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헬레나 P. 블라바츠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마벨 콜린스] 운명의 바람 소리를 들어라

일루젼 2021. 10. 2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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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헬레나 P. 블라바츠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마벨 콜린스 / 스로타파티
출판 : 책읽는귀족
출간 : 2017.01.13


 

우연한 확장이 연결되는 순간들은 항상 경이롭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언제나 강렬한 느낌을 준다. 

 

해당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구해둔 책이었는데, 펼쳐놓고 보니 여러 가지들이 얽혀있었다. 신지학회와 <스승의 발밑에서>, 그리고 <요가난다>의 '바바지'까지 이어진다. '베니션', '바바지', '생 제르맹'. 모든 영성적인 것들의 출발은 그곳인지도 모른다.

 

장난감 칼을 가지고 놀 때는 소꿉놀이지만, 진짜 칼을 가지고 휘두를 때는 무도가, 장인, 백정, 범죄자가 확연히 나뉜다. 더는 놀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다룰 수 없는 힘은 축복이 아니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힘은 다룰 수 없는 힘이다. 검은 그 자체로 특성을 가지며 그것을 쥔 자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자격을 갖춘 자만이 검을 뽑을 수 있겠으나, 아무 날붙이라도 맨손보다는 위험한 법이다. 스스로가 맨손임을 깨달은 자는 날붙이를 탐하기보다 제 몸을 단련하는 것이 옳다. 

 

검무. 책을 읽는 동안 검무 생각이 났다. 목적을 뚜렷하게 하고, 원하는 궤적대로 흔들리지 않는 검끝을 아름답게 흘리려면 그럴 수 있는 몸과 정신이 필요하다. 원하는 것을 뚜렷이 그려갈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지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길이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조심히 가는 수밖에 없다. 

 


 

- 혼이 볼 수 있기 전에 내면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육체의 눈은 모든 환영에 눈이 멀어야 한다. 혼이 들을 수 있기 전에, 맹호의 포효 소리가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아야 하고, 노호하는 코끼리들의 울음소리도 개똥벌레의 청아한 날갯짓 소리처럼 들리지 않아야 한다. 

 

- 그대가 첫 번째 전당을 안전하게 지나고 싶거든, 그대의 정신이 그곳에서 타오르는 욕정의 불길을 생명의 햇빛으로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대가 두 번째 전당을 안전하게 건너고 싶거든, 그곳에 피어 있는 감각을 마비시키는 꽃의 향기를 들이마시기 위해서 멈춰 서서는 안 된다. 그대가 '카르마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한다면 그런 환영의 세계에서 그대의 스승을 찾지 말아야 한다. 지혜로운 자는 감각의 유원지에서 지체하지 않는다. 

 

- 그대가 그 길로 들어서기 전에 그대는 그대의 '아스트랄체'를 없애버려야 하고, 그대의 '멘탈체'를 깨끗이 해야 하며, 그리고 그대의 가슴을 정화시켜야 한다. 영원한 생명의 순수한 대해는 깨끗하고 맑아서 폭풍우 치는 흙탕물과 섞일 수 없다. 

 

-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길은 둘이요, 위대한 대 완성은 세 가지이며, 몸을 지식의 나무로 바꾸게 하는 미덕은 여섯 가지가 있다. 누가 그 길에 다가설 것인가? 누가 그 길로 먼저 들어설 것인가? 

 

- '상나 의상'을 얻으면 영원의 빛을 얻을 수 있다. '상나 의상'이 개성을 말살하는 열반을 줄 수 있으며 윤회를 멈추게 한다. 오, 제자여!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비를 죽이나니. 다르마나카야의 영광을 입은 완전한 붓다는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없도다. 아! 수많은 소아들은 대아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느니라. 인류가 '단위 (Units)'들의 안녕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느니라. 

 

- 마라(Mara)에 대한 두려움으로 돕기를 주저하는 자는 자아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사라질 운명일 것이리니. 자신의 지친 발을 흐르는 시냇물에 담그고 피로를 풀려고 하지만, 물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시냇물에 발을 담그지 못하는 순례자는 뜨거운 열기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느니라. 이기적인 두려움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은 나쁜 열매밖에 열리지 않을 지리니. 이기적인 헌신자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니라. 자신의 삶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니라. 

