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실비아 페데리치 /황성원 / 김민철
원제 : Caliban and the Witch
출판 : 갈무리
출간 : 2011.11.30
최초로 자본이 축적되어 생성되는 시초 축적.
일시적인 축재가 아닌, 자본이 하나의 계급 구조를 형성하는 현상이 일어나려면 누군가는 착취당해야만 한다.
진정한 '무한 가치 창출'이란 과연 가능한 개념인가?
나의 이익이 상대의 이익이 될 수 있을지라도, 지속되는 구조를 들여다보면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손해가 일어난다. 그 대상이 때로 인간이 아닐 뿐이다. 착취의 구조는 붕괴될 수밖에 없고, 문제점은 구조를 깨닫거나 그렇지 못하거나와 관계없이 한계점에 달하면 불거져 나온다.
저자는 중세 유럽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산업혁명의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착취가 숨겨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들의 임금노동만을 다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 가능하도록 그 외의 모든 부분을 뒷받침해주었던 여성의 노동은 자연 재화처럼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자원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더해 어째서 여성의 노동이 가부장적 그늘 아래로 가리워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면 권력을 둘러싼 대규모 전쟁이었던 '마녀사냥'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마녀사냥의 의미와 원인을 종교적인 시각을 넘어 사회 구조와 가치관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이다. 몇몇 부분에서는 다소 모순적인 점을 느끼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주장들이었다.
궤변일 수 있지만, 복지 제도는 사실 가난한 이를 위한 제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가난한 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아름다운 덕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그 고아한 표정 안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반란이 일어나 교수대가 세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섞여있다. 극한으로 몰린 이들은 사회전복을 꿈꾸게 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환경 속에서 기득권이 자신이 누려오던 권리와 부를 지키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현재 이득을 보고 있는 사회 체제를 최대한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투자가 복지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당장 상가의 유리창이 깨지고 강도가 늘어나는 치안 불안정 상태가 되는 것보다 적당한 보조를 통해 구조 안에서 시스템에 순응해 '성공의 꿈을 안고' 노동하게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시니컬하게 보았을 때 그렇고-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기본 생활권을 보장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은 개념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나 삐딱하게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조금 샛길로 빠졌는데, 시대가 변해가며 비인간적이었던 착취의 구조는 조금씩 문제의식을 지닌 이들에 의해 분석되고 지적되고 있지만 '마녀사냥'으로 대표할 수 있는 여성의 무임금 노동은 이 과정 속에서도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시대는 젠더 이슈로 다시금 논쟁이 치열하다. 저자의 세대가 뿌린 씨앗이 발화한 것일까?
책을 줄여나가기로 한 마당에 계속 새 책을 살 수는 없어 최대한 도서관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타관 도서를 신청하는 경우에는 손에 쥐기까지 평균 1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기존에 읽고 있던 책들도 있으니 처음 읽기로 결심한 때로부터 실제로 읽기 시작하기까지는 약 2주 정도의 텀이 생긴다. 이 간격이 득이 될 때도 있고 실이 될 때도 있는데, 나름대로는 재미난 시기에 해당 도서를 읽게 되니 득이 더 많다고 볼 수 있겠다. (단점은 도서관의 책들은 무한에 가까우므로 열심히 읽어도 내 책들은 줄지 않는다는 점. 보다 가열차게 읽어나... 가고 싶은데... 흠)
<캘리번과 마녀>를 읽고 나서 양태자 씨의 <중세 잔혹사 마녀사냥>에 대한 평가가 조금 변한 부분이 있다.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전반부 마녀사냥의 역사적인 부분에 관한 개괄적인 구조를 이 책을 참고해서 쓴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상당 부분의 얼개가 매우 유사하며, 비슷한 지점에서 약간의 의견을 가감하는 형태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마녀사냥을 테마로 삼은 책을 다량 읽어본 것은 아니므로 좀 더 많은 책을 읽어본 후 판단할 문제이지만,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다시금 실비아 페데리치가 대단하다고 느끼는데, 이 저자는 '마녀사냥' 자체를 말하고자 했다기보다는 그 안에 녹아있는 노동과 착취, 계급화와 젠더 이슈를 말하고 싶었던 것인데 자료 조사와 연구가 너무 깊어 마녀사냥 그 자체로 충분한 책이 되었다.
- 이것 외에도 금납화의 부정적 결과는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 생산자가 자신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이는 부역이 화폐 지대로 대체되면서 농민들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한 노동과 영주를 위한 노동을 차별화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 자유로워진 농민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발전 과정에서" 금납화는 "독립적인 농민 소유권의 성장"을 촉진하여 "예전의 자가 고용 토지 보유자"를 자본주의적 소작인으로 바꿔놓았다(Marx 1909: Vol. 3, 924 ff).
- 반란이 실패한 것은 봉건 권력의 모든 세력들(귀족, 교회, 부르주아지)이 전통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에 대한 공포로 합심하여 공동보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부르주아지의 상은 진정으로 왜곡된 것이다. 이 상에서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귀족과 전쟁상태에 있으며 평등과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그러나 중세 말기 토스카나에서 잉글랜드, 그리고 저지대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보나 이미 그들은 하층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귀족과 연합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농민과 도시의 민주적 직조공 및 수선공이 귀족보다 더 위험하다고 인지했고, 그 위험은 시민계급이 소중히 여기던 정치적 자율성을 희생해서라도 막아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절대국가로 가는 첫걸음인 군주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귀족의 권력을 재 수립한 것은 바로 도시 성벽 내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두 세기 동안 투쟁해 온 부르주아지였다.
- 동시에 낮은 출생률과 가난한 사람들의 출산 기피 또한 인구감소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난받았다. 이것이 얼마나 타당한 지적이었는지는 판단하기 힘들다. 17세기 이전의 인구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사회적 계층을 불문하고 결혼연령대가 높아졌고 (새로운 현상으로서) 버려지는 아이의 수가 늘어났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또 설교대에 선 목사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젊은이들의 행태를 비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인구위기와 경제위기는 1620-163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유럽과 식민지 모두 시장이 위축되고, 무역이 중단되고, 실업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발전도상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 있었다. 유럽과 식민지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돼서, 각지의 위기들이 서로를 빠른 속도로 상승, 확대시키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의 국제적 경제위기였다.
- 그러나 1699년이 되어서도 잉글랜드인들은 여전히 인디언들의 삶에 매료된 사람들이 인디언식의 생활방식을 버리도록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대인의 보고에 따르면 "아무리 간청하고 눈물로써 설득해 보아도 그들 중 많은 수는 인디언 친구들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인디언 아이들은 잉글랜드인들과 함께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옷을 입도록 배웠지만, 한 명도 남김없이 원래의 공동체로 돌아가 버렸다(Koning 1993:60)."
- 이 같은 기획은 16세기와 17세기의 수많은 철학적, 종교적 사색들이 왜 사실적인 인체 해부로 구성되는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인체 해부는 인체의 어떤 속성들을 살리고 어떤 부분을 죽일지를 결정하는 데 활용된다. 평범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는 것이 연금술이라면, 육체적 힘을 노동력으로 바꾸려는 것은 사회적 연금술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통해 토지와 노동 사이에 도입된 새로운 관계가 신체와 노동 간의 관계도 똑같이 장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동이 발전을 무한하게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역동적인 힘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면 신체는 뉴턴 물리학이 질량과 운동 사이에 설정해 놓은 것과 유사한 조건에서, 오직 의지만이 움직일 수 있는, 운동성이 없고 척박한 물질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마치 뉴턴 물리학에서 질량은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운동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토지처럼 신체는 경작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해되어야 한다. 그래야 숨은 보물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신체는 노동력의 존재 조건이지만 동시에 노동력 사용에 대한 주요한 저항요인으로서 노동력을 제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체가 그 자체로는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신체가 죽어야만 노동력이 살 수 있다.
- 자본주의적 노동 합리화를 위해서는 이런 관행들을 없애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마법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힘의 형태인 데다가 노동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수단, 다시 말해서 노동의 거부들 의미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마법이 근면함을 해친다"며 개탄했다. 베이컨은 이마에 땀을 흘리는 대신 게으른 몇 가지 처방만을 가지고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만큼 화나는 일은 없다고 털어놓았다(Bacon 1870 :381).
- 이런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마녀사냥이 늘어난 것은 "더 나은 부류의 사람들"이 "낮은 계급"에 대한 꾸준한 공포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서였다. "낮은 계급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기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이 사악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공포가 그 자체로 대중적인 마법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법에 대한 전투는 언제나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했고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동력 문제는 17세기에 특히 긴급해졌다. 유럽 인구가 다시 감소하기 시작해서 정복 이후 몇십 년간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발생했던 것과 유사한 인구 붕괴의 유령이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녀사냥은 출산 통제를 범죄화하고 여성의 신체, 특히 자궁을 인구증가와 노동력의 생산 및 축적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던 시도라고 볼 수 있는 여지는 분명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한다. [일단] 이것은 가정이다. 분명한 것은 인구감소에 집착하는 정치계급이 마녀사냥을 촉발했고, 인구 규모가 국부를 좌우한다는 확신이 이를 부채질했다는 점이다.
(리뷰자 주 : 그런 주장 하에서라면 가임기 여성들을 더 보호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동일한 저서 내에서 기존 노예들을 재생산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여성 노예들에 대한 처우가 나아졌음을 설파한 것과는 상충되는 주장으로 보인다. 최소한 마녀사냥으로 2세기 동안 사망한 여성의 절대 숫자가 엄청남을 주장하는 것과 상충되지 않도록 하려면 추가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다. 저자는 그런 상황 때문에 결론적으로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냥 자체가 신체와 재생산 능력으로 생성되는 권력을 놓고 일어난 전투였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 주장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각 자체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 따라서 마녀사냥은 여성에 대한 전쟁이었다. 이는 여성을 비하하고 악마화 하며 이들의 사회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집단적인 시도였다. 동시에 고문실에서, 그리고 마녀들이 죽어가던 화형대에서 여성성과 가정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상이 구축되었다. 여기에서도 마녀사냥은 당대의 사회적 흐름을 증폭시켰다. 실제로 마녀사냥이 표적으로 삼았던 관습과, 같은 시기 가족생활과 젠더, 소유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입법이 금했던 행위들 간에는 틀림없는 연속성이 있다.
