 하였다. 비잔틴제국에 대항한 군사행동에서 쿠스라우 2세의 가장 중요한 전리품 가운데 하나는 영토가 아니라 주요 기독교 유물이다. 그것은 4세기에 예루살렘이 스스로를 성소로 홍보하던 시절에 잠시 등장했던 소위 '성십자가'(True Cross)였다. 614년 쿠스라우 2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그 성십자가를 취했고, 그것은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에게는 분노와 모욕이었다. 그러나 쿠스라우는 그것을 존중하여 자신의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그것을 맡겼다. 그때 새로운 사산 왕조 보란(Boran) 여왕이 헤라클리우스의 성공적인 반격 이후 현실을 깨닫고 비잔틴제국과의 평화정착을 꾀할 때 이것은 외교적인 주요 협상의 내용이 되었다. 성십자가를 돌려준 사산 왕조 평화대표단은 대주교 이쇼야브가 인솔했고 그가 비잔틴 황제와 칼케돈 감독들이 배석한 가운데 베로이아(Berrhoea, 현재 알레포)에서 자신의 교회 의식에 따라 성만찬을 집례 했을 때 그는 양성론 역사에서 전례 없었던 만족을 얻었다. 조약은 헤라클리우스에게도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사산 왕조 군대에 의해 전체적으로 엉망이 된 비잔틴 예루살렘의 잔해 속에서 그의 유물이 돌아오는 가두행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버려두었고, 마호메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러한 오랫동안 버려진 성소가 다시 그 영광과 화려함을 회복했다. 690년 초 압달 말리크(Abdal-Malik) 칼리프는 우마르의 첫 기념물에 특별한 돔 건물을 더했고 그것은 현재 우마르의 모스크로 불린다. 그러나 모스크도 아니고 우마르에 의한 것도 아니기에 2중 오류이다. 기독교가 만든 그 어떤 것보다도 인상적인 건물인 이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의 기능은 아마도 원래 기독교를 넘어서는 마호메트의 계시의 승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 이것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었다. 칼리프가 선택권 없이 수도권에 살 수밖에 없는 총대주교의 선출에 관심을 가졌기에, 그 총대주교의 자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사산 왕조 아래에서처럼, 양성론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이슬람 칼리프들의 궁정 의사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이것은 결과에 있어 반드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 의사들은 교회 전체적인 관심을 돌보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대주교직을 사용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바스 칼리프들이 그리스도 의사들의 의료봉사에 두었던 가치로 인해 바그다드가 새로운 고등교육기관의 배경이 되었고, 832년 설립 때부터 니시비스(Nisibis)와 곤데샤푸르의 학교들을 앞서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천문학과 의약에서 전문성을 장악했다. 아바스 칼리프들은 유용한 것이라면 이슬람 이전의 모든 학문의 원천을 끌어들이는 데 관심이 있었고, 그 주요 원천은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돼어 동방 교회가 보존하였던 문헌들이었다. 

 

- 양성론파는 항상 십자가상을 거부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고통받은 존재로 만드는 일은 예수의 본성에 대한 혼돈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십자가에는 그리스도가 없는데, 이는 그의 부활을 상징하기 위함이다(흥미롭게도, 단성론파 아르메니아인들도 같은 십자가를 좋아했는데, 전혀 반대의 신학적 이유에서였다). 1250년 루브뤽의 수도사 윌리엄은 중앙아시아의 한 양성론파 그리스도인이 '프랑스식' 은십자가를 보고, 거기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잡아 뺐을 때, 분개를 금치 못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19세기 오스만 제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이미지가 없는 것에 놀라고 기뻐하였으며, 동방교회를 '아시아의 개신교'라고 선언하였다. 

