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 - 궁극의 자유와 행복으로 이끄는 심오하고 풍요로운 영적 순례

일루젼 2021. 10. 19.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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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 김정우 

원제 : Autobiography of a Yogi
출판 : 뜨란 
출간 :  2014.08.12


 

'마이클 싱어'의 <될 일은 된다>를 읽다가 '요가난다'가 궁금해져 찾아 읽었다.

그렇다면 싱어 또한 크리야 요가를 익혔다고 봐야할 것이다. 

 

책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운데, 내가 아는 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700여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지만 일화를 중심으로 쓰여져 있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성경과 베다, 때로는 과학이나 철학서까지 다양하게 오가며 풀어놓는 화두들은 요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요가난다와 그의 스승, 그리고 그 스승의 스승과 대스승 바바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가르침과 깨달음, 그리고 이적들도 흥미롭지만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만나게 된 인물들과 유럽에서 만난 다른 종교의 성인들에 관해서도 흥미롭게 읽었다. 구루지 스리 유크테스와르의 입적 후 듣게 되는 영계에 관한 설명은 대다수의 관련 서적들에서 설명하는 형태와 아주 흡사하다. 

 

꼬박 이틀의 시간을 들였지만 매우 만족스럽다. 사는 동안 여러 번 읽을만한 책이다. 

 


 

- "너를 위해 모든 문이 열려 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영원히 없다." 

 

- '눈을 감았을 때, 어둠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 어머니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는 말의 힘을 해로운 일에 사용하지 말라고 꾸짖으셨다. 

 

- "만물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는 우주의 표면적 운행 원리를 우리는 자연법칙이라 부른다. 그러나 감춰진 영적 세계와 내면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더욱 미묘한 법칙이 있는데, 이런 원리는 요가를 통해 낱낱이 인식할 수 있다. 그 본질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스승들인 것이다." 

 

- 스승은 맹목적인 독서의 무용성을 자주 강조하셨다. "이해를 했다는 것과 많은 수의 어휘를 알고 있다는 것을 혼동하지 마라. 한 번에 하나의 성구가 천천히 흡수되면 성전은 내적 실현을 향한 의욕을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간에 자주 끊어지는 학습은 그릇된 만족감이나 소화되지 못한 지식으로 끝나고 만다." 

 

- 스승이 다른 사람을 치료할 때마다 영적 법칙에 따라 반드시 아파야 할 필요는 없다. 질병의 치료는 보통 성자가 지닌 여러 가지 즉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치료자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루가 제자들의 영적 진보 기간을 대단히 크게 단축시키려 하는 드문 경우에는, 자의로 자기 몸을 써서 제자들의 나쁜 업보를 많이 소진시키기도 한다. 

 

- 위대한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는 <3인의 은둔자 The Three Hemits>라는 제목의 홍미로운 민간 신화를 책으로 엮은 적이 있다.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로에리치'가 이를 요약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섬에 늙은 은둔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찌나 단순한 사람들이었던지 외우는 기도문도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우리는 셋입니다. 당신께서도 셋이십니다.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처럼 소박한 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엄청난 기적들이 눈앞에서 전개되었다. 지역 주교가 어느 날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기도문을 이들이 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 섬을 방문해서 정식으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로 결심했다. 이윽고 섬에 도착한 주교는 은둔자들을 만나서 하늘에 올리는 기도가 불경스럽다고 지적한 다음, 그들에게 여러 가지 정형화된 기도를 가르쳐주었다. 그러고 나서 주교는 섬을 떠났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던 중에 보니 무언가 찬란한 빛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발광체가 가까이 접근하자 주교는 그 속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배를 따라잡으려고 파도 위를 달려오는 세 은둔자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주교에게 다가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주교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리려고 이렇게 서둘러 왔습니다."

외경심에 사로잡힌 주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부디, 여러분이 하던 예전의 기도를 계속해 주십시오."] 

 

- 창조의 본질이 빛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빛의 현상에 관한 자신의 신성한 지식을 이용하여, 도처에 존재하는 빛의 원자들을 순식간에 지각이 가능한 형상 속으로 투사할 수 있다. 그러한 투사가 취하는 실제적인 형태는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약품이 될 수도 있으며, 인간의 육체가 될 수도 있다. 실제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요기의 희망과 의지력, 구상화의 강도뿐이다. 

 

- "빛과 그림자 둘 다 창조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진은 불가능하다. 마야의 선과 악은 절대적으로 번갈아 나타난다. 만일 이 지상에 기쁨만이 끝없이 계속된다면, 인간이 기쁨 말고 다른 것을 희구하려 하겠는가?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이 영원한 집을 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이야말로 그 기억을 일깨워주는 바늘이다. 탈출구는 지혜를 통하는 길 뿐이다. 죽음의 비극도 실제가 아니다. 죽음에 직면하여 몸서리치는 자는, 마치 무대 위에서 공포탄을 맞고 놀라 죽어 넘어지는 배우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의 자녀들은 빛의 후예이다. 그들은 절대 미망 속에서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 

 

- "고대의 계시를 단지 읽는 데만 그치지 말고 온 마음을 다 바쳐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자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너희의 모든 문제는 명상을 통해서 해결해라. 쓸데없는 종교적 사색 대신 실제로 신과 만나도록 해라. 모든 독단적인 신학 나부랭이를 깨끗이 청소해버려라. 직접 지각이라는 신선한 치유의 물줄기가 마음속에 흐르게 해라. 내면의 '안내자'가 들려주는 능동적인 목소리를 따라라. 신성한 목소리에는 삶의 모든 질곡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스스로를 고통에 빠뜨리고 마는 인간의 얕은 꾀가 비록 끝이 없어 보일지라도, 무한자의 구원 또한 그만큼 무궁무진하다."   

- 변화되고 정화된 수행자들의 삶 자체야말로 바로 크리야의 영원한 생명력을 보증하는 증거였다. 

 

- 인도의 여러 위대한 스승들은 티르탄카라(고해를 건널 수 있도록 여울목을 만드는 사람-옮긴이)라고 불렸다. 혼란스러운 인간들에게 비바람 몰아치는 삼사라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삼사라는 인간에게 윤회에 대해 되도록 저항하지 말라고 유혹한다. 

 

- 죽음은 존재가 말살되거나 생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의 탈피가 아니다. 또한 불멸로 들어가는 문도 아니다. 세속의 즐거움에 빠져 자신의 '참된 자아'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부드러운 매력을 지닌 영계에서 그 '참된 자아'를 되찾을 수 없다. 거기에서 그는 단지 미와 선(이 둘은 하나다!)을 좀 더 분명하게 자각하고, 미와 선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키울 뿐이다. 악전고투하는 인간이 영적 정체성이라는 불멸의 황금을 만들어야 하는 곳은 조악한 지상이라는 모루(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옮긴이) 위이다. 탐욕스러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보상으로 힘들게 얻은 황금 보물을 손에 든 인간은 마침내 육체의 윤회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 "육신은 떠나지만 나의 활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내 영혼도 계속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육신이 떠난 다음에도 나는 신의 메시지를 가지고 세계의 구원을 위해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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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뿐만이 아니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마하트마 간디, 동방의 등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사랑의 염파가 식물 생장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미국의 원예학자 루터 버뱅크, 특정한 날마다 몸에 성혼을 나타내는 가톨릭 성녀 테레제 노이만 등 동서양을 망라한 저명한 영적 대가들과의 만남도 가감 없이 서술되어 있다(우리는 히말라야의 궁전이나 스승의 부활 같은 '기적적 사건'을 읽을 때도 항상 이 책이 자서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일상의 보통 사건들과 기적이라 불리는 비범한 사건들 모두의 배후에 존재하는 미묘하면서도 명확한 법칙을 명쾌하게 설명하여, 자칫 신화처럼 읽힐 수도 있는 이야기를 우리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자상하게 배려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일반 자서전의 차원을 넘어 우리를 영적 깨달음과 우주 의식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덫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책입니다. ... 죽음은 여전히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지요.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바로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삶을 대신하여 변화를 만듭니다. 죽음은 낡은 것을 깨끗이 쓸어버려 새로운 것이 들어서게 길을 터줍니다." -스티브 잡스

