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양태자
출판 : 이랑
출간 : 2015.01.09
약간의 미묘함이 있다.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출판사에서 강조한 '비교종교' 학위와의 깊은 관계성은 찾지 못했다.
해당 시기의 일들은 당대의 눈으로 보아야한다는 저자의 생각에는 공감하지만 전반부의 서술들은 당시의 생활상이 반영된 느낌은 아니며, 종교적으로 깊게 파고드는 느낌도 아니다. 저자가 독자를 고려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으나 '베난단티'에 대한 서술은 긴즈부르그의 저서와 사뭇 동떨어지는 면이 있으므로 개인적으로는 판단이 어렵다.
그러나 중후반부부터 이어지는 개별적인 사례들은 충분히 흥미롭고,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나는 생활사들 역시 추가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고리들을 제공하므로 해당 영역이 관심사라면 한 번쯤 읽어봄직 하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에 도전을 해볼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 그리고 이 책에서는 성인 남녀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마녀사냥', '마녀' 등으로 총칭해서 썼음을 밝힌다. 마녀라는 말속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나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여자는 '마녀'로, 남자는 '마남' 내지는 '마술사'로 칭하여 구분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면 '마녀'가 주는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 책에서는 여자와 남자, 어린이까지 모두 마녀로 칭했음을 밝혀 둔다.
- 그리스 로마 시대에 노예에게 동물처럼 낙인을 해두었던 관습은 중세까지 이어졌다. 신성 모독을 저질렀을 때에는 B(Blasphemie, 신성모독), 도망치다 잡힌 노예의 눈썹 위에는 F, 집시처럼 방랑하는 자들에게는 R 혹은 V, 도둑은 T, 살인자는 M, 위증죄는 P, 추문을 일으킨 자는 SL이라는 낙인을 새겼다.
- 이처럼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재판비용을 청구하였기 때문에 마녀사냥의 그물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재산을 탕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드슈타인에서는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사람이 마녀사냥의 피해를 많이 입었다. 마녀 혐의로 붙잡히면 일단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자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마녀사냥을 빌미로 시의 재정이 매우 풍족해졌음은 물론이다.
- 카타리나 케플러(Katharina Kepler, 1547~1622)는 용병이었던 하인리히 케플러와 결혼하여 그 해에 첫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가 나중에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 이름을 날린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다.
- 어린이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독일의 라우 Kurt Rau 교수와 베버 Hatig weber 교수가 많은 연구를 남겼는데, 그중 라우 교수는 1618~1730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일어난 어린이 마녀사냥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7~10세의 남녀 어린이 45명이 마술을 부린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 재판에 넘겨졌는데, 훈계 차원의 가벼운 벌을 받은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베버 교수는 1660년경 독일 로이트링겐 Reutingen에서 일어난 마녀사냥과 1675~1689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일어난 어린이 마녀사냥을 연구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는데, 특히 이 책은 17세기 유럽의 어린이 마녀재판에 대해 소상히 밝혀낸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 독일인의 이름에 폰 von이 들어가면 전통 귀족 출신이라는 뜻이다. '전통'이란 말을 붙이는 이유는 후에 생긴 도시 귀족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도시 귀족은 중세기에 상업을 통해서 부자가 된 이들로 전통 귀족과는 생성 과정부터 다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안나는 이름에 폰이 붙는 전통 귀족이었는데, 그녀도 마녀사냥의 광기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래도 전통 귀족들은 민중과 비교하면 마녀사냥에서 비교적 적게 희생당한 편이었다. 이 점은 오스트리아 동남쪽에 있는 도시 슈타이어마르크 Steiermark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녀로 고발이나 밀고를 당했더라도 귀족 신분이기 때문에 하층민처럼 쉽게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다.
