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마리옹 고드프루아 / 자비에 덱토 / 강현정
출판 : 시트롱마카롱
출간 : 2018.11.01
너무 맛있게 읽었다.
이 책은 시대순으로 진행되는 역사적 순간들, 그리고 각 순간을 함께하거나 더욱 빛나게 한 요리들 50선을 선정해 당시 일화와 레시피를 소개하는 책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용어 번역의 일관성이 약간 흔들렸다는 점 정도인데 (소렐/수영 등) 쏟아지는 영어, 프랑스어, 기타 언어들의 향연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리법이 존재한다는 말은, 순서와 규칙을 지키면 일정 정도의 비슷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요리 같은 -감각과 재능의 영역이라 생각되는- 것조차 일정 틀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희망적이다.
또한 누군가를 접대하는 자리에 필요한 섬세함과 정교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상대가 좋아할 만한 맛뿐 아니라 시각적 효과, 재료와 조리법까지 고안해 미묘하고 은근한 의미들을 담아 차려내는 접대 음식들. 이런 상징과 의미 부여법은 식사 뿐 아닌 모든 소통의 영역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자신만의 의식을 설계하고 싶다면 특히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음... 나는 이 분야에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맛있는 요리와 요리 재료들을 검색해가며 읽었더니 예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해 궁금한 요리들도 있었고, 먹어봤거나 맛이 짐작되는 요리들도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무척 배가 고프게 읽었다. 외식이 쉽지 않은 요즘 시기에 이런 고통을 안겨주다니...!!
하지만 재미있고, 흥미롭고, 또 행복했다. 상황들이 조금 정리가 되면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싶어졌다. 직접 맛있는 걸 해먹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제일 맛있는 요리는 남이 해주는 요리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조금 무리한 주문이다.
기쁨의 노래가 들릴 것이다! Gaudeamas!
- 이 글을 쓴 우리는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를 선택한 독자에게, 이 책은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는 데 위험할 뿐 아니라 심지어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며, 디톡스 요법이나 통 알곡, 해조류 섭취 등 몸에 이로운 특별한 식단에 대한 영감은 전혀 주지 않고, 오히려 그 같은 건전한 영양 섭취를 권장하는 영양학자들의 의견에 찬물을 끼얹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 주방에서 사용하는 작은 나이프나 도마, 셰프 나이프 등 도구는 좋은 것으로 장만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손님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할 때는 예쁜 접시에 나누어 담으면 음식이 빨리 식으므로, 커다란 서빙 식기를 사용해 따뜻하게 나누어 먹는 편이 좋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회색 샬롯이 좋은지(자비에의 선택), 분홍색 샬롯이 좋은지(마리옹의 선택), 혹은 키친 에이드(Kitchen Aid) 믹서기가 좋은지(자비에), 켄우드(Kenwood) 제품이 좋은지(마리옹) 자신만의 뚜렷한 취향이 있는 것도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유기농 제품을 고르는 것 못지않게 지역 생산물 인증제도인 IGP, AOC, AOP를 염두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과 소기름, 돼지비계, 라드 등을 골고루 사용하고 팬에 감자를 볶을 때 절대로 그 기름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요리한 다음에는 언제나, 언제나(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주방과 바닥과 천장(특히 강조!)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친절한 경고를 무시하고 조리상 '잘못된' 시도를 했다가 실망스러운 사태가 벌어진다면, 우리는 독자들이 과학과 열정을 마음껏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 일반적으로 식탁에서는 정치, 건강, 종교, 신분 등에 관한 대화는 금기시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소재가 식사 중의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우리 저자들 중 한 명(누구일까?)에 따르면 프랑스는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양파와 분홍색 샬롯을 사용하는 미개인들이다. 이는 마치 루아르(Loire)와 부르고뉴(Bourgogne)의 와인을 섞어 마신다거나, 푸아그라와 송로버섯을 섞는 것과 같다. 두 번째로 양파와 마늘을 사용하는 온건한 중도파가 있으며, 마지막 그룹은 회색 샬롯과 마늘을 사용하는 문명인들이다.
- 1633년 5월 16일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는 '성령 기사단'을 위해 연회를 베푼다. 그 장면은 저 유명한 아브라함 보스의 판화를 통해 전해진다. 만찬을 주최한 왕은 주빈석에서 독상을 받는다. 모든 요리가 왕에 집중된다. 기사단원들은 그 앞 양쪽에 놓인 긴 직사각형 식탁에 나란히 앉아 식사한다. 그들 앞에는 음식이 담긴 수많은 둥근 접시들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을 총 지휘하는 주방장은 커다란 면포로 요리를 덮어 내보낸다. 애피타이저를 한가운데 놓고, 그 주위에 오르되브르를 놓는다. 이어서 포타주와 두 번째 요리가 들어온다. 플라톤의 향연(Le Bengaets, BC 380) 이후로 그렇게 격식을 갖춘 식사가 진행되고 모두 연회를 즐기며 음식을 맛본다. 중세 이후, 식사 예법은 식사 순서와 정숙한 태도를 기본으로 명문화된 에티켓에 따라 이뤄졌다.
- 신성불가침인 중국 황제의 식단을 자세히 기록한 이 유일한 고서를 읽어보면 아시아와 유럽의 식문화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황제의 식사는 엄격하게 체계화돼 있었다. 예를 들어 주 요리에는 20근의 여러 종류 고기를 사용해야 하고, 국물을 끓이는 용도로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 4근 반이 들어간다. 108가지 요리로 구성된 황제의 식사에는 조리기, 볶기, 오래 끓이기, 증기로 찌기 등 모든 종류의 조리법이 고루 사용돼야 한다. 요리의 가짓수로 보면, 왕실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계급에 따라 점점 그 수가 적어진다. 황후는 96가지 요리, 왕의 첫 번째 서열 후궁에게는 64가지 요리가 제공됐다.
-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일 년 후, 튈르리 궁에 사실상 유폐돼 있던 루이 16세의 입지가 더 좁아지자, 그의 추종자들은 탈출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791년 4월 2일 미라보의 죽음과 4월 18일 폭동으로 왕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린 루이 16세는 부이예 장군과 몽메디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왕실 일가는 러시아 대령의 아내였던 코르프 남작부인의 수행원으로 변장하고 도주를 감행한 것이다. 왕은 남작부인의 집사 뒤랑으로 행세했다. 도주 경로는 이미 정해졌다. 일행을 태운 베를린행 대형 4륜 마차는 샬롱 쉬르 마른으로 떠나 퐁 드 솜 벨에서 경기병 부대와 합류해 생트 므누까지 경호를 받는다. 거기서 로얄 드래곤으로 호위대가 교체되고, 클레르몽 앙 아르곤에서부터 드라공 드 무슈 호위대가 바렌까지, 다시 새로운 경기병 부대가 몽메디까지 인도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물론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왕은 노란 레몬 색 바퀴가 달린 묵직한 녹색 4륜 마차를 타고 가면서 노닥거리기도 했고, 중간에 쉬면서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때는 앙시앵 레짐 시대였고, 신, 왕, 국가는 영속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혁명은 광폭으로 치닫고 있었다. 6월 20일 밤, 왕의 피신 작전은 바렌에서 끝났다. 생트 므누의 용기병 대장이었던 장 바티스트 드루에가 라파예트 장군의 부대를 이끌고 왕실 일당을 체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왕의 피신 작전을 처음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슈아 공작의 책임이 왕가의 식탐보다 더 치명적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왕은 생트 므누를 지나면서 그 지방의 특산물을 맛보기 위해 시간을 지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음식은 오랜 시간 익혀 혀에서 녹을 정도로 부드러운 족발 요리였다. 카미유 데물랭이 공개한 이 일화는 그냥 묻히기에 너무도 놀라웠다.