 

- "평정심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익을 얻었다고 기뻐하지도 않고, 또한 손해를 보았다고 슬퍼하지도 않는 법이다. 인간이란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 소리의 무한한 힘은 모든 원자 에너지의 배후에 숨어 있는 우주의 진동력인 '창조의 말', '옴 Aum'으로부터 생겨난다. 어떤 말이라도 뚜렷하게 인식하고 깊은 집중 상태에서 발화할 때는 그 말의 내용을 실재화하는 힘을 지닌다. 소리를 내서 말하거나 속으로 하거나 환자에게 어떤 고무적인 말을 반복하는 것은 심리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비결은 마음의 진동수를 높이는 데 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회상록>에서 의식의 경계를 넘어 초월 의식으로 들어가는 반복 암송 장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혼자 있을 때 일종의 깨어 있는 '무아지경'을 경험한 적이 많다. 정말 이 경지를 표현할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 경지는 내 이름을 조용히 반복해서 부를 때마다 찾아왔는데, 내 이름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말하자면 나라는 개체를 아는 강렬한 의식에서 개체라는 특성 자체가 산산이 흩어져서 경계가 없는 존재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고 이 경험이 어떤 혼란스러운 의식 상태인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 선명한 의식 상태이되, 다만 표현할 말이 따로 없을 뿐이다. 이런 경지에 들어서면 죽음조차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체성의 상실은 소멸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참모습일 뿐이다. 이 경험은 결코 흐릿하고 모호한 황홀경이 아니라 마음의 절대 고요와 연관된 초월적 신비의 상태이다." 

 

- 칼리는 영원한 성모의 모습을 지닌 신의 한 상징이다. 

 

- 그 부적은 영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구조적 특성상 점차 사라지는 이러한 물건들은 결국에는 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있다(제43장 참고). 그 부적에는 만트라(신성한 찬양의 말)가 새겨져 있었다. 소리나 인간의 목소리인 바크의 잠재력이 가장 깊이 있게 연구된 곳이 바로 인도이다. 전 우주에 울려 퍼지고 있는 옴의 진동(성경의 경우에는'말씀' 또는 '바다의 소리')은 세 가지 표현, 즉 구나 guna를 지닌다. 창조, 보존, 파괴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 Taittiriya Upanishad> 1:8).

 

- 인간은 말을 할 때마다 옴의 세 가지 성질 중 어느 하나를 작용시킨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경전의 계율, 곧 '인간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항목의 배후에 깃든 섭리이다. 

 

- "왜 이런 일 따위에 놀라는가? 참된 요기들에게는 현상계의 미묘한 통일성이 가려져 있지 않다네. 나는 즉석에서 멀리 캘커타에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지. 제자들 역시 거친 물질의 모든 장벽을 의지대로 초월할 수 있다네." 

 

- 당연한 귀결로, 물질을 다루는 자연과학은 요기들이 정신과학을 통해 발견한 법칙의 타당성을 확인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1934년 11월 26일, 왕립 로마대학교에서는 인간에게 투시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이 있었다. 신경심리학 교수인 주세페 칼리가리스 박사가 피실험자 신체의 어느 부위들을 압박했더니, 피실험자가 벽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사물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하는 반응을 보였다. 칼리가리스 박사는 참석한 교수들에게, 피부의 어떤 부위들이 자극을 받는 경우, 피실험자는 자극이 없었으면 절대 인식하지 못했을 대상을 볼 수 있는 초감각적 인상들을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칼리가리스 박사는 피실험자가 벽 건너편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흉곽 오른쪽 부위의 어느 한 지점을 15분간 압박했다. 칼리가리스 박사는 신체의 특정 지점들이 자극받으면 피실험자들은 전에 보았던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상당히 멀리 떨어진 대상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8년 동안 밤의 절반을 명상하면서 인내했지. 마침내 갖가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네. 엄청난 영적 지각이 내면을 밝게 비추었지. 그러나 나와 무한 사이에는 항상 어떤 장막이 남아 있었어. 초인적인 정성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합일의 경지는 매번 나를 외면했지. 어느 날 저녁, 나는 라히리 마하사야를 찾아뵙고 그분의 신성한 중재를 간청했네. 나의 끈질긴 간청은 계속 되었지."

 

-"신을 향한 사랑이 겨우 이 정도였니? 친구의 배신이라는 아주 작은 시험도 이겨낼 수 없을 만큼 허약한 그런 것이었어?"

'신의 시험'이라는 아마르의 말을 듣고 나자 마음이 다시 진정되었다. 우리는 부르드완의 명물 시타브호그(여신을 위한 음식)와 모티추르(조개로 만든 달콤한 음식)를 먹고 기분 전환을 했다. 

(리뷰자 주 : motichoor는 조개로 만든 것은 아닌 듯 하고, besan과 기버터 등을 첨가한 시럽을 끼얹어 먹는 튀김 요리이다.)

 

- "말이란 껍데기일 뿐이다. 스스로 명상하는 중에 이루어지는 기쁜 만남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확신하도록 해라."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구루는 해결책으로 크리야 요가를 권하였다.

"내가 더 이상 너희를 인도하는 육신 속에 존재하지 않을 때, 요가의 열쇠는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이 기술은 이론적인 영감으로 취급되어 책으로 묶이거나 서류로 보관되어 망각될 수 없다. 그것의 진짜 힘은 수행에 있다. 크리야를 통해서, 끊임없이 너희들이 추구하는 자유를 향한 길로 정진해 나아가라."

크리야는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계발된 기법으로서 자기 노력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라고 나 또한 생각한다. 
 

- "자연의 신비를 해결하는 자는 거의 없지! 선과 악은 삶이 모든 지성 앞에 던져놓은, 풀어볼 만한 스핑크스 같은 수수께끼라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도해보지만 아무 해답도 못 찾고 테베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자신의 삶 자체를 벌금으로 지불하고 있는 셈이지. 때때로 우뚝 솟은 뛰어난 인물만이 외로이 그 비밀을 알아내서 패배의 비애를 초월한다네. 그런 인물은 이원성의 마야 maya에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합일의 진리를 추출해내지." 

 

- 인간이 반응하는 서로 다른 감각적 자극, 즉 촉각, 시각, 청각, 미각, 후각 등의 오감은 전자와 양자의 진동수 차이로 생성된다. 이 진동은 다시 '생명자'(프라나)에 의해 통제되는데, 생명자는 지성의 영역에서 말하면, 다섯 가지 상이한 감각적 관념-질료로 충전된 미묘한 생명력으로서 원자보다 더 섬세한 에너지이다. 간다 바바는 요가의 한 기법으로 자기 자신을 프라나의 힘에 공명 시킴으로써 생명자들이 진동 구조를 재배열하도록 유도해서 원하는 결과를 실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만든 향기나 과일, 그 밖의 기적 들은 평범한 진동에 의해 생성된 실제 물질로, 최면 기법으로 생성된 내면의 감각이 절대 아니었다. 