- 신세계의 마녀사냥이 유럽에 영향을 미쳤을까? 아니면 이 두 가지 박해는 유럽 지배계급이 중세시대 이래로 이단에 대한 박해를 통해 쌓아 올린 억압적 전략과 전술이라는 동일한 수원지에서 유래했을 뿐인가?
- 오늘날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녀사냥은 유럽과 미국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이는 16세기와 17세기의 마녀사냥이 오랫동안 역사가들의 관심밖에 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이런 일들이 보도되는 경우도 사건의 중요성은 대체로 빠뜨리는 경우가 많고, 이런 현상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어서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어 있다.
- "헤게모니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확산되었는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간에 공포의 역할을 간과한다면 이는 현명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공포를 통한 사고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생리학적 상태와 함께 이 공포를 통한 사고는 그 특수한 특성 덕분에 식민지 헤게모니의 탁월한 중재자 기능을 하는 사회적인 성격의 것이다. 인도인, 아프리카인, 백인들은 이런 식으로 신세계에 '죽음의 공간'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타우시그는 죽음의 공간이 "변형의 공간"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경험을 통해 좀 더 생생한 생의 감각을 느낄 수도 있고, 공포를 통해 자의식의 성장만이 아니라 분절화와 권위에 대한 자기 순응의 상실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 7).
- 이 책에 대한 착상은 이런 전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이 작업에 동기를 부여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생각이었다. 첫째, 남성 노동자 계급의 역사와 분리된 "여성의 역사"가 갖는 한계를 피하면서 동시에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재고하고픈 욕심이 오랫동안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영감을 얻은 <캘리번과 마녀>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런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내 해석 방식에 따르면 캘리번은 현대 카리브 문학에서 아직도 공명하고 있는 반식민주의 저항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징이기도 했다. 특히 자본주의 논리에 대한 저항의 영역이자 수단이라는 의미를 갖는 프롤레타리아트 신체의 상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템페스트>에서는 원경에 국한되었던 마녀의 모습이 이 책에서는 무대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마녀는 자본주의가 파괴해야만 했던 여성 주체라는 세계(이단자이자 치유자, 반항적인 아내, 감히 혼자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 주인의 음식에 독을 섞고 노예들의 반란을 책동하는 여성 마술사)의 체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 이 책의 두 번째 동기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새롭게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면서 자본주의의 근원과 연관된 일단의 현상들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수백만의 농업생산자들로부터 토지를 박탈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클로저"나,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 묘사한 "대유폐"를 연상시키는 대규모 유폐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빈곤하게 만들고 범죄자 화하는 것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박해로 인해 새로운 이산자 운동 diasporic movement이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이런 박해는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 "부랑자들"을 지역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도입한 "피의 법률"을 연상시킨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최근 여성에 대한 폭력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국가(남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는 마녀사냥이 부활하기도 했다.
- 결론적으로 말해서 푸코가 <성의 역사>(1978)에서 목회자적 고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마녀사냥을 연구했더라면, 이런 역사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무성적인 주체의 관점에서는 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아가 고문과 죽음이 "생명"을 위해, 심지어는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자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목표는 생명을 노동할 수 있는 역량과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중세 반봉건투쟁의 관점에서 "이행"을 이해하는 것은 잉글랜드의 인클로저와 아메리카 대륙 정복 배후의 사회적 동학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며, 무엇보다도 "마녀"가 멸종한 것과, 국가의 통제가 재생산의 모든 측면으로 확장된 것이 왜 16~17세기 시초 축적의 초석이 되었는지를 밝히는데도 도움이 된다.
- 농민은 부담스러운 사용료를 내야만 하는 영주의 화덕에서 빵을 굽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영주의 제분소에서 곡물이나 올리브를 빻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내기도 했다(Bennett1967: 130~31; Dockes 1982:176~79). 그러나 투쟁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일주일에 며칠씩 영주 직영지에 바쳐야 했던 부역이었다. 이 "노역"은 농노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부담이었고, 13세기 내내 자유를 향한 농노의 투쟁에서 중심적인 화두였다.
- 전시의 군역에 대한 저항도 강했다. 베넷 H. S. Bennett에 따르면 언제나 잉글랜드 촌락의 징집 군사가 필요했는데, 중세의 지휘관은 부하들을 전투에 묶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돈만 받았다 하면 기회가 닿는 순간 도망쳤기 때문이다. 1300년의 스코틀랜드전이 그 전형적인 경우로, 6월에 1만 6천 명에게 소집령을 내렸으나 7월 중순까지 7천6백 명만이 응소했는데, 그나마 이것이 "파고가 가장 높은 때였으니 8월이 되면 3천 명 정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왕은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점점 더 사면된 범죄자와 불량배에게 의지해야만 했다(Bennett 1967:123~25). 갈등의 다른 원천은 농노들이 공유지로 간주한 숲, 호수, 언덕을 포함한 비경작지의 이용이었다. 그들은 12세기 중엽 잉글랜드 연대기에서 그들이 "숲에서 어떤 것이든 가지고 나올 수 있고, 연못에서 낚시할 수 있고, 숲에서 사냥할 수 있으며, 숲, 연못, 목초지에서 뜻대로 할 것"임을 주장했다(Hilton 1973 : 71). 그러나 가장 격심한 투쟁은 여전히 귀족의 지배권으로부터 나오는 세금과 의무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는 사망세 manomorta, 타 장원에서 온 사람과 결혼하면 증가하게 되어 있던 결혼세 mercheta, 상속세 heriot, 그리고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지대 tallage가 있었다. 지대는 영주가 자의적으로 금액을 결정하고 원하는 때에 거둘 수 있었다. 결코 적지 않은 것으로 십일조 tithe도 있었는데, 소득의 10분의 1을 성직자에게 내는 것이지만 보통 영주가 성직자의 이름으로 대신 징수했다. 봉건 의무 중 노역과 더불어 "자연과 자유에 반하는" 이와 같은 세금에 대한 원성이 가장 높았다. 이와 같은 부담은 토지 또는 여타 혜택으로 보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 권력의 자의성을 보여 준다. 따라서 농노는 끈질기게 이에 저항했다. 던스터블 수도원의 농노들이 보인 태도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1299년에 "이렇게 지대를 내느니 지옥에 가는 것이 낫겠다"고 선언했고, 논란 끝에 자유를 얻어냈다(Bennett 1967: 139). 비슷하게 1280년에 요크셔 지방의 마을인 헤돈의 농노들은 지대를 폐지하지 않으면 레번서레드나 헐과 같이 "지대가 없어서 매일 피난민이 늘어 가는" 인근 마을로 이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같은 책 : 141). 이것은 말뿐인 위협이 결코 아니었다. 마을 town로 도망치는 것은 농노의 투쟁에서 중요한 부분을 구성했고, 잉글랜드의 일부 장원에서는 "사람들이 도주하여 인근의 도시에 살고 있으며, 그들을 붙잡아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도시는 계속 그들을 비호한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다(같은 책 : 295~96).
- 천년왕국 운동의 전형적인 예는 1224~1225년에 가짜 플랑드르 백 볼드윈 Pseudo Baldwin의 출현으로 촉발된 운동이었다. 이 은둔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1204년에 살해당한 볼드윈 9세를 자처했다. 그의 주장은 증명할 수 없었지만, 그가 신세계를 약속한 것이 내전을 야기했고, 플랑드르의 방직 노동자들이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Nicholas1992:155). 이 가난한 사람들(직조공과 축융공)은 가짜 볼드윈 백작이 금은보화와 완전한 사회변혁을 하사할 것이라 믿으며 일치단결했다(Volpe 1922: 298~9). 이와 비슷한 운동으로 농민과 도시 노동자가 1251년경에 부자들의 집을 불태우고 약탈하고 삶의 조건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며 프랑스 북부를 휩쓸었던 양치기 십자군이 있고, 또 이탈리아 움브리아에서 시작한 채찍질 고행단이 있는데, 이것은 요아임다 플로라 Joachim da Flora 대수도원장의 예언에 따르면 세계 종말이 올 예정이던 1260년에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Russell 1972a : 137). 그러나 중세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건 관계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고 성장하는 화폐경제에 저항한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천년왕국 운동이 아니라 민중적 이단이었다. 이단과 천년왕국 운동을 흔히 하나의 주제로 다루지만, 명확한 구분선을 그을 수는 없으나 이 두 운동 사이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 천년왕국 운동은 조직적 구조나 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보통 특정한 사건이나 카리스마적 개인이 운동에 불을 붙였으나, 그 운동은 군사력에 부딪히면 즉시 무너졌다. 대조적으로 이단 운동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이단의 주요 종파들은 종교 전통을 재해석하기도 하는 사회적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들 자신의 재생산, 사상의 전파, 자기 방위의 관점에서 보면 잘 조직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고, 반봉건투쟁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중세 저항운동의 한 형태로서, 여러 이단 종파가 3백 년이 넘도록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 독일의 "하층민" 사이에서 활약했는데, 이들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Werner 1974 : Lambert 1977). 이는 대체로 교회가 그들을 맹렬하게 박해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단적 교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알비파 Albigensians를 향한 것과 같은 반이단 십자군이 조직되었고, 이단자는 말뚝에서 화형 당했으며, 그들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교황은 국가적 억압의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기구인 종교재판소 Holy Inquistion를 설치했다.