 

- 제자여! 길은 하나이지만, 그 끝에서는 두 갈래이니라. 그 단계는 네 개의 문과 일곱 개의 문으로 나누어져 있느니라. 하나는 즉각 지복에 이르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지복을 늦추는 길이다. 두 길 모두 보상이니라, 선택은 그대의 자유이다. 

 

-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위대한 보상을 포기 하노라." 그는 이렇게 더 위대한 희생을 성취한다. 

 

- 오 제자여! 두려움은 의지를 죽이고 모든 행위를 정지시키느니. 만약 실라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 채 여행을 하면 돌로 덮여 있는 도의 길에서 카르마의 자갈들이 순례자의 발에 상처를 입히리라. 

 

- 신은 지혜이며 사랑이다. 그리고 더 많은 지혜를 가지면 가질 수록, 신에 대하여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워라. 그러나 우선 다른 사람을 돕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부터 배위라. 끈기 있게 공부해라. 사람들이 여러분을 현명하다고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지 말며, 현명하다는 행복감을 갖기 위해서 공부하지 마라. 왜냐하면 오직 지혜 있는 사람만이 현명하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도움을 주고 싶더라도, 무지하면 선보다 해를 더 많이 줄 수 있다. 

 

-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단순하다.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천국을 얻기 위해서 혹은 윤회로부터 개인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분은 이런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전적으로 망각했다면,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거나, 어떤 천국에 갈 것인가 등에 대해서는 생각할 리가 없다. 명심하라. 모든 이기적인 욕망은 그 목표가 아무리 높은 것일지라도 자신을 속박한다는 것과, 그것을 없애기 전까지 그 사람은 스승의 일에 완전히 자유롭게 헌신할 수 없다는 것을. 

 

- "지성, 용기, 의지 그리고 침묵." 

 

- 이처럼 너무 많은 고통이 단순한 부주의로 일어난다. 자기의 행동이 타인에게 주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르마는 결코 잊지 않으며, 사람이 잊었다는 것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여러분이 '도의 길'에 들어서고자 한다면, 생각없이 행한 잔인함을 저지르지 않도록 자기가 하는 일의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 다른 모든 사건들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죽음'만큼은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이다. 

 

 

   

더보기

 - "영매를 보면 볼수록 인류가 점점 더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혼 없는 피조물들, 그리고 지상의 육체의 그림자들을 나는 본다. 그들 대부분은 혼과 영이 떠난 것들로 강령회에 오는 방문객뿐 아니라, 영매들의 활력 에너지를 먹고사는 반물질의 그림자들이다."  

 

- "블라바츠키 여사가 책을 쓰면서 나에게 옥스포드 보들리 도서관에 가서 본인이 아스트랄 빛 속에서 본 것을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책 제목과 페이지 등을 알려주고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는 내게 더 힘든 일을 주었는데, 바티칸에 있는 사본에서 발췌한 구절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내 친척을 통해서 그 구절을 확인해 보니, 겨우 두 단어만 틀리고 나머지는 모두 맞았다. 나는 그 밖에도 블라바츠키 여사가 원하는 정보는 모두 친구를 통하거나, 혹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때로는 책을 통해서 반드시 찾아 주었다." 

 

- 이 <루시퍼>에 실렸던 글 중 <그 이름에는 무엇이 있는가?(What's in a Name?)>라는 시작 부분에서 블라바츠키 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간행물의 이름을 루시퍼(Lucifer)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가? 멋진 이름이다. Lux, Lucis는 '빛'이고, ferre는 '옮기다' 라는 의미로 '빛의 전달자' 혹은 '빛을 옮기는 자'이다. 이보다 더 나은 이름이 있을까? 루시퍼가 추락한 혼과 동의어로 된 것은 오직 밀턴의 <실락원> 때문이다. 이 간행물의 첫 번째 목적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크리스트(Christ)로 사용한 이 이름에 대한 오해의 오점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에오스포러스(Eosphoros), 로마어로 루시퍼(Lucifer)이며, 이것들은 환한 밝은 태양빛의 전조로 새벽 별인 비너스(Venus)의 명칭이다. 크리스트(Christ)가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는가? '나, 예수는 ... 환한 새벽 별이다(요한계시록 22:16).' 우리의 간행물도 또한 새벽의 창백하고 순수한 별처럼 진리의 환한 새벽을 알리도록 하자. 모든 부조화와 글자 그대로의 모든 번역들을 혼에 의한 진리의 한 가지 빛 속에 합치도록 하자." 