- "운동은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위스키와 시가만 있으면 되지요." 윈스턴 처칠의 건강 관리법은 어찌 보면 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이는 20세기 관습에 뿌리를 둔 생활방식이다. 물론 최근 수십 년간 진화된 식품 위생 인식으로 이 같은 습관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지만 말이다. 사실 리큐어와 시가의 매칭에 관한 기호 자체는 비교적 최근 일이다. 증류주 제조 과정은 이미 오래전에 알려졌지만, 이를 이용한 오드비 제조는 12세기에 와서야 시작됐다. 게다가 이름부터 '생명의 물(aqua vitae)'을 뜻하는 오드비(eau-de-vie, 스코틀랜드 게일어로는 uisghe beatha이고 이것이 usquebaugh를 거쳐 현재 whisky가 됐다)는 장수의 묘약을 만들려던 화학자들의 작품이고, 단순한 술이라기보다 의약품, 소독제, 치료제로 사용하려고 개발됐다. 병을 앓던 나바르의 왕 샤를 르 모베는 침대 시트에 오드비를 뿌려놓을 놓았는데, 하인이 실수로 불붙은 초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왕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일화도 있다.
- 네덜란드 상인들이 주니퍼베리로 향을 내 만든 맑고 투명한 오드비가 의학적 효능이 있는 약제가 아니라 술로서 더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18세기에는 스코틀랜드에서 획기적인 발견이 이뤄진다. 당시 영국인들은 이미 셰리와 보르도 와인의 열성적인 애호가였다.
(리뷰자 주 : 나는 아무래도 싱글몰트 셰리 위스키들이 가장 맛있다. 물론 피트도 좋지만...)
- "게르망트 와인 저장고에 숨겨져 있던 샤토디켐 와인 중 하나를 마시며, 나는 공작께서 미묘하게 변경하신 레시피에 따라 조리한 멧새 요리를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신비스러운 비밀의 식탁에 앉아본 사람은 꼭 멧새 요리를 먹지 않아도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i)>의 한 구절을 읽으며 멧새의 식용 소비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너무 자주 먹어 사양하는 일도 있었던 시절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식재료 중에도 금기가 있다. 어떤 음식은 종교적·민족적 이유로 금지되고, 사회 통념상 돼지, 말, 개를 금기시하는 사례도 있다. 옛날에는 합리적이든 아니든 금지된 식재료는 대개 소비자 자신을 보호한다는 목적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면 1920~1933년(아직도 미국의 남부 몇몇 지역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에서는 금주령이 내려졌고, 1915~2011년 프랑스에서는 환각 중세를 일으키는 독성 물질이 함유된 압생트(absinthe, 쓴 쑥으로 만든 독한 술)가 금지됐다. 하지만 이밖에도 미식가들을 괴롭히는 금지된 식재료들이 있다. 대부분 종을 보존해야 하는 희귀 동물이다. 오래된 예로 거북이를 들 수 있는데,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거북이 요리법을 만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거북이 애호가가 많았던 영국에서는 송아지 머리가 이를 대신하곤 했다. 고래 고기는 현재 일본의 '과학적' 어획을 둘러싼 논쟁으로 가장 민감한 식재료다.
- 그러나 프랑스에서 미식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재료는 바로 멧새일 것이다. 법으로는 금지돼 있으나, 암암리에 꽤 많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멧새는 단순히 식재료일 뿐 아니라 일종의 의식과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도 포획하고, 준비하고, 조리하는 과정이 거의 하나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멧새를 그물채로 생포하면 거의 같은 크기의 새장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새는 꼼짝도 못 하고 머리만 삐죽 내밀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곡식을 최대한 먹인다. 무게가 두 배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목구멍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새를 도살하는데, 그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즉 아르마낙에 담가 익사시키는 것이다. 이런 준비 과정을 거친 멧새를 익힌 뒤에 머리에 커다란 냅킨을 뒤집어쓰고 먹는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다리를 제외하고 통째로 먹는 이 작은 새의 향을 온전히 흡입하기 위해서고, 또한 큰 뼈들을 발라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뱉어내기 위해서다. 멧새 요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고, 미각이 뛰어났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도 이 기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식사를 마렌산 굴 30개, 푸아그라, 샤퐁 닭, 그리고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의 멧새로 만들어주기를 소원했다.
(리뷰자 주 : 멧새 먹는 법을 다룬 다른 책을 읽었었다. 머리에 흰 천을 쓴 사진과 함께 어딘가에서 읽었었는데... <매너의 문화사>였나?)
- 음식은 링컨 정부 당시 백악관에서 사용하던 식기 세트와 마찬가기로 붉은색과 흰색 본차이나에 담겨 나왔고, 주빈 테이블 뒤편에는 1865년 토마스 힐이 그린 <요세미티 계곡의 풍경(View of the Yosemite Valley)>이 걸려있었다. 이것은 1864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일반 대중을 위한 국립공원 제정의 토대를 만든 최초의 협약인 요세미티 그랜트에 서명한 것을 축하하고자 그린 그림이었다. 이렇듯 하나하나의 메시지는 철저하고 꼼꼼하게 계산되고 심사숙고해 준비됐다. 식사 메뉴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시작하는 미국 취향을 반영해 전통적이면서도 세계를 향해 열린 요리들로 구성했다. 그렇게 해산물 수프와 시나몬 애플 케이크뿐 아니라 체리 처트니를 곁들인 오리 요리도 식탁에 올랐다.
(리뷰자 주 : 섬세한 설계. 동경하지만 정말 쉽지 않다.)
- 훌륭한 식사란 정성껏 만든 세련된 요리와 좋은 와인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정의처럼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와인은 기원전 6,000년 캅카스에서 처음 포도를 재배한 이래 와인 양조의 효용성을 발견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됐다. 그렇다고 고대 유럽에서 와인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유럽에서 '와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레고리안 언어인 ghvin의 파생어를 사용하는 반면, 현대 그리스어만이 다른 단어인 (krasi)를 사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옛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순수한 와인(orvoſ, oinos)을 소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와인은 시럽처럼 농도가 짙고 불순물이 많아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잔에 물을 타서 희석하거나 허브를 넣어 마셨을 것이다. 이런 관습은 그리스인들로부터 에트루리아인과 로마인들에게 전해졌고, 정복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갈리아 남부에까지 퍼져나갔다.
- 그곳에서 포도 경작 이후 두 번째 커다란 혁신이 일어난다. 갈리아인들은 기원전 3세기부터 이미 그들의 와인을 기존의 항아리가 아니라 커다란 떡갈나무 통에 넣어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내용물인 와인과 보관용기인 나무통의 상호작용으로 와인은 안정성이 높아졌고, 그때부터 좀 더 순수하고 발전된 상태의, 그리고 물을 타서 희석하지 않고도 마시기에 적합한 와인을 생산하게 됐다. 기원후 초반 몇 세기에 갈리아족의 와인, 특히 아키텐(Aquitaine)의 와인은 제국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뚜껑을 한번 열고 나면 와인을 보존할 수 없어 가정에서 소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 중요한 혁신이 일어났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합작품이었다. 영국인들은 가벼운 보르도 와인인 클레레를 아주 좋아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레드도 아니고 로제도 아닌 색을 띠고 있으며, 일단 산소와 접촉하고 나면 보존이 거의 불가능했다. 보르도 초대 국회의장이자 1649년부터 샤토 오브리옹을 소유하고 있던 아르노 드 퐁탁은 와인 저장고의 전문가들에게 연구를 위탁해, 배 부분이 볼록하고 병목이 길쭉한 독특한 모양의 와인 병을 만들었다. 게다가 이 병에는 코르크 마개가 있어서 이 작은 크기의 와인 병 운반과 보관을 쉽게 해 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숙성될 수 있게 해 줬다. 그의 와인은 금세 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고, 1660년부터 영국의 왕 찰스 2세의 와인 저장고 책자에 언급된 오브리오노(Hobriono, le Haut Brion)를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테루아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만든 엄격한 등급 체계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와인이 탄생했고, 보르도 와인은 1855년 프랑스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때 나폴레옹 3세가 법제화했다.