 

- 그러나 홍해와 아라비아의 중심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10세기에 에티오피아는 구디트 또는 유디트(Gudit or Judith)라는 여족장에 의한 반란에 직면했는데, 그녀는 교회와 왕국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능한 한 많이 파괴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확실히 멀리 떨어진 건물들만 남았고,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악숨 지역의 고대 절벽 꼭대기 수도원 데브라 다모(Dabra Damo)였다. 이것은 에티오피아 수도원 운동의 가장 초기에 설립된 것 가운데 하나이며, 높은 언덕 위 절벽 꼭대기에 위치하여 여전히 줄에 매달려 단애면(Clif face)을 기어올라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 어느 시점부터 에티오피아는 다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세계적으로 감독들의 사도전승을 연결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낸 의장감독(abun)도 없어졌다. 이용 가능한 신학적 문헌은 선별적이었고, 특징에서도 무계획적이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인들은 <에녹 1서>(1 Enoch)로 알려진 책을 정경의 일부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그 책이 다른 곳에서는 존경받지 못하던 때였다. 사실 <에녹 1서>는 왕족 전설, <케브라 나가스트>(Kebra Nagast)의 기초를 제공하여 에티오피아 전통의 특별한 부분의 역할을 하였다.

 

- 일부다처제냐 일부일처제냐라는 난처한 문제 하나가 아프리카 전역의 그리스도인들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뒤흔들고 있다. 타나크에는 완전히 존경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분명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부다처제를 교회는 금하였다. 에티오피아 군주들은 아프리카 전통을 따르면서 관습적으로 여러 아내를 맞았다. 수도사 배샐로태 미카엘(BaSalotà Mika'él)은 무모하게도 여러 처와 첩들을 거느렸다는 이유로 암대세욘 왕을 비난했고, <케브라 나가스트>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일부일처제를 강조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군주국가는 주요 수도원에 관대한 땅을 하사함으로 비난을 잠재웠고, 일부다처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는 대가로 교회에서 결혼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한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그들의 배우자들과 갈라서기 전까지 성만찬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실제로 수긍하는 에티오피아 평신도들도 대부분도 일부다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열적이고 의식적인 금식을 통해 그러한 배제를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 보편 교회에서 두 명의 감독은 여전히 아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의 단어, '파파'(Papa)라는 고대의 라틴 명칭(영어로 'Pope')을 사용한다.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대주교인데, 추정하기는 이는 복음서 저자 마가의 계승자이고, 키릴로스와 디오스코로스 그리고 잔인하게 살해된 프로테리우스의 분명한 계승자이다. 다른 하나는 로마의 감독으로 사도 베드로의 다소 개연성 없는 계승자이며 세계 기독교의 가장 큰 단일 단체의 지도자이다. '가톨릭'이라는 단어에 대한 다양한 기독교적인 이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로마의 교황이 주재하는 교회에 대한 설명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례에 따른 다른 모든 기독교 단체에 대한 중요하고 객관적인 권위주장이 거기에 뒤 따르는데, 현재의 교황도 아직까지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 이 프로그램의 한 가지 목적은 지난 과거 로마에서 있었던 베드로와 바울의 연합보다는 베드로의 역할을 새롭게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베드로가 단순히 로마 기독교회 설립자일 뿐만 아니라, 첫 감독으로 간주되었던 것도 바로 다마수스의 시대였다. 역설적으로 마태복음 16:17-19을 근거로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우위이며 홀로 그 나라의 열쇠를 받았으며, 그에 의해서 그 열쇠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졌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실제로, 북아프리카 가톨릭 교회가 로마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 그 지역 도나투스파 적대자들을 이겼던 북아프리카 감독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생각이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은 370여 년경 바로 다마수스의 시대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베드로의 승격은 단순히 교황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도 고대의 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어떤 영광스러운 과거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채택한 신앙은 더 이상 수준 낮은 자들의 것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적합한 종교가 될 수 있었다. 

 