 

- 하지만 과학계에서도 인간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많은 연구에서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스트랄 디자인 체에 대한 증거가 예일대 과학자인 헤럴드 팍스턴 버(Harold Faxton Burr)와 S. C. 노스롭(Northrop)에서 전기적 구조라고 부르는 것에서 보게 된다. 살아 있는 개체들 속에는 그 개체를 만드는 전기적인 구조가 있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죽을 때까지 그 몸속에 그대로 있다고 한다.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 구조는 그대로 있다고 한다.  

 

- 문학계에서의 영향을 보면, 아일랜드의 신지학회 회원으로 적극 활동했던 예이츠는 영적인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블라바츠키 여사가 운영했던 비전 부문 초기 회원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영적 현상만을 너무 추구하다가 학회를 떠나도록 요청받았다고 한다. 조지 러셀을 수줍게 찾아간 제임스 조이스도 빼놓을 수가 없다. 제임스가 러셀을 찾아간 주된 이유는 당시 러셀이 동양 철학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작가들과 접촉하는 통로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러셀은 신지학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지만, 주기, 윤회, 영원한 어머니에 대한 믿음 같은 것에 상당한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그 외에도 영향을 받은 E. M. 포스터, D. H. 로렌스, T. S. 엘리엇, 손턴 와일더 등도 있다. 

 

- 내가 여기에 번역한 내용은 <시크릿 독트린(The Secret Doctrine)>의 토대가 된 <드쟌의 서(Book of Dzyan)>의 스탠져들을 발췌한 원전과 맥락이 같은 것들이다. 나가르주나(용수 Nagarjuna)의 전설에 따르면, '나가(Nagas)'에 의해서 위대한 아라한에게 전해졌다는, 신비 문헌인 <파라마르타(Paramartha)>와 이 <금잠의 서(The Book of the Golden Precept)>는 원전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상과 금언들은 숭고하고 독창적이지만, 종종 산스크리트 문헌들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 다양한 표기 방식으로 쓰였는데, 티베트어로 쓰이기도 했고, 대부분의 표의문자로 씌어졌다. 성어(센자르: Senzar)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알파벳을 가지고 있었으며, 표음 문자보다는 표의 문자의 성질을 띤 다양한 방식의 암호 문자들로 씌어졌다. 또 다른 방법은 숫자와 색채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각각의 숫자와 색채는 그것에 해당하는 티베트 문자(30개의 단음자와 74개의 복음자로 구성)가 있어서 하나의 완전한 암호 문자를 이룬다. 표의 문자로 쓰였을 경우에는 본문을 읽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이런 경우 점성학에서 사용되는 상징과 부호들, 즉 12궁도와 7원색이 사용된다. 7 원색은 각각 명암의 정도에 따라 밝은 색, 원색, 어두운 색으로 나뉘어져, 말이나 문장을 쓰는 데 사용되는 33자를 나타낸다. 이 방법으로 12궁도를 다섯 번 반복하고, 5원소와 7원색을 첨가하면 60개의 성스러운 글자들과 12개의 부호들로 구성된 완전한 문자가 된다. 문헌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부호가 읽는 방법을 결정하는데, 각각의 단어가 단순히 산스크리트어 방식일 때는 인도식에 따라 읽으면 되고, 혹은 중국식에 따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쉬운 방법은 비전을 받은 신비가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부호나 상징들 자체가 아라비아 숫자들이나 그림처럼 독자가 어떤 특별한 언어나 혹은 그가 특히 선호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읽는 방법이다. 

 