- 사학자 볼프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재판에서 사용될 증빙서류들을 미리 빼돌려 자취를 없애는 식으로 혐의를 피해 나갔다. 하지만 대 반역죄를 저지른 경우는 귀족일지라도 꼼짝없이 법정에 끌려갔다. 그렇다면 전통 귀족 안나 노이만(Anna Neumann von Wasserleonburg, 1535~1623)은 어쩌다 마녀로 몰렸을까? 안나는 결혼을 여섯 번 했다는 이유로 마녀로 지목되었다. 그녀는 신교도였지만 그중 네 번은 구교 신자와 결혼하였다. 왜 이 시대에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인 결혼까지 이토록 구교와 신교를 구분한 것일까? 당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집안 대대로 구교를 믿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신교를 믿는다거나 신교도가 구교도와 결혼한다는 것은 무척 심각한 죄(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에 속했다. 당시는 구교와 신교의 편가름이 심했고 서로 간의 싸움도 잦았다. 21세기에도 종교가 다른 사람끼리 가족이 되면 다툼이 일어나는 마당에,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여자가 여섯 번이나 결혼한다는 것은 드문 경우였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인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리에서는 그녀가 하늘을 날아다닐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달리 흰색의 간을 가졌으며 마법을 부려 날씨를 바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녀와 결혼한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마법 때문에 일찍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말도 나왔다. 그녀는 세 번이나 마녀로 고발당했지만 귀족 신분이었던 터라 쉽게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다.
- 필자는 마녀사냥이 일어났던 많은 도시를 직접 방문했다. 지난번 책(<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뒷골목 사랑>)에서도 밝혔지만, 당시 마녀사냥이 일어났던 도시 중 뷔딩겐 Buedingen 과 글렌하우젠 Gelnhausen 그리고 이드슈타인 Idstein 등은 지금도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곳들은 한 번의 방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방문하여 사진을 찍고 자료들도 모았다.
- 마녀 Hexe라는 개념을 넓게 살펴보면 마귀나 사탄, 데몬이라는 단어들도 함께 등장하는데, 앞으로 소개할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나마 개념 정리를 해본다. 그리스도교의 구약에서 사탄 Satan은 유일신 하느님의 반대자를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사탄과 마귀 Teufel를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중세에는 마귀와 데몬(악령, Daemon)을 같은 개념으로 보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면 신약에서는 사탄을 '신의 창조물'로 보았다. 즉 사탄은 천사가 타락한 존재이자 사람들을 악의 길로 이끄는 자이며 신과는 정반대 편에 있다. 신약, 구약 그리고 중세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나온 이 개념을 종합해 보면 사탄은 나쁜 힘이자 마귀나 데몬의 제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학자들의 저서에 도 이와 유사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마귀나 데몬이 인간의 몸이나 동물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녀사냥을 정당화하는 각종 학설이나 논거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평온하지만 마귀나 데몬이 몸으로 스며들게 되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며 인간을 해치고 날씨를 나쁘게 만드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게 되니 이를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힘을 행하는 자들을 마녀라고 칭하게 되었으며(이 책에서는 마귀나 사탄, 데몬, 악령 등을 모두 '마귀'로 통일하여 서술하였다) 이들을 처단할 이론적 기반도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마녀는 다시 백마녀와 흑마녀로 나눌 수 있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나쁜 일을 저지르는 마녀는 흑마녀, 사람들을 돕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일을 하는 마녀는 백마녀라고 불렀다. 미시 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 Carlo Ginzburg의 연구에 의하면 이탈리아 북동부의 프리울리 Friuli에는 백마녀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한다. 백마녀들은 마을을 위해 살았는데, 날씨가 좋지 않다거나 전염병이 돈다거나 곡식 수확이 좋지 않을 때에 마을을 위해 축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예식을 올렸다. 이런 의식은 16세기까지 존속하다 점차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유럽이 점점 그리스도교 화가 되면서 갖은 핍박을 받다 결국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마녀로 몰려 죽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리뷰자 주 : 베난단티를 말하는 듯한데, 세부적인 설명은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참고만.)