- 민중적 이단은 상인들과 십자군이 들여온 동방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통교리로부터의 이탈이라기보다는 사회생활의 급진적 민주화를 갈망하는 저항운동에 가까웠다. 중세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이단이 곧 "해방신학"이었다. 이단은 영적 쇄신과 사회정의를 향한 민중의 요구에 뼈대를 부여했고, 더 높은 진리에 호소함으로써 교회와 세속권력에 동시에 도전했다. 이단은 사회 계서제, 사적 소유, 부의 축적을 비난했다. 또 이단은 중세 최초로 일상의 모든 면(노동, 소유 출산, 여성의 지위)을 재정의한 새롭고 혁명적인 사회 관념을 민중 사이에 퍼뜨리면서 진정으로 보편적인 의미에서 해방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단 운동은 국제적 차원의 대안적 공동체 구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공동체는 종파의 구성원이 더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고, 필요시에 도움과 격려를 구할 수 있는 연고· 학교 · 은신처로 이루어진 넓은 지지기반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도 해 줄 것이었다. 실제로 이단 운동이야말로 최초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상업적 정기시와 성지순례, 그리고 종교박해를 피해 지속적으로 국경을 넘었던 피난민들의 도움으로 종파들(특히 카타르파 Cathars와 발도파 Waldenses)이 구축한 연락망과 영향력의 범위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민중 이단의 근저에는 신이 더 이상 욕심 많고 부패하고 불명예스러운 성직자를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카타르파와 발도파는 스스로 “진정한 교회"를 자처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이단의 도전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도전이었다. 교회는 봉건 권력의 사상적 지주였고, 유럽에서 토지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농민의 일상적 착취에 가장 책임이 큰 단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1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철권으로 통치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강탈한 돈으로 금고를 채우는 데 자신의 소위 "성스러운 자격"을 이용하는 전제권력이 되어 있었다. 사면과 면벌부와 주교직을 판매하고, 오직 십일조의 거룩함을 설교하기 위해 신앙이 돈독한 자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고, 모든 성사를 시장터로 만드는 것이 교황으로부터 교구 사제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어 있었다. 성직자는 물질적 보상 없이는 장례식을 거행하지도, 세례를 해 주지도, 사면을 행하지도 않을 만큼 타락했다.
- 많은 이단이 사도적 빈곤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고, 초기 교회를 특징지었던 단순한 공동체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리옹의 빈자> Poor of Lyon와 <자유 영혼 동지회> Brethren of the Free Spirit와 같은 일부 종파는 기부받은 구호품으로 살아갔다. 또 다른 종파들은 육체노동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보헤미아의 초기 다볼파 Taborites 와 같은 종파들은 "공산주의"를 실험했는데, 그들에게는 평등과 공동체적 소유를 확립하는 것이 종교개혁만큼이나 중요했다. 발도파의 경우에도 한 종교재판관이 "그들은 거짓말, 사기, 맹세를 피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상업을 배제한다"고 보고한 바 있다. 그는 발도파가 맨발로 걷고, 양모로 만든 옷을 입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공유한다고 하였다(Lambert 1992:64). 그러나 이단의 사회적 모습은 1381년 잉글랜드 농민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존 볼 John Ball의 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우리는 신의 모습을 본 따서 창조되었는데도 짐승처럼 대접받고 있다"라고 말했고, 또 "신사와 농노가 따로 존재하는 한 잉글랜드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Dobson 1983 :371). 가장 영향력이 큰 종파였던 카타르파 또한 유럽 사회운동사에서 돋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십자군을 포함한) 전쟁을 혐오했고, 사형제를 규탄했으며(이로 인해 교회가 처음으로 사형을 지지하는 공식 선언을 하게 되었다), 다른 종교에 관용적이었기 때문이다. 반알비파 십자군 이전에 카타르파의 본거지였던 남부 프랑스는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고조될 때 유대인들의 피난처였다. 이곳에서는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 Cabbala가 카타르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Spencer 1995b:171). 카타르 파는 살상을 거부했고 달걀이나 고기 같이 성적 생산의 결과물인 음식을 피하고자 했다. 그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부했으며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다.
- 출산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바울파 Paulicians나 보고밀파 Bogomils와 같은 동방의 이원론적 종파가 카타르파에 미친 영향의 소산이기도 했다. 바울파는 성상 파괴주의의 한 종파로서, 출산의 순간에 영혼이 물질세계의 덫에 걸린다고 보아 출산에 반대했다. 보고밀파는 10세기에 발칸 지역의 농민들을 개종시키며 세를 얻었다. "육체적 비참함 때문에 사물의 사악함에 눈뜬 농민들 사이에서 태동한"(Spencer 1995b: 15) 민중 운동인 보고밀파는 (신의 세계에서는 선 쪽이 최우선 할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악마의 작품이라 설파했으며, 그들이 영송에서 "시련의 땅"이라 부르는 현세에 새로운 예속민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자식 낳기를 거부했다(Wakefield and Evans 1991 : 457). 보고밀파가 카타르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카타르파가 결혼과 출산을 거부한 것은 아마도 "죽음-욕구" death-wish나 삶에 대한 경멸로 인한 것이기보다는 보고밀파와 유사하게 "그저 생존하는 수준으로 떨어진" 삶을 거부(Vaneigem 1998:72)했기 때문인 듯하다. 카타르파의 반출산 주의가 여성과 성을 비하하는 관념과 연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삶과 육체를 경멸하는 사상들은 대개 그러한 관념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이단 종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성에 대한 카타르파의 태도로 말하자면, "종교적으로 완성된 이들"은 성행위를 하지 않았으나 다른 이들은 성적 금욕을 실천할 것이 요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일부는 교회가 금욕에 부여한 중요성이 육체의 과대평가를 내포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몇몇 이단은 성행위에 신비적 가치를 부여했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성사처럼 대하기도 했고, 성행위가 금욕보다 순수한 상태에 도달하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설교했다. 그리하여 이단은 모순적이게도 동시에 극단적인 금욕과 방탕으로 박해받았다. 성에 관한 카타르파의 교의는 명백히 동방의 이교와 만나면서 발전된 주제들을 정교하게 다듬은 궤변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렸던 인기와 다른 이단 종파에 행사한 영향력은 결혼과 출산에 뿌리를 둔 중세의 경험적 현실을 폭넓게 대변하기도 한다. 중세 사회에서는 토지 부족과 동업조합의 보호주의적 가입 규제로 인해 농민도 장인도 자식을 많이 낳을 수 없었고, 많이 낳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실제로 농민과 장인 공동체들은 태어나는 아이의 숫자를 조절하려 했다. 가장 흔히 쓰던 방법은 결혼을 미루는 것이었다. 정통파 기독교인들도 (만약 한다 해도) 늦은 나이에 결혼했으며, "땅이 없으면 결혼도 없다"는 것이 규칙이었다.
- 메리 콘드렌 Mary Condren이 켈트족 아일랜드로의 기독교 침투에 관한 연구서 <뱀과 여신> The Serpent and the Goddess (1989)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행위를 규제하려는 교회의 시도는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4세기 이래로 성직자들은 지속적으로 여성의 배제와 성행위의 배제를 성스러움과 동일시함으로써 성행위가 여성에게 주는(남성에 대한) 힘을 몰아내려 했다. 그들은 여성을 교회의 모든 예배 및 성례의 집전으로부터 축출하고, 생을 부여하는 마법적인 여성의 힘을 여성스러운 옷을 도입함으로써 빼앗으려 하고, 성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는 모두 가부장적 계층이 여성의 힘과 성적 매력에서 오는 힘을 파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성격 이성에 새로이 부여되었다. 성은 고해의 주제가 되었으니, 고해자의 성행위에서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도 토론의 주제가 되었으며," 이제 "성행위의 상이한 면면이 생각, 말, 의도, 비자발적 요구, 실제 성행위로 나뉘어 성의 과학을 구성하게 되었다"(Condren 1989:86~87). 교회가 성적 규제를 재구성한 특권적 도구로서 7세기부터 출간한 책자인 고해 안내서 Penitentials가 있다. 푸코는 <성의 역사> 1권(1978)에서, 이 책자들이 17세기에 담론으로서의 성과 다양한 단계로 구성된 성 관념을 만들어 내는데 맡았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해 안내서는 중세에 이미 새로운 성 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책자들은 성행위 중 허용된 체위들(실제로는 오직 한 가지 체위만이 허용되었다)과 성행위가 허용되는 날짜, 그리고 성행위의 대상으로서 허용되는 자와 금지되는 자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교회가 진정한 성적 교리문답을 부과하려고 시도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성적 통제는 12세기에 고조되었다.
- 1123년과 1139년의 라테란 Lateran 평의회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성직자들의 결혼과 축첩에 대한 정화운동을 개시하면서 결혼은 성사이므로 지상의 어떤 권력도 그 서약을 종결시킬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때 고해 안내서가 성행위에 부과한 제한들도 되풀이되었다. 40년 후 1179년의 라테란 평의회에서 교회는 "이상 성행위"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면서 동성애자와 피임 성교를 동시에 겨냥했고(Boswell 1981 : 277~86), "자연에 반하는 실금"이라 하여 처음으로 동성애를 비난했다(Spencer 1995a : 114).
- 억압적 법률이 도입되자 성은 완전히 정치화되었다. 후일 가톨릭이 성 문제를 다룰 때 보이는 병적인 집착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미 교회는 신자들의 침실을 엿보는 수준을 넘어서, 성을 국가적 문제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성 문제에 관한 이단의 비정통적 선택들도 성직자의 지배로부터 신체를 해방시키기 위한 반권위적 입장이라고 봐야 한다. 이 반성직자 반란의 명백한 예로 아말릭 파 Amalricians와 <자유 영혼 동지회> 같은 13세기 범신론 종파들의 부흥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성적 행동을 통제하려는 교회의 노력에 맞서, 신은 모든 사람들 안에 있으며, 그 논리적 귀결로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파했다.
- 이단 운동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여성에게 부여한 높은 지위다. 볼페의 말대로, 교회에서 여성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단에서 여성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즉 여성은 남성과 같은 권리를 가졌고, 중세에는 다른 어느 시대에도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사회생활과 이동성을 누릴 수 있었다(Volpe 1971: 20; Koch 1983:247). 이단 종파들, 특히 카타르파와 발도파에서 여성은 성례를 집전하고 설교를 행하고 세례를 주고 사제 서품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발도파 신자들이 정통신앙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가톨릭 주교가 여성에게 설교를 금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카타르 파는 "사색의 여인"이라는 여성상을 숭배했으며, 그것이 단테가 베아트리스를 창조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Taylor 19541 100). 또한 이단은 미혼남녀의 동거를 허락했는데, 이는 동거가 반드시 문란한 행동으로 귀결될 것이라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단의 남녀는 종종 자유롭게 동거했는데, 이것은 초기 교회의 아가페 공동체에서처럼 마치 남매가 한 집에 사는 것과 같았다. 여성공동체도 형성되었다. 베긴 공동체가 그 전형적인 예로, 도시 중산층 여성 평신도들이 (특히 독일과 플랑드르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은 남성의 통제도 받지 않고 수도원의 지배도 받지 않으면서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부양했다(McDonnell 1954;Neel 1989).
