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코디 캐시디] 제일 처음 굴을 먹은 사람은 누구일까 - 인류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위대한 처음을 찾아서

일루젼 2022. 1. 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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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코디 캐시디 / 신유희
출판 : 현암사 
출간 : 2021.11.30 


 

어서 뒤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겁게 읽었다.

 

이 책은 호미닌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가 일어난 시점부터 지금의 우리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시간 단위를 24시간으로 치환해 각 17가지의 '최초'들이 대략 몇 시경, 어디쯤에서 일어났는지를 살펴본다.

 

최초의 미스터리 살인. 

최초의 굴 시식가. 

최초의 기록된 이름.

최초의 말 라이딩. 

....

...

 

 

이 각각의 이야기에는 주인공들이 존재한다. 기록이 존재하기 이전 시기의 이름 모를 인물들에게는 상황상 가장 적합해보이는 이름과 성별을 부여하는데,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만으로도 '역사적 순간'일 뿐이었던 지식이 누군가의 '이야기'로 변화한다. 오시리스, 주빌리, 윌, 커크 등등 각 인물의 이야기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자료, 입담을 통해 생동감 있게 전해진다. 

 

기존의 통설들을 시원하게 뒤집는 반전들도 존재했는데, 천공술을 시술받는 건 언제고 꺼려지는 일이지만, 가죽짚신은 꼭 한 번 신어보고 싶다. 저자에 따르면 수렵채집인들이 농경정착민으로 변화하게 된 가장 큰 미끼는 '주식(빵)'이 아닌 '술'이라는 주장이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납득해버리고 말았는데, 고된 노동을 인내해가며 되풀이할만한 충분한 동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흠흠.

 

약간의 오타들이 있어 조금 아쉬웠지만, 내용 전체를 해치치는 못한다.  

시원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니 재미나 흥미 차원에서라도 꼭 한 번 읽어봄직하다.

 

추천!

 


   

 

 

- 석화 이전 시대의 호미닌이 해산물이나 껍데기를 벗긴 조개를 먹은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마린은 설명했다. 마린의 의견에 따르면, 그들이 바다에서 먹거리를 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조류 때문이었다. 특히 굴은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졌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므로 95%의 경우에는 접근조차 할 수가 없다. 예측할 수 없이 드물게 나타나는 특성 때문에 초기 호미닌은 굴 채집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렵 채집인은 자신이 미리 계획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채집 방식에 생계를 걸지 않았다"고 마린은 이야기했다. 
 

- 그러나 석화의 진짜 능력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용기가 아니었다. 피너클 포인트 동굴에서 발견된 수많은 굴 껍데기는 그녀가 언제 바다에 가야 굴을 채취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마린은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바다의 조류를 예상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 그러나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유전학자인 조지 비들 Jorge Beadle이 1972년에 옥수수의 야생 조상에 대한 오랜 수수께끼를 풀면서, 그는 의도치 않게 맥주와 빵 논쟁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비들의 발견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술을 마음껏 마실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면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먹거리 자원을 길들일 수도 있으며, 이전에도 이미 그렇게 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투프 문화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현재 옥수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열량을 제공하는 주요 곡물이지만, 길들인 옥수수는 밀과 달리 야생에서 발견된 그 어떤 식물과도 닮지 않았다. 인위 선택이 옥수수의 모습을 너무 확연히 바꿔놓은 탓에 옥수수의 야생 조상은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들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오늘날의 옥수수가 멕시코의 야생풀인 테오신테 teosinte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비들의 발견으로 인류학자들은 나투프 인들이 처음으로 곡물을 모으게 된 이유를 다시 고려해야 했다. 빵을 얻으려고 야생 밀을 모았다는 생각은 비교적 그럴듯하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고 먹을 게 없었어도 테오신테를 모으는 수고를 감수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테오신테는 먹거리 자원으로는 전혀 유용하지 않다. 