- 사학자 마이어 Meyer는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의 민중은 곤궁과 가난에 찌들었고 하루하루 생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도피처를 찾아다녔다. 즉 식물에서 추출한 액체를 마시고 황홀이나 흥분, 무아경 속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 액체를 마시면 마실수록 점점 더 강렬한 자극제나 흥분제를 필요로 했고, 그러다가 중독증상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었다." 마이어는 이런 상황을 마녀와도 연관 짓는다. 그 증명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헥센바인 Hexenwein', 이름 그대로 '마녀 와인'이다. 이 와인은 일반 와인과는 달리 씁쓸한 맛인데 마취제를 섞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이들의 음식은 밀가루에 콩을 넣은 수프가 고작이었고 음료는 물과 우유가 전부였다. 옷은 보온을 위해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 걸쳐 입는 게 다였다. 왕족이나 귀족, 교황이 아니면 열심히 일을 해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고 마이어는 밝히고 있다.
(리뷰자 주 : 확인이 필요한 부분들이 조금 있다.)
- 그가 유대인이나 터키인을 언급한 것은 당시 이들이 유럽인에게 핍박받는 민족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럽인의 기준으로 볼 때 이들은 무조건 나쁘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옥에는 당연히 이들이 있을 것으로 간주한 듯하다.
(리뷰자 주 :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비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었다고 보이는데, 조금 미묘한 표현이다. 비교종교학을 수학했다는 느낌은 약한데, 저자가 독자를 고려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사례들을 모아놓은 후반 위주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 신학자 윌리엄 휘스턴(William Whiston, 1667~1752) 역시 기이한 지옥설을 주장했다. 그는 지옥에는 혜성이 하나 있는데 태양으로부터 이 혜성이 멀어진 거리에 따라 지옥이 춥거나 더울 수 있다고 말하였다. 신교 신학자인 토비아스 스윈덴(Tobias Swinden, 1659~1719)은 지옥은 태양 안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마귀가 충분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은 태양밖에 없다는 것이다.
- 이번에는 사형집행인으로 일했던 한 남자의 일기 Hangman's Diary를 살펴보자.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당시 사회상과 사형집행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독일어권에서는 어떤 한 분야의 대가에게 명예스러운 칭호로 '마이스터'를 붙여준다. 이 일기의 주인공인 프란츠(Franz Schmidt, 1555~1635)도 사람 목을 '한 방에 잘 쳤던 대가였기에 이름 앞에 '마이스터'가 붙었다.
- 프란츠는 정년퇴임을 한 후에도 계속 관청의 일을 도왔다. 그가 의뢰받은 일은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자르는 것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시신의 일부를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약이나 부적으로 쓰려는 이유였다. 중세 사람들은 죽은 인간의 몸에는 미처 다 쓰지 못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손을 잘라 마구간에 갖다 놓기도 했고, 도둑질한 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손가락만 잘라 돈주머니나 금고에 넣어두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염원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말년에 인체 실험을 통한 의학적인 연구도 했으며 집에 병원을 열어 많은 병자를 돌보았다. 어느 면에서는 대단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리뷰자 주 : Glory.)
- 여자들과 비교하면 그 수가 적었지만, 이드슈타인에서는 남자들도 다수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마귀의 힘을 빌려 이리로 모습을 바꾸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남자도 있었지만, 대개는 돈놀이를 하면서 지나친 이자를 챙기는 등 윤리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처형당하였다. 지금 이드슈타인 시에서는 당시에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성벽에 걸어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있다.