- 그러나 이단 운동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운동의 종말은 1533년에 독일 뮌스터에 신시를 건설하려는 재세례파 Anabaptists의 시도와 함께 도래했다. 이 시도는 피비린내 나는 탄압으로 분쇄되었고, 무자비한 보복의 물결이 뒤따랐으며, 이로 인해 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영향을 받았다(Po-chia Hsia 1988a : 51~69). 그때까지는 지독한 박해도 이단의 악마적 묘사도 이단적 신앙의 전파를 막을 수 없었다. 안토니노 디 스테파노 Antonino di Stefano에 따르면, 파문, 재산 몰수, 고문, 화형, 반이단 십자군과 같은 조치 중 어느 것도 이단적 사악함 haeretica pravitatis의 "엄청난 활력과 인기"를 손상시킬 수 없었다(di Stefano 1950: 769). 13세기 초에 제임스 드 비트리 James de Vitry는 "어느 공동체에나 이단의 지지자, 수호자, 신자가 있다"고 썼다. 1215년의 반알비파 십자군이 카타르파의 본거지를 파괴한 후에도 이단은 (이슬람과 함께) 교회가 직면한 주요한 적이자 위협으로 남았다. 이단의 신도는 모든 부문으로부터 채워졌다. 그들은 농민, 하급 사제(이들은 가난한 자들과 공감하여 그들의 투쟁에 복음서의 언어를 덧입혔다), 도시민이었으며, 심지어 소귀족도 있었다. 그러나 통속 이단은 주로 하층계급의 현상이었다. 통속적인 이단은 농촌과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 즉 농민, 수선공, 직조공 사이에서 "그들에게 평등을 설파하고 선지자적·종말론적 예언들로 그들의 마음속에 반란을 조성하면서" 번창했다(같은 책 :776). 북부 이탈리아 트렌토 지방 종교재판소에서 1330년대에도 여전히 열렸던 재판기록을 살펴보면 이단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종교재판은 30년 전에 사도파 Apostolics의 지도자인 프라 돌치노 Fra Dolcino가 그 지방을 지나갔을 때 사도파 신도들을 접대한 사람들을 피고로 삼았다.
- 노동자의 저항을 흐트러뜨리고자 불화를 유도하는 제후들과 지방당국의 성 정책의 또 다른 측면은 매춘의 제도화였다. 매음굴이 개설되었고, 곧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국영 매춘은 당시의 고임금 체제 덕에 가능했는데, 지배층은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 젊은이들의 소란을 잠재울 효과적인 처방으로 간주했다. 젊은이들은 예전에는 나이 든 사람들만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을 "큰집" la Grande Maison(프랑스에서 당시 국영 매음굴을 일컫는 말)에서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Rossiaud 1988). 파도바나 피렌체 같은 유럽의 몇몇 도시에서 동성애가 널리 공개적으로 행해졌는데, 흑사병 이후에는 인구감소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매음굴은 이 동성애에 대한 대책으로 간주되기도 했다.(Otis 1985).
- 정복 이후 수십 년 동안 노동, 질병, 징벌이 아메리카 토착민의 3분의 2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노예무역과 노예노동착취의 중심부이기도 했다. 흑인 수백만 명이 아메리카로 가는 선박에서, 그리고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에서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 신음하다 죽어갔다. 나치 체제를 예외로 하면, 유럽에서는 그와 같은 대량학살 수준의 노동 착취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역시 16~17세기에는 지주와 상인들이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토지를 사유화하고 사회적 관계를 상품화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가난과 죽음이 횡행하는가 하면, 이제 막 떠오르는 자본주의 경제를 침몰시키려는 강렬한 저항이 일기도 했다.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여성과 재생산의 역사는 위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출현은 주로 노동력을 새로운 형태로 편성·분할하고 새로운 노동의 원천을 모색하게 함으로써 (유럽에서든 아메리카에서든,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인)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를 가했기 때문이다.
-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잉글랜드에서는 심지어 인구의 3분의 1이(Laslett 1971 : 53)- 토지를 상실하여 한때 직접 생산하던 음식을 돈을 지불하고 사 먹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이, 노동비용을 절감하는 화폐의 마법 같은 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내외에서 농산물의 수출입을 촉진하는 시장 체계가 발전하고 상인들이 농산물을 매점매석했기 때문에 물가가 상승한 것이다. 1565년 9월 안트베르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말 그대로 길에서 굶어 죽는 와중에" 창고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곡물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Hackett Fischer 1996 : 88).
- 노동자의 식단에 일어난 변화에서 이와 같은 극적인 빈곤화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식탁에서 라드 몇 조각을 제외하고 고기가 사라졌다. 맥주, 포도주, 소금, 올리브기름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Braudel1973 : 127ff; Le Roy Ladurie 1974).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노동자의 식단은 주로 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빵이 지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중세 후기를 대표하는 고기의 풍부함과 비교하면 역사적인 퇴보라 할 수 있다. 크리트 Peter Kriedte는 그 당시 "육류의 연간 소비는 1인당 1백 킬로그램에 달했는데, 이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놀라운 양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1인당 20킬로그램 미만으로 줄어든다"(Kriedte 1983: 52).
- 14-15세기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핵심은 "자유"와 노동량 감소였다. 그러나 16-17세기에는 굶주림이 투쟁의 주요 원인이었고, 투쟁은 빵가게나 곡물창고에 대한 습격, 곡물 수출에 반대하는 폭동의 형태를 띠었다. 이것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기나긴 굶주림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팽창으로 인해 이 시대가 끝났다는 설명은 그럴듯하다. 당국은 이런 공격에 가담한 사람들을 "쓸모없는 인간들", "가난한 것들", "비천한 자들"이라 불렀지만, 사실 그들은 대부분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장인들이었다.
- 결국 16~17세기에 “식량 범죄"가 중대범죄로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녀재판에서 되풀이되는 "악마의 연회"라는 주제가 전형적인데, 이로부터 양고기구이, 흰 빵, 포도주를 먹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미 악마적인 행위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사용한 주요 무기는 그들의 굶주린 몸뚱이였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반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은 방랑하고 구걸하면서 유복한 사람들을 에워싸고, 팔을 붙잡고, 상처를 보여 주어 유복한 이들이 끊임없이 전염과 반란의 공포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16세기 중엽에 한 베네치아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길을 가거나 광장에 들르면 항상 여러 사람이 적선을 구걸하며 에워싸는데, 그들의 낯빛에도 수심이 역력하고, 눈은 보석 없는 반지 같고, 몸은 뼈만 앙상하다."
- 플랜테이션 체제가 자본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했던 것은 단지 그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잉여 노동이 축적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체제가 지금까지 자본주의 계급관계의 패러다임으로 작동하고 있는 노동의 경영, 수출지향적 생산, 경제통합, 국제적 분업의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플랜테이션 체제는 대대적인 노동 집결과 고향에서 뿌리 뽑히고 의지할 곳 없는 예속 노동력으로 공장제에 선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노동비용 절감을 위한 이주노동과 지구화를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특히 노예와 임노동자를 지리적·사회적으로 나누어 놓은 상태에서 "소비재"의 생산을 통해 노예노동을 유럽 노동인구의 재생산에 통합시킨 국제분업의 형성에 결정적인 단계가 되었다. 식민지의 설탕, 차, 담배, 럼주, 면 생산은 1650년대에 노예제가 제도화되고 유럽의 임금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한 다음에야 대규모로 개시되었다(Rowling 1987:51, 76, 85).
- 다른 한편 대도시의 임금은 노예들이 생산한 재화를 시장에 진출시키고 노예노동의 생산물 가치를 실현시키는 매개물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노예노동은 여성의 가내 노동과 마찬가지로 대도시 노동인구의 생산 및 재생산에 확실하게 통합되었다. 나아가 임금은 축적의 수단으로 재정의 되었다. 즉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동원하는 수단으로써, 그리고 임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에 의해 오히려 은폐된 노동자들의 노동 또한 동원하는 수단으로써 정의된 것이다. 유럽 노동자들은 자기가 노예노동의 생산물을 구매한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만약 알았다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까?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여기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없다. 확실한 것은 차, 설탕, 럼주, 담배, 면의 역사는 우리가 공장제의 등장과 관련하여 원자재로써 또는 노예무역의 교환수단으로써 거기에 부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 "수출품들"과 함께 노예들의 피뿐만 아니라 새로운 착취 과학의 씨앗과 노동계급의 새로운 분할도 바다를 건넜기 때문이다. 이 분할에서 임노동은 노예제의 대안이 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노예제에 의지했다.