 

- 고고학자들의 이 같은 믿음에 물음표가 떴다. 유럽, 러시아,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에서 천두술을 받은 두개골이 발견됐으며, 시행시기는 거의 7천 년이 넘는 기간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만약 수술을 시행했던 의사가 제로 박사뿐이었다면, 또는 특정 기간, 특정 지역에서만 있었던 것이라면 제로 박사의 동기가 종교적 신념이거나, 또는 전족과 같이 극단적으로 신체를 변형시키는 관습의 일종이었을 것이라고 쉽게 결론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천두술은 서로 접촉한 적도 없고 공통점도 거의 없는 문화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것이 특정 지역의 관습이나 생활 방식일 가능성은 없으며, 따라서 좀 더 포괄적인 설명이 필요해졌다. 의학 역사학자 플리니오 프리오레스키 Plinio Prioreschi가 쓴 것처럼 "그것은 모든 지역에서, 모든 선사 시대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욕구와 경험에 뿌리를 둔 행위였다."

- 제로 박사가 처음으로 메스를 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려면 특정 지역의 생활 방식이나 종교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두개골에 난 구멍 Holes in the Head>을 집필한 고고학자 존 베라노 John Verano는 특히 파격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고대 의사들의 의학적 지식과 의술이 꽤 훌륭했다는 것이었다.

 

-  1990년대 초, 하버드대 생화학자이자 의학 역사학자인 L. J. 헨더슨 Henderson은 이렇게 주장했다. "임의의 질병에 걸려 임의로 찾아간 의사에게 진료를 받은 임의의 환자가 치료 효과를 볼 가능성이 50%를 넘긴 것은 인류 역사상 1910년과 1912년 사이, 미국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다." 하물며 수술의 역사는 그보다 더 암울하다.

-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 소속 의사였던 윌리엄 William Keen 박사는 자신의 계산 결과, 게티즈버그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 도시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것이 7배나 더 위험하다고 기록했다. 구멍 뚫린 두개골을 본 인류학자 폴 브로카가 그의 수술이 성공했음을 진단했던 바로 그해에도, 런던의 의사가 그와 비슷한 수술을 해서 환자를 살리는 경우는 70%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제로 박사가 뛰어난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수술을 성공시켰다는 발상은, 현재까지 기록된 의학 역사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실시한 수술 방식은 실제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있다.  

 

- 어느 찬송가에서 여신 율 Eula는 수메르 여성의 삶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묘사했다.
"나는 딸이고, 나는 신부이며, 나는 아내이며, 나는 주부이다." 

 

    

 

더보기

- 처음에 석화는 잠자는 거북이나 거북 알, 또는 해변으로 쓸려온 고래나 쉬고 있는 바다사자 등 무언가 다른 먹거리를 찾아서 바다 근처를 뒤지다가 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동굴 속 공예품 중에서 혹등고래의 피부에서만 사는 코로눌라 디아데마 Coronula diadema, 즉 일종의 따개비를 찾았는데, 바다에서 약 4.8km나 떨어진 동굴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신기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바다를 다니다가 어느 날, 우연히 조류가 제일 낮을 때 바다에 도착한 석화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굴 껍데기를 쪼개서 용감하게도 그 안에 든 것을 맛보았을 것이다.

 

- 조나단 스위프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 정도로 대담한 일은 아니다. 현대의 개코원숭이 등의 동물들도 굴을 먹는다. 다른 동물들이 굴을 먹는 모습을 본 석화는 그게 먹어도 괜찮은 음식임을 꽤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코원숭이는 사람과 달리 꽃도 먹고 짖기도 하는 동물이므로, 석화처럼 경험이 풍부한 채집인은 다른 동물이 먹는다고 무작정 따라서 먹지는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석화가 아트로파 벨라돈나 Atropa belladonna 열매를 먹는 토끼를 보고 따라 했다면, 그녀는 24시간 이내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동물이 굴을 먹는 모습을 봤다면 어쨌든 이는 한 번쯤 용기를 내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익혀서 먹는다면 더더욱 시도해볼 만했다. 익힌 음식은 날음식보다 안전했고, 점액질에 흐물흐물한 생굴의 모양새는 없던 조심성도 생기게 했을 것이었다. 