- 이드슈타인 시의 영주가 펼친 다른 교활한 정책도 살펴보자. 당시 이드슈타인은 30년 전쟁의 여파로 시의 재정도 파탄이 났지만, 인구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1648년의 자료를 보면 이든 슈타인의 인구가 서른 가구 남짓으로 줄었던 때도 있었다. 세월이 홀러 출산을 통해 다시 인구가 늘기는 했지만, 인구가 늘어난 데에는 영주의 마녀사냥 정책도 단단히 한 몸을 하였다. 그는 마녀 혐의를 받아 잡혀 온 사람 중 출산이 가능한 40세 이하의 여자는 무소건 풀어주었다. 어떻게든 인구를 늘리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시대의 여자들은 한 명의 아이라도 더 낳아서 시의 인구 증가에 이바지해야 했다. 인구가 줄면 노동력이 부족해 도시를 경영하기 힘들고 세수도 감소하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인구를 늘리는 것이 영주의 최대 과제였다. 한 예로 당시 마녀로 몰린 사람 중 하나였던 로트쾨핀 Rothkoepfin 가의 딸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 유로 풀려났는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임기 여성이라는 이유로 방면된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 결국 카타리나는 1615년 마녀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첫 번째 재판에서 혐의가 없음이 증명되어 곧 풀려났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다시 우르술라의 고발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케플러는 어머니 카타리나를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에는 아들이 부모의 변호인으로 나서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케플러는 그의 친구가 있는 튀빙겐 대학의 법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어머니의 무죄방면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카타리나는 석방될 수 있었다.
- 다음은 겨울에도 꽃을 피워 '꽃 마녀'로 알려진 카타리나 팔다우프(Katharina Paldauf, 1625~1675)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학자들은 그녀가 마녀로 참수당한 것은 확실하지만, 겨울에 꽃을 피웠다는 사료는 찾지 못했기 때문에 '꽃 마녀'는 후세에 와서 붙여진 별명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녀의 이름 앞에는 여전히 '꽃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 그가 가족은 없지만, 재산이 많은 노인이라서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누군가가 마녀로 몰려 사형을 당하면 시나 교회, 혹은 영주가 그의 재산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666년은 30년 전쟁이 끝난 후라, 시의 재정이 몹시 열악하여 마녀사냥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오늘날에는 긍지 높은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도시로 평가받는 뮌헨이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조금 씁쓸하다.
- 다음은 1675년에서 1690년까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Salzburg에서 열렸던 한 재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재판의 중심인물이 '마술사-야클 Zauberer-Jack'이라 불리는 한 소년이어서 이 재판을 야클 재판 Jackl Prozess이라고도 부른다. 후세 사람들은 이 재판을 환상과 환영에서 기인한 재판이라고 평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마녀 재판과 비교했을 때에 동화 같은 진술이 더 많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재판이며 유럽에서는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 동물 가죽을 벗기는 일을 하던 바바라 Barbar Koller라는 여자가 잡혀 재판에 넘겨진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 그녀가 왜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저 당시 펠드바흐는 마녀사냥이 매우 여러 차례 일어난 도시였고 그녀도 그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펠드바흐에서는 1673년 한 해에만 52명이 마녀로 몰려 희생되었고 1689~1690년에는 9명의 남자와 19명의 여자가 희생되었다. 옆 도시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전부 95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남자는 53명으로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희생된 남자의 수가 많은 편이었다.
- 카타리나의 아버지 야콥 헤노트는 가족과 함께 쾰른으로 이주한 노동자로, 처음에는 비단을 염색하는 일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단체장까지 맡을 정도로 성공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는 1578년부터 탁시스 Taxis 가의 도움으로 쾰른의 우편장 자리에 오르면서 사회적으로 더욱 지위가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폰 투룬 운트 탁시스 von Thurm und Taxis로 불리는 탁시스 가문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명망가로 손꼽히고 있다. 이 가문은 1748년부터 독일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한 성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독일과 유럽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16~18세기에 우편업으로 많은 돈을 벌면서 계속 신분을 높여간 가문이다. 당시의 우편장이 어느 정도 지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런 직업을 가지게 된 것에 '출세 karriere'라는 단어가 붙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직책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총 우편장까지 해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리뷰자 주 : 우편업이 주는 메리트와 우편장에 관해서는 <주류의 문화사> 참조.)