- '먹는다'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단순히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다는 차원을 넘어 쉽사리 포착할 수 없는 문화적·사회적·역사적 가치와 경향이 개입한다. 단절과 개인주의를 반영하는 혼밥과 혼술이 유행처럼 번지는가 하면, 자존감을 상실한 자아를 달래고 때로 과장된 행복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SNS에 식사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열심히 올리기도 한다. 결핍감이 심한 사람들은 타인의 '먹방'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본능적인 욕구여서 미뢰를 통해 경험한 그 달콤한 순간은 뇌리에 새겨져 우리는 거듭 미각적 쾌감에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즉각적이고도 일차적인 만족 말고도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그들이 함께 호흡하는 공기의 온도마저도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부모는 늘 자식과 함께 밥 먹기를 원하고, 친구나 직장 동료끼리도 함께하는 회식이 중요하며, 혼례나 장례 등 집안 대소사에도 국가 정상들이 만나는 회담 자리에도 함께 식사하는 절차가 빠지지 않는다. 특히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의식을 통해 서로 마음을 열고 적이 아니라 동지가 되는 상황은 마치 연금술과도 같은 마술적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럴 때 음식은 온갖 정성을 다해 최고의 맛을 내야 하리라.
- 게랑드산 소금(sel de Guérande) :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프랑스 최대 천일염 생산지 게랑드에서 생산한 소금, 점토질이 많은 지표 위에서 태양열과 바람에 의해서만 전통적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으며, 특히 플뢰르 드 셀(fleur de sel)은 고급 소금의 대명사로 불린다.
-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파스타의 역사일 것이다. 파스타가 유럽에 처음 등장한 흔적을 찾자면 굳이 마르코 폴로 시대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물론 토마토가 유럽에 처음 상륙한 시기는 16세기지만, 이미 파스타의 기초는 준비돼 있었다. 아피키우스의 저서 <요리에 관하여>에는 라자냐의 레시피(여기서 걸쭉한 소스를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는 가룸이다)가 나온다. 12세기 영국의 한 요리사는 작은 미트볼을 반죽으로 감싸 익히는 일종의 고기만두 비슷한 음식을 최초로 개발했는데, 이를 기름에 튀기는 것이 아니라 끓는 물에 데쳐 익혔고, 이것이 바로 라비올리의 시초가 됐다.
-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Frédéric II(1194~1250) :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가의 황제(재위 1220~1250), 시칠리아의 왕, 스위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로부터 '왕위에 오른 최초의 근대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은 중세의 가장 진보적인 군주로 알려졌으며, 자연과학, 언어, 법률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당시 최고의 지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 그중 주목할 만한 이는 추기경 로렌초 캄페지오의 요리사였던 바르틀로데오 스카피다. 그는 추기경을 위한 연회를 총괄했는데, 대표적으로 1536년 카를 5세에게 경의를 표한 연회를 들 수 있다. 이후 바티칸에 요리사로 들어간 스카피는 교황 비오 4세와 5세의 요리와 연회를 담당했고, 1570년에는 자신의 요리 지식을 집대성한 <요리 기술의 오페라(Operadell' Arte del cucinare)>를 집필했다.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이 요리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채소나 칠면조 등 신대륙에서 건너온 새로운 식재료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요리에 사용했을 뿐 아니라 동구 유대인들의 음식에서 영감을 받은 조리법까지 접목하는 등 오늘날 퓨전 요리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됐다. 실제로 그는 중부 유럽 유대인들의 요리법에서 착안해 사료를 강제로 먹인 거위 간 요리를 개발했고, 시기가 1536년으로 추정되는 연회 때부터 왕실 식탁에 최초로 올렸다. 그가 개발한 요리는 푸아그라 구이였으며, 꼬챙이에 꿰어 익히는 동안 그 모양을 잘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다. 그래서 오늘날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될 식재료인 토마토와 옥수수는 물론이고 카사바(마니옥), 감자, 가지, 피망, 고추 등의 가지과 채소들이 유입되고,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인도와 중국에까지 전파된다. 게다가 1442년 알폰소 5세가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면서 카탈루냐와 이탈리아 반도의 관계는 더욱 굳건해졌고, 채소를 풍부하게 사용하던 카탈루냐 요리사들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 그중 주목할 만한 이는 추기경 로렌초 캄페지오의 요리사였던 바르톨로메오 스카피다.
- 바르톨로메오 스카피 Bartolomeo Scappi(1500~1577) : 르네상스 시대의 저명한 요리사. 1536년 4월 연회에서 대주교 로렌초 캄페지오를 위해 요리한 것이 그의 최초의 경력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다른 대주교의 요리사로 활약했으며, 교황 비오 4세 때부터 바티칸 궁정의 요리를 맡았고, 이어 교황 비오 5세의 요리사가 됐다. 1570년 <Opera delſ arte del cucinares>라는 저서를 편찬하면서 명성을 얻은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1,000여 개 요리법을 기록했으며 요리 도구와 기법을 활용하면서 포크의 기원을 알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카피는 당대의 주방에 새로운 요리기법과 재료를 도입하면서 혁명적인 변화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는다.
- 해기스 Haggis : 해기스는 양 또는 송아지의 내장을 다진 양파, 오트밀, 쇠기름, 향신료, 소금 등과 섞은 뒤 그 위장에 넣어서 삶은 둥근 모양의 순대와 비슷한 스코틀랜드의 향토 음식이다. 14세기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는 hagws 또는 hages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해기스는 스코틀랜드의 향토음식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18세기에는 시인 로버트 번스가 <어드레스 투어 해기스(Address to a Haggis)>라는 시를 지어 헌정하기도 했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는 번스의 생일인 1월 25일에 삶아 으깬 순무와 감자를 곁들인 해기스와 스카치 위스키를 먹는 전통이 있다.
- 그러나 이 음식에 동반되는 오늘날과 같은 의식이 그 모습을 갖춘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다. 1787년 스코틀랜드의 대표적 서정시인 로버트 번스는 <해기스 예찬(Address to a haggis)>이라는 시를 지어 '순대 요리를 만드는 위대한 셰프(great chieftain o the puddin' race)'에게 헌정했다. 로버트 번스의 타계 1주년 만찬에서 이 시인을 추모하는 참석자들이 식사 중에 시를 낭송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에도 이런 의식은 꾸준히 이어져왔고, 시인의 생일인 1월 25일, 스코틀랜드에서 전통적으로 열리는 "번스 디너(Burns Supper)"에는 백파이프 연주를 배경으로 주방장이 직접 해기스 쟁반을 들고 만찬장에 입장한다. 해기스는 일종의 소시지로, 부드러우면서도 알갱이가 씹히는 식감과 향신료로 양념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동물 내장을 사용한 모든 음식이 그렇듯이 재료를 너무 오래 두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만한 추수감사절 의식이 치러진 것은 그로부터 약 일 년 후의 일이다. 겨울은 혹독했다. 9월에 떠나올 때 120명이었던 청교도 순례자들은 도중에 많이 되돌아가서 1621년 3월이 되자 5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겨울 내내 식량을 제공해줬던 왐파노악 원주민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원주민들은 장어 낚시하는 법과 옥수수 재배하는 기술도 알려줬다. 1621년 9월 말, 청교도들은 드디어 추수했고, 수확은 풍성했다. 따라서 그해 겨울은 조금 더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추수감사절 행사는 당시에 9월 29일을 전후로 3일간 계속됐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뿐 아니라 새로운 개척자들을 맞이해 살아갈 수 있게 허락해준 아메리칸 원주민들에 대한 감사도 포함된 의식이었다. 백 명가량의 왐파노악 원주민과 50여 명의 순례자가 함께 축하연을 치렀다. 추수감사절 식탁은 풍성함 자체였다. 사슴 세 마리와 야생 조류도 넉넉히 준비했는데, 그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시만 해도 가축으로 사육하지 않았고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칠면조의 등장이었다. 과연 그것을 어떻게 조리했을까? 아마도 구웠을 것이고, 소스는 따로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날을 기념해 오늘날 미국인들은 11월 넷째 목요일이면 특별한 소스를 곁들인 칠면조 구이를 온 가족이 함께 즐긴다.