 

- 아프리카 남단에서는 매달 며칠만, 그것도 하루에 몇 시간 동안만 조류가 아주 낮아진다. 이는 자주 일어나지도 않을뿐더러 일정하지도 않다. 조수 간만의 차와 시기는 한 달 내내 급격하게 변해서 어떤 때는 조수 간만의 차가 별로 크지 않지만, 또 어떤 때는 그보다 훨씬 크게 나타난다. 이처럼 무작위로 나타나는 조류의 패턴은 호미닌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미닌이 조류의 패턴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해답이 누가 봐도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밤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 조류는 대체로 태양과 달의 인력에 의해 일어난다. 태양과 달이 지구의 같은 편에서든 아니면 지구를 사이에 두고서는, 어쨌든 일직선을 이루면, 둘이서 같이 지구의 중심을 끌어당겨서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조류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조류의 패턴은 얼핏 보면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사실 이는 보름달이나 초승달을 보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현상이다. 즉 석화는 단순히 용감하게 새로운 음식을 시도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한 고대의 천문학자였다. 매일 밤 다양한 형태로 밤하늘을 찾아오는, 신비롭게 크고 하얗고 둥근 물체와 바다의 움직임 간의 연결고리는 오늘날에도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쉽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석화는 이를 해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세계 최초의 실용 천문학자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일단 조류를 예측하게 된 석화는 언제 바다에 가야 하는지 계획할 수 있었고, 이로써 굴은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주식의 한 부분이 되었다. 

- 우리의 호미닌 조상이 처음으로 침팬지와 보노보에서 분기했을 때, 그들은 털에 살면서 피를 빨아먹는 페디큘러스 휴마너스 캐피티스 Pediculus humanus capitis, 흔히 머릿니라고 불리는 기생충의 숙주였다. 머릿니는 이후 최소 600만 년간 호미닌의 몸에 기생했으며, 지금도 인간의 머리카락에서 그 존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머릿니 외에도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이가 또 있다. 지난 600만 년 동안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서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 두 종을 더 옮겨왔는데, 그것은 바로 사면발니와 몸니다.

- 약 300만 년 전, 우리 조상은(아마도 같은 시간대는 아니었겠지만) 고릴라와 잠자는 공간을 공유했고 그로 인해 우리 몸에 사면발니가 옮겨왔다. 이후에는 털이 아닌 몸에 붙어서 사는 몸니까지 등장하면서, 인간은 다른 영장류들보다 세 배나 많은 종의 이가 기생하는 숙주가 됐다. 마냥 불결하게만 느껴지는 내용이지만 여기에도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이들 기생충 덕분에 생물학자들은 절대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류가 옷을 입기 시작했을까?

- 옷은 유기물을 재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돌이나 뼈와 달리 화석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옷의 기원은 오랫동안 미결 문제로 남아왔다. 최근까지도 고고학자들은 옷이 먼저 발명됐고 그로 인해 털이 필요 없어지면서 호미닌의 몸에서도 털이 사라진 것이리라 추측했다. 어찌 보면 옷은 벗을 수 있는 털과 다름없으므로, 시도 때도 없이 항상 따뜻하게 있기보다는 필요할 때만 온기를 얻는 방식으로 업그레이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럴듯한 의견이지만, 최근 유전학자들은 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포르투갈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이 처음 남아메리카 남쪽 해안을 항해했을 때, 산 위에는 만년설이 쌓였고 바다에는 빙하가 흘러들어 왔지만, 그곳에 사는 야가족과 알라쿠엘프족은 옷 없이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 체온 유지를 위해 그들은 몸에 동물 기름을 발랐고 모닥불을 아주 많이 피웠다. 마젤란의 선원들이 '불의 땅'이라는 뜻으로 티에라 델 푸에고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였다. 그들은 옷을 입고 생활하는 이웃 오나족 사람들과 자주 전쟁을 벌였으므로, 야가족과 알라쿠엘프족이 옷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옷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태즈메이니아 Tasmania의 어보리진도 랄프가 살았던 지역보다 훨씬 추운 기후에서 생활하면서도 옷은 거의 입지 않았다. 옷은 인류학자들이 '문화적 보편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불의 통제와 달리 옷은 모든 인류 문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아니다. 그러나 몸에 색을 칠하거나, 문신을 새기거나, 귀걸이를 하거나, 그 밖에 몸을 꾸미는 행위는 문화적 보편성에 해당한다.  
 