- 앞에서 이야기한 비르기트 수녀원 외에도 수녀원에서 마녀사냥이 일어난 기록은 숱하게 남아 있다. 이번에는 1611년 프랑스 프로방스 Provence 지방에 있는 우르술린 Ursulinen 수녀원에서 일어난 마들렌 Madeleine de la Palud이라는 젊은 수녀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수녀원에 들어간 직후부터 마귀 환시에 시달렸다. 그녀만이 아니라 동료 수녀인 루이즈 Louise Capeau도 함께였다. 이 두 수녀가 마귀 쫓는 사제로 유명한 도미니코 수도원장 미카엘리스 Michaelis의 최측근이었음에도 말이다. 미카엘리스 수도원장은 교황 직속의 종교재판관으로서 프로방스 지방을 관리하는 책임자이자 이미 18명을 마녀로 몰아 죽인 전적을 갖고 있었다. 악명 높은 종교재판관 밑에 있는 두 수녀가 이런 증상을 보였으니 결과를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 헤네킨은 다비드 David라는 수도 신부에게 전권을 일임했고 다비드는 직분을 받은 뒤 제일 먼저 그의 연인이자 수녀인 시몬느 Simone Gaugain를 수녀원의 수련원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그리스도교 안에는 많은 신흥 종파가 범람했는데 여기에 속하는 종파는 일루미나타파 Illuminatenm와 아담파(Adamiten,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형제 자매회) 등 수없이 많다. 다비드도 이와 비슷한 종파를 추종하는 신부였다. 이들의 믿음체계는 기존 구교에서 말하는 교리와는 약간 다르다. 물론 신흥 종교나 신흥 종파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기존 종교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흥 종교나 신흥 종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이한 교리를 짜깁기해서 만든 신용 종교나 신흥 종파는 세간의 문제를 일으켰는데 다비드가 추종하는 세력은 후자에 속했다.
- 18세기 중엽인 1749년, 70세의 레나타(Maria Renata Saenger von Mossau, 1680~1749) 수녀는 뷔르츠부르크 부근의 운터젤 Unterzell 수녀원의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변덕이 심했다. 그녀의 성향으로 치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정신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나타 수녀는 어릴 때부터 멍청하고 어리숙한 아이였다. 그러다 한 고급 관리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면서부터 마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어리숙하고 멍청했지만 마술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열두 살에 마녀 그룹에서 장으로 발탁되었고 어둠의 제후 왕관을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19세가 되었을 때 부모의 강압으로 프레몽트레 Praemonstratenser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 딘젤바허 Dinzelbacher 교수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1400년경 '이교도(딘젤바허 교수는 이들을 Ketzeri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라고 불린 사교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당시 바티칸의 비리와 부패에 역겨움을 느끼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정신을 부르짖으며 경건한 원시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부패한 구교의 교계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있다고 주장한 이들은 흰색 옷을 입고 자신들을 거룩한 존재라고 표명했으며 특히 성서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바티칸의 거대한 힘에 짓눌려 이교도로 핍박을 당하다가 결국 많은 추종자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마저리 역시 흰색 옷을 입고 성서 지식까지 풍부하였기에 그녀도 이런 신흥 종파에 속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 중세 사람들은 예수와 마리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뷰자 주 : '운다'는 행위가 고귀하다고 여겨졌다는 내용을 다른 책에서도 읽었는데, 출처를 찾아보고 확인해둘 것)
- 이탈리아 페루자 Perugia에서 있었던 일이다. 축일이 5월 20일인 복녀(복녀나 복자도 성인과 성녀처럼 교회의 정식 절차에 따라 선포된 사람이므로 공식적으로는 공경의 대상이다. 다만 복녀나 복자는 성인이나 성녀와는 달리 그 범위가 어떤 지역이나 단체에만 한정된다. 이 책에서는 복녀와 성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칭호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녀들이 마녀에서 성녀의 반열에 올랐는지가 이 글의 주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골룸바(Columba, 1467~1501)는 도미니코 수도원의 평신도 중 3회원이었다. 1회원이 수도사나 사제라면 2회원은 수녀이고 3회원은 평신도지만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칭한다.