- Ordre du Saint-Esprit :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578년 프랑스 국왕 앙리 3세가 왕족들을 포함한 구성원으로 창단한 성령 기사단. 이들은 당대 최고의 성찬으로 차린 연회를 여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기사단의 상징인 코르동 블루, 즉 파란 리본은 미식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 Abraham Bosse(1602~1676) : 프랑스의 예술가, 판화가. 아브라함 보스는 '오감' 연작 판화를 비롯해 왕실이나 귀족들의 생활모습을 담은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 hors d'oeuvre : 서양 요리에서 식욕을 돋우기 위해 식사 전에 나오는 간단한 요리나 술안주로 먹는 간단한 요리를 뜻한다.
(리뷰자 주 : 확인해볼 것. 앙트레와의 차이는?)
- Desiderius Erasmus(1446~1536) : 네덜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성직자이자 인문주의자이며,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준 기독교 신학자이다.
- 타유방의 <비앙디에>(14세기), <파리 살림 백과(Menagier de Paris)>(14세기), <아주 훌륭한 요리책(Lire fort excelent de anisine)>(16세기) 등에 따르면 언제나 체리, 자두, 건자두, 포도, 블랙베리, 멜론 등 과일은 식사를 시작할 때 제공된다. 아주 드문 예외가 있다면 더운 과일로 분류되는 대추야자, 딸기, 모과, 배가 있는데, 이들은 안타깝게도 '무겁다'고 인식됐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성령 기사단 참석자들은 이 과일들을 디저트로 먹었다. 오늘날 적어도 북부 유럽에서 이런 변화의 예외가 되는 과일은 애피타이저로 즐겨 먹는 멜론뿐일 것이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아마도 답은 와인에 있을 것이다. 다시 판화를 살펴보자. 위에서 언급한 네 번째 인물을 자세히 보면 그가 갈증을 느껴 와인을 한 잔 가져다줬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식탁 위에 어떤 잔도 미리 올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문한 와인 때문에 이후 서빙 순서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 고기류 로스트 이후에 서빙됐던 조개나 갑각류 등의 해산물이 17~18세기에는 화이트 와인과 함께 식사 초반부로 그 순서가 앞당겨진 것이다. 가공 돼지고기(charcuterie) 나 찬 고기, 즉 콜드 컷의 순서 변화도 마찬가지다. 붉은 살 육류는 그 이후 채소와 레드와인과 함께 서빙됐다. 예전에는 앙르트메와 함께 냈다. 디저트는 스위트 와인과 함께 코스의 마지막 순서를 차지한다.
- "자주 먹어보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아주 고약한 맛이 나는, 거품이나 기포가 떠 있는 이 음료가 끔찍했을 것이다." 16세기 페루와 멕시코에 파견됐던 예수회 수도사 호세 데 아코스타는 초콜릿을 이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초콜릿은 그간의 비호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이 14세 왕궁에서 소비되기 시작했다. 왕은 초콜릿을 맛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가 프랑스에 들여오던 당시 초콜릿은 음료였다. 주로 바닐라로 향을 낸 설탕 시럽에 초콜릿을 녹여 마셨다. 또한 초콜릿 타르트 등 고체 형태 초콜릿도 소비됐는데, 그 흔적은 프랑스 역사의 '대-세기(Grand Siècle)'라고 부르는 17세기 후반 여러 요리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초콜릿 타르트는 왕실 식탁에 디저트로 나왔을 테고, 단것을 좋아했던 왕은 이것을 이로 깨물어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Anne of Austria, Anne d'Autriche(1601~1666) : 프랑수아나바르의 왕 루이 13세의 왕비로 루이 14세의 어머니이다. 아들인 루이 14세가 5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1643년부터 1651년까지 섭정을 맡았고 1651년 마자랭 추기경에게 섭정 직위를 이양했다. 스페인 왕 페리페 3세의 딸이었던 안 도트리슈는 프랑스에 카카오를 공식적으로 수입한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 한 세기의 중간 지점인 1651년, '프랑수아 피에르 드 라 바렌'의 요리책 <프랑스 요리사(Le Caisinier Frangoi)>가 출간됐다. 이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1815년까지 250쇄가 넘게 제작됐으니 오늘날 출판업자들에게는 아마도 꿈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당시 인쇄업자만큼이나 많은 수의 해적판 제작업체가 활개를 치던 암스테르담, 헤이그 등지에는 해적판까지 등장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식사 성격에 따라 코스 순서대로 내는 포타주, 구운 육류 요리, 앙트르메 등이 자세히 설명돼 있다. 가톨릭 교회의 원칙을 존중해 고기를 먹어도 되는 기간, 사순절 이외에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기간, 그리고 사순절 기간, 이렇게 세 가지 분류에 따라 그에 맞는 요리들을 소개하고 있다. 육수, 농후제, 육즙 소스, 쿨리(coulis, 야채나 과일 등을 갈아 퓌레로 만든 끈적한 소스) 등을 만드는 법도 주요 목록 사이에 잘 정리돼 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700가지가 넘는 레시피를 일일이 번호를 매겨 목차에 분류해 놓은 총람이라 할 수 있다. 당시로써는 책의 구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목차 형식이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였다. 1인칭 화법으로 책을 쓴 바렌은 요리사로서의 구문과 문법을 제시하며 새로운 문학 장르의 토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혁신적 요소만으로는 이 책의 위대함과 존재감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무엇이 이 책을 그토록 유명하게 만들었을까?
- 프랑수아 피에르 드 라 바렌은 여러 이유에서 선구자로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이전 약 1세기 동안 어떤 요리책도 출간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등장한 이 책은 위대한 17세기의 새로운 맛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은 요리의 기술적 측면을 다뤘을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이어질 레시피들을 폭넓게 소개한다. 이후 요리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반박될 때 이 책은 그 쟁점의 중심 자료가 됐다. 그뿐 아니라 피에르 드 륀에서부터 프랑수아 마시알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리사의 책이 출간되면서 바렌의 이 요리서는 꼭 필요한 참고문헌이 됐다. 윅셀 후작, 다시 말해 니콜라 샬롱 뒤블레의 전속 요리사였던 바렌은 요리의 기술면에서 향신료의 올바른 선택법을 제시했고, 레시피에 부케가르니를 사용했다. 바렌은 아 라 모드(a la mode), 블루(au bleu), 나튀렐(aulnaturel) 등 다양한 조리 방식도 자세히 설명해놓았으며 이 방식들은 나중에 보편화됐다. 그 덕분에 당시 사람들은 외프 아 라 네즈(oeuf a la neige), 비스크(bisque), 베샤멜(bécharmel) 등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 있게 됐다. 소스 등의 농도를 조절하는 농후제(liaison)는 버섯, 송로버섯, 아몬드 베이스로 만들었고, 밀푀유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처럼 유명해진 바렌은 그 성원에 힘입어 <프랑스 파티시에(Partissier frangois)>도 펴냈고, 1662년에는 <체계적인 요리사(Le Casticinier méthodigne)>, 이어 1667년에는 <완벽한 잼 메이커(Parfait conthturier)>를, 출간했다.
- <프랑스 요리사>가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1656년, 피에르 드 륀이 집필한 책 <프랑스 요리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책에는 계절에 따라 모든 종류의 고기, 수렵육, 가금류, 바다 생선과 민물 생선 요리법이 자세히 수록돼 있다. 그뿐 아니라 찬 파티스리와 더운 파티스리 레시피도 망라돼 있다. 파리의 서적상 피에르 다비드는 다름 아닌 바렌의 책을 출간한 인물이다. 그는 사실상 바렌의 책 재판본 발행과 피에르 드 륀 책의 출판권을 손에 넣었다. 바렌의 책이 종교 절기에 기반을 뒀다면, 피에르 드 륀의 책은 계절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 책 역시 전체적으로 900여 가지 레시피가 음식을 내는 순서에 따라 잘 정리돼 있고, 바렌의 책에서는 중간에 삽입돼 있던 육즙 소스, 쿨리, 소스에 관한 설명이 피에르 드 륀의 책에서는 첫머리에 따로 정리돼 있다. 이 책은 바렌의 책과 비슷한 점들이 조금 있는데, 이를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라고 볼 수만은 없다. 고난 주간 성 금요일에 알맞은 요리라는 주제로 레시피를 묶어놓은 것을 보면, 종교적 이유로 육식을 절제했던 풍습이 오히려 채식 위주의 가벼운 요리가 발달한 계기가 됐음을 알 수 있다.