- 1940년 프랑스 남서부에서 발견된 라스코 Lascaux 동굴에서도 엄청나게 훌륭한 벽화가 나왔는데, 이를 본 파블로 피카소는 "현대 미술이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을 비롯한 오리냐크 화가들은 정말로 많은 예술적 혁신을 창조했다. 크기와 각도를 이용하여 2차원의 표면에 3차원을 표현하는 원근법은 아테네의 예술가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장은 그보다 거의 3만 년 전에 힘 겨루는 코뿔소와 하강하는 말을 그리면서 원근법을 적용했다. 점과 공간을 활용해서 이미지를 표현하는 점묘법 역시 1800년대 후기 프랑스 화가들의 업적으로 알려졌지만, 쇼베 동굴 입구 근처에는 한 예술가가 점묘법을 사용해서 붉은 매머드를 그린 그림이 있다.

- 쇼베 동굴에서는 스텐실 기법이나 네거티브 이미징 기법도 찾아볼 수 있다. 쇼베의 화가들은 벽에 손바닥을 대고 손가락을 넓게 편 후에, 가늘고 속이 빈 뼈에 황토를 넣고 입으로 불었다. 그러면 손바닥을 대고 있었던 면만 빼고 붉은 황토가 흩뿌려지면서 손자국이 남았는데, 이는 "내가 여기에 있었음"을 남기고 싶었던 고대 예술가의 마음을 반영한 듯하다.  

 

- 지난 10년 이내에 고고학자들은 대륙 분수령 길이 열리기 전에도 오리건과 칠레에 사람들이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를 찾았다. 따라서 현재 오리건 대학교 고고학 교수 존 얼랜슨 John Erlandson을 포함한 많은 고고학자들은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이 적어도 1만 6천 년 전에 이루어졌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 시기에 가능했던 유일한 경로는 캐나다 서부 해안을 따라 작은 배를 타고 위험천만한 항해를 하는 것뿐이었다. 캐나다 해안의 바위를 조사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몇몇 바위가 약 1만 6천 년 전 빙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 실제로 바닷길이 존재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얼랜슨에게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을지 물었다. 그는 캐나다 해안의 서쪽 경계를 가득 메운 켈프는 베링기아인의 식량이 됐을 뿐만 아니라 데르수가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놓아주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 같은 '켈프 하이웨이 kelp highway'는 베링기아에서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 Baja까지 이어져 있어서, 데르수가 항해하는 동안 먹거리는 물론 계속해서 남하할 수 있는 동기 부여까지 제공했을 것이라고 얼랜슨은 말했다.
(리뷰자 주 : 캐나다 해안의 바위 중 일부가 빙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바닷길이 존재했음 사이의 관계성 확인.)

 

- 즉 호미닌이 발효된 과일즙을 농축해서 과일주를 만들고, 꿀에 물을 첨가해서 벌꿀 술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한 이후였다. 과일주와 벌꿀 술을 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서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하기 전부터도 곧잘 만들어졌다. 그러나 과일주와 벌꿀 술은 맥주만큼 인간 사회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맥주는 곡류로 만든다. 즉 대량으로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맥주의 발견으로 호미닌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술을 마실 수 있게 됐다. 술을 마시려는 욕구가 얼마나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는지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맥주의 발견이 인류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순간 중 하나라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맥주의 발견은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곡물은 술의 재료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요한 먹거리이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섭취하는 열량의 거의 절반은 곡물에서 나오며, 곡물의 집약적 재배는 농업혁명, 즉 사냥과 채집에서 농업과 목축으로 넘어가는 첫 번째 변천을 촉발했다. 지금까지도 농업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사건으로 남아있다.