  

- "호랑이 길들이기는 이제 충분하겠지. 나를 따라오너라. 인간의 마음 속 정글에서 울부짖는 무지라는 야수를 정복하는 법을 네게 가르쳐주리라. 너는 지금 그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네 마음을 천사들로 가득 차게 하려면 요가 수행을 통한 감동을 경험해야만 한다!" 

 

- 샤스트라 shastra는 '신성한 책'이라는 말인데, <슈루티 Shruti>, <슴리티 Smriti>, <푸라나 Purana>, <탄트라 Tantra> 등 4개의 경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광범위한 책에는 종교와 사회생활, 법학, 의학, 건축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 중에서 <슈루티>는 '직접 들은' 혹은 '계시된' 경전으로 베다를 뜻한다. <슴리티>는 '기억된' 지식으로 까마득한 옛날의 역사상 최초의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를 말한다. <푸라나>는 18편의 고대 우화를 말하고, <탄트라>는 '의식'이란 뜻으로 상징적으로 쓰인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문집이다. 

 

- "크리야는 당신의 '친타마니'입니다." 나는 새로운 학생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이 기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정신의 진화 속도를 단축하는 힘이 있어요. 힌두교 경전에 보면 인간의 에고가 마야로부터 벗어나는데 백만 년이 걸린다고 씌어 있는데, 그 자연적 기간을 크리야 요가로 크게 단축할 수 있어요. 자가디스 찬드라 보세가 증명한 대로 나무의 성장을 정상 속도보다 훨씬 가속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 발달도 내면의 과학을 통해 더 빠르게 할 수 있지요. 충실하게 실천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구루 중의 구루를 만나게 될 거예요." 

 

- 친타마니 : 소원을 성취시키는 힘을 가진 신비로운 보석이자 신의 한 이름이기도 하다. 

 

- "알겠다. 유크테스와르, 하지만 널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네 자신이다. 지금 너는 스스로 야위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  "이제, 너는 잠재의식이 시키는 대로 건강이 따라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전기나 중력과도 같은 일종의 힘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전지전능하신 신의 불꽃이다. 나는 무엇이든지 정신을 집중하여 간절히 믿는다면, 그것이 곧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 <마가복음> 11:24 

 

- "이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 책무를 다한 사람들은 다른 세상을 꾸미게 된다. 지상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는 한, 너는 세상 사람들에게 감사의 봉사를 행할 의무가 있다. 무호흡(사마디) 상태를 완벽하게 실현한 사람만이 우주적 책무에서 풀려난다. 네가 최후의 완벽한 경지를 성취했을 때 그 사실을 반드시 나에게 알리도록 해라." 

 

- 스승이 이런 거대한 변화 작업을 위해 애쓰시는 동안, 나는 훈련용 쇠망치의 무게에 눌려 여러 번 흔들렸다. 스승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이 싫거든 언제라도 떠나라. 네가 진보하는 것 말고 너한테 바라는 것은 없다. 이롭다고 느낄 때만 머무르도록 해라." 그렇게 여지없이 내 자만심을 질책하신 데 대해 나는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말하자면 스승은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내 입안의 병든 치아를 발견하여 뿌리를 뽑아내고 계셨던 것이다. 자만의 응어리는 그렇게 거칠게 다루지 않으면 제거하기 어렵다. 자만의 응어리가 풀리면서 신은 드디어 방해받지 않는 통로를 찾게 된다. 신의 이런 노력도 인간의 완고한 이기심으로 빨려 든다면 그만 헛수고가 되고 만다. 스리 유크테스와르의 직관은 날카로웠다. 누군가 별 생각이 없이 말을 하더라도 항상 말한 사람의 감춰진 생각에 대해 답하시곤 했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생각은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고요하게 하고 사람들의 혼잡한 말 뒤에 숨겨진 생각을 감지하도록 해라." 

 

- 대부분 학생들이 왔다가는 그냥 가버렸다. 번지르르한 말로 지지해주고 쉽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스승의 아슈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영겁의 세계로 이끄셨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자기 위안만을 바라는 욕심을 부렸다. 그런 학생들은 떠나갔다. 겸손보다는 숱한 굴욕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스승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꿰뚫는 지혜의 햇살은 그들이 지닌 영혼의 병을 치유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했다. 

 

- 경전의 금지 조항은 스와미들로 하여금 편협한 자기본위의 마음을 극복하는데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샹카라와 스리 유크테스와르는 자신의 존재를 인격을 초월한 영혼 속에 통합시켰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규율에 의한 어떠한 구원도 필요치 않았다. 도인은 가끔씩 의도적으로 경전의 규율을 무시하는데, 그것은 그 규율의 원리가 형식보다 앞서고 어떤 형식에도 얽매여 있지 않다는 근본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예수는 안식일에 곡물의 이삭을 주우셨던 것이다. 예수는 피할 수 없는 비판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결코 안식일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수백 명이 서로 다르게 대답하지. 경전의 풍요로움을 외부에 과시하는 데만 골몰한다면, 귀중한 진주를 찾는 데 필요한 내면의 침묵 시간이 과연 얼마나 남겠는가?" 스리 유크테스와르는 당신 제자들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강한 집중력을 강조하셨다. "지혜는 눈과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원자와 동화된다. 하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머리에만 들어 있지 않고 존재 자체에 있을 때, 너희들은 조심스럽게 그것의 의미를 단언할 수 있다."   

 

- 스승은 제자가 명상 수행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강화시켜 아무리 강렬한 의식도 제대로 감당할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제자에게 우주 의식의 신성한 체험을 전해준다. 단순히 지적인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직 요가 수행과 헌신적인 바크티 수행으로 의식을 올바르게 확장해나갈 때,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이 주는 해방의 충격을 소화할 수 있다. 신성한 체험은 진지한 구도자에게 반드시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당사자의 강렬한 열망이 저지할 수 없는 힘으로 스스로를 신에게 끌고 가는 것이다. 신은 구도자의 열성에 따라 그의 의식 영역 안으로,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들어가 우주의 영상을 펼친다. 

 

- 힌돌레 라가는 우주적 사랑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봄의 여명기에만 듣는다. 데파카 라가는 자비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여름날 저녁에만 연주된다. 메그하 라가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기의 낮 동안에 연주되는 선율이다. 브하이라바 라가는 평정을 얻기 위해 8월, 9월, 10월 아침에 연주된다. 스리 라가는 순수한 사랑을 얻기 위해 가을 황혼기에 연주된다. 말코운사 라가는 용맹을 위해 겨울철 한밤중에 연주된다. 

 

- 인도 음악은 옥타브를 22스루티(반의 반음)로 분할한다. 이처럼 짧은 음의 간격은 12음을 가진 서양의 반음계가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섬세한 음악 표현을 가능하게 해 준다. 한 옥타브의 기본 7음은 힌두 신화에서 색채 또는 새나 짐승의 자연스러운 울음소리와 관련이 있다. 도 소리는 초록색과 공작에 상응하고, 레 소리는 붉은색과 종달새에, 미 소리는 황금색과 양에, 파 소리는 연노랑색과 왜가리에, 솔 소리는 검은색과 나이팅게일 새에, 라 소리는 노란색과 말에, 시 소리는 모든 색채의 배합과 코끼리에 각각 상응한다. 