- François Pierre de La Varenne(1618~1678) : 프랑스의 요리사. 샬롱 쉬르 손의 주지사 셀 후작의 요리사였던 그는 옛 중세 요리로부터 탈피한 근대 오트 퀴진 요리법을 자세히 기록한 조리서 <프랑스 요리사>를 집필했다.
- françois : '프랑스의'라는 의미의 옛 표기로 현재의 français와 동일하다. 1835년 프랑스어 철자법 개정 이전까지 사용됐으며 프랑수에' 라고 발음한다.
- François Massialot(1660~1733) : 프랑스의 유명 요리사, 궁정과 귀족 계층의 요리를 담당했던 마시알로는 1691년 출간한 요리책 <왕족과 부르주아의 요리사(Le Cuisinier royal et bourgeoit)>를 비롯한 여러 권의 가치 있는 조리서를 집필했다.
- bouquet garni : 부케가르니는 파슬리 줄기, 월계수 잎, 타임, 셀러리 등의 향신재료를 리크(서양 대파)로 싼 다음 실로 묶어 고정한 것을 말한다. 육수나 소스 등을 만들 때 넣어 향을 내거나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향이 우러나면 꺼낸다
- 루이 15세와 그의 정부(情婦)였던 퐁파두르 후작부인 잔 푸아송이 즐겨 먹은 유명한 클래식 디저트 '퓌 다무르(puits d'amour, 사랑의 우물이라는 뜻)'의 기원을 얘기하려면 뱅상 라 샤펠과 버터라는 식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뱅상 라샤펠은 누구인가. 17세기 말에 태어나 '계몽시대'라고 부르는 18세기 중반에 생애를 마친 이 요리의 거장은 1742년 <새로운 시대의 요리사(La Caisinmier moderne)>라는 책을 집필해 출간한다. 이 책에서 그는 좀 더 단순하면서도 지적이고 과학적인 요리를 제안한다. 모든 종류의 요리를 종합적으로 다룬 이 책에서는 특히 라드를 넣어 만든 타르트 반죽 시트에 달걀과 크림 혼합물을 채워 넣어 굽는 '키슈(quiche)'라는 파이를 버터를 넣어 만든 파트 푀유테로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종이처럼 얇은 페이스트리로 입안에서 사르르 부서지는 가볍고 바삭한 식감이 특징이다.
- 이 메뉴를 통해 와인과 관련한 사실도 알게 됐다. 애피타이저에는 부르고뉴나 보르도 와인을, 로스트 요리에는 샹파뉴를 걸들였다. 사실 이는 좀 특별한 경우인데,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샹파뉴는 굴이나 달콤한 음식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마데이라나 토케 와인도 이례적이지는 않았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레이디핑거 비스킷을 마데이라잔에 담가 적셔먹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영국의 조지 2세, 프랑스의 루이 15세,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캐서린 2세(예카테리나 여제), '계몽시대'라고 부르는 18세기 유럽에서는 결혼과 전투를 통해 왕관을 쓴 다섯 군주가 주인공이 돼 구대륙의 국경선을 그려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식탁을 점령한 것은 대부분 프랑스 요리였다. 특히 여제의 식탁에서 두드러진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독일 공주 출신 예카테리나 여제의 식탁에는 정복의 횟수만큼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랐다. 그녀가 특별히 좋아했던 요리는 푹 익힌 소고기 찜이었고 이것은 짭짤한 오이, 말린 사슴 혀로 만든 소스와 함께 식탁에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그다지 정통적인 요리는 아니었다. 18세기는 소금보다는 설탕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전통 과일 젤리의 일종인 콜롬나 파스틸라(pasila de Kolomna)는 여황제가 특별히 좋아했던 간식이다. 우리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그의 연인 포템킨 백작의 집에 초대됐을 때 '사르다나팔루스의 폭탄(bombes a la Sardanapale)'이라는 요리를 대접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벤저민 프랭클린' 하면 털모자와 목욕이 떠오른다. 그가 채식주의자, 그것도 아주 드문 정치적 채식주의였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자서전을 보면 벤저민 프랭클린은 일상에서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덕행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에게 이런 생활규범은 음식 문제에서 보여준 금욕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또한 채식주의 식습관을 중시한 것만큼이나 이와 관련된 이미지를 지우려고 애썼다. 파리에 거주하던 시절 그는 사람들이 '전설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런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자신에 대해서도 철저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안경을 감추지 않았고, 털로 만든 모자를 썼으며, 늘 갈색 옷을 입었다.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서려 있었다. 당시 음식이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는 테이블 매너를 비롯한 미식 문화가 발달했고, 식사할 때 세브르 도자기와 고급 크리스털을 사용했다. 프랭클린은 이와 정반대로 매 순간 검소와 절제로 일관했다. 그의 숙소에서 홀 매니저와 두 하인만이 그의 음식 시중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사실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전투 중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 중 하나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일화에 마렝고 치킨(poulet Marengo)이 등장한다. 그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프랑스 혁명력 8년 목월(牧月) 25일, 제1집정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피에몬테에서 오스트리아 군대에 맞서 전투가 시작될 순간을 기다린다. 그는 배가 고팠고, 요리사에게 남은 재료는 닭 두 마리뿐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설적 일화는 바로 이 닭으로 만든 요리에 관한 것이다. 요리사는 닭을 토막 내 올리브 오일에 지지고 나서 제철 채소, 토마토와 화이트 와인을 넣고 뭉근히 끓인다. 생닭을 잘라 지져 노릇하게 익혔으므로 얼핏 로스트 치킨처럼 보이는 것을 냄비에 넣고 자작하게 끓여 익히는 것이다. 독특한 조리법이다. 이런 일화가 없었다면 마렝고 치킨은 토스카나식 치킨 카차토레(pollo alla cacciatora)나 로마에서 흔히 먹는 치킨 디아볼라(pollo alla diavola)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요리에 사용되는 재료와 조리법은 마렝고 치킨과 거의 같다. 그랑콩데에 이어 나폴레옹의 요리사였던 뒤낭은 이 일화와 레시피의 주인공이 자기라고 주장했는데, 역사학자가 문헌을 조사해보니 이 요리사는 그 전투가 시작되던 무렵에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리뷰자 주 : 왜 목월이 5월일까?)
- Antonin Carême(1784~1833, Marie Antoine Carème) : 프랑스의 파티시에, 요리사, '셰프의 왕이자 왕들의 셰프'로 불렸던 그는 프랑스의 왕족과 신흥 부르주아층을 위한 오트 퀴진을 발전시켰으며,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셰프였다.
- 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1754~1838) : 프랑스의 정치가, 외교관,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이다. 보통 탈레랑으로 불린다. 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키고 외무 장관을 지냈으며 영국 주재 대사가 돼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로부터 벨기에의 독립을 도왔다.
- 나폴레옹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프랑스인들은 부르봉 왕조를 되찾았으며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는 계속됐다. 당시 요리사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바로 '앙토 카렘'이었다. 그는 당시 정권의 우두머리인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의 요리를 담당했다. 또한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샹파뉴 지방 평원에서 열린 유럽 왕실 대표들의 오찬을 총괄하기도 했다. 1816년 2월 21일, 왕실 근위대는 부르봉 왕조의 복귀를 축하하는 무도회를 개최했다. 3,000명이 참가해 프티 뤽상부르 성의 정원에서부터 보지라르가를 거쳐 오데옹 극장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연회 행렬을 상상해보라. 무도회장은 9단 스탠드 좌석으로 이뤄져 있었다. 앙토냉 카렘은 <프랑스의 총주방장(Mattre d'hotel francai)>에서 환상적이었던 이날 저녁 파티의 추억을 더듬는다. "오데옹 연회장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수많은 촛불이 찬란히 빛났고, 금과 은, 그리고 거대한 화환으로 장식된 극장 귀빈석 기둥도 화려했다. 메인 발코니석은 당시 왕실 가족이 차지했고, 가장 좋은 로얄석 발코니에는 궁정 여인, 공작 등 귀족, 상원과 하원 의원, 장관, 외교관, 사령관 등 고위 인사들로 가득했다."