(리뷰자 주 : <음식의 제국>은 큰 틀에서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무역 항해 루트를 따라가며 주제들을 살펴본다. 그는 16세기 노예무역에 종사하는데, 그는 유럽인이 아니란 말인가? 저자는 지속적으로 이 부분을 강조하는데, 직접적으로 수입해서 부리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 그러나 노예노동이 유럽 임노동자의 생산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유럽 임노동자와 대도시 자본가들 사이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나타났다고, 다시 말해서 저렴한 수입품을 향한 공통된 욕구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공고해졌으리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아메리카 정복에서 보듯이, 사실 노예무역은 유럽 노동자들에게 전대미문의 불행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노예제는 마녀사냥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관리하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거대한 실험장이었으며, 이 방법들은 후일 유럽에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노예제는 유럽 노동자의 임금과 법적 지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예제가 끝난 다음에야 유럽에서 임금이 눈에 띄게 상승하고 유럽 노동자들이 단결권을 얻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 노동자들이 아메리카 정복의 혜택을 누렸다고 보기 힘들며, 특히 그 초기 단계에는 더욱 그러하다. 소귀족과 상인들에게 있어서 격렬한 반봉건 투쟁은 식민지 팽창을 추구하게 만든 촉매였고, 식민지 정복자들은 노동계급이 가장 사무치게 증오하는 집단에 속한 이들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유럽 지배계급들이 아메리카 정복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저항을 분쇄할 용병을 고용할 수 있는 금과 은을 손에 넣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그래서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차례대로 복속되던 시기에 유럽 노동자들이 고향에서 쫓겨나 동물처럼 낙인찍히고 마녀로서 불태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프롤레타리아트 개개인은 명백히 공범자나 마찬가지였다 할지라도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언제나 아메리카 약탈의 공범이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귀족계급은 "하층계급"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협력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초 아메리카행 스페인 선박에 승선할 수 있었던 하층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 약정 노예계약이나 유형의 결과로 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은 그들이 종종 어깨를 맞대고 일한 아프리카 노예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 출신 노동자들은 주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그들을 위험 분자로 간주했으며,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유럽 출신 노동자를 덜 쓰고 그들을 아프리카 노예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법안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인종적 구분선이 그어진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Moulier Boutang 1998). 그때까지는 백인, 흑인, 토착민 간에 동맹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고, 본토에서건 플랜테이션에서건 유럽인 지배계급의 상상 속에 언제나 그러한 동맹에 대한 공포가 존재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이런 공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마녀의 아들이자 토착민 반란자인 캘리번과 먼바다를 항해하는 유럽 출신 프롤레타리아트 트린큘로와 스테파노가 조직한 음모를 그림으로써, 억압받는 자들의 치명적인 동맹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프로스페로의 마법을 통해 지배자들 간의 불화가 치유되는 극적인 대조를 펼쳐 보인다.
-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우에서 흔히 그렇듯이, 프랑스인들은 몽타네-나스카피족의 관대함과 협동심,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에 감동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인디언의 "부실한 도덕"에 충격을 받았다. 몽타네-나스카피족은 사유재산, 권위, 남성 우위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조차 거부했기 때문이다(Leacock 1981 : 34~38).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모든 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인디언을 쓸 만한 무역상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문명의 기본 요소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믿고 교육에 들어갔다.
- 무대, 연단, 정치 및 철학적 상상 등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출현한 것은 중상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출현과 청교도 개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16세기 서유럽이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구현된 것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1612)에 나오는 프로스페로다. 프로스페로는 애리얼의 천상의 영성과 캘리번의 야만적인 물질성을 겸비한 존재다. 하지만 기껏 균형 잡힌 상태에 도달한 듯하더니 결국 노여움을 드러냄으로써 거대한 존재의 사슬에서 "[남성]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독자적인 지위에 대한 자부심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캘리번을 무찌르면서 그는 "이 어둠은 나의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했다. 여기서 청중들은 천사와 야수의 성질을 함께 나타내는 우리 인간이 정말로 문제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프로스페로에게는 예감으로만 존재하던 것이 17세기에 이르러 이성과 육체의 열정 간의 갈등으로 공식화된다. 이 갈등은 고전적인 유대 기독교 주제들을 재개념화 하여 새로운 인류학적 패러다임을 낳았다. 그 결과 막 이승을 떠난 영혼을 소유하기 위해 천사와 악마가 펼치던 영세의 접전과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제 이 갈등은 한 인간 안에서 전개된다. 인간 자체가 서로 다른 요소들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충돌하는 전쟁터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인색함, 신중함, 책임감, 자기 통제 같은 "이성의 힘"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방탕함, 게으름, 생명 에너지의 체계적인 탕진 같은 "육체의 저급한 본능들"이 있다. 전쟁은 수많은 전선에서 전개된다. 이성은 육욕에 눈이 먼 자아의 공격 앞에 방심해서는 안되며 "살덩어리의 지식”이 마음의 힘을 더럽히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는 신체가 완전히 관계적인 용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체는 이제 더 이상 특정 실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지배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신체"가 되었다면 신체는 "프롤레타리아트", 특히 약하고 비이성적인 여성(햄릿이 말한 "우리 안의 여성"을 생각해 보라) 혹은 "거친" 아프리카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때 신체는 제약의 기능, 즉 이성으로부터의 "타자성"을 통해서만 규정되며 내적 전복의 대리자로 다뤄진다. 하지만 이 “거대한 야수"에 대한 투쟁은 “하층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자연 상태"에 대한 전투에서 이 투쟁을 내부화했다. 이미 확인한 대로 프로스페로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 역시 "이 어둠은 내 것"임을, 다시 말해서 캘리번이 프로스페로의 일부임을 인정해야만 했다(Brown 1988; Tyllard 1961 : 34~35). 이런 인식은 16세기와 17세기의 문학작품에 만연해 있다.
- 따라서 자본주의 발달 초기의 특징이었던 신체에 대한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새로운 자연철학의 프로젝트였던 신체의 기계화는 국가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펼쳐진 최초의 실험들에서 초점이기도 했다. 마녀사냥에서 초점을 옮겨 개인의 재능에 대한 청교도의 꼼꼼한 탐구와 기계론적 철학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사회적 입법행위, 종교개혁, 우주의 과학적 합리화처럼 겉으로 봐서는 연관관계를 찾을 수 없는 경로들이 하나의 실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인간 본성을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이때 본성의 힘은 새로운 경로로 옮겨져 노동력의 개발과 형성에 종속되어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체는 이 과정에서 점점 더 정치화되었다. 즉, 사회적 규율의 외적 한계, "타자"로 탈자연화되고 재정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7세기 신체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신체의 종말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신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특정한 유기적 실체를 의미하는 대신, 계급 관계의, 그리고 착취 지도에서 계급관계를 만들어 내는, 꾸준히 변동하는 경계들의 정치적 기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 이는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진행된 사회적 쇠락의 과정에서 여성들이 감내한 "원죄"와도 같았고, 따라서 지금까지도 제도적 관습과 남녀관계를 특징짓는 여성혐오증을 이해하려면 계속 돌이켜볼 수밖에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반면 극히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연구할 때마저 마녀사냥이 마치 계급투쟁의 역사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망각해 버린다. 하지만 두 세기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수십 만명의 여성들이 화형이나 교수형, 혹은 고문을 당했다는 점에서 [맑스주의자들이] 대량살상에 대한 의혹을 품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다. 또한 마녀사냥이 신세계의 식민화 및 원주민 말살, 잉글랜드의 인클로저, 노예무역의 출현, 부랑자와 거지들에 대한 "피의 법률" 제정과 동시에 일어났고, 봉건제가 종식된 후 자본주의가 "이륙"하기 전 무주공산과도 같던 시절에 절정을 이루었다는 점은 유의미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유럽 농민들은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곧 완벽한 역사적 패배를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와 관련된 시초 축적의 양상들은 그야말로 비밀에 부쳐져 있다.
- 독일에서는 독일 왕자의 동의를 받아 루터파 교회가 지명한 "마을 방문자"가 이런 비난을 조장했다(Strauss 1975 : 54).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목사와 행정당국이 의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들은 맹렬한 비난이 확실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또한 피의자들이 완전히 고립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옷에 표식을 달도록 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들을 알아서 멀리하도록 만들었다(Massali 1988 : 112).
(리뷰자 주 :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주홍글씨>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 마녀사냥은 인구집단 내에 집단적인 정신질환을 유발하기 위해 멀티미디어 선동을 활용한 유럽 최초의 박해이기도 했다. 인쇄매체가 최초로 한 일은 마녀들의 세세한 악행과 가장 유명세를 탄 재판을 홍보하는 소책자를 통해 마녀로 인한 위험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Mandrou 1968: 136). 이를 위해 예술가들을 모집했는데, 이중에 독일인 발둥 Hans Baldung은 가장 지독한 마녀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박해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법학자·치안판사·악마 연구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종종 한 인물처럼 행동하곤 했다. 이들은 마녀 박해를 지지하는 주장을 체계화하고 비판에 답했으며, 법적인 장치를 완벽하게 갖춰 놓음으로써 16세기 말엽에는 표준화된, 거의 관료적인 수준의 마녀재판 형식을 마련했다. 이는 국가 간에 자백의 형식이 유사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업무 중에 철학자나 과학자 같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협력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두 부류는 오늘날에도 근대 합리주의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다. 이런 협력의 대상에는 영국의 정치 이론가인 흡스가 있었는데, 그는 마법의 존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사회적 통제수단으로써 박해를 인정했다. 역사학자 로퍼 Trevor Roper가 16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이자 몽테스키외라고 일컬은 보댕은 프랑스의 유명한 변호사이자 정치이론가로서 마녀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올라 유혈사태를 촉구한 마녀의 최대 적수였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작성한 것으로 유명한 보댕은 재판에 수차례 참석하고 "증거들"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집필했는데(Demomania, 1580), 여기서 그는 마녀들을 화염 속에 던져 넣기 전에 "자비롭게" 교살시킬 것이 아니라 산 채로 화형에 처해야 하고, 소각시키더라도 죽기 전에 살이 썩어 들어가도록 해야 하며, 아이들도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잉글랜드에서는 16세기까지 대부분의 마녀재판이 에섹스 지역에서만 벌어졌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에섹스에서 대부분의 토지는 인클로저에 묶이게 되었지만 토지사유화가 진행되지도, 의제에 올라본 적도 없었던 영국의 다른 섬들에서는 마녀사냥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서부 고원지역이다. 이 두 곳에서는 마녀 박해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는데, 집단적인 토지소유 제도와 혈연관계가 지배적이어서, 마녀사냥을 가능케 하는 국가와의 공모와 공유지의 분할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장로교 개혁의 영향 하에 자급 경제가 사라져 가던 영국식의 사유화된 스코틀랜드 저지대에서는 마녀사냥 때문에 최소한 여성 인구의 1%에 해당하는 4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반면, 고원지대와 아일랜드 여성들은 마녀를 화형에 처하던 시절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 이탈리아의 역사가 무라로 Luisa Muraro는 <게임의 숙녀> a Signadel Gioco (1977)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연구는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알프스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다루고 있다.