 

- "무쿤다, 너는 왜 점성술이 권하는 팔찌를 끼지 않느냐?"

"스승님, 그걸 꼭 끼어야 합니까? 저는 점성술을 안 믿습니다."

"그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과학적 태도는 '믿음'보다는 '옳고 그름'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턴이 발견하기 이전에나 이후에나 똑같이 존재한다. 우주의 법칙들이 인간의 믿음에 따라 좌우된다면 우주는 그야말로 무질서한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고대 점성학이 현재처럼 악평을 받고 있는 것은 사이비 학자들 때문이다. 점성학이란 수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워낙 방대한 체계여서 심오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무식한 사람들이 천체를 잘못 읽고 엉뚱하게 해석한다 해도 그것은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현자들'과 함께 점성술의 지혜도 내쳐서는 안 된다." 

 

- 점성학을 잘 모르고 미신적으로 두려움을 갖게 되면, 그런 사람은 별들이 기계적으로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비굴한 노예가 된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별들, 다시 말하면 전생을 극복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충성의 대상을 피조물에서 창조주로 옮김으로써 가능하다. 사람은 신과의 일체감을 깨달을수록 사물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영혼은 언제나 자유롭다. 영혼은 태어나지 않으므로 죽음도 모른다. 영혼은 결코 별들에게 지배받지 않는다. 

 

- "여행하는 사람이 지도를 버려도 괜찮은 때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이다. 여행 중에는 편한 지름길이 있다면 어떤 길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옛 스승들은 인간이 미망 속에서 헤매는 기간을 단축시키는 많은 방법을 발견해냈다. 업의 법칙에는 지혜의 힘으로 교묘히 조정할 수 있는 모종의 역학적 특징들이 있는 것이다." 

 

- "옛날 인도의 리쉬들은 그처럼 미묘한 우주적 영향력의 역효과를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리쉬들은 금속과 금속의 결합인합금뿐만 아니라 식물과 식물의 결합도 유익하다고 밝혀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2캐럿 이상의 흠집 없는 보석이다. 이와 같은 점성학의 실용적 활용에 대해 인도 밖에서는 별로 진지한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는 그러한 보석이나 금속, 기타 성분의 결합체는 필요한 무게가 확보되지 않거나 그 물건들이 피부에 밀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위대한 스승들은 자신의 힘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므로 그날 일어난 사건들도 무심코 관찰한다면 모두가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스승의 힘이 개입되었음에도 너무나 미묘하여 전혀 몰랐다. 그분은 암암리에 베하리와 숙부와 라젠드라와 다른 친구들을 통해 당신의 의지를 작용시키신 것이다. 아마도 나 말고는 모두가 그 상황을 합리적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 우리는 빨간 자수가 수 놓인 덮개로 그늘막을 친 작은 배(시카라)도 여러 번 탔고, 달 호수 Dal Lake의 복잡한 수로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 수로는 마치 물 위에 뜬 거미줄로 짠 그물망처럼 보였다. 통나무와 흙으로 대충 얽어 만든 채마밭들이 물길에 많이 떠다녔다. 광대한 호수 한가운데를 떠다니는 채마밭에서 자라는 채소들과 멜론을 처음 본 순간 그 독특한 광경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땅에 '뿌리 내리기'를 거부하는 농부가 자신의 사각형 '경작지'를 끌고 갈래갈래 이어진 호수의 새로운 장소로 옮겨 다니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 지상에서 맡은 구루의 임무는 영적 수단이나 지적 충고, 혹은 의지력, 질병의 육체적 전이를 통해서 인류의 비애를 경감시키는 데 있다. 깨달은 이는 원하면 언제든지 초월 의식에 몰입함으로써 육체의 질병을 망각할 수 있다. 때때로 제자들에게 시범을 보이기 위해 육체의 고통을 태연히 참기도 한다. 요기는 다른 사람의 질병을 짊어짐으로써 그들의 인과응보의 법칙도 충족시킬 수 있다. 인과율의 법칙은 기계적으로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작용하는데, 신성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 작용을 과학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 신은 가끔 기도의 실현을 늦춤으로써 기도자의 열망을 시험하신다. 그러나 결국에는 기도자가 마음속에 그리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신다. 경건한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힌두교도는 크리슈나 혹은 칼리 여신의 모습을 본다. 특별한 믿음의 대상이 없으면 무한히 뻗어나가는 빛을 보게 된다. 

 

- 타인의 마음과 사건들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은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3장 24절에 언급되어 있는 비부티(요가의 힘)이다. 그 힘이란 '우주적 공감'의 결과라고 이 경전은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경전은 신이 자신의 완전한 모습 그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선언한다. 전 우주에 대한 통제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의 신성한 근원에 대한 올바른 기억을 얻은 모든 이는 그러한 힘을 본유적으로 타고난다. 스리 유크테스와르와 같이 신성을 실현한 사람들은 '에고 원리'(아한카라)와 개인의 욕망이라는 자아의 반발이 없다. 진정한 스승들의 행위는 리타, 즉 자연의 정의(질서)와 쉽게 일치한다. 에머슨의 말에 의하면,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덕이 높은 것이 아니라 덕 그 자체이다. 그 다음에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며, 신이 매우 기뻐하는 바가 된다. 신성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창조의 미묘한 법칙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참사람들이 굉장한 힘을 발휘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성인들은 저마다 그 나름의 방법으로 신을 나타낸다. 개성의 표현은 두 개의 모래알도 똑같지 않은 현상 세계에서는 기본적인 것이다. 신을 깨달은 성자들에게 불변의 법칙이 공식처럼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대 인도의 자나카 왕과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처럼 광대한 사업에 관여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에서 응달처럼 조용히 자신의 삶을 겸손하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가르치고 여행하고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세속적인 비평가도 성자마다 각기 다른 사본을 펼쳐 보이는 카르마의 비밀스러운 두루마리를 제대로 판독하지는 못할 것이다. 

 

- "하느님을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자는 하느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자와 같다." -러스킨 

 

- 신은 우주의 유일한 소유자로서 인간에게 생애를 거듭해가며 온갖 선물을 말없이 베푼다. 하지만 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이 단 하나 남아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다. 인간의 마음은 자율적이어서 신을 향한 사랑을 보류하기도 하고 실행하기도 한다. 

 

- "언젠가 너는 비단을 좋아하는 서양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일종의 상징으로서 전통적인 목면 대신에 이 비단 옷감을 너를 위해 선택했다." 인도에서는 승려들이 청빈을 이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비단옷을 입은 스와미는 보기 드물었다. 그러나 모종의 미묘한 육체 전류를 더 잘 보존한다는 이유로 목면보다 비단옷을 선호하는 요기들도 더러 있다. 스승이 말씀하셨다. "나는 의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드와트(의식을 따르지 않는) 식으로 너를 스와미로 만들겠다." 

 

- 후기 <우파니샤드>는 진리의 직접 인식을 수행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으로 여섯 가지 체계 중에서도 특히 <요가수트라>를 들고 있다. 요가의 실용적 기법들을 통해서 인간은 척박한 사고의 땅을 영원히 뒤로하고, 참된 본질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파탄잘리의 요가 체계는 팔성도로 알려져 있다. 

 

- 베다에 입각한 여섯 가지의 권위 있는 체계는 상크야, 요가, 베단타, 미맘사, 니야야, 바이세시카 등이다. 