-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식사 메뉴다. 연회에 참석한 하객 3,000명은 1,500개 접시에 담겨 나온 10가지 포타주, 포르투갈식 돼지 뒷다리 햄, 칠면조 갈랑틴(galantine, 주로 흰 살 육류나 가금류에 다진 소를 섞어 익힌 다음 젤리화한 찬 음식) 등 90가지에 달하는 육류, 즐레 소스의 새끼 자고새 살미를 포함해 최소 8가지로 준비된 약 200개의 찬 앙트레, 90종의 대형 파티스리 (찬 수립육 파데, 설탕으로 만든 누가 등), 라드를 두른 메추리 25마리, 렌식 로스트 치킨, 새끼 자고새 등을 포함한 250가지 로스트 등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이처럼 많은 새로운 요리의 향연에서, 또한 이처럼 대담한 건축물을 무대로 열린 연회에서, 카렘은 자신이 요리사임을 잊지 않았고, 그에 어울리는 훌륭한 맛을 선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맛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 과제는 요리를 통해 궁극의 풍미를 선사하는 것, 즉 오스마좀(osmazóme)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가 강조한 이 '오스마좀'이라는 말은 각 요리에서 끌어내야 하는 궁극의 정수를 뜻한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 유명 셰프들로 하여금 더 연구하고 생각하게 하는 동기이자 목적이 됐다. 즉 분자 요리로 놀라운 반향을 일으킨 스페인의 페란 아드리아, 프랑스의 조엘 로부숑 같은 요리사들이 액화 질소를 사용한 머랭 조리법 등을 정립하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앙투안 카렘은 개혁적인 요리사들이 오늘날에 와서야 주장하는 것들을 이미 오래전에 처음으로 추구했던 선구자일까?
-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책 <나폴레옹 르 프티 (Napolion de Pour)>(1852)에서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해도 소용없다고 했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3세)는 6월의 불행한 날들(1848년 6월 민중 봉기)로부터 8년 뒤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튈르리 궁에 정착한 나폴레옹 3세는 호화로운 연회를 아무렇지 않게 즐겼다(과거 루이 16세는 이 궁에서 황급히 도주하다가 잡혀서 파리의 오래된 요새인 탕플 탑 감옥에 갇혔던 적이 있다). 1862년 11월 12일, 그의 요리사는 가벼운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메뉴는 닭 콩소메 루아얄, 영국식 거북이 포타주, 수비즈 소스의 양 등심, 토끼고기 무스와 송아지 넓적다리 살 파르망티에를 곁들인 소 안심, 젤리처럼 굳힌 갈랑틴, 구운 새끼 자고새 스튜, 푸아브라드 소스의 소고기 안심, 뇌조 요리, 버터와 파슬리를 넣고 익힌 플라젤렛 강낭콩 요리, 크림 돼지감자, 파인애플 빵, 커피 파르페, 프티 콩데 등으로 구성됐다. 이런 아주 고전적인 메뉴가 초대하는 미각 여행의 배경에는 '쥘 구메 Jules Gouffe)'라는 요리사가 있었다.
(리뷰자 주 : 여기서 말하는 거북이 포타주는 가짜 거북 스프를 말한다.)
- 요리의 역사는 발견, 혁신, 기념비적 사건들이 쌓여가며 이뤄진다. 고대부터 그 명성이 이어진 유일한 요리사로는 마르쿠스 가비우스 아피키우스가 있지만, 중세 말 이래 몇몇 위대한 요리사는 자신의 시대를 빛냈을 뿐 아니라 후대 요리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타유방'에서 바르톨로메오 스카피를 거쳐 앙토넹 카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대부분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소박한 프로방스 요리사에 불과했던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만큼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13세 때 삼촌 식당에서 수습생으로 일을 시작한 에스코피에는 17세 때 세르클 마세나의 셰프가 된다. 이어 셰 필립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해준 메뉴 중 하나인 서양 배 디저트 푸아르 벨 엘렌(poire Belle-Hélène)을 만들었다. 이것은 같은 해에 탄생한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라 벨 엘렌(아름다운 엘렌)>의 제목을 따서 이름을 지은 디저트다.
- 물론 에스코피에만이 이런 메뉴를 후대에 남긴 것은 아니다. 트루아그로 형제의 소렐 소스 연어나 앙드레 다갱의 그린 페퍼 소스 오리 가슴살 요리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에스코피에는 대표 메뉴를 여럿 남겼을 뿐 아니라 메뉴 이름을 신비스러우면서도 기억하기 쉬운 것으로 정하는 등 소통 능력까지 갖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미 18세의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장을 계속했다. 19세기 후반은 유럽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실증주의 사고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였다. 이런 환경에서 에스코피에를 필두로 미식 문화도 꽃을 피우게 됐다. 30대에 접어든 그는 파리와 칸의 여러 식당에서 셰프로 활동하다가 1884년부터는 루체른의 르 그랑 나시오날과 모나코의 르 그랑 호텔의 주을 맡았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에게 내는 요리를 언제나 일관된 수준으로 유지하고, 준비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주방에서 각각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분배한 브리가드(brigade) 시스템을 창시했다.
- 특히 그는 요리의 기본 원리 연구에 열정을 기울였다. 요리 원리를 꼼꼼히 분석하고 체계화해 주방에서의 작업이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뤄져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에스코피에의 업적은 단순히 주방 합리화에 그치지 않는다. 요리에 관한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다른 요리사들뿐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 요리하는 이들에게도 전수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량이 귀하던 시절 그는 <쌀, 최고의 영양 식품(Le Riy Paliment le meileur et le plus matriti)>과 <싸게 살기: 염장 대구(La Vie à bon marche : la morae)> 등 저서를 집필해 서민층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책은 역시 1902년에 펴낸 <요리 안내서(Lu Guide calinaire)>이다. 이 책은 에스코피에 생전에 1907년, 1912년, 1921년, 세 번에 걸쳐 재출간됐다. 이 기념비적인 대작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요리책과 달리 방대한 조리법을 분류하고 자세히 분석하고 설명해서 기본 레시피를 바탕으로 스스로 조합하고 응용할 수 있게 구성한 책이다. 이처럼 그는 근대와 현대 요리의 기초를 확립했고, 오늘날까지도, 의식적이든 아니든, 모든 요리사들의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남게 됐다.
- 1867년 6월 7일, 제2회 파리 만국박람회가 성대하게 개최됐고, 전 세계 국가 지도자들이 모였다. 프러시아의 왕 프레데릭 기욤은 이 행사를 기회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알렉산더 2세와 훗날 알렉산더 3세가 되는 차레비치(sarévitch)를 초청해 파리의 카페 앙글레에서 함께 만찬을 현다. 참석자 중에는 오토 본 비스마르크 백작도 있었다. 세 황제(비록 두 사람은 한참 뒤에야 왕위에 올랐지만)의 만찬으로 알려진 이 저녁식사는 참석한 인물의 중요도만큼이나 그 장소도 화려하고 격식 있었다.