- 초기 농경민들은 수렵 채집인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일찍 죽었으며, 건강 상태도 더 나빴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들이 일부러 농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으리라고 추측해왔다. 그보다는 마치 덫에 걸린 가재처럼, 메소포타미아의 수렵 채집인들도 미끼를 물어서 어쩔 수 없이 농업에 걸려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미끼는 어쩌면 학자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것처럼 '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농업으로 끌어들인 미끼가 다름 아닌 '맥주'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세계 최초로 맥주를 만든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여기서는 그녀를 오시리스 Osiris라고 부를 것이며, 나는 오시리스가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맥주는 밀, 보리, 호밀 중 어느 한 곡물의 씨로 만들어졌을 것인데, 수렵채집인 사회에서 곡물을 모으는 일은 주로 여성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 오시리스는 대략 1만 5천 년 전 중동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아마도 고고학자들이 슈바이카 Shubaya라고 부르는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요르단 북동부에 있는 슈바이카 유적지는 2018년 어느 고고학팀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구운 곡물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 오늘날의 맥주 공장은 대개 이러한 종류의 오염을 피하려고 주의 하지만 시큼한 맥주를 만드는 몇몇 공장에서는 일부러 락토바실러스를 넣기도 하는데, 이 맥주들이 아마도 최초의 맥주 맛과 꽤 비슷할 수도 있다. 스콧 언저만은 지금까지도 양조되는 맥주 중에서 오시리스의 음료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베를리너 바이세 Berliner Weisse라는 맥주를 꼽았다. 베를리너 바이세는 제조 과정에서 홉 hop을 쓰지 않으며, 가볍고 시큼한 맛이 난다. <비어 & 브루잉 매거진 Beear & Brewing Magazine>에 따르면, 베를리너 바이세는 "원기를 북돋는 독특함이 있고, 약간 흐릿하고 거품이 일며, 가볍게 톡 쏘는 맛이 난다." 그러나 베를리너 바이세와 달리, 오시리스의 맥주에는 밀 고형물이 떠다녔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상형문자를 보면 그들은 맥주를 짚에 걸러서 먹었는데 아마도 맥주 위의 부유물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시리스의 맥주는 현대 라이트 맥주와 비교해도 알코올 함량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그것을 마시고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맥주를 마시면 몽롱해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즐기기는 한 듯하다.

-  테오신테도 옥수수처럼 이삭이 있긴 하지만 테오신테의 이삭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크기가 작다. 테오신테 한 자루에 함유된 열량은 현대 옥수수 한 알에 들어있는 것보다도 적다. 미시간 대학교 고고학자 켄트 플래너리 Kent Flannery는 테오신테를 '배고픈 음식'이라고 표현했고, 위스콘신 대학교 식물학자 휴 일티스 Hugh Itis는 야생 테오신테의 보호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그 곡물을 인간이 썼다는 것 자체가 의아할 정도"라고 말했다. 또한, 일티스는 "누군가가 이처럼 완벽하게 쓸모없는 곡물을 모으려고 또는 기르려고 노력한 이유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그에 대한 답은 술이었다.

- 테오신테는 겉껍질에서 달콤한 맛이 난다. 그 옛날, 지금의 멕시코에 살았던 사람들은 마치 사탕을 먹듯이 가끔 테오신테 껍질을 씹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약 7천 년 전 그들은 테오신테 이삭을 모아서 달콤한 즙을 짜기 시작했다. 테오신테 즙이 옥수숫대 술로 발효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옥수숫대 술을 만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큰 테오신테 이삭을 선택하고, 그 씨가 퍼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테오신테 이삭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나 테오신테 이삭이 5cm 정도까지 커져서 이제야 좀 먹거리답다 싶어 지기까지는 무려 3천 년간의 인위 선택 과정이 필요했다. 
 

- 사실 사람이 가축으로 키울 수 있는 동물은 엄청나게 드물다. 지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Diamond에 따르면, 다음 여섯 가지 행동적, 생물학적 특성이 있는 동물만이 가축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인간과 같은 먹거리를 두고 경쟁하는 동물은 가축이 될 수 없다. 돼지처럼 음식물 찌꺼기를 먹는 동물이어야 하며, 인간이 먹을 수 없는 먹이를 먹는 동물이면 더욱 좋다.

둘째, 우리에 갇힌 상태에서도 번식할 수 있어야 한다. 짝짓기를 위해 오랫동안 달려야 하거나 복잡한 영역 표시 행위가 있어야 하는 치타와 같은 동물들은 가축으로 삼기 어렵다.

셋째, 성장 속도가 빨라야 한다. 가축을 키워서 고기나 젖 등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효율적이어야 한다.

넷째, 개와 마찬가지로 무리를 이루고 살면서 그 안에 사회적 서열이 존재하는 동물이어야 한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우두머리에게 순종하는 유전적 성향을 갖고 있으므로 인간이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로 개입할 수 있다.

다섯째, 겁이 많거나 도망가고자 하는 본능이 강한 동물은 가축이 될 수 없다. 사슴이 그 예다.

마지막으로, 얼룩말과 같이 인간이 쉽게 다룰 수 없는 공격성을 지닌 동물들은 아무리 순한 개체만 선택적으로 번식시켜도(실제로 그러한 시도가 수차례 있었으리라고 고고학자들은 가정한다) 잠재적 가축이 되기 어렵다.