"발디 피에메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고 한 명이 어느 밤 자신이 시어머니와 함께 산에 있다가 멀리서 큰 불이 난 것을 보았다고 판사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도망가거라, 도망가." 그녀의 대모가 말했다. "이건 게임의 숙녀의 불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방언에서 '게임' gioco은 사 바트에 해당하는 가장 오래된 단어다(발 디 피에메의 재판에서는 아직도 이 게임을 지휘하는 여성에 대한 언급이 있다)."
- 계급 반란은 성적 범죄와 함께 사바트에 대한 묘사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사바트는 성적으로 난잡한 괴물 같은 집단임과 동시에 전복적인 정치 집단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가담자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설명과, 악마가 마녀들을 사주해서 지배자에게 저항하도록 한다는 식의 시선에서 절정을 이룬다. 마녀와 악마 사이에 맺어진 조약을 마치 투쟁 중인 노예와 노동자들이 맺곤 하던 조약처럼 탄원이라고 불렀다는 점(Dockes 1982 : 222; Tigar and Levy 1977 : 136)도 중요하다. 박해자들의 눈에는 악마가, 영혼을 팔려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모든 자연적인 법칙과 사회적인 법규를 어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 권력, 부를 약속해 준다는 의미였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헨리 카멘에 따르면 사바트의 형태학에서 핵심적인 주제인 식인 풍습에 대한 위협 또한 농민반란의 형태학과 닮아 있다. 반란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고혈을 짜내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이들을 먹어 버리겠다는 위협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 스위스 일부 지역에서는 마녀사냥 초반에 마녀를 Herege("이단")이나 Waudois("발도파")라고 불렀다(Monter 1976:22; Russell 1972 : 34ff). 게다가 이단들 역시 진정한 종교를 등졌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고, 남색, 영아살해, 동물숭배 등 사술의 영역에 진입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부분적으로 이는 언제나 교회가 경쟁 종교를 상대로 벌이던 의례적인 비난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카타르 파에서 아담 파 Adamites에 이르기까지 성적인 혁명은 이단 운동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특히 카타르 파는 교회의 여성비하적 시각에 도전하면서 결혼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생식마저 반대했다. 이를 영혼을 옭아매는 행위로 본 것이다. 이들은 또한 마니교를 포용했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마니교는 중세 후반으로 갈수록 교회에서 이 세상에 현존하는 악마의 존재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 데에, 그리고 마법을 반교회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종교재판의 관점에 원인을 제공했다. 따라서 이단과 마녀의 사술 간의 지속성은 최소한 마녀사냥 초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마녀사냥은 이단과는 상이한 역사적 백락에서 발생했다. 이미 유럽의 지형은 일차적으로는 흑사병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과 혼란을 통해(이는 유럽사의 분수령이다), 그리고 그 이후 15세기와 16세기에는 경제 및 사회적 삶에 대한 자본주의적 재조식 화가 야기한 계급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극적으로 탈바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공통된 요소들(예를 들어 밤의 떠들썩한 연회)이 이단에 대한 교회의 투쟁에서와 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단과 사술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사술을 여성 범죄로 여겼다는 점이다. 박해가 절정에 달했던 1550년과 1650년 사이에는 특히 그랬다. 이보다 더 앞선 시기에는 남성들이 피의자의 40%에 달했지만 이후 박해받는 사람의 수가 꾸준히 줄어들었고, 그것도 대체로 집시나 하층계급 성직자를 비롯해서 부랑자, 거지, 뜨내기 노동자 같은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16세기경에는 악마 숭배에 대한 규탄이 정치 및 종교 투쟁에서 공통적인 주제였다. 분위기가 한창일 때는 마녀를 규탄하지 않는 주교나 정치인이 없을 지경이었다. 청교도들은 가톨릭, 특히 교황이 악마에게 봉사한다고 비난했다. 루터를 비롯해서 스코틀랜드의 녹스, 프랑스의 장 보댕 등 많은 이들이 마술을 부린다고 비난받았다. 유대인들 역시 악마를 숭배한다는 의례적인 비판을 받아서, 이들을 그림으로 그릴 때는 뿔과 발톱을 함께 그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사실은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 마법이라는 범죄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한 이들의 80% 이상이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여성들이 박해를 받은 범죄분야는 영아살해이고 다음이 마법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 악마 연구자들은 마녀가 여성임을 강조하면서 신이 남성에게는 그런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브라우너(1995) 의지적처럼 이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던 주장은 변화를 겪었다. <마녀들의 망치>의 저자들은 여성이 마법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이들의 "만족을 모르는 욕정"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마틴 루터와 인본주의 작가들은 여성들의 도덕적·정신적 약점을 타락의 기원으로 강조했다. 어쨌든 모두 여성을 사악한 존재로 꼽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이단 박해와 마녀 박해 사이의 더 큰 차이는 마녀 박해에서는 성도착 및 영아살해에 대한 비난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따라서 피임술을 사실상 악마 화했다는 점이다. 피임, 낙태, 마법을 처음으로 같은 범주로 묶은 것은 다음과 같은 불평을 담은 이노센트 8세의 교서(1484)였다.
- 또 다른 문제는 근대적인 과학 수단의 등장을 마녀사냥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머천트는 <자연의 죽음」(1980)에서 이 관점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머천트에 따르면 마녀 박해의 뿌리는 과학혁명, 특히 데카르트적인 기계론적 철학의 등장이 촉발시킨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이 전환 때문에 자연, 여성, 지구를 돌봄의 어머니로 바라보던 유기적인 세계관이, 이들을 "고정된 자원"의 지 위로 강등시키는 기계적 관점으로 대체되었고, 이로써 이들을 착취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윤리적 제약들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Merchant 1980: 127). 마녀로서의 여성은 자연의 "야성적인 면", 즉 자연에 존재하는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으며, 따라서 신과학이 수행하려는 프로젝트에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의 화신으로 박해받았다. 머천트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저작 속에서 근대 과학의 출현과 마녀 박해 간의 연관관계를 보여 주는 증거를 찾는다. 머천트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라는 베이컨의 사고가 고문을 통한 여성 심문 방식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자연을 지배할 수 있고 벗겨낼 수 있으며 강간할 수 있는 여성으로 그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Merchant 1980 : 168~72). 머천트의 설명은 과학적 합리주의가 진보의 견인차였다는 가정에 도전한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 과학 때문에 발생한 인류와 자연 간의 심원한 단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마녀사냥을 환성 파괴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자연계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를 여성에 대한 착취와의 관계 속에 바라본다.
(리뷰자 주 : <그린나이트>가 떠오른다.)
- 내가 앞서 제시했던 몸과 마녀의 역사는 "캘리번과 마녀"라는 언급 속에 축약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캘리번과 마녀는 식민화에 저항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상징하는 <템페스트>의 등장인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이란 신세계 주민들의 종속과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일어났던 유럽 민중들, 특히 여성들의 종속 간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토지에서 지역공동체 전체를 강제로 몰아냈고, 빈곤이 엄청나게 확산되었으며, 민중들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관계를 파괴하는 "기독교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또한 구세계에서 발달된 억압의 형태들이 신세계로 이전된 뒤 다시 유럽으로 재도입되는 꾸준한 교차 수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의 차이를 과소평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 사술을 부린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과거에는 역사가들이 대체로 유럽에 국한된 현상으로 여겼던 일이다. 단 한 가지 공인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세일럼의 마녀재판으로 이는 신세계 마녀사냥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초점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악마 숭배라는 비판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식민화에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이 장에서의 나의 논의를 위한 기초를 잡아준 두 가지 문헌을 특별히 언급해야만 한다. 하나는 잉카 사회와 식민지 페루의 젠더 관계에 대한 재규정과 마녀사냥에 대한 연구서인 실버블랫의 <달, 해, 그리고 마녀들>(1987)로서 (내가 아는 한) 마녀라는 이유로 박해당한 안데스 지역 여성들의 역사를 복원한 최초의 영어 문헌이다. 다른 하나는 파리네토의 <마녀와 권력>(1998)이라는 에세이집으로 아메리카의 마녀사냥이 유럽의 마녀재판에 미친 영향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책의 흠이라면 마녀 박해가 젠더 중립적이었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 하지만 인도 제도 파괴에 대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Bartolome De Las Casas의 설명이나 식민지 정복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어보면 스페인인을 이 왜 이런 관행에 충격을 받았을까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이들 또한 하나님과 금을 위해 아무 거리낌 없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고 코르테즈 Cortez에 따르면 1521년에는 단지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기 위해 십만 명을 도륙했다(Cockroft 1983: 19). 이와 유사하게 식민지 정복에 대한 기록에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서 발견한 식인 의례가 유독 부각되지만, 이는 그 시절 유럽에서 흔했던 의료시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6세기와 17세기, 심지어는 18세기에마저 인간의 피(특히 비명횡사한 사람들의 피)는 여러 가지 액체에 인간의 살을 담가서 추출해낸 미라수 mummy water의 형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간질을 비롯한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데 흔하게 사용되었다. 게다가 "살, 피, 심장, 두개골, 골수 등 여러 신체 부위들과 관련된" 이런 식인 풍습은 "사회 주변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가장 존경받는 집단 내에서도 시행되었다”(Gordon~Grube 1988:406~407). 따라서 스페인인들이 1550년대 이후 원주민들에 대해 느꼈던 새로운 공포는 단순히 문화적 충격에서 기인했다고 보기가 힘들다. 이는 오히려 노예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서 인격을 박탈하고 이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식민화의 논리 속에 내재한 반응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 이런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라틴아메리카 혁명군들이 캘리번의 어머니인 마녀 시코락스가 아니라 캘리번을 식민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캘리번은 주인에게서 배운 언어로 주인을 저주하는 방식으로만 주인에게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반란에 있어서는 "주인의 수단"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캘리번은 속임수에 넘어가서 자신의 해방이 강간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자신이 신으로 숭배하는 신세계의 일부 기회주의적 백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로 성취될 수 있다고 믿게 될 가능성이 있다. 대신 "달을 통제하고, 조수간만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녀 시코락스(<템페스트>, 5막, 1장)라면 아들에게 대지, 물, 나무, "자연의 금고" 같은 지역적인 힘과 공동체적 유대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도록 가르쳤으리라. 고난의 수 세기를 거치면서도 공동체적 유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해방투쟁에 자양분을 공급해 왔고, 이미 어떤 약속의 형태로 캘리번의 상상을 사로잡았다.