- 그 지속적인 영향은 중세 예술에서 신기하게도 히에로니무스의 모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그의 이름을 따라 히에로니무스파 'Jeronimite'로 불린 강력하고 부유한 스페인 수도원의 헌신 덕택에 스페인은 특별히 많은 사례들을 제공한다). 그는 독서와 저술에 집중한 학자로서 호화스럽게 구비된 환경에서 연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든지, 아니면 사막에 있는 거친 눈의 은자로 그려진다(실제로 은자로서의 삶은 실패했지만). 어느 쪽이든 그는 대개 사자와 함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중동의 중세 서방순례자들에 의해, 이름에 대한 비현실적인 혼돈으로 인한 실수로 그림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게라시모스(Gerasimos)라는 대중적인 팔레스타인 은자인 성인에 대해 들었을 것인데, 그는 사실 히에로니무스보다 한 세대 뒤에 살았다. 게라시모스의 극적이고 금욕적인 자기부정의 위업은 사자 발에서 가시를 빼서 그 사자와 오랜 우정을 이룬 선인이라는 기독교 이전 이야기를 스스로 자기 것으로 만들으로써 극에 달했다. 실제로 그 사막의 성자는 사자를 길렀을지도 모른다. 사자를 떠나서, 히에로니무스가 성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성공시키지 못했다거나, 시리아 사막 기둥 꼭대기에 앉은 성 시메온의 경우처럼, 학자에게는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이 자기희생과 같다고 후대의 저술가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수많은 수도사들이 고대 본문을 읽고 즐기고 후대인들을 위해 필사를 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수혜자는 서방 문화였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역사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하여 옛 신들에 대한 조소까지 나아가지만, 그의 관심은 단순히 로마의 재난보다, 심지어 로마 역사 전체 화폭보다도 더 넓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의 중심에 있는 문제로 향하였다. 악의 본질과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함이나 최고선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악은 단순히 비존재(non-existence), 즉 '선의 결핍'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누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존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보려고 하고, 침묵 속에서 들으려는 것과 같을지라도,' 모든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무를 향하는 의도적인 타락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마니교도가 이전에 그의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개념, 즉 악은 빛의 세력과 끊임없이 우열을 다투는 적극적인 힘이라고 보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악에 대한 이러한 정의(선의 결핍)는 마니교로부터 멀어지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방문하면, 적어도 인간 경험에서 순수한 악이 순수한 무 그 이상임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 가톨릭과 도나투스파의 대부분의 논쟁은 3세기 키프리아누스가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제시한 세례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계승한 후계자가 어느 편인가에 집중되었다. 펠라기우스 주의라는 이름이 붙게 된 명제들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분노를 처음으로 일으킨 것은 바로 켈레스티우스의 이러한 주장이었다. 정작 펠라기우스와의 관계는 켈레스티우스와의 관계와 같은 쓰라림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후 수년 동안 복잡한 정치적 움직임과 그 반작용으로 새롭게 열기가 올랐다. 펠라기우스에 반대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십자군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패배시켰고 높은 신분의 펠라기우스의 지지자들도 교회 직분을 잃었다. 

 

- 아우구스티누스를 가리켜 세상을 부정하는 충동에 사로잡힌 플라톤주의나 스토아주의의 후예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일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에 기초했던 초기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은 의심할 바 없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있다. (사실 거의 읽지 않은) 플라톤의 유산에 대한 주석과 플라톤적인 사유방식은 그의 저서의 대부분을 형성하였다. <신의 도성>에서 플라톤에 대한 긍정적인 주석 가운데 그는 플라 톤주의자들이 결국 그리스도인에 가까운 자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플라톤주의자들을 나머지 철학자들 그 이상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왜 플라톤이 중세 내내,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잃어버린 저작에 대한 재발견으로 기독교사상가들이 흥분하기 시작할 때조차도, 기독교 사상의 중심에 가깝게 남아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신플라톤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플라톤의 하나님은 초월적이며, 타자이며, 멀리 계신 분이다. 

 

- 술피키우스가 말한 이야기를 통해 서방 기독교에서 가장 자주 쓰는 기술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인 예배실(chapel)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마르틴이 가난한 사람을 입히기 위하여 자신의 군 망토를 반으로 찢었는데, 후에 그 가난한 사람은 마르틴의 꿈에 그리스도 자신으로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라틴어로 카펠라(capella)라고 하는 잘려진 '작은 망토'는 후에 갈리아의 로마 통치자를 계승한 프랑크(Frankish) 야만족 통치자의 최고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가장 고귀한 유물을 보관하는 작은 교회나 임시 구조물(capellae)은 그것을 따라서 이름을 붙였다. 그리하여 서방은 군주의 개인적인 교회에 그 이름을 붙였고, 후에 어떤 작은 교회에도 그 이름을 붙였다. 술피키우스가 얻은 것은 동방의 그 어떤 기적 행위자나 영적 활동가와도 동동한 성자를 라틴 서방에서도 배출할 수 있다는 단호한 주장이었으며, 이것은 이제 서방의 자기 확신이라는 성장하는 구조물에 또 다른 구성요소였다. 