- 사람들은 그녀를 이탈리아 시에나 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erine, 1347~1380)와 동일시했다. 카타리나 성녀의 행적이 실린 글에 카타리나의 이름을 지우고 골룸바를 넣어도 될 정도라는 칭송을 들으며 그녀는 사람들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기적도 일으켰다. 1494년 페루자에 페스트가 돌 때 페스트에 걸린 이들을 치유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속죄의 길을 걸어야 페스트를 몰아낼 수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당시는 페스트를 병원균이 아니라 하느님의 벌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 1495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재위 1492~1503)가 페루자에 왔다. 여기서 잠깐, 골룸바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두 자식 체사레 보르자와 루크레치아에 대해 살펴보자. 교회사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불린다. 그는 여러 명의 여자에게서 모두 9명의 자녀를 둘 정도로 종교적인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1431년에 태어난 그는 1492~1503년에 교황으로 재임하였는데, 이 자리도 부정적으로 취득한 것이었다. 그가 교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삼촌인 교황 갈리스토 3세 (Calixtus IⅢ, 재위 1455~1458)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 루크레치아는 골룸바의 고해 신부이자 <성인전>의 저자이며 점성학자인 세바스티아누스 안젤리 신부에게도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의 죄목은 골룸바의 거짓 계시를 세상에 퍼뜨렸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는 이들을 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골룸바의 신비체험을 두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는 그녀를 성녀로 판정했지만, 교황의 딸 루크레치아는 그녀를 마녀로 판정했다. 어쨌든 골룸바가 성녀와 마녀라는 두 영역을 넘나드는 평가를 받다가 죽은 것은 틀림이 없다. 그녀가 죽은 지 124년이 흐른 1627년, 그녀는 후대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Ⅲ, 재위 1623-1644)의 축복을 통해서 가톨릭 복녀로 공표되었다.
- 그는 베네치아 북쪽의 알프스 지방 출신으로 이름은 지오반니 피에트로 리온 Giovanni Pietro Lion이다. ... 게다가 그는 처세에도 능했다. 특히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이 뛰어났으며 성서 해석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재주를 무기로 그는 늘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아갔다. 그는 교황 바오로 3세(PaulⅢ, 재위 1534~1549)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돈 게레미아 Don Geremia와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는가 하면 베네치아 공화국 왕자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거기다 시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만나면 늘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성서에 능통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였다.
- 이번에는 성녀로 끝없이 추앙받던 한 여자가 하루아침에 마녀로 몰린 이야기를 알아보자. 스페인에서 태어난 막달레나 델라 크루즈(Magdalena de la Cruz, 1487~1560)는 다섯 살 무렵부터 이상한 징후를 보였다. '빛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가 그녀의 삶에 나타난 것이다. 마귀는 변덕을 부리며 때로는 아주 힘센 동물의 형태로, 때로는 미소년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나타났다. 어느 날은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으로 나타나 "나를 따르라!"라고 속삭였다. 괴로움을 참지 못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못을 박았고 그 때문에 갈비뼈 2개가 부러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귀는 끊임없이 달콤하게 그녀를 유혹했다. 자신에게 순종하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그녀의 삶을 거룩하게 꾸며 주겠다고 약속했다.
-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은 다양했다. 추기경과 교황대사 그리고 심지어 당대에 유명한 종교재판관까지 그녀를 흠모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스페인 세비야의 주교는 그녀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였는지 편지로 영성 교환까지 할 정도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Karl V, 1500~1558,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라고 함)도 그녀에게 자신의 군사들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청했는가 하면, 카를 5세의 부인은 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Felipe II, 1527~1598)로 등극할 어린 아들의 영세 옷과 투구에 축성해달라 고 간원했다. 축성된 옷을 입으면 마귀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성녀로서 그녀의 명성이 치솟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가 사는 수녀원에는 곳곳에서 밀려오는 감사 선물이 산처럼 쌓여갔다. 믿지 못할 기이한 일은 더 있다. 1518년, 그녀가 임신한 것이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였음에도 그녀는 성령의 도움으로 임신하게 되었다며 도리어 자신의 떳떳함을 표명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발언을 믿었다. 이는 신에게 바치는 그녀의 겸허한 순종이라면서 변함없이 그녀를 공경했다 하니 그녀에 대한 추앙이 당시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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