- 당시는 파리 시내 이탈리안 대로에 있는 식당 카페 앙글레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때이기도 했다. 아돌프 뒤글레레(Adolphe Druglere)가 주방을 맡은 뒤 이 식당은 파리에서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심지어 서양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명소가 됐다. 셰프 뒤글레레는 포타주 제르미니, 폼 안나 등의 메뉴를 개발했고, 발자크의 소설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rer)>이나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Education sentimentale)>,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ia)> 등 명작에 뒤지지 않는 평판을 얻으며 완벽에 가까운 전통 요리로 명성을 쌓았다. 이처럼 큰 인기를 얻은 뒤글레레 셰프의 수많은 요리 중에는 수플레아 라 렌, 대문짝 넙치 그라탱, 양 등심 요리, 파리식 랍스터 요리, 샴페인 소르베, 멧새 요리, 봉브 글라세(bombe glacée, 반구형 아이스크림 케이크) 등이 있으며, 특히 루앙의 쿠론 여관에서 처음 선보이고 나서 파리의 식탁을 점령하고 프랑스 레스토랑의 상징적 요리가 된 루앙식 오리 요리는 그의 대표 메뉴로 꼽을 수 있다. 이는 다이닝 홀에서 직접 선보이는 메트르 도텔(maitre d'hôtel, 홀의 서빙을 총괄하는 매니저)의 섬세한 서빙이 돋보이는 세련된 요리이다. 그는 손님의 테이블 앞에서 요리를 마무리하고 능숙한 매너로 소스를 완성해 서빙해야 한다. 와인 또한 요리의 수준에 걸맞게 준비된다. 연령 20년 이하의 와인은 찾아볼 수 없고, 마데이라와 셰리 뿐 아니라 흔히 19세기에 생산된 최고의 레드 와인으로 평가받는 샤토 라피트(château-Lafite)를 위시한 최상급 보르도 와인, 최고의 빈티지인 1847년 산 샤토 디켐(château d'Yquerm), 그리고 부르고, 뉴 와인으로는 유일하게 1846년 산 샹베르탱(chambertin)을 서빙했다.
- 1897년 12월 17일, 포트사이드에서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거대한 동상 제막식이 거행됐다. 한겨울이었지만 그날 이집트의 날씨는 온화했다. 이 행사에 준비한 음식은 케디비알(khédivial) 포타주, 루쿨루스 테린, 꼬챙이에 꿰어 구운 새끼 칠면조 요리, 봄채소를 곁들인 안심, 지중해산 버찌 술 마라스키노 리큐어 소르베, 송로버섯을 넣은 르망산 샤퐁(거세 수탉) 로스트, 그린 샐러드, 크림소스 아스파라거스, 생트 알리앙스식 차가운 꿩 파데, 여러 가지 맛 아이스크림 봉브 케이크와 화려하게 장식한 사부아 케이크, 그 밖에도 물론 치즈와 다양한 디저트가 포함됐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지역이 이집트인데 동양 음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무화과도, 대추야자도 세몰리나 가루도 없다. 푸아그라로 만든 루쿨루스 테린으로 시작하는 이 코스 메뉴는 프랑스 고급 요리를 총동원해 구성됐다. 물론 푸아그라는 본산지가 이집트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푸딩은 영국의 왕과 왕비가 평소에 즐기던 메뉴는 아니다. 하지만 인도의 젊은 황후와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푸딩을 즐겼다. 189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왕의 식탁에 어떤 음식이 올랐는지는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연히 크리스마스 푸딩이 포함됐고, 콩소메, 칠면조, 대문짝 넙치 요리도 나왔다. 군주들은 크리스마스 전통에 따라 의례적 행사를 정립했다. 그들은 특별한 날에 자손을 한자리에 모이게 함으로써 군주의 기능이 자문 역할에 그치는 입헌군주정에서 그들이 국가의 초석으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오늘날에는 비록 '프린스 앨버트(PA)'라는 말을 들으면 푸딩 레시피보다 피어싱 용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크리스마스 식사를 준비했던 당시 요리사들의 수고에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여왕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오스본성에 기거할 때면 주로 특별 열차 편으로 음식을 공수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푸딩은 면포 행주에 싼 채로 몇 주간 매달아뒀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영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음식인 푸딩의 역사에 관해 수많은 역사학자가 연구를 계속해왔다. 푸딩이 탄생한 이유 중 하나는 재료로 쓰인 건과일류의 보존성과 관련이 있다. 원래는 가을에 도축한 고기를 얇게 썰어 콩팥 기름에 재운 과일과 함께 틀에 넣어 보존했다. 이로부터 두 가지 음식이 탄생하는데, 하나는 고기 파이, 다른 하나는 걸쭉한 국물 또는 수프이다. 크리스마스 푸딩은 차츰 필수 메뉴로 자리 잡았다. 당시 푸딩에 들어가는 재료 중에 콩팥 기름이 등장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푸딩의 색깔을 내는 것은 당밀과 황설탕이다.
(리뷰자 주 : 보통 생각하는 커스타드 푸딩과는 다소 다른 질감이다.)
- PA (Prince Albert) piercing : 남성의 성기에 착용하는 링 모양의 피어싱을 가리킨다.
(리뷰자 주 : <음식의 제국>에서 다뤄진 바 있다.)
- 1911년 4월 14일,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 일등석 승객들에게 각종 디저트가 카트에 담겨 나온다. 젤리 복숭아로 만든 월도프 케이크를 먹을까, 바닐라 글레이징을 한 초콜릿 에클레어를 먹을까, 그들은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몰라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슈 페이스트리에 크림을 채워 넣는 이 레시피는 16세기부터 알려졌고, '공작부인의 빵'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옛날 방식으로 안을 채우고 싶으면 향을 더한 샹티이 크림이나 잼, 마멀레이드를 고를 수도 있다. 그다음 설탕을 끓여 만든 시럽(sucre cuit au cassé, 끓인 설탕을 찬물에 담갔을 때 선명하게 깨지는 상태)에 에클레어를 통째로 담갔다가 건져서 코팅을 한다. 이날 타이타닉호에서 디저트를 만들던 파티시에는 자신이 생애 마지막 에클레어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슈 페이스트리 반죽의 특징은 만드는 중간에 불 위에서 잘 저으며 수분을 증발시키고, 오븐에 구우면서 다시 한번 건조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그래야 머랭처럼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한 슈를 얻을 수 있다. 크렘 파티시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왕실과 귀족의 요리사였던 프랑수아 마시알로의 레시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는 달걀을 풀어놓은 혼합물에 밀가루와 우유를 넣고 화덕에서 끓여 만들었다.
(리뷰자 주 : 에끌레어는 "파티세리 바이 가루하루"가 찐이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 먹고 싶다.)
- 쇼와 3년(1928) 11월 10일 히로히토 왕세자가 일본 왕위에 오른다. 왕의 의복과 장신구를 승계하는 긴 전통 즉위식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의례에 따른다. 이 연회에서는 당연히 '떠오르는 태양의 제국'이라 불리는 일본의 전통 관례와 풍습 등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연회 만찬의 메뉴는 프랑스 어로 쓰여 있었고, 상에 올린 음식 중 아시아풍 음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맑은 거북이 콩소메를 제외하면 모든 코스가 프랑스 요리 일색이었다. 디플로마트 소스를 곁들인 송어, 벨뷔 스타일 메추리 쇼 프루아, 익힌 채소를 곁들인 소고기 안심, 샴페인 소르베, 골수 소스 셀러리, 껍질 사이에 송로버섯을 넣고 로스트한 새끼 칠면조, 임페리얼 푸딩 등이 식탁에 올랐다. 이 메뉴를 통해 샴페인은 탄생 이후 누려온 긴 역사, 즉 전통적으로 세상의 모든 권위 있는 중요한 식탁에 반드시 오른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리뷰자 주 : 이 거북이 콩소메는 정말 거북 수프다. 자라탕 같은.)
- Sauct diplomate : 생선 육수, 양파, 달걀노른자 베이스의 노르망디 소스(sauce normande)에 랍스터 버터와 잘게 썬 랍스터 살, 송로버섯을 넣어 섞은 것.
- chaud-froid de caille en Bellevue : 거위 간과 잘게 다진 송로버섯 등으로 속을 채운 뒤 원래 모양대로 송아지 육수에 익혀 식힌 메추리에 쇼 프루아 소스를 끼얹고, 송로버섯과 삶은 달걀로 장식한 다음 메추리 육즙 젤리를 씌워 굳힌 요리.
- operation Overlord : 노르망디 전투에 대한 암호명으로,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서 성공적으로 마친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포함해 궁극적으로 프랑스 전역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 처칠은 스탈린에게 유고슬라비아 군주의 군대인 체트닉스가 아니라 요시프 브로스 티토 지지파를 옹호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렇게 전후에 등장할 세계의 판도가 결정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새로 성립될 국제기구의 원칙이 채택됐다. 점령지 곳곳에서 독일은 분령됐고 동 프러시아의 소련 합병도 결정됐다. 한편 폴란드 국경은 모호한 상태로 남았는데, 이는 스탈린의 탐욕이 강하게 작용한 탓이었다. 3국의 지도자는 각기 자신의 힘과 비전,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협상에 임했다. 회담이 열린 사흘 동안 매일 저녁 한 명의 국가 원수가 돌아가면서 호스트가 돼 연회를 개최했다. 첫날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디너파티를 주최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요소는 거의 없었다.