 

- 가축화에 성공한 몇 안 되는 동물들은 모두 다 갖춘 극히 드문 경우이다. 지난 2천 년간(타조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의미 있는 가축화가 새롭게 이루어진 사례는 없었다. 전 세계 육류의 대다수는 아직도 겨우 세 가지 가축에게만 의존한다. 말의 가축화 역시 보기 드물게 순한 수말 한 마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암말은 자연적으로 무리를 이끄는 수말을 따르지만, 야생 수말은 암말을 지켜주기 위해 다른 수말들과 싸우며 적대적이다. 수말은 본능적으로 남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다른 무리를 찾아 나서거나, 둘 중 하나다. 따라서 수말을 우리 안에 가두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 말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처음 가축이 된 암말은 여러 마리였지만 수말은 단 한 마리의 '아담'에게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나타난다. 이 수말은 아마도 유난히 차분하고 유순해서 야생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겠지만, 가축으로 잡혀간 우리에서는 많은 암말과 교배하여 후손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리뷰자 주 : 그 세 가지 가축은 무엇 무엇인가?)

- 그러나 이처럼 건강에 해로운 생활 방식이 가하는 공격에 주발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초기 농경민들이 생각보다 훨씬 정교한 의학적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쩌면 주발리는 항균제를 사용했고, 관절염 완화를 위해 뼈바늘과 숯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고 헌트는 내게 말했다. 주발리의 직업은 확실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동기 시대 유럽에 어떤 종류의 직업이 존재했는지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치기, 농부, 구리를 다루는 대장장이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사꾼, 이발사, 재단사는 있었을까? 20년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신석기시대 유럽 경제가 그저 생존에 기초했을 것으로 추측했었다. 그러나 외치의 신발을 자세히 연구한 결과, 학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정교한 경제체계가 갖춰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리뷰자 주 : 뼈바늘과 숯을 문신이 아닌 관절염 완화를 위해 사용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 외치의 신발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이탈리아 볼차노 Bolzano에 있는 사우스 티롤 고고학 박물관 South Tyrol Museum of Archaeology에서 전시관 유리를 통해 본 신발은 그저 속이 빈 빵 덩어리를 끈으로 묶어둔 것처럼 생겼다. 그러나 체코 즐린 zlin의 신발 공학 교수 페트르 라바체크 Petr Hlavacek는 외치가 발견되자마자 그의 신발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외치가 신었던 신발을 그대로 따라서 복제품을 만들었다. 끈과 가죽으로 만든 부츠에 안감으로는 건초를 채웠으며, 치수까지 265mm로 맞췄다. 그리고는 그 신발을 신고 테스트를 해보았다. 미끄러운 얼음 위를 걸어보기도 하고, 신발을 물에 빠뜨려 보기도 했으며, 유럽에 있는 여러 산에 올라가 보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그 신발이 '기적'이라고 선언했다. 건초로 댄 안감은 눈에서도 발을 따뜻하게 유지해주었고, 부드러운 가죽 바닥은 현대 등산화보다 더 압력 분산이 잘 되고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체코의 산악인 바클라브 파텍 Vacay Patek 역시 그 신발을 신어본 후에 "유럽에서 이 신발로 정복하지 못할 산은 없다"고 감탄했다. 라바체크는 전문적인 구두 수선공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질 좋은 신발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는 주발리의 마을에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직업이 있었을 가능성을 (증명까지는 아니라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현재 연구원 중에서 신석기시대 유럽에 어떤 직업과 거래가 존재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우리가 주발리의 직업을 추측하기에는 단서가 너무 적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주발리가 목축민이었다는 것이다.

- 1942년 3월 14일 아침, 앤 쉬프 밀러 Anne Sheafe Miller는 코네티컷 뉴헤븐 New Heaven의 어느 병원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이 서른세 살의 간호사는 한 달 전 유산을 겪으면서 감염됐다. 수혈과 설파제 등 최첨단 의료 기술에도 체온은 41.7℃까지 올라갔고 그녀는 의식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전의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그녀는 치명적인 용혈성 연쇄상구균 패혈증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고 의사 존 범스테드 John Bumstead는 자신의 노트에 기록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범스테드 박사는 뉴저지에 있는 어느 실험실에서 아직 실험 단계에 있는 약물을 구해왔다. 그 약은 매우 귀한 것이어서 의료진들은 나중에 앤의 소변에서 그것을 재활용하기도 했다.