- 그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줄 스승을 지혜의 전당에서 찾아라. 저 너머에 있는 그 전당에는 모든 환영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의 빛이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영광을 발하며 빛나고 있다. 제자여! 창조되지 않은 그것이 지혜의 전당에 거주하고 있듯이, 그대 안에도 거주하고 있다. 그대가 그것에 도달해 둘을 하나로 융합하고 싶거든, 그대가 입고 있는 환영의 어두운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육체의 목소리를 죽여라. 진리의 빛과 그대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감각의 이미지가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게 하여라. 그리고 그대 자신의 '아그냐나(Agnyana)'를 깨달아 배움의 전당으로부터 도망쳐라. 이 전당은 거짓된 아름다움 속에 있어서 위험하며, 그대의 수련을 위해서만 필요할 뿐이다. 제자여! 눈부신 환영의 광채에 현혹되어 그대의 혼이 거기에 머물러서 허위의 빛 속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 그대가 신비스러운 소리들의 사다리 위에 발을 올려놓기 전에 그대는 '내면의 신'의 소리를 일곱 가지로 들어야 한다. 첫 번째 소리는 나이팅게일이 짝과 이별할 때 부르는 감미로운 소리와 같다. 두 번째 소리는 반짝이는 별들을 일깨우는 '디야니스'의 은빛 심벌즈 소리로 들린다. 그다음은 조개 속에 갇혀 있는 바다 요정의 슬픈 멜로디와 같다. 그리고 네 번째 소리는 '비나'의 선율과 같다. 대나무 피리 소리와 같은 다섯 번째 소리가 그대의 귓속에서 울린다. 그리고 그것은 우렁찬 트럼펫 소리처럼 변한다. 마지막 소리는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처럼 진동하여 퍼져나간다. 이 일곱 번째 소리는 다른 모든 소리들을 삼켜버리고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 여섯 가지 소리를 죽여서 대아(스승)의 발밑에 놓았을 때, 그때 제자는 '유일자' 속으로 융합되어 그 '유일자'가 되고, 그 '유일자' 안에서 살게 된다. 

 

- 제자여! 그대 앞에 있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대가 버리고 온 과거에 대한 단 하나의 생각도 그대를 끌어내릴 것이며, 그러면 그대는 처음부터 다시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대 속에 있는 과거의 경험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없애야 한다. 뒤를 돌아다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물리게 하면, 그 욕망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을 믿지 마라. 왜냐하면 이것은 마라의 가증스러운 현혹이기 때문이다. 마치 꽃의 심장을 파먹고 자라는 벌레처럼 욕망은 악을 먹음으로써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진다. 장미는 기생충이 그 심장을 먹어 치우고 생명의 액을 다 빨아먹기 전에 어버이 줄기에서 태어난 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 도의 길들을 찾아라. 그러나 제자여! 그대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대의 가슴을 깨끗이 해야 하느니라. 그대가 첫발을 내딛기 전에, 그대는 먼저 허위와 진실, 덧없는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것을 배워야 하느니라. 무엇보다도 머리로 터득한 지혜와 혼의 지혜, 즉 눈의 가르침과 가슴의 가르침을 구별하는 것을 배워라. 무지는 꽉 막혀 있는 공기가 없는 통과 같은 것이리니! 혼은 그 무지의 통 안에 갇혀 있는 새와 같다. 새는 지저귀지도 못하고 깃털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혼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가수처럼, 무력하게 앉아 있으며 끝내는 지쳐서 죽어가느니라. 그러나 그렇게 무지할지라도, 길을 밝혀주고 안내할 혼의 지혜가 없는 머리로 터득한 지식보다는 더 낫다. 

 

- 오 제자여! 자기만족은 거만한 바보가 올라간 높은 탑과 같다. 그는 자만으로 가득 찬 고독 속에 앉아서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를 인식하지 못하나니. 현명한 자는 허위의 배움을 거부한다. 허위의 배움은 선법에 의해 바람 속에서 흩어진다. 선한 법률은 교만한 자들, 겸손한 자들 모두에게 똑같이 도나니. 눈의 가르침은 대중을 위한 것이고, 가슴의 가르침은 선택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눈의 가르침을 아는 자는 자만 속에서 말하느니, "보아라, 나는 알고 있도다." 가슴의 가르침을 아는 자는 겸손하고 조용하게 말하느니, "나는 이와 같이 들었도다." 

 

- 오, 입문의 후보자여! 자만과 자존감에서 헌신의 노예가 된 자, 존재에 집착하지만 인내심과 복종을 대법 앞에 놓은 자는 부처의 발밑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처럼, 현생에서 '스로타파티'가 된다고 말해 주어라. 완전한 '시디스'는 아주 멀리 흐릿하게 보이지만, 일단 첫발을 내딛고 비전의 시냇물 흐름에 들어서면, 그는 산 독수리 같은 시력과 겁 많은 암사슴의 청력을 얻을 수 있게 되리라. 열망자여! 참된 헌신은 전생에서 그의 지식이었던 바로 그 지식을 그대에게 다시 가져다준다고 말해 주어라. 신(deva)의 시력과 신의 청력은 단 한 번의 짧은 생에서는 얻어질 수 없나니. 