 

- 히에로니무스의 반대자들이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헬비디우스(Helvidius)였다. 그는 예수가 분명하게 형제와 자매가 있었으며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영원히 처녀로 남아있었기보다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였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평범한 의 미를 택했다. 또한 뒤를 이어 친절한 수도사 출신 조비니안(Jovinian)의 차례가 다가왔다. 그는 그가 '본성에 대항하는 새로운 교리 '라고 부른 금욕을 실천하는 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았는데, 그는 어떤 세례교인이든 결혼했든, 독신이든, 혼자 살든 동등하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기회가 있다고 주장했다. 후대를 위해 이 두 사람을 신학적인 일탈자로 이름 붙이는 싸움을 지휘하면서, 히에로니무스는 이 둘은 신학적 일탈을 꾀하는 자들이라면서, 이 오랜 논쟁 중 의미심장한 조치를 취했는데, 즉 그는 독신 상태가 결혼상태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서방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사실 카시아누스는 서방교회에서 논쟁적인 인물이 되었다. 초기 그의 멘토는 위대한 영적인 저술가이며 수도사이며 점점 논쟁의 근원이 되었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였었다. 다시 말해 카시아누스는 열정적인 오리게네스 지지자였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과 협력하여 영적인 생활에서 성장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 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카시아누스는 에바그리우스라는 이름이 이미 의심받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의 영적인 저술에서 에바그리우스의 이름이 없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저술은 에바그리우스의 '마음의 순수함'이라는 주제를 수도원적인 노력의 목표로 발전시켰다. 에바그리우스가 선호하던 또 다른 개념, 즉 사람들 가운데 히에로니무스로부터 적의에 찬 비평을 일으켰던 '아파테이아'(apatheia) 혹은 '냉담함'(passionlesness) 또는 '고요함'(serenity)과는 달리, '마음의 순수함'이라는 개념은 안전한 성경적인 표현이었다. 

 

- 로마귀족제는 이탈리아의 반복적인 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졌는데, 역설적으로 이는 대개 콘스탄티노플 황제들이 옛 이탈리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동일한 참사가 북아프리카의 옛 삶의 방식에도 심각한 손상을 주었고, 이는 7세기 이슬람의 맹공격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남겨놓았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55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라틴문화는 거의 멸절되었는데, 그 증거는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수기 사본의 존재이다. 수기 사본을 만드는 힘든 과정, 즉 수세기 동안 축적된 지식의 깨지기 쉬운 생산물이 보존될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끝나고 있었고, 샤를마뉴(Charlemagne) 시대 250여 년 동안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그 사이 고전문학 대부분은 우리에게서 영원히 사라졌다. 정치적으로 이전 제국의 지역은 여러 '야만' 왕국으로 바뀌었는데, 대개 아리우스파 고트족(Arian Goths)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은 아리우스 주의를 옛 라틴세계 가톨릭 그리스도인들과의 문화적 차이의 표지로 여겼다. 두 문화는 신기하게도 분리된 채 나란히 남아있었는데, 실제로 떠나게는 할 수 없는 '손님'을 맞은 '주인'인 라틴 엘리트들은 다소 불분명한 재산권을 지켜주는 대가로 고트족 지도자들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군 복무를 피했다.