- 11월 29일, 스탈린 주최로 열린 두 번째 만찬의 메뉴에 관해서는 자세한 자료를 구할 수 없었지만, 독일군 포로 5만 명이 소련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에 건배를 제안했을 때, 주최자와 처칠 사이 설전이 있었다고 한다. 처칠은 스탈린이 사과하고 그를 만류할 틈도 주지 않고 연회장을 떠났다. 마지막 날 만찬 주최자는 처칠이었다. 이날은 꽤 의미 있는 날이었다. 11월 30일은 바로 처칠 총리의 69번째 생일이었다. 식사 메뉴는 비교적 간단했지만 파티는 성대했다. 페르시아식 수프, 카스피해 연안에서 잡은 브라운 송어, 칠면조, 페르시아식 랜턴 아이스크림 디저트, 치즈 수플레 등이 나왔다. 저녁식사 중 해프닝이 있었다. 페르시아 랜턴은 아이스크림 안에 초를 넣어 표면을 통해 불꽃이 보이게 한 디저트였다. 스탈린이 연설을 하는 사이에 나온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디저트에 매료된 종업원은 쟁반을 똑바로 들지 못했고, 촛불이 든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리면서 불은 스탈린의 통역사 블라드미르 니콜라이에비치 파블로브의 머리카락에 옮겨 붙었고, 하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리뷰자 주 : 사진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확인할 수 없었다. 추후 다시 도전.)
-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 이후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았는데, 그것은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탔던 경험이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자국 영토인 크림 반도의 얄타 해수욕장을 회담 장소로 정했다. 이 회담의 결과는 잘 알려졌다. 소비에트 연합은 독일이 항복한 지 3개월 만에 일본과 벌이는 전쟁에 합류했고, 유럽은 영향력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분할됐다. 독일은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점령됐다(포츠담 회담에서 4개 지역으로 바뀐다). 또한 폴란드 국경은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소비에트 연방에는 긍정적으로, 독일에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회담 진행은 미국인들이나 영국인들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직 전쟁이 한창인 유럽 대륙을 통과해 간다는 것은 지병을 앓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고, 이 과정에서 몸이 매우 쇠약해진 순간도 있었다. 그는 이 회담이 끝난 뒤 불과 2개월 후에 사망했다. 게다가 얄타는 해수욕장으로서도 그리 멋진 곳은 아니었다. 광산과 난파선 잔해 등으로 항구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또한 미국과 영국 선박은 그곳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세바스토폴에 정박해야 했으므로 처칠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은 본국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 처칠은 이곳을 "발진티푸스 예방에 좋을 정도, 그러나 머릿니에는 치명적일 정도의 위스키가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하데스(Hades, 저승의 신)의 리비에라"라고 묘사했다. 회담은 6일간 계속됐는데, 공식적인 만찬은 3번에 그쳤다. 루스벨트가 주최했던 첫 번째 연회와 처칠이 주최했던 마지막 저녁식사는 그 차이가 엄청났다. 첫 번째 만찬에서 물론 캐비아와 보드카가 나오기는 했으나, 나머지는 미트로프나 남부식 프라이드치킨 등 전형적인 미국 메뉴였다. 반대로 영국 총리가 개최한 디너에는 청어, 연어, 홀스래디시를 곁들인 새끼 돼지 요리 등 현지 특산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식 메뉴는 얄타에 문화적 충격을 남긴 반면, 처칠이 제공한 메뉴는 개성 있는 우아함으로 남았다. 심지어 조지아인인 스탈린에게 그 지역 특선음식인 양고기 케밥, 샤슬릭까지 대접했으니 말이다.
- 어디에서도, 설사 잠자리에서도 비밀은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 증거가 여기 있다. 1961년 5월 재클린 케네디는 대통령인 남편과 함께 프랑스 공식 방문길에 올랐다. 그녀의 명성은 실로 대단했으며, 모든 언론은 그녀의 행적을 밀착 취재해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녀의 다이아몬드를 기억하고, 샤를 드골 대통령이 엘리제궁 만찬에서 그녀에게 대접한 카나페를 기억한다. 이날 메뉴에는 파리 스타일 바닷가재 요리, 오를로프 송아지 안심, 젤리로 차게 굳힌 페리고르 산 푸아그라, 샐러드, 멜론 안에 든 디저트가 나왔다. 대통령궁 요리의 정수를 보여준 메뉴였다. 와인은 1953년 산 게부르츠트라미너, 1952년 산 본 그레브 그리고 1952년산 샴페인 멈 코르동 루즈를 냈다. 이후 몇 년이 지난 뒤 재클린은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잭과 결혼했을 때만 해도 나에게 드골은 영웅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너무도 무례했다."라고 그녀는 당시 프랑스 방문을 회상하며 말했다. 마지막에는 "나는 프랑스인들이 너무 싫다. (..) 그들은 친절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밖에 모른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때 나온 프랑스 음식들은 정말 맛있었다.
(리뷰자 주 : 당시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 확인해볼 것.)
- 보퀴즈는 송로버섯을 가늘게 갈아 오믈렛에 넉넉히 넣거나 수프에 넣어 먹거나 간단히 채소에 살짝 얹어 먹는 방법을 떠올렸다. 보퀴즈는 1대부터 재료로는 송로버섯을, 조리법으로는 수프를, 그리고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로는 유타주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발한 요리를 가장 먼저 시식한 이는 모레스텔의 제분업자 고랑수아 숄라였다. 그는 수프 그릇을 덮은 채 부풀어 있는 피유타주를 깨고 맛을 봤다. 모든 요소가 무척 섬세했고, 맛도 일품이었다. 바삭하게 깨지는 페이스트리 덮개 덕분에 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미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크러스트가 깨지면서 퍼지는 송로버섯의 풍미 또한 대단했다. 이 '트러플 수프'는 한 셰프의 영혼이 담긴 불멸의 시그니처 요리로 자리 잡게 됐다.
- 2006년 3월 14일, 그날도 팔군(Phalgun, 힌두교의 음력 달력) 달력상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힌두교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이며 '색의 축제'라고 불리는 홀리(Holi)도 이 달에 있었다. 이것은 선(Vishnu)이 악(Hiranyakashipu)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축제다. 마하라자 가즈 싱에게 그해의 홀리 축제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 알랭 뒤카스(Alain Ducasse) 셰프와 그의 조리 팀은 의욕이 넘쳤다. 모두 18코스의 메뉴가 준비됐다. 소금 크러스트를 씌워 익힌 왕의 텃밭 채소와 곁들임 양념, 개구리 뒷다리와 소렐 소스, 송로버섯을 넣은 따뜻한 뿔닭 파데, 바닷가재 라비올리와 부이용, 익힌 채소와 생채소 모둠, 캐비아를 얹은 도미와 비트, 모렐 버섯과 부드러운 뇨키, 작은 어선에서 잡은 가자미 필레, 낚시로 잡은 넙치 요리와 검은 송로버섯, 랍스터와 돼지감자, 셀러리, 땅콩을 곁들인 비둘기, 올리브를 박아 노릇하게 지진 송아지 흉선, 세이보리와 가지를 곁들인 어린양 등심 요리, 열대 과일 바슈랭, 바닐라 밀푀유, 붉은 베리류 디저트, 헤이즐넛, 배 등이 준비됐다. 엘리제궁의 저장고에서 공수한 와인은 1998년 산 동 페리뇽 샴페인, 도멘 퐁텐 가냐르의 2009년 산 바타르 몽라셰, 2008년 산 사토 퐁테 카네, 2006년 산 샤토 오브리옹과 도멘 트림바흐의 2002년 산 리슬링 레이트 하비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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