- 주 경찰관이 알갱이가 굵고 짙은 갈색을 띠는 가루를 뉴헤븐에 있는 앤의 병실까지 가져왔고, 그 자리에 있던 미생물학자 모리스 타거 Morris Tager 박사는 훗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그 약에 "약간의 우려와 의심"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타거 박사는 그날 오후 새로운 약을 그녀에게 주입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정상 체온을 회복했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그날로부터 대략 57년을 더 살았다. 그 약은 바로 페니실린이었으며, 앤 쉬프 밀러 이후 페니실린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

 

- 페니실린은 세계 최초의 항생제로 인간이 감염과 맞서 싸우는 방법에 엄청난 혁신을 가져온 약이지만, 해로운 박테리아와의 영원한 투쟁에서 항생제는 두 번째로 효과적인 무기에 그친다. 그 어떤 의학적 산물도, 그리고 아마도 그 어떤 의학적 발견도 비누만큼 많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했다. 

 

- 세멜바이스는 의사들에게 산파가 출산을 돕는 과정을 전부 똑같이 따라 하도록 지시했다. 그와 똑같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심지어 병동에서 성직자가 종을 울리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료 의사가 시체를 부검한 후에 산모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산욕열로 사망한 것을 보고 그는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의사들은 시체를 부검한 후 바로 분만실로 이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반면, 산파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마도 의사들이 무언가 치명적인 입자 또는 냄새 등을 시체에서 산모로 옮기는 것이라고 추리한 그는 의사들에게 분만실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을 것을 요구했다. 사망률은 즉각 감소했지만, 의사들은 환자를 죽인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세멜바이스의 이론을 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그는 해고됐고, 의사들은 손 씻기를 멈추었다. 이후 세멜바이스는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 그리고 마침내 1977년 11월 1일 말린의 면역체계는 거의 4천 년간 인류의 골칫거리였던, 마지막 베리올라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것에 성공했다.

추신: 그러나 현재도 베리올라 바이러스를 담고 있는 바이알 병이 최소 두 병은 남아 있는데 하나는 조지아 애틀랜타의 생물학 실험실에, 다른 하나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다. 바이올라를 무기로 개발하는 것을 승인한 국가는 하나도 없지만, 1971년 소비에트에서 현장 테스트한 천연두 생물무기가 아랄스크의 어선으로 흘러 들어가서 세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천연두에 걸린 사람은 말린이 마지막이었지만, 1978년에는 잉글랜드의 버밍엄대학교 실험실에서 베리올라 바이러스가 환기 시스템을 통해 위층 사무실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자넷 파커 Janet Parker라는 이름의 의료 사진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부터 천연두는 정기 백신 접종을 멈췄으므로 현재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베리올라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없는 상태이다.

- 윌은 거의 4천 년 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대략 160km 떨어진, 지금의 이라크 중부에 있었던 고대 도시 니푸르 Nippur에서 태어났다. 니푸르는 대략 7천 년 전부터 유프라테스강의 축축한 강둑 근처에 세워졌으며, 기원후 1천 년 즈음 쇠퇴하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도시 중 하나였다. 윌이 태어날 무렵에는 강이 변화하여 한때는 수시로 범람했던 평원이 많이 건조해졌고, 니푸르 시민들은 갈대로 집을 짓는 대신 메소포타미아 방식에 따라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생활했다. 니푸르는 대형 신전이 있는 종교적 중심지였다. 고고학자들이 이 도시에서 복원한 4만 개의 수메르 점토판 중 대부분이 신전 관리, 공무원 임금, 시민들의 세금 부과, 곡물에 대한 회계 등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중 몇몇은 신전 관리자들이 젊은 학생들에게 수메르 언어를 가르쳤던 니푸르 서기 학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윌은 이들 교사 중 하나였다. 그 말인즉슨 윌이 아카드 사회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힘 있는 가문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아카드 사람들은 다신교도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신들이 일상의 여러 사소한 측면을 통제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빚이 있으면, 우투 신에게 빚을 없애달라고 빌었다. 복수를 꿈꿀 때는 니누르타 Ninurta에게 도움을 구했다. 가게 주인이 어떤 서비스를 판매하면, 그 주인은 이른 시일 내에 그 서비스를 반드시 제공할 것이라고 엔키 Enki에게 맹세했다.