 

- 클로비스의 회심 이후 1,300년이라는 기간 동안 프랑크 왕국이 된 나라의 18명의 군주들은 그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받아 라틴어 루도비쿠스(Ludovicus)의 프랑스 변형인 '루이'(Louis)가 되었다. 이제 라틴교회는 의심스러운 정교회의 동방 황제도 아니고 테오도릭 같은 아리우스파 이단도 아닌 서방에서 강력한 군사적 후원자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스페인의 서고트(Visigothic) 왕들이 자신들의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전투적으로 유지하던 가톨릭 신앙을 포용하기 100여 년 더 전의 일이었다. 가톨릭 기독교의 역사가 말하는 방식은 바로 곁에 위험스레 있는(mean-miss)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서구에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 감추려 한다. 만약 야만 군주들 사이에서 선호도의 균형이 프랑크의 클로비스에 의해서라기보다 스페인 서고트에 의해 좌우되었다면, 유럽의 역사는 로마 군주제보다는 분권화된 아리우스주의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클로비스가 그토록 집정관이 된 것을 기념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 이러한 성인들과 프랑스의 기독교 가톨릭 군주와의 동맹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방 유럽에서 기독교에 관한 커다란 정치적 사실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었고, 이후 프랑스 군주들은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라는 칭호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 칭호는 메로빙거 왕조의 최후의 몰락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잠재적인 칭호,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계속되었다. 수세기 너머, 이 두 개의 신성한 기독교 군주들의 경쟁은 반복해서 유럽의 평화를 방해했다. 생생한 기억으로, 프랑스의 정치학은 고대 프랑스의 교회와 왕권 사이의 연대에 대한 강렬한 의식에 의해 여전히 영향을 받고 또한 분노하고 있다. 메로빙거 왕조에 대한 명성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기독교 역사의 실재에 주목하는 것보다는, 불분명하고 비밀스러운 음모론으로 과거를 구성하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 그레고리우스는 목회자들이 어떻게 평신도들에게 목회적 돌봄을 제공하고 설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저술을 남긴 최초의 저자다. 목회와 설교는 그가 교황으로 선임되기 전에 살아왔던 수도승으로서의 관상적인 삶과는 사뭇 다른 사역이었다. 이전에 수도사였던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에서의 이러한 사역은 목회자들에게 수도원보다도 더 큰 영적인 진보를 이물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보았다. 왜냐하면 관상적인 평안과 혼란스러운 일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분열되고 찢어진 마음이 그 많고 무거운 문제들에 휘말릴 때, 말씀 설교라는 사역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설교 가운데 마음 그 자체를 묵상하기 위해서 마음을 언제 마음 그 자체로 돌이킬 수 있을까?" 이것은 교회가 점점 수도사들의 영적인 영웅주의를 강조하고 있을 때 교구 목회자들에게는 그들이 직면해야 할 자신들의 영적인 도전이 있다는 가치 있는 선언이었다. 

 

- 우리는 이들 중 하나인 위트혼의 니니안(Ninian of Whithorn)을 이미 다루었지만, 그는 투지가 넘치고 고통을 당한 잉글랜드의 괴짜 패트릭(Patrick)에 비하면 분명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패트릭은 니니안보다 젊은 동시대인이었을 것이다. 

 

- 영국선교는 로마 감독이 이전 기독교 경계를 확장하려 노력한 첫 시도였다. 이전의 주요 기독교 선교 시도가 제국의 칼케돈 교회가 이단으로 이름 붙인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은 기이하면서도 아마 중요할 것이다. 북부 '야만인들'에 게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 감독과 '아리우스파' 울필라(UIfila), 동방에는 단성론자 야콥 바라데우스(Jacob Baradeus), 그리고 아라비아, 중앙 아시아, (처음) 에티오피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시리아의 양성론자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예외는 가톨릭 그리스도인들로 갈리아의 열정적인 가톨릭 교회의 강한 영향을 받았던 켈트족 영국인들(Celtic Britons)의 주도권이었다. 갈리아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들이 가톨릭 서방교회의 신성한 언어로, 즉 라틴어로 그들의 문학과 예전을 보존하기로 결심한 것은 미래 영국 기독교인의 생활 형성을 위해 아주 중요했다. 