 

- 크리야의 산스크리트어 어원은 크리 kri로서 '행하는' 또는 '행위하고 반응하는'이란 뜻이다. 동일한 어원은 카르마 karma에서도 발견된다. 카르마란 원인과 결과의 자연스러운 원리를 말한다. 따라서 크리야 요가란, '일정한 행동 또는 의식 kriya을 통한 무한 존재(신)와의 합일 yoga'을 뜻한다. 이 테크닉을 성실히 수행하는 요기는 점진적으로 카르마, 즉 인과응보의 평형 법칙이라는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요가의 오래된 계명 때문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집필하는 이 책에서는 크리야 요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실제적인 테크닉은 SRF(Self-Realization Fellowship)의 정통 크리야반(kriyaban, 크리야 요기)을 통해 전수받아야만 한다. 여기서는 개괄적인 언급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영적인 삶이라고 하는 우수한 방법은 요기에게 자유를 부여하며, 자기 에고라는 철창에서 벗어나 편재의 심오한 공기를 맛보게 해 준다. 반면에 일상의 삶이라는 속박은 굴욕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인간은 진화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자연으로부터 아무런 단축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아무리 마음과 육체를 지배하는 법칙에 반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건강하게' 살더라도, 궁극의 해방을 얻으려면 여전히 백만 년이라는 기나긴 가장행렬 같은 환생을 거듭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세속의 일상적인 의무를 벗어버린 사람은, 오로지 보다 큰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비드알라야는 '학교'를 의미하며, 브라흐마차랴(브라흐마차리)는 베다에 기술된 인생의 4단계 가운데 하나이다.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결혼 이전에 공부하는 학생-브라흐마차랴 (2) 세속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가장-그리 하스타 (3) 은둔 수행자-바나프라스타 (4) 세속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유행자 또는 숲 속 거주자-산야시

현대 인도에서는 이러한 구도의 일생이 널리 준수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 상당수 사람들은 이 단계를 진지하게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4단계는 평생토록 이어지는 구루의 지도를 받으며 종교적 의미를 간직한 채 이행되고 있다. 

 

- 슬픔이 사라지자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신은 당신의 자녀들이 모든 것을 당신의 한 부분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며, 또한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겨오던 친구들을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숨겨버리는,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죽음의 벽만을 본다. 그러나 집착에서 벗어나서 만물을 신의 한 표현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끼던 모든 것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신 안에서 열락을 호흡하는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 스승께서는 다시 한번 외치셨어. "사난단, 제2의 크리야 요가에 의해 나는 여기서 육체의 형틀을 버리겠다."

 

- 라히리 마하사야에 의해 전수된 제2의 크리야 요가 기법을 완전히 익힌 수행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육체를 이탈하거나, 혹은 다시 육체로 돌아올 수 있다. 상당한 정도의 진보를 성취한 요기들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제2의 크리야 요가 테크닉을 사용한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죽는 시간을 미리 알고 있다. 위대한 요기들은 영안으로 출입한다. 그것은 프라나 상태의 문으로 '구원의 문'이다. 

(리뷰자 주 : 오쇼가 말했던 깨어서 맞이하는 죽음은 이것을 말하는 듯 하다.)

 

- 신이 나에게 이성적 능력을 부여하신 이상, 나는 그것을 사용하고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카시가 영계의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묘한 법칙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못다 이룬 욕망들을 품은 채 진동하는 하나의 영혼이 되어, 아스트랄계(영계)에서 반짝이는 수백만 영혼들 사이를 떠다니는 빛 덩어리였다. 수많은 영혼의 진동하는 빛들 가운데서 어떻게 카시의 영혼과 주파수를 맞출 수 있을까. 

 

-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사후에도 영계에 약 500~1,000년 동안 남아 있게 되지만, 다시 태어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는 어떤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육체적 탄생이나 영계에서의 탄생에 걸리는 기간은 각자의 업에 따라서 미리 결정된다. 죽음과 '작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잠,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양자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으로 하여금 감각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혼이기 때문에 수면과 죽음 속에서 자신의 원상태(신체가 없는 영혼)를 일깨워주는 어떤 환원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힌두교 경전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업의 평형 법칙'은 작용과 반작용, 원인과 결과, 파종과 수확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극히 자연적이고 정의로운 과정을 통해서, 인간 각자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 스스로의 운명을 주조해나가는 것이다. 현명하든 어리석든 인간은 스스로 우주의 에너지들을 발동시키며, 발동된 모든 에너지는 자기에게 돌아와서 다시 출발점에 정착한다. 동그란 원주를 달리는 한 점처럼 그것은 조금의 예외도 없다. "이 세상은 마치 수학 방정식처럼 생겼다. 제아무리 뒤집어도 균형을 잃지 않는, 그리하여 모든 비밀은 남김없이 드러나고 모든 범죄는 반드시 처단된다. 모든 선은 보답을 받고 모든 잘못은 시정된다. 조용한 가운데, 그러나 분명히." -에머슨, <보상 Compensation> 개인들의 삶에 나타나는 갖가지 불공평한 모습의 기저를 이루는 정의의 법칙으로 업을 이해한다면, 인류의 마음은 신과 인간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타고르는 란치의 모든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요가의 집중 기법과 에너지 충전 '요고다' 수련에 관한 나의 설명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 이 세상의 환영인 '마야'가 개인에게 나타날 때는 '아비다(문자 그대로는 '지식이 아님', '무지', '미망이라는 뜻)로 불린다. 마야 혹은 아비다는 결코 지적인 확신이나 분석으로 깨뜨릴 수 없으며, 오로지 '니르비칼파 사마디'라고 하는 내면의 특정 경지에 도달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시대, 모든 땅의 선지자들은 그러한 의식 상태에서 초월적 언어를 끄집어냈다. 에스겔(기원전 6세기경 유대의 예언자-옮긴이)은 말했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으로 향한 문이라. 그리고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니, 그 음성은 많은 물줄기들의 소리와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빛이 가득하도다."
이마(동쪽)에 있는 신성한 눈을 통해 요기는 자신의 의식을 편재 속으로 항해시키면서, 창조의 유일한 실체인 '많은 물줄기들' 혹은 '진동들'의 신성한 소리인 '말씀' 또는 '옴'을 듣는다. 

 

- 우주적 마야의 환영에서 깨어나 이 세상이 오직 신의 마음속에 내재된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위대한 성자들은, 육체가 응축 혹은 동결 상태의 에너지이므로 조작이 가능하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에 자신의 육신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물리학자들도 물질이 단지 응결된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만, 완전하게 깨달은 위대한 스승들은 물질 통제에 관한 한 이미 이론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 "피조물을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뱃속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 석회가 나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하는 필멸의 존재는 그 누구도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없다. 인간이 창조주에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존경은 그분을 찾는 것뿐이다. 인간은 결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추상체의 영광을 찬양할 수 없다. 성자들의 머리 주위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원광이야말로 신을 경배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상징적인 증거이다." 

 

- "스승님의 구루께서는 왜 피마자기름을 사용하셨나요?"

"애야, 기름을 주셨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가 없단다. 다만 내가 어떤 물질적인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라히리 마하사야님은 그냥 가까이에 있던 기름을 집어들고 보다 깊은 내 신념을 일깨워주기 위한 상징적 물질로 활용하셨을 따름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스승께서는 라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신성한 구루께서는 제자가 괜찮을 거라고 일단 말씀하신 이상 어떻게 해서든지 치유의 효력이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최후의 질병인 죽음 앞에서도 라마를 치유하셨던 것이다." 