 

- 제자여! 용기를 내어라. 황금률을 명심하여라. 일단 그대가 스로타파티, 즉 '시냇물에 들어간 자'의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일단 그대가 현생이나 미래생에서 해탈의 시냇물 바닥에 발을 담그기만 하면, 오!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여! 이제 그대 앞에는 일곱 번의 환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신과 같은 지혜를 갈구하는 자여! 보아라. 그대 눈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 네 단계 디야나의 험준한 길은 언덕 위로 굽어져 있나니. 그 높은 정상에 오르는 자는 위대하고 더 위대하고 더욱더 위대한 자이다. 파라미타의 정상은 그보다 훨씬 더 가파른 길로 올라가야 한다. 그대는 일곱 개의 관문을 싸워서 통과해야 하느니라. 그 일곱 개의 기둥은 욕정의 화신인 잔인하고 교활한 힘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느니라.   

 

- 제1열쇠는 다나(DANA)로, 불멸의 자비와 사랑의 열쇠이다. 제2열쇠는 실라(SILA)로, 원인과 결과의 균형을 잡아주는 열쇠로 더 이상의 카르마 작용을 막아 주는 언행의 조화의 열쇠이다. 제3열쇠는 크샨티(KSHANTI)로, 어떤 것에도 동요되지 않는 상냥한 인내심이다. 제4열쇠는 비라가(VIRAGA)로, 고통과 쾌락에 무관심하고 환영을 정복하며 오직 진리만 지각하는 것이다. 제5열쇠는 비리야(VIRYA)로, 세속의 거짓의 수렁에서 벗어나서 지고의 진리를 향해서 싸워 헤쳐 나가는 불요불굴의 에너지이다. 제6열쇠는 디야나(DHYANA)로, 일단 황금의 문을 열기만 하면 성자를 영원한 사트의 영역과 끝없는 관조로 이끈다. 제7열쇠는 프라냐(PRAJNA)로, 인간을 디야니스의 아들인 보살로 만들고 신으로 만드는 열쇠이니라. 

 

-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는 순례자는 니르바나에 이르는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발에서 더 많은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이 더욱더 순결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일곱 번의 짧고 덧없는 생 뒤에는 니르바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 또한 어떤 사람들은 <스승의 발 아래서>를 작은 윤리 교과서로 생각하여 한 번 읽고 지나가는 좋은 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된 가르침을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되새기면서 꾸준하게 실천하다 보면 점점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또한 분명히 어떤 확실한 결과들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 여러분은 진실과 허위를 분별해야 한다. 생각과 언행을 항상 진실되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선 생각을 진실되게 하라. 그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진실하지 않은 사상이 많고, 우매한 미신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진보를 이룰 수 없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해서, 혹은 수세기 동안 믿어 온 것이기 때문에, 또는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책에 쓰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집하지 마라. 여러분 자신이 그 일을 생각하고, 그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비록 천 명의 사람이 어떤 문제에 합의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 주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들의 의견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미신은 세상에서 가장 큰 악들 중 하나이며, 여러분 자신을 해방시켜야 할 구속 중 하나이다. 

 

- 여러분은 또한 다른 방면에서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표면상으로는 아무리 악하게 보일지라도, 모든 사람과 사물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배워라. 여러분은 여러분의 형제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것을 통해서 도울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다. 그 속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일깨우는 방법을 배우고, 그 속에 있는 신의 생명에게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라. 그리하면 여러분의 형제들을 과오로부터 구하게 될 것이다. 

 

- 영적인 능력을 바라지 마라. 여러분이 그 능력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스승께서 생각하신다면, 그런 능력은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너무 일찍 그런 힘을 억지로 가지게 되면, 장애가 되는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때때로 이런 힘의 소유자는 기만적인 '자연령'에게 끌려 다니거나, 자만심이 생겨서 자신은 실수를 범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얻는데 쓸 수 있는 시간과 힘을 다른 선한 일을 위하여 쓸 수도 있다. 영적인 능력은 발전해 감에 따라 자연히 생기게 되며, 당연히 생겨야 한다. 