- 위 질문은 이탈리아의 역사가 파리네토의 주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신세계의 마녀 사냥이 유럽의 마녀사냥 연대표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사술 이데올로기를 정교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유럽의 마녀사냥이 16세기 후반에 대중적인 현상이 되었던 것은 아메리카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파리네토의 주장이다.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당국과 성직자들은 악마 승배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마녀라고 믿게 되었으며, 결국 이 확신을 자국 내에서 벌어진 기독교화 공세에 적용시켰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악마의 땅'이라고 묘사한 식민지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유럽 국가들이 정치전략으로서 절멸을 채택했다는 지점이다. 이 전략이 16세기 말엽에 시작된 마녀 사냥의 대량화와 위그노 교도들의 대학살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Parinetto 1998:417~35). 파리네토의 관점에서 이 두 종류의 박해가 연결되어있다는 핵심적인 증거는 인도제국에서 온 보고서들을 유럽의 악마 연구가들이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파리네토는 주로 장 보댕에 주목했지만, 프란체스코 마리아 구아조도 언급하고 있고, 아메리카의 마녀사냥을 이식함으로써 발생한 "부메랑 효과"의 예로 심문관 랑크르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랑크르는 바스크 지방의 라부르에서 수개월 간 박해를 자행하며 모든 사람들을 마녀라며 맹비난했다. 또한 파리네토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로, 16세기 후반에 유럽의 사술 레퍼토리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주제들을 언급한다. 식인 풍습, 아이들을 악마에게 봉헌하는 것, 성수와 마약에 대한 언급, 동성애(남색)를 악마주의와 동일시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신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파리네토의 주장이다.
- 처음으로 체포된 서인도제도 노예 티투바인들의 점치는 행위가 세일럼 재판에 불꽃을 당겼고, 영어권 영토에서 있었던 마지막 마녀 박해 가 1730년 버뮤다에서 죽은 흑인 노예 사라 바셋 Sarah Bassett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Daly 1978: 179). 사실 18세기에 이르자 마녀는 서인도제도의 토착 마법인 오비 Obeah를 실행하는 아프리카인들을 의미하게 되었고, 농장주들은 이 오비를 반란선동으로 여겨 겁을 집어먹고 악마화했다.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부르주아의 레파토리에서는 마녀사냥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화와 기독교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식민화된 사회의 신체에 확실히 이식되어 피식민 공동체 스스로 자신들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실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에르가스툴라는 로마에서 노예를 모아둔 "지하 감옥"이다. 이곳의 노예들은 사슬에 묶인 채로 잠을 잤다. 당시 어느 지주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에르가스툴라의 창문은 너무 높아서 노예들이 닿을 수 없었다고 한다(Dockes 1982 : 69). 로마가 정복한 지역 중에서 "노예가 자유민보다 훨씬 많은 곳이라면 거의 어디에나" 에르가스툴라가 있었다(같은 책 : 208). 에르가스톨로(ergastolo)라는 명칭은 여전히 이탈리아의 형법 용어로 쓰이는데, 그 의미는 "종신형"이다.
- 탈주 노예 공동체의 가장 좋은 예는 300년경에 갈리아 지방을 점령한 바코드(Bacaude)다(Dockes, 1982:87). 그들의 이야기는 기억할 가치가 있다. 그들은 로마 제위를 놓고 싸우던 경쟁자들의 잦은 전투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은 자유 농민과 노예였다. 그들은 농기구로 무장하고 훔친 말을 타고 패거라를 이루어 유랑했다. 그래서 그들을 "싸움패"(band of fighters)라 불렀다(Randers-Pehrson 1983:26). 도회인들도 가담했다. 그들은 자치공동체를 형성하고, “희망"이라고 적힌 동전을 주조하고, 지노자를 선출하고, 사법제도를 운영했다. 그들은 평지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군의 막시밀리앙에게 패배한 후로 5세기에 대대적으로 "게릴라" 전법을 펼쳐서 반복되는 군사작전의 대상이 되었다. 그 같은 407년에 있었던 "격렬한 봉기"의 주인공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르모리카(브리타니) 전께서 그들을 무찔렀다(같은 책 : 124). 여기서 "반란 노예와 농민이 자율적인 '국가'조직을 만들었다. 로마 관리를 추방하고, 지주의 땅을 몰수하고, 노예주를 노예로 삼고, 사법체제와 군대를 조직했다"(Dodkes 1982 :87). 그들을 탄압과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코드는 결코 완전히 패망 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들은 바코드를 정복하기 위해 야만적인 침략 부족들과 협의해야 했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서고트족을 스페인으로부터 소환하여 갈리아 지방의 땅을 후하게 하사했는데, 이것들이 바코드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였다. 황제들은 바코드를 정복하기 위해 훈족을 고용할 정도였다(Renders-Pehrson 1983 : 189). 그러나 바코드는 전진해 오는 훈족의 아틸라에 맞서 비스고트족과 알라니족과 힘을 합해 싸우며 그 존재를 계속 드러낸다.
- 발도파 내에서 스스로를 부양하는 올바른 방법들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1218년 베르가모 집회에서 발도 파가 크게 두 줄기로 갈리면서 이 문제가 결판났다. 프랑스 발도파는 탁발에 의지하는 삶을 지지했고, 몸바르디아 발도파는 자신의 노동에 의지하는 삶을 지지하여 노동자들의 집단 또는 조합을 형성하는 쪽으로 나아갔다(di Stefano 1950: 775). 롬바르디아 발도파는 주택 등의 사적 소유권을 유지했으며 결혼과 가족을 허용했다(Little 1978 : 125).
- 엥겔스의 말에 따르면 다볼파는 보헤미아에서 독일 귀족에 맞서 일어난 후스파(Hussite) 민족해방운동의 혁명적·민주적 당파였다. 엥겔스는 그들에 관해서 "그들의 요구는 모든 봉건적 압제를 끝장내고자 하는 농민과 도시 하층민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었다”고만 썼다(Engels 1977:44n). 그러나 다볼파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레아의 <중세 종교재판소>(The Inquisition of the Middle Ages)에 자세하게 나온다(Lea 1961 :523~40). 그들은 농민과 빈민이었고, 귀족과 신사를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으며, 공화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1419년에 프라하의 후스파가 처음으로 공격받았을 때 다볼산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다볼파라 불린다. 그들은 거기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나중에 독일 귀족에 대항하는 저항 중심지이자 공산주의의 실험장이 되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프라하에서 오자마자 각자의 소유물을 커다란 상자에 모아 넣어서 공유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집단적 조치는 얼마 못 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정신은 그 후로도 한참을 살아남았다(Demetz 1997 : 152-157). 다볼파는 그들의 목적에 보헤미아의 독립과 몰수재산의 유지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보다 온건한 칼릭스턴파(Calixtins)와 구별된다(Lea 1961 : 530). 그러나 그들은 외적에 맞서 후스파를 결집시킨 다음의 4대 원칙에는 분명히 동의했다.
- 보고밀파가 카타르파에 준 영향을 입증하는 증거 중에 "서유럽의 카타르파가 보고밀파로부터 인계받은" 두 저작이 있다.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The Vision of Isaiah)과 <비밀 식사>(The Secret Supper)로, 웨이크필드와 에반스의 카타르파 문헌 논평에서 인용되고 있다(Wakefield and Evans1969 : 447~465). 보고밀파와 동방교회의 관계는 카타르파와 서방교회의 관계와 비슷했다. 마니교 주의와 반출산 주의는 차치하고도, 비잔틴 당국은 보고밀파의 "급진적 무정부주의"와 시민 불복종, 그리고 계급적 증오를 경계했다. 보고밀파에 적대적인 장로 코스마스(Cosmas)의 설교에 따르면 "그들은 주인에게 복종하지 말고, 부자를 매도하고, 국왕을 증오하고, 장로를 조롱하고, 귀족을 비난하고, 국왕에게 봉사하는 자들을 신의 눈에는 용납할 수 없는 자들로 간주하라고 가르치며, 모든 농노에게 영주를 위해 일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 이단은 발칸지역의 농민에게 심원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고밀파는 민중의 언어로 설교했고, 민중은 그들의 주장을 이해했다. 느슨한 조직, 악의 문제에 관한 매력적인 해결책, 사회적 저항에의 헌신은 그 운동을 사실상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Browning 1975: 164~166). 이단에 대한 보고밀파의 영향은 13세기에 이르러 흔히 사용된 "버거리"(buggery)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단어는 처음에는 이단을 지칭하다가 나중에는 동성애를 가리키게 되었다. (Bullough 1976a : 76ff),
- 재세례파는 정치적으로 "중세 후기의 사회운동과 종교개혁이 불 붙인 새로운 반교권 운동"을 대표했다. 그들은 다른 중세 이단들처럼 경제적 개인주의와 탐욕을 비난하고 기독교적 공동체주의를 지지했다. 재세례파의 뮌스터 점령은 도시의 봉기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에 이르기까지 북부 독일을 휩쓸던 농민전쟁 시기에 이루어졌다. 동업조합들은 1531년에 뮌스터시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시의 명칭을 신 예루살렘으로 바꿨으며, 재세례파 네덜란드 이민자들의 영향을 받아 재화 공유에 기반을 둔 공동체적 정부를 설치했다. 신 예루살렘의 기록물은 파괴되었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오로지 적대자들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졌다. 따라서 우리는 사건들이 전승되어 온 대로 일어났으리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신 예루살렘에서 여성이 처음에는 높은 수준의 자유를 누렸다고 한다. "그들은 대의에 찬성하지 않는 남편들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정부가 1534년에 일부다처제를 도입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끝이 났다. 이 결정에 대한 여성의 "격한 저항"이 일어났다. 저항한 여성들은 탄압을 받았는데, 감옥에 갇히거나 때때로 사형당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Po-Chia Hsia 1988a : 58~59).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동업조합들이 "이행"에서 여성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건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실 그들이 임노동에서 여성을 배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선전활동을 벌였다는 점과 그들이 마녀사냥에 대해 반대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 그래서 공창의 확산은 심지어 피렌체에까지 번진 반동성애 선전을 동반했다. 원래 피렌체의 사회조직에서 동성애는 "나이, 혼인 여부,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남성들을 매혹시켰던" 중요한 부분이었다. 피렌체에서 동성애가 워낙 일반적이라 창녀들이 남장하고 호객행위에 나서곤 했다. 1403년의 두 조치가 변화의 신호였다. 피렌체 당국은 먼저 "이상 성행위자"(sodomites)의 공직 취임을 금지했고, 동성애를 근절하기 위해 "예절청"(Office of Decency)이라는 감시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예절청이 취한 첫 조치는 의미심장하게도 새로운 공창을 열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1418년이 되어서도 당국은 여전히 도시에서 이상 성행위를 일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Rocke 1997: 30-32.35). 피렌체 정부가 인구감소와 "이상 성행위"의 대책으로서 공적자금을 지원받는 매춘을 장려한 것은 트렉슬러(Richard C. Trexler, 1993)의 다음 글에서 볼 수 있다. "15세기의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처럼, 피렌체에서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매춘이 그보다 훨씬 더 도덕적·사회적 함의가 큰 두 악과 싸운다는 믿음이 보편적이었다. 하나는 남성의 동성애였는데, 이것이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결국에는 모든 차이와 예법을 흐릿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적자 인구의 감소였는데, 이것은 결혼하는 경우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같은 책 : 32). 트렉슬러는 14세기 후반과 15세기 초반의 루카·베네치아·시에나에서도,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의 확산·인구감소·공창에 대한 공적 지원 사이에 상호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매춘부의 수가 증가하고 사회적 힘이 강해지면서 반동이 일어났다고도 지적한다. "15세기 초 피렌체의 설교자와 정치인은 여자와 남자가 비슷해 보이는 도시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믿었다. 한 세기 뒤에 그들은 상층 계급 여성이 매음굴의 창녀와 구분되지 않는다면 과연 도시가 오래갈 수 있을 것인지 자문했다"(같은 책 : 65).