 

- 라히리 마하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진정한 존경심을 갖고 바바지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수행자는 언제든지 즉각 영적인 축복을 이끌어낼 수 있다." 죽음을 모르는 이 구루의 육신에는 나이를 짐작할 만한 아무런 흔적도 없다. 그는 스물다섯 안팎의 젊은 청년처럼 보인다. 하얀 피부에 중간 정도의 키와 체격을 가진 그의 아름답고 건강한 육신에서는 분명히 눈에 보이는 빛이 발산된다. 눈은 검고 그윽하며 부드럽다. 또한 길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구릿빛을 띤다. 신기한 일은 그의 얼굴이 제자인 라히리 마하사야의 얼굴과 꼭 닮아 보일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 유사성이란 실로 놀랄 만한 것이어서, 누군가 만년의 라히리 마하사야를 겉보기에 청년처럼 보이는 바바지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 그러자 함께 있던 라히리 마하사야가 항의했어. "스승님, 그건 너무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과거의 업에 따라 네 눈앞에서 한 줌의 재로 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바바지께서는 자신의 손을 그 제자의 보기 흉한 어깨에 올려놓으셨어. "내가 오늘 밤 고통스러운 죽음으로부터 너를 해방시켰다. 네 업의 법칙은 이제 가벼운 화상을 통해 완전히 충족되었다." 

 

- "만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 산에서 이대로 뛰어내리겠습니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스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제 삶은 더 이상 무의미합니다." 바바지께서는 무표정하게 말씀하셨지. "그렇다면 뛰어내려라. 지금 너의 진보 상태로는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자 그는 곧 낭떠러지로 몸을 날렸어. 바바지께서는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그 사나이의 시체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셨어. 제자들이 참혹하게 망가진 그의 시체를 안고 돌아오자 구루께서 자신의 손을 그의 몸에 올려놓으셨지.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가 눈을 뜨고, 전능하신 구루 앞에 겸손히 엎드렸다네. 바바지께서는 부활한 제자를 향해 애정 어린 미소를 보내셨어. 

 

- "나는 이 산야시(고행자)의 발을 씻어주고 있다. 다 씻고 나면 밥그릇도 깨끗하게 씻어줄 생각이다." 바바지께서는 꼭 어린아이처럼 웃으셨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구루께서는 내가 아무도 비난하지 않기를, 우수하건 열등하건 모든 사람이 육체의 사원에서 신을 찾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위대하신 구루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셨다. "현명한 사두와 무지한 사두 모두를 섬기면서, 나는 신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을 배우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라는 이름의 미덕이다." 

 

- 이처럼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통해 라히리 마하사야는 다음과 같은 가장 보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자신의 생업과 사회적 의무를 모두 수행하고 나서도 과연 경건한 명상을 위한 시간이 날까?" 가정을 가진 이 위대한 구루의 균형 잡힌 삶은 수천 명의 남녀에게 말 없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최소한의 봉급으로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 데다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겸손한 성품 덕분에 라히리 마하사야는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속세의 삶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 약초에 관한 지식은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히말라야의 약초는 회춘 처방에 사용되어, 1938년 세계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당시 이 약초 요법을 처방받은 사람은 바라나시 힌두 대학 부총장이던 77세의 마단 모한 말라비야 박사였다. 이 저명한 학자는 놀랍게도 45일 만에 건강과 근력, 기억력, 정상 시력을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 치열이 나오는가 하면 주름살이 모조리 사라지기도 했다. '카야 칼파'로 알려진 약초 요법은 힌두교의 의학서인 「아유르베다Ayurveda 」에 나오는 80가지 회춘 처방 가운데 하나이다. 말라비야 박사는 자칭 1766년생이라고 주장하는 스리 칼파차랴 스와미베순다스지의 손으로 시술을 받았다. 이 스와미는 자신이 백 살이 넘었음을 입증하는 기록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연합통신》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40세처럼 보였다고 한다. 고대 인도의 의학서는 의술을 다음과 같은 8개 분야, 즉 살아(수술), 살라캬(목 위의 질병), 카야치키트사(적절한 의약), 브훈타비댜(정신 질환), 카우마나(유아 돌보기), 아가다(독성학), 라사야나(수명), 바기카라나(강장) 등으로 분류했다. 베다 시대의 의사들은 정교한 구술 기구를 사용하고, 성형수술을 시행했으며, 독가스의 영향력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제왕절개 수술과 뇌수술을 실행했으며 각종 의약품의 활성화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유명한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신에 시서 「의학 원료 Materia Medica」의 많은 부분을 인도의 전통 의학서에서 차용했다.

 

- 스와미 사타난다는 바라나시에 갈 수 없었던 한 수행자에게서 자신이 꿈속에서 크리야 요가에 입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승 라히리 마하사야가 그의 기도에 응답해서 가르침을 베풀었던 것이다. 

 

- "다수의 잘못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면 안 된다. 지상의 모든 것은 마치 모래와 설탕이 섞이듯이 서로 혼합된 속성을 갖는다. 설탕만을 붙잡고 모래 알갱이는 건드리지 않는 현명한 개미가 되어라. 비록 많은 사두들이 미망 속을 방황한다 할지라도, 축제는 신과의 합일에 도달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축복받고 있다."

 

- 바바지께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우리가 만나게 된다고만 말했지 얼마 동안 머물러 있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너는 그때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 그래서 너의 불안한 격정 때문에 내가 에테르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 카비르는 16세기의 위대한 성자이다. 그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는 힌두교도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도 있었다. 카비르가 죽었을 때, 제자들이 장례 절차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스승은 마지막 명상 중에 깨어나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내 시체의 반은 이슬람교 의식에 따라 매장하고, 나머지 반은 힌두교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이 말을 마치고 다시 사라져 버렸다.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덮고 있던 수의를 들춰봤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황금빛 목련 꽃다발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꽃들의 반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마가르에 충실히 매장되었는데, 이슬람교도들은 오늘날까지 그의 사당을 숭배하고 있다. 나머지 반은 힌두교 의식에 따라 바라나시에서 화장되었다. 그 자리에는 카비르 체우라라는 사원이 세워져서 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카비르는 젊었을 때 신비의 길에 이르는 지적인 방법을 자세하게 안내해달라는 두 제자의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님을 찾는 길은 멀게도 보여라. 그러나 님께서 가까이에 계시다면 어떤 길도 필요치 않으리, 그러니 참으로 우습구나, 물속에서 목말라하는 물고기들 꼴이라니!" 

 

- 필사적으로 생각을 영어로 정리하려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모든 노력을 포기했다. 생각의 조각들이, 마치 미심쩍게 안장을 쳐다보는 야생마처럼 그 어떠한 영어문법과의 타협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승이 일전에 해주셨던 보장을 믿고 홀에 모인 청중들 앞에 나섰다. 

 

- "이 책은 내가 쓴 <인간 식물의 훈련 The Training of the Human Plant> 입니다. 새로운 유형의 훈련(공포를 모르는 실험)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따금 가장 모험적인 시도가 최상의 꽃과 열매를 맺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므로 어린이를 위한 교육의 혁신적 조치들도 좀 더 늘어나고 과감해져야 할 것입니다.” 

 

- 그녀의 생애를 다룬 책들은 다음과 같다. 프리드리히 리터 폰 라마의 <테레제 노이만:우리 시대의 성흔 기적자 Therese Neumann: A Stigmatist of Our Day>와 <테레제 노이만의 속 연대기 Further Chronicles of Therese Neumann>, A. P. 쉼베르크의 <테레제 노이만 이야기 The Story of Therese Neumann>, 요하네스 슈타이너의 <테레제 노이만 Therese Neumann>. 