 

- 또한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생겨나는 사소한 욕망들도 경계해야 한다. 절대로 돋보이거나 현명해 보이려고 하지 마라. 말하려는 욕망을 갖지 마라.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진실하고 친절하며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 말하기 전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고 말하라. 만일 그런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말하지 마라. 

 

- 스승께서 가르쳐 주신, 행동에 특별히 필요한 여섯 가지 자질들은 다음과 같다.

정신에 대한 자기 통제, 행동에 대한 자기 통제 ,명랑함, 관대함, 일점 지향성, 확신감. 

 

- 이러한 슬픔이나 고난은 여러분의 과거 생에 속한 것이지, 현재 생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것보다 현재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라. 그것은 미래생의 일을 만드는 것이며,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다. 결코 슬픔이나 우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라. 우울함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우울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그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런 기분이 생기면, 즉시 떨쳐 버려야 한다. 

 

- 또한 여러분은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여러분의 생각이 산만하지 않도록 하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생각을 그것에 집중시켜라. 정신이 태만하지 않도록 하고, 항상 좋은 생각을 마음속에 갖고, 마음이 자유스러울 때에는 언제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도록 하라. 여러분의 '생각의 힘'을 매일매일 선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라. 진화해가는 방향의 힘이 되도록 해라. 매일매일 슬퍼하거나 고통받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들에게 사랑의 생각을 쏟아부어라. 

 

-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사람이 한 일이면, 사람이 할 수 있다. 나는 사람이고 또한 사람 속에 내재한 신이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도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여러분의 의지는 담금질한 강철과 같아야 한다. 

 

- 여러분이 신과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신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달하도록 흐를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도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자신을 망각한다. 그는 마치 신의 손에 있는 펜과 같은 것이어서, 그 펜을 통하여 신의 생각이 지상에 표현되므로, 그런 펜이 없다면 신의 생각이 나타날 수가 없다. 또한 그는 동시에 살아 있는 불의 상징으로, 신성한 사랑을 이 세상에 비추는 역할도 한다. 

 

-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는 지혜, 그 지혜를 안내하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사랑, 이것들이 바로 여러분이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지혜, 의지 그리고 사랑은 로고스의 세 가지 면이다. 그리고 신께 봉사하고자 하는 여러분은 이러한 면들을 세상에 나타내어야 한다. 

 

- 중국의 도교(Taoism) 문헌들 중에서 <청정경(The Classic of Purity)>으로 알려진 매우 섬세한 단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후대에 도교로 알려진 철학 체계의 본질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마지막 주창자가 기원전 5세기에 있던 노자(Lao Tse)였다. 사본 필사자인 갈현(Ko Hsuan)은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청정경>을 동쪽 화(Hwa)의 신성한 통치자로부터 얻었다. 그는 이것을 금문교(Golden Gate)의 신성한 통치자에게서 받았다. 그 통치자는 그것을 서쪽 황실 모후로부터 받았다." 

 

- 각각의 기질에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길이 있다. 그러나 그 길은 헌신만으로 찾아질 수 없고, 종교적인 사색만으로도, 열렬히 발전하는 것만으로도, 자기희생의 노력만으로도, 삶에 대한 세심한 관찰만으로도 찾아질 수가 없다. 그 어느 것도 제자를 한 계단 이상 앞으로 데려다 줄 수가 없다.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계단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악들을 하나씩 극복함에 따라서 그것들이 사다리를 구성하는 계단이 된다. 인간의 미덕들은 진실로 필요하며, 결코 없이 지내서는 안될 그런 계단들이다. 

 

- 이러한 평온함은 매우 지친 혼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깊은 침묵 속에서 마침내 길을 찾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비스러운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건, 그건 바로 '말하는 사람 없이 말하는 목소리'이다. 그것은 형체도 실체도 없이 찾아오는 사자(messenger)이다. 혹은 마침내 개화된 혼의 꽃이다. 그것은 그 어떤 비유로도 묘사될 수가 없다. 