-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민(Samir Amin 1974)을 참고할 것. 16~17세기의 -그리고 그 후의- 유럽에서 노예제가 존재했음을 강조하는 것은 유럽 역사가들이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보노는 이 망각이 "아프리카 쟁탈전"의 산물이며, 이 쟁탈전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제를 중식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으로서 정당화되었다고 말한다. 보노는 이것이 유럽의 엘리트가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내세우는 유럽에서 노예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리뷰자 주 : 주석에서는 이와 같이 주장하는데 어째서 본문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유럽과 아메리카를 비교해가며 노예의 유무를 따졌던 걸까? 실질적인 노동력으로서 직접 유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나? 이 부분과 유럽에서의 마녀사냥이 신세계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조금 미진한 점을 느꼈다.)
- 유럽에서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된 적은 없었다. 노예제는 주로 가내 여성 노예의 형태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이 되자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다시 수입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에서는 16세기 내내 노예제를 부과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그 결과 공공부조의 도입 후 구빈원과 교정원이 세워졌다. 잉글랜드는 이 분야에서 유럽을 선도했다.
- 초기 모계사회의 여성과 자연 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생태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새롭게 부각되면서 머레이의 주장이 최근 몇 년간 각광받았다. 마녀를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숭배했던 고대 여성 중심적 종교의 수호자로 생각했던 이들 중에는 콘드렌이 있다. <뱀과 여신>(1989)에서 콘드렌은 마녀사냥은 기독교가 처음에는 고대 종교의 여사제들이 악마적인 목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사용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나중에는 아예 이들이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함으로써 고대 종교의 여사제들을 몰아내려는 지난한 과정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Condren 1989: 80-86). 이런 맥락에서 콘드덴이 제시한 가장 흥미로운 주장 중 하나는 기독교의 사제들이 여성의 재생산력을 전유하려 했던 시도와 마녀 박해 간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다. 콘드렌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의 사제들이, 재생산의 기적을 수행하고, 불임여성이 임신할 수 있게 만들어 주며, 신생아의 성을 바꾸고, 초자연적인 낙태술을 시행하며,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현명한 여성들"과 진정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는가를 보여 준다(Condren 1989 :84-85).
- 로버트 만드로우가 살펴본 바와 같이 남성들이 워낙에 여성이 자신을 발기부전으로 만들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마을 성직자들은 "매듭 묶기"(남성들을 성적 불구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수단)의 전문가로 의심되는 여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Mandrou 1968 : 81-82, 391ff.; Le Roy Ladurie 1974 : 204~205; Lecky 1886: 100).
- Thorndike 1923-58v : 69; Holme 1974 : 85-86; Monter 1969 : 57-58.
셀리그먼(Kurt Seligman)은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까지는 연금술이 용인되었지만,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군주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적고 있다. 청교도 국가에서는 연금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 연금술사들은 금속을 금으로 바꾸겠다고 해놓고서는 실행하지 못하는, 연기 를 파는 사람들로 묘사되었다(Seligman 1948:126ff). 연구 중일 때는 이상한 병과 도구에 둘러싸여 주위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러는 동안 길 건너편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가난한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연금술사에 대한 존슨(Ben Johnson)의 풍자적 묘사는 이 같은 새로운 태도를 반영한다. 점성술 또한 17세기까지 성행이었다.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악마 연구>(Demonology, 1597)에서 점성술은 무엇보다 계절과 날씨 예측에 관한 연구에 국한될 경우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로즈(A. L. Rowse)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성과 사회>(1974)에서 16세기 말한 점성술사의 삶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도 남성 마술사는 약간의 어려움과 간열적인 위험을 감수하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앨런(Allen)과 홉스(Hubbs)는 <아틀란타를 넘어 : 연금술을 통한 변화에서 여성의 운명> (Outrunning Atlanta : Feminine Destiny in Alchemic Transmutation)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연금술 작업에서 반복되는 상징은 생물학적 창조 과정에 대한 여성의 헤게모니를 전복하려는, 혹은 심지어는 저지하려는 집착을 연상시킨다. ... 이 지배욕은 아테나를 머리로 낳은 낳은 제우스나 가슴뼈로 이브를 자연계에 아담 같은 이미지에서도 나타난다. 자연계에 대한 통제력을 손에 넣기 위한 원시적인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연금술사는 모성의 마법을 추구할 뿐이다. ... 따라서 위대한 연금술사 파라셀수스(Paracelsus)는 '인공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사람이 여성의 신체와 생모의 신체 외부에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다(Allen and Hubbs 1980: 213)."
- 데스콜라(Philippe Descola)는 아마존 상류지역에 살던 한종족인 아추아르(Achuar)인들 사이에서는 "효과적인 경작을 위한 필요조건이 텃밭 수호정령인 눈쿠 (Nunkui)와의 직접적이고도 조화로우며 꾸준한 교류에 달려 있다"고 적고 있다(p. 192). 이는 모든 여성들이 텃밭에 있는 식물과 약초들이 잘 자라라는 의미에서 마법적인 주문을 외우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은밀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같은 책 192). 텃밭을 보호해 주는 정령과 이 텃밭의 주인인 여성 간의 관계는 아주 친밀하기 때문에 이 여성이 죽으면 "텃밭도 따라 죽는다. 결혼하지 않은 딸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여성도 이전 텃밭 주인이 만들었던 관계를 감히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따라서 필요한 경우에도 아내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지 못한다. ... 어떤 남성에게 더이상 텃밭을 경작해서 식사를 만들어 줄 여성(어머니, 아내, 여자 형제나 딸)이 없을 경우 자살을 하는 수밖에 없다(Descola 1994: 175).
- 타키 온코이라는 이름은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사로잡은 무아지경의 춤사위를 일컫는 것이다.
- 파리네토는 아메리카 인디언 "야만인"들의 몰살과 위그노의 몰살 간의 연관관계는 산 바르톨로메의 밤(Night of San Bartholome) 이후에 나타난 프랑스 청교도들의 의식과 문화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확인된다고 적고 있다. 프랑스 청교도들의 의식과 문화는 그 이후로 식인자들에 대한 몽테뉴의 수필에, 그리고 이와는 아주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유럽의 마녀를 통해 식인 풍습 및 남색 성향의 인디오를 연상한 장 보댕의 사고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파리네토는 프랑스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야만인들과 위그노들 간의) 이 같은 연관성이 16세기의 마지막 및 십 년간 절정에 달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인들이 자행했던 대학살(1565년 플로리다에서 프랑스 식민자 수천 명을 무터교도라는 이유로 학살한 것까지 포함해서)은 스페인 지배에 대항하는 투쟁을 진압하는 데 "폭넓게 사용되던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Parinetto 1998 : 429-30).
- "근대적 변화와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개념화된 [아프리카] 마녀 사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대해서는 <아프리카학 비평>(African Studies Review)의 1998년 12월호를 참조할 것. 이 호는 이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다이앤 시카비와 페터 게쉬르(Diane Ciekaway and Peter Geschiere)의 <마법의 억제 : 후기 식민 아프리카에서 갈등하는 시나리오들>(Containing Witchcraft : Conflicting Scenarios in Postcolonial Africa, 같은 책 :1-14)을 볼 것. 또한 아담 아쉬포스(Adam Ashforth), <남아프리카의 마법과 폭력, 그리고 민주주의>(Witchcraft, Violence and Democracy in South Africa, Chicago : Univ. of Chicago Press, 2005)와 알리슨 베르구(Allison Berg)가 제작 및 감독을 맡은 다큐멘터리 비디오 <마녀의 추방> (Witches in Exile, California Newsreel, 2005)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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