 

- 십대에 그는 아일랜드로부터의 침략자들에 의해 잡혀 노예가 되었고, 갈리아 지방을 떠돌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일랜드로 돌아가야 할 것을 강력하게 느껴 아일랜드에서 감독처럼 활동했으며 이전 감독 팔라디우스(Palladius)가 선교에서 남긴 것을 취합했다. 이것과 그 후 편지를 보면, 패트릭은 브리튼, 남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동일한 고통스런 반대에 직면했으며, 그 대부분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반대는 후에 전설로 남았음을 알 수 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사도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세계적인 순회로 현대 가톨릭 교회에까지 존경을 일으키는 성자가 되었다. 그의 사후 영향은 더 멀리 확대되어, 대륙과 섬에서 노예로 살았던 그의 과거 경력과 아일랜드로부터 뱀을 쫓아냈다는 명성은 유럽인들에 의한 노예제의 희생자들임을 스스로 깨달은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아름답고 개별적인 라틴어 본문에 채색으로 쓰인 수기, 청동 종, 금속 지팡이 등은 아일랜드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후기 역사에도 불구하고, 초기 성인들의 유골만큼이나 중요하게 그들과 관련된 유물이 되었기에 사랑스럽게 보존되었다. 켈트 기독교 문화는 예배에서 그와 같은 성스러운 물건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20세기의 호기심 많고 이야기 좋아하는 역사가 웨일즈의 제럴드(Gerald of Wales)는 이 강조점을 특별히 언급하여,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사람들은 복음서에 대한 맹세를 깨는 것보다 종이나 지팡이와 같은 물건에 대한 맹세를 깨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 이방인 왕 에셀버트(Ethelbert)가 프랑크 그리스도인 공주인 베르타(Bertha)와 결혼했었던, 그곳에는 로마의 과거가 중요하다는 생생한 의식이 있었다. 켄트 왕국의 수도는 캔터베리(Canterbury)라 불린 이전의 로마 도시였다. 후에 정치력이 켄트로부터 떠났을 때, 아우구스티누스 계통의 후배 앵글로-색슨 감독들과 대주교들은 웨섹스(Wessex)나 머시아(Mercia)의 고압적인 군주들과 다소 거리를 두면서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12세기에야 앙주(Angevin) 군주들이 런던시를 자신들의 수도로 바꾸었고 그 서쪽 웨스트민스터 (Westminster)에 궁전을 지었다. 그때 캔터베리 대주교들은 현재의 교구교회 성 메리 르 보우(St Mary-le-Bow) 교회의 자리인, 런던의 중심에서 새롭게 얻은 땅의 가능성을 실험하며 최대한 이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은 램버스(Lambert)에서 자신들의 작은 영지를 보유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웨스트민스터로부터 템스(Thames) 강을 가로질러 빠르게 배로 닿을 수 있었고 이제는 캔터베리가 아니라 그곳의 새로운 궁전이 오히려 그들의 작업을 위한 진정한 중심이 되었다. 12세기 말 한 대주교조차도 그레고리우스의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였고, 자신의 대성당을 램버스로 옮겼으나 그 계획은 십자군 원정에서 그가 사망함으로 실패하였다.

 

- 이 눈부신 왕국의 이상은 비드가 잉글랜드라 불리는 단일 민족을 묘사한 것에 의해 부추겨졌다. 결국 그의 책 제목도 <잉글랜드인들의 교회>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gens Anglorum)이다. 비드는 이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로마에 대한 공통의 충성을 근거로 하는 공유되는 특별한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보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비드의 잉글랜드 사람들과의 대화 이야기에서 영웅이다. 비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라 그레고리우스를 잉글랜드의 '사도'라고 불렀다. 그가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잉글랜드의 계속적인 존경을 반영하였다. 비드 자신의 시대에 잉글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서유럽 세계는 이 '그레고리우스-열광자'를 잉글랜드의 기이한 경우로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우스는 실제로 의심을 받아 그 교황직은 끝났고, 로마인들 중 이를 슬퍼할 사람도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생애는 8세기 초 휘트비(Whitby)의 노섬브리아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인에 의해 최초로 쓰였다. 로마 교회가 그레고리우스의 예식을 따르고, 그를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초기 서방의 '4대' 신학자, 4명의 라틴 박사들 중에 한 사람으로 기술한 것은 그가 죽고 20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 게다가 피핀은 그의 거룩한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이전의 파리 감독이었던 게르마누스(Germanus) 혹은 제르맹(Germain)을 끌어들였다. 게르마누스는 시의적절한 때에 환상 가운데 어느 한 경건한 여인에게 나타나 그녀에게 파리에 있는 자신의 유골을 더 화려하게 개장하라고 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피핀은 수많은 프랑크 귀족들 앞에서 과시적인 예식으로 헌신적으로 복종하였고, 또한 그 성인의 수도원(생 제르맹 데프레(St Germain-des-Prés), 당시는 파리 교외에 있었음)에 이전 메로빙거 땅으로 풍성한 지원을 하였다. 피핀과 칼로만은 특히 영향력 있는, 오래전에 죽은 성인 동맹자들이 있는 대수도원 공동체를 지원하면서, 그렇게 자신들의 새로운 정치적 모험의 행운을 교회의 주요 변화와 개혁으로 연결시켰다. 