 

-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마음)만을 가지고 구하기 때문이다. 그 정신의 목소리는 정신이 활동하는 세계에서만 들린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스물 하나의 규칙을 다 지나간 후에 비로소 구하는 자는 가질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 구한다는 것은 내면의 갈망, 즉 영적인 열망의 갈구를 느낀다는 것이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갈망을 조금이나마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제자가 배울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받아들여지고, 승인되며, 인정된다. 그렇게 되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등불을 켰으며, 그 등불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대한 첫 번째 싸움에서 승리할 때까지 배울 수 없다. 정신은 진리를 인식할지 모르지만, 영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일단 그 폭풍우를 지나서 평온함을 성취하기만 하면, 그때는 언제든지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 심지어 제자가 주저하고, 머뭇거리거나, 외면하더라도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 

 

- 오컬티즘에서 한 걸음만 내디디면 '지식의 나무'에 가게 된다. 오컬티즘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어야만 한다. 그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는 더 이상 무지에서 나온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그는 선의 길을 가든가, 아니면 악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고 명확하게 알고서 두 가지 길 중에 한쪽 길로 한걸음만 내딛게 되어도 엄청나게 큰 카르마의 결과를 낳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향해 가는 그 목표에 대해서 불확실해하며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걸어간다. 그들의 인생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그 결과로 그들의 카르마가 혼란스럽게 작용한다. 그러나 일단 지식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는 혼란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카르마의 결과들이 거대하게 증가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계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또 왜냐하면 오컬티스트는 조금이라도 반신반의 할 수 없으며, 일단 그 입구를 넘어서게 되면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 모나드(Monad) : 단일자(The One). 자신의 세계에 있는 삼위일체의 영(threefold spirit). 오컬티즘에서는 그것은 하나인 삼위일체, 즉 아트마(Atma), 붓디(Buddhi), 마나스(Manas)를 의미한다. 영적 의지(Spiritual Will), 직관(Intuition) 그리고 상위 마인드, 혹은 하위 세계 속으로 윤회해서 점진적으로 진보하면서 인간을 지나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는 인간의 불멸 부분.

 

- 블라바츠키 여사가 영국을 잠시 떠난 사이 <신지학의 열쇠(Key to Theosophy)>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신지학에 대하여 좀 더 심오한 공부를 준비하게 해주는 열쇠라고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내용들을 보면, 사후 상태의 성질, 정신의 신비, 인간과 우주의 칠중 구조, 윤회와 카르마 등등이다. 
 

- 팔리어인 '이디(iddhi)'는 산스크리트어의 '시디스(siddhis)'와 동의어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령 능력을 말한다. 두 종류의 시디스가 있다. 하나는 낮은 차원의 조잡한 심령 능력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도의 수련을 요하는 영적인 힘이다. <슈리마드 바가바타>에서 크리슈나는 말한다. "요가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자, 자신의 감각을 굴복시켰으며, 자신의 정신을 나 크리슈나에게 집중한 자, 그런 요기들에게 모든 '시디스'들이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다(Nada)'는 '영적인 소리'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소리 없는 소리' 혹은 '침묵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 옴(AUM)은 칼라 함사(Kala Hamsa), 즉 대붕(Bird) 혹은 스완(Swan)이다. <나다 빈두(Nada-Bindu)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A는 대붕의 오른쪽 날개를, U는 왼쪽 날개, M은 꼬리를 뜻하며, '아르다-마트라(Ardha-Matra)'에 머리가 있다고 한다. 즉, 0.5 미터 정도에 머리가 있다고 한다. <나다 빈두(Nada-Bindu)>에서 말하길, "함사에 올라타고, 그래서 옴 위에서 명상하는 요기는 카르마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영(Spirit) 속에서 살고 싶거든, 육체적인 개성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의식의 세 가지 상태를, 깨어 있는 상태인 '자그라트(Jagrat)', 꿈꾸는 상태인 '스바뿌나(Svapna)', 그리고 깊은 수면 상태인 '수슙티(Sushupti)'이다. 투리야(Turiya)는 꿈이 없는 상태를 넘어 서 있는 의식 상태로, 지고의 영적인 상태이다.

 

- 동양의 어떤 신비가들이 말하는 존재의 일곱 가지 계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대붕, 즉 칼라 함사의 몸속에 있는 일곱 가지 영적인 로카(loka) 혹은 세계를 말하며, 그 대붕이 브라흐마(Brahma, 중성)가 아닌 브라흐마(남성)로 될 때, 그 대붕은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 붓다의 가르침의 두 개 학파, 즉 비전(esoteric) 학파와 현교(exoteric)를 각각 '가슴의 가르침(Heart Doctrine)'과 '눈의 가르침(Eye Doctrine)'이라고 부른다. 보디달마(Bodhidharma)-달마 대사-는 중국에서 그것을 비전 학파 그리고 현교 학파로 불렀다. 고타마 붓다의 가슴(하트)에서 나온 가르침이기에 그렇게 불렀고, 눈의 가르침은 그의 머리 혹은 두뇌의 작업이었다. '가슴의 가르침'은 또한 '진리의 봉인(Goal of the truth)' 혹은 '진정한 봉인'이라고 불렸고, 거의 모든 비전적인 작품들에서 상징이다.