 

- "당신은 에너지가 에테르와 태양과 대기로부터 당신의 품속으로 흘러든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 강하면서도 우아한 손에 내 시선이 닿자, 그녀는 새로 아문 두 손등의 네모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또한 손바닥에 난 초승달 모양의 조금 작은 상처도 가리켰다. 상처는 각각 손을 관통한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그 모양에서, 서양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동양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는 끝이 초승달 모양인 커다란 사각형 쇠못을 떠올렸다. 성녀는 매주 일어나는 자신의 환시에 대해 약간 말해주었다. 

 

- 인간의 정신은 그것이 인지하는 현상 세계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유동적이어서 어떤 궁극에 도달할 수 없다. 지적 만족이 최고의 목표일 수는 없다. 신을 찾는 자는 변함없는 진리인 비다 vidya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상대적 지역인 아비다 avidya에 불과하다. 

 

- 그의 즐거우면서도 진지한 대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말에 확신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를 잘 알고 있는 현자의 특징인데, 그것은 그가 신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위대한 지혜와 강한 의지력, 결단력 등이 모든 면에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 마이소르 인근 지역에 물을 대기 위해서 1930년에 건설된 관개용 댐이다. 거대한 수력발전 설비가 있는 이 댐은 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로 마이소르 시를 환히 밝히고, 비단과 비누, 백단향 기름 등을 생산하는 공장에 전력을 공급한다. 마이소르 특산품인 백단향 기념품에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상쾌한 향기가 담겨 있다. 보일락 말락 한 구멍 하나만 내줘도 향기가 다시 살아난다. 

 

- <동서> 1935년 1월호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네 계급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것은 원래 출생에 달려 있지 않고, 사람이 성취하려고 설정해놓은 삶의 목표를 통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카마(욕망: 감각적인 활동으로 수드라의 단계) (2) 아르타(성취: 감각을 만족시키지만 통제할 수 있는 바이샤의 단계) (3) 다르마(자기 수양: 책임과 올바른 행위로 이루어진 삶으로 크샤트리아의 단계) (4) 모크샤(해탈: 영성과 종교적 가르침의 삶을 사는 브라만의 단계)

이들 네 계층은 육체, 정신, 의지력, 대영혼으로 인류에 봉사한다. 네 단계는 항구적인 구나 guna(품성)를 기준으로 할 때 타마스와 라자스와 사트바에 상응하는데, 이들은 각각 장애, 활동, 확장 혹은 질량이나 에너지, 지성에 해당한다.

 

- 이렇게 해서 자연은 하나의 구나 또는 두 구나의 결합체가 두드러지게 발현되는 정도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카스트를 다음과 같이 지정해주었다.

(1) 타마스(무지) (2) 타마스-라자스(무지와 활동의 결합) (3) 라자스-사트바(올바른 활동과 개 달음의 결합) (4) 사트바(깨달음)

물론 모든 인간은 세 가지 구나를 제각기 다른 비율로 갖는다. 구루는 한 사람의 카스트 혹은 진화 상태를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다. 

 

- 저 광대한 창공 아래 
가죽옷을 입은 신이 산다. 

(리뷰자 주 : 인간을 이름이다.)

 

- 한 번은 붓다가 '왜 사람은 모두를 똑같이 사랑해야 하느냐?' 는 질문을 받았다. 이 위대한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윤회를 거듭하면서 지나온 여러 번의 생에서 모두들 언젠가 한 번은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 스승은 계속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그곳은 히라날로카, 즉 '깨달은 영계'라고 부른다. 나는 거기서 진보된 존재들이 영적인 업을 소멸시켜 영계의 윤회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히라날로카에 거주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고도의 진보를 이룩했다. 그들은 모두 지상에 나온 마지막 환생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의식적으로 물리적 육신을 떠날 수 있는 힘을 명상수행으로 획득했다. 지상에서 사비칼파 사마디의 단계를 넘어 니르비칼파 사마디에 든 상태에서 임종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히라냘로카에 들어갈 수 없다." 

 

- "육체적 욕구는 자기 중심성과 감각적 쾌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각적 경험의 충동이나 유혹은 영적 애착이나 근원적 지각과 관련된 욕구보다 훨씬 강하다. 영적 욕구는 진동에 의한 환희에 중점을 둔다. 영적 존재들은 영계의 곳곳에서 연주되는 천상의 음악을 즐기면서, 변화하는 빛이 여러 가지로 만들어 내는 창조의 끝없는 양상을 보고 황홀경에 빠진다. 또 영적 존재들은 빛의 냄새를 맡고 빛의 맛을 보고 빛을 만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욕구는 모든 대상과 경험을 빛의 형태 혹은 응축된 생각이나 꿈으로 응결시키는 영적 존재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근원계의 욕구는 지각에 의해서만 성취된다. 오직 근원체로 둘러싸여 있으며 거의 완전히 자유로운 근원적 존재들은 우주 전체를 신의 생각과 꿈이 실현된 것으로 본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 전부 순수한 생각으로 물질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근원계의 존재들은 물리적 감각이나 영적 즐거움이 주는 기쁨을 영혼의 미세한 감수성을 거칠게 질식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 "영혼이 무지와 욕망이라는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밀봉된 한 개, 두 개 혹은 세 개의 몸이라는 그릇 안에 들어가서 갇혀 있는 한, 그런 사람은 대영혼의 바다에 합류할 수 없다. 거친 물리적 용기를 죽음이라는 망치로 깨부순다 해도 나머지 두 개의 덮개, 곧 영적 덮개와 근원적 덮개는 그대로 남아 그 영혼이 편재하는 대생명과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지혜로써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힘이 남은 두 개의 그릇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면 마침내 자유를 얻은 자그마한 인간의 영혼이 밖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그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 "영혼은 본질상 보이지 않으므로 영혼을 담은 몸(혹은 여러 개의 몸)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 몸이 있다는 것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에 의해 그 몸의 존재가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 "근원계는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미묘하다. 근원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마치 딱딱한 바구니를 매단 빛나는 풍선처럼 넓디넓은 영계와 물질계의 우주 전체를 상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형상화할 수 있을 만큼 고도의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 만일 이처럼 초인적 집중력을 가지고 지극히 다양하고 복잡한 두 개의 우주를 순수한 상념으로 전환했다가 다시 용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런 사람은 근원계에 도달하여 마음과 물질의 경계선에 서게 된다. 거기서는 고체, 액체, 기체, 전기, 에너지, 인간, 짐승, 식물, 박테리아 등 창조된 모든 것을 순수한 의식의 형태들로 지각한다.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 자신의 육체를 볼 수 없고 오직 생각으로만 존재를 지각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하다. 인간은 상상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근원계의 존재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의 지능은 마음만으로 생각의 극단을 넘나들 수 있으며, 마음속으로 이 행성에서 저 행성으로 건너뛰거나 영원의 나락으로 끝없이 빠져들고, 로켓처럼 은하계를 날아오르거나 여러 은하수와 별들이 총총한 우주 공간으로 탐조등처럼 불꽃을 발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자유로운 근원계의 존재들은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어떠한 물질적 혹은 영적 방해나 업력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즉시 객관적 대상물로 실현시킬 수 있다." 