 

- 760년대부터 프랑키아의 목회 기록자들은 교황이 분명하게 메로빙거 왕에 대한 피핀의 축출을 명령하고 권위를 부여했다는 생각을 부지런히 만들어냈다(그들은 또한 마지막 메로빙거 왕들을 어떤 신적인 보험도 들지 않고 재해를 당한 불행한 사람들로 묘사했다). 피핀은 빠르게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로부터 자신의 갑작스런 체제 변화에 대해 승인을 얻었고, 자카리아스의 직속 후계자 스테파누스 2세(Stephen I1, 752-7 재임)는 이 승인에 대한 보상을 얻었다. 피핀이 자신의 수도원적인 소명을 킬데릭에게 주었던 751년, 롬바르드 족은 마지막으로 라벤나에서 남아 있던 비잔틴 황제의 대표를 추방했고 그들은 로마만큼 남쪽으로 먼 이탈리아의 남아있던 비잔틴 영역을 침략했다. 피핀 왕은 이 땅을 다시 찾았지만, 그는 그것을 제국 정부에 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비잔틴 인들의 분노에도) 그는 그 땅을 교황 스테파누스에게 주었다. 그의 결정은 그 이후 1000년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는 유럽의 가장 오래된 정치적 단위들 가운데 하나, 중앙 이탈리아에 교황령을 설립했다. 그리고 19세기에 있었던 교황령의 최종적인 해체가 현재 교황제의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있다. 

    

- 샤를은 하나밖에 없는 수기사본이 사라지면 그 본문도 사라지게 되는 고전 세계의 문서 출혈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그는 사본들을 복사하는 거대한 계획을 추진했고 필사자들은 본문을 빠르게 기록하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메로빙거 초기부터 시험되어 왔던 '카롤링 소문자체'(Carolingian minuscule)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서방 유럽에 퍼졌고, 너무도 영향력이 커서 지금 여러분이 사용하는 영문 소문자체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 실제적으로 서방에 현존하는 고전문학이나 초기 기독교 문서 어느 것도 9세기 복사본의 폭발적 증가 이래로 상실된 것은 없는 것 같고 사실 대체적으로 본문의 가장 이른 사본들의 시기도 이때이다. 이 '정보 폭발'은 기독교적 노선 위에서 사회를 개조하고 지도하려는 시도의 기초였다. 황제의 조언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들이 생각한 것에서 모든 사회를 통제하는 법체계를 끌어왔다. 샤를마뉴가 좋아하던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이었다. 그가 교회와 평신도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 <일반인에 대한 충고>(Admonitio Generalis)를 출판했을 때, 그는 스스로를 유다의 요시야 왕과 비교할 수 있어 행복해했다(요시야는 고대의 율법책을 찾아 실시하였으며 그의 프로그램은 또한 모세, 즉 원래의 율법수여자와 연결되었다). 

 

-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높고 가장 강력한 기도의 형태는 성만찬(Eucharist)이었다.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사제는 회중을 주 예수 자신과 만나도록 인도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제단 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킨다. 4세기부터, 서방교회는 이것을 '보내다'라는 뜻의 후기 라틴어 '미시오'(misssio)로부터 유추하여 이를 '미사'(miss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세기까지 현대 로마 미사 예전에서 사제는 상징적으로 "가라, 보내는 바이다” (Ite missa est)라는 특이한 말로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사제의 기도를 생각할 때, 그들은 특별히 미사의 능력을 원했다. 이것은 미사의 특징과 수도원의 특징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기도를 변화시켰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