 

-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는 달마 대사의 제자들이 비교 지식에 통달한 자들-초인들-을 호칭하는 말이다. '마디야미카' 학파의 창시자인 나가르주나(불교에서는 용수보살이라고 부름)는 '용수(Dragon Tree)'라고 불렸는데, 용은 지혜와 지식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나무가 소중히 여겨지는 것은 부처님이 탄생과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바로 보리수 아래였으며, 첫 번째 설법도 보리수 아래에서 있었다. 그리고 열반에 드신 것도 보리수 아래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상나 의상(Shangna robe)은 불교를 퍼뜨린 33명의 아라한들 중 세 번째로 위대한 아라한인 '라자그리하'의 '샹나바수(shangnavasu)'의 옷이다. 그것은 지혜를 획득해서 그 지혜를 가지고, 개성을 말살하는 열반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자 그대로는 초심자가 비전을 받을 때 입는 옷이다. 에드킨스(Edkins)가 말하길, 레이똥(Le Hy Tong) 왕조 때 티베트에서 중국으로 이 옷을 가져왔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라한이 태어날 때, 깨끗한 곳에서 이 식물(상나 식물)이 자라난다"고 한다. 

 

- 많은 삶 동안 정진을 해서 종종 다르마나카야에 도달한 보살들이다. 인류를 돕거나 인류의 비애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니르바나로 들어간다. 즉, 인류의 시야와 가슴으로부터 사라진다. 북방 불교에서는 프라티에카 붓다는 '영적인 이기심'과 동의어이다. 

 

- '스로타파티 (Srotapatti)'는 '열반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들어간 자'라는 의미로, 어떤 예외적인 이유가 아니면 한 번의 생에서 열반에 이르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제자는 어느 한 생에서 노력을 시작해 다음 일곱 번째 생에서 그 목표에 도달한다. 

 

-  일명 '홍모파(Red Caps)'로 불리는 '둑파(Dugpas)'는 티베트 서부와 부탄에 거주하고 있는 탄트라 종파로, 흑마술에 통달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슐라킨트바이트 같은 동양 학자들이 티베트의 국경 지대를 직접 찾아갔는데도, 둑파의 혐오스러운 의식과 관습을 '황모(Yellow Caps)', 즉 동부 라마승들 및 그들의 제자와 성자들의 신앙과 혼동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 '도르제'는 산스크리트어로 '바즈라(Vajra)'라고 하며, 인간을 보호하는 신들-티베트어로는 드락쉐드(dragshed)-이 가지고 있는 무기의 일종으로서, 화학에서 오존이 그렇듯이 공기를 정화시킴으로써 사악한 영향력들을 물리치는 오컬트적인 힘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또한 '무드라(Mudra)' 즉, 명상을 할 때 이용되는 자세이기도 하다. 좌선의 자세이건, 부적이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사악한 영향력들을 압도하는 힘의 상징이다. 그러나 둑파(Dugpa)는 이 상징을 흑마술에 오용했다. 황모파(Yellow Caps)나 갤룩파(Gelugpa)에서는 그것을 기독교의 십자가처럼 미산적인 상징이 아닌 힘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둑파에서는 그것이 흑마술의 표식인 두 겹의 역삼각형과 비슷하다. 

 

- '비라가(Viraga)'는 객관적 우주, 쾌락, 그리고 고통에 대한 절대적인 무관심이다. 

 

- 아함카라(Ahamkara)는 '나(I)' 혹은 나임(I-am-ness)'이라는 개성의 느낌이다. 타타가타(Tathagata)의 의미는 '앞서간 전임자들의 길을 걷는 자'이다. 

 

- "세 가지 진리를 소중히 여겨라. 그것들은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다." 이 세가지 진리는 <백연화의 목가(The Idyll of the White Lotus)> 제2권, 8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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