 

- "지상의 카르마를 다 갚지 못한 존재들은 영계의 죽음 이후에 우주의 상념들로 구성된 더 높은 근원계로 못 가고, 열여섯 가지 거친 요소들로 이루어진 물리적 신체와 열아홉 가지 미묘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영적 신체를 연속적으로 의식하면서 물질계와 영계만을 오갈 수 있다. 지상에서 영적 발달을 이루지 못한 존재는 대부분의 시간을 죽음이라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아름다운 영계의 모습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존재는 영계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물질계 차원으로 돌아가서 좀 더 깊은 교훈을 얻게 된다. 이처럼 반복된 여정을 통해 미묘한 영적 구조를 가진 세계에 점차 익숙해진다. 둘째, 영계에 오래 머무르는 보통 거주자들은 모든 물질적 욕구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어 더 이상 거칠게 진동하는 지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다. 오로지 영적 카르마와 근원적 카르마만을 소진시키면 되는 이런 존재들은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무한히 섬세하고 미묘한 근원계로 들어간다. 우주 법칙에 따라 결정된 일정 기간이 끝난 후에 생각-형체의 근원체를 벗는 이들 진보된 존재들은 히라냘로카나 혹은 그와 비슷한 단계의 다른 영계에 돌아와서 아직 다 갚지 못한 영적 카르마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영체로 태어난다." 

 

- "나의 아들아, 너는 이제 내가 신성한 명령에 의해 부활했음을 더욱 완벽하게 이해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지상에서 올라오는 영적 존재들보다, 특별히 근원계에서 다시 영적으로 윤회해 영계로 돌아오는 존재들을 위한 구원자 역할을 수행하려고 부활한 것이다. 지상에서 오는 자들이 여전히 물질적 카르마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면 히라냘로카와 같은 높은 영계의 행성으로 오르지 못한다. 지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상으로 나타나는 환시를 통한 차원 높은 희열을 알지도 못하고 영계 생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않은 탓에, 죽은 다음에도 다시 한정되고 불완전한 지상의 갖가지 즐거움으로 되돌아오기를 갈망한다. 마찬가지로 영계의 많은 존재들도 자신의 영체가 분해되는 동안 근원계의 보다 진보된 영적 희열 상태를 마음속에 그려보는 대신, 거칠고 저급한 영적 행복을 생각하는 차원에 머물면서 영계의 천국을 다시 방문하고자 갈망한다. 그런 존재들이 영적으로 죽은 다음에 창조주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근원계(생각으로 이워진 세계)에 완전히 머물려면 무거운 영적 카르마를 청산해야 한다. 보기에 즐거운 영적 우주계의 경험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근원계에 머무르게 된다. 모든 근원적 카르마 혹은 과거 욕망의 씨앗들을 청산하면, 갇혀 있는 영혼이 무명이라는 세 개의 코르크 마개 중에서 마지막 것을 밀쳐내고 근원체라는 최종적인 용기에서 빠져나와 영원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이제 이해를 하겠느냐?" 

 

- "인간은 매일 열여섯 시간가량 스스로를 물리적 용기(육체)와 동일하게 생각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잠들어 꿈을 꾸면, 영계의 존재들이 그렇듯이 힘들이지 않고도 어떤 대상이든 창조할 수 있는 영적 신체(영체)로 머물게 된다. 그러나 잠이 아주 깊이 들어 꿈도 꾸지 않는다면, 그때는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의식 또는 '나'라는 감각을 근원적 신체(근원체)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때의 잠은 생생하게 원기를 돋운다. 하지만 꿈을 꾸는 사람은 근원체가 아닌 영체와 접촉하게 되므로, 그런 잠은 충분한 원기 회복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 "모두에게 말하라! 니르비칼파의 깨달음에 의해, 이 지상이 한갓 신의 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꿈이 창조한 더 섬세한 행성인 히라냘로카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이 지상에서 가졌던 육체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한 나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요가난다 여, 모든 사람에게 말하라!" 

 

- 그녀는 간디가 쓴 많은 편지를 모아서 <어느 제자에게 보내는 간디의 편지 Gandhi's Letters to a Disciple>를 출간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구루가 지도한 자아 수련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미라바이는 1960년에 펴낸 책 <영혼의 순례 The Spirit's Pilgrimage>에서 와르타로 간디를 방문한 많은 사람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나 역시 많은 사람을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만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한 사람은 터키의 유명한 여류 작가 할리드 에디브 하눔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의 SRP 설립자인 스와미 요가난다이다." 

 

- 위대한 전기 공학자인 찰스 P. 스타인메츠가 한 번은 로저 w. 봅슨의 질문을 받았다. "어떤 분야를 연구하면 다음 5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진보가 되겠습니까?" 스타인메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영적인 분야에서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역사가 뚜렷이 보여주듯이, 거기에는 인간 발전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이었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갖고 단지 장난을 해왔을 뿐이며 물리적 힘만큼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언젠가, 물질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세상 남녀를 창조적이고 강하게 하는 데에도 거의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때는 세상의 과학자들이 여태까지 거의 손대지 않았던 신과 기도와 영적인 힘을 연구하기 위해 방향을 바꿀 것입니다. 이런 날이 오면, 세계는 지난 세대들이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진보를 한 세대에서 이루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스도는 '이것이 첫째 계명'이라고 선언했다.

 

- "많은 사람들이 새롭고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에 생각을 쏟기보다는 오히려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완전한 평화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신과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아난다 모이 마 

 

- "그 가트는 외딴곳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구루는 내 주위에 보호의 빛을 드리워서 그곳을 찾는 다른 목욕객들이 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유한하고 거친 음식에 의존하는 데서 해방시키는 크리아 Kria 기법을 가르쳐 주셨지요. 그 기법은 어떤 '만트라'를 사용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어려운 호흡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크리아 이외에 어떤 약이나 마술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 힌두교 경전에 의하면, 인간이 이 지상의 특정 장소에 끌리게 되는 것은 윤회를 거듭하면서 성령이 물질적 상황을 통해 표현되는 동시에그 물질적 상황을 지배하는 무한한 방식을 좀 더 완전하게 알기 위해서라고 한다. 동양과 서양은 이 위대한 진리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배우고 있으므로 서로가 발견한 것을 기꺼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  

 

- 신의 친구가 되기 위해 인간은 항상 자신을 마야의 혼미함 속에서 우유부단하게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업보와 행동의 죄악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업보의 냉정한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구도자는 그 구속에서 궁극적으로 해방되는 길을 발견하는 힘을 얻는다. 인간이 업보의 노예가 되는 것은 마야로 혼미해진 마음의 욕구 때문이므로, 요기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은 정신의 조절이다. 그러면 여러 가지 가면으로 덮인 업보에 의한 무지는 사라지고 원래의 본질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신비(인간이 지상에 머무는 유일한 목적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는 호흡과 아주 교묘하게 얽혀 있다. 무호흡은 불사이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고대 인도의 현인들은 호흡이라는 유일한 실마리를 잡고 숨을 쉬지 않는 상태를 얻는 정밀하고 합리적인 과학을 발전시켰다. 인도가 세상에 다른 선물은 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크리야 요가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선물이 될 것이다. 성경에는 히브리 예언자들도 하느님이 호흡을 육체와 영혼의 미묘한 연계점으로 작용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다. 

 

-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심한 압박을 받는 20세기 인간들은 이 놀라운 약속을 동경의 마음으로 듣는다. 이 속에 담긴 완전한 진리는 성스러운 유산을 다시 찾기 위해 용감히 분투하는 모든 구도자에게 그대로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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