 

- 그러나 월 자체는 엄청나게 독실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벤트 알스터는 저서 <고대 수메르의 지혜 Mirstom of Ancien samer>에서 초기 형태의 우스개 이야기들이 "사회적 행동에 대해 완전히 세속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적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월과 같은 수메르 서기들이 지금으로 치면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기독교인'과 같이 얼마든지 타협이 가능한 수준의 종교적 신념을 가진 남자 또는 여자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어렸을 때는 윌 자신도 서기 학교의 학생이었을 것이다. 서기 학교는 현대 버전의 초등 교육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비슷한 나이에 입학해서, 숙제가 있었고, 시험을 치렀으며, 일정 부분 공통된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이 진행됐다. 설형문자에는 문장부호가 없었으므로 문법은 좀 더 쉬웠겠지만, 그래도 공부는 지겨웠을 것이다. 당시 수메르 언어는 거의 죽은 언어였기 때문에 몇 가지 심각한 실수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알스터는 말했다. 한 학생은 '절뚝거리는'을 뜻하는 기호를 쓰려다가 '개구리'를 뜻하는 기호를 새겼는데, 이는 원어민이라면 할 수 없는 실수였다.

 

- 이와 같이 기분 좋은 정서적 전환을 가져오기 위해 농담이 작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양치기 개 농담은 학자들이 유머의 부조화 이론 incongruity이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을 둔 것이다. 마치 '지그'가 나온 것처럼 설정한 후 ‘재그'를 내놓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목사,  랍비, 그리고... 오리가 술집으로 들어갔다"는 문장이 그러하다. 매튜 헐리 Mattew Hurley가 이끄는 MIT 연구원 3인방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 같은 부조화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가 가정한 것에서 오류를 발견하면 보상으로 뇌에서 도파민이 소량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조화 이론은 "흰개미가 술집에 들어가서 '여기 바텐더 있어요?'라고 물었다"와 같이 간단한 농담을 읽었을 때 바로 웃음이 나오지 않고 잠시 멈칫한 후에야 웃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 두 번째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월성 이론 superiority theory'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남들보다 더 낫다고 느껴질 때 즐거움을 느낀다고 우월성 이론은 말한다. 이러한 유형의 유머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경험, 대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룬다. 멜 브룩스 Mel Brooks는 "내가 손가락을 다치면 그것은 비극이지만, 당신이 뚜껑 열린 하수구에 빠져서 죽으면 그것은 희극이다"라는 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요약했다. 우월성 이론을 수학 공식으로 옮기면 '희극 = 고통 + 고통을 당한 사람과 나와의 정서적 거리'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완화 이론 Relief theory'이 있다. 미국 철학자 존 듀이 John Dewey는 완화 이론을 "갑작스러운 긴장 완화"로 인한 유머라고 정의했다. 깜짝 장난감 상자나 술래잡기 등과 같이 무섭거나 불안하게 느껴졌던 상황이 갑자기 안전한 것으로 바뀌었을 때 재미를 느낀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완화 이론은 종을 초월해서 작용한다. 인간의 아이만큼이나 침팬지도 서로를 뒤쫓는 놀이를 즐기는데, 이는 공포가 갑자기 안도로 변할 때 느끼는 즐거움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문화에서는 너무나도 모욕적이고 불쾌한 말이 다른 문화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 영국에서 욕으로 쓰는 말 중 상당수는 생리현상이나 성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인 중세 시대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당시 영국에는 사생활 개념이 거의 드물어서 사람들 대부분이 개방된 공간에서 생리현상을 해소했었다. 따라서 대소변을 가리키는 단어가 욕설에 쓰일 만큼 문화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말이 아니었다. 중세 유치원 선생님들은 수업 중에도 일상적으로 piss24와 같은 단어를 썼을 것이다. 대신에 중세 영국인들은 '신의 뼈’나 ‘신의 피'와 같은 욕설로 상대방을 화나게 했다. 그렇다면 윌이 살았던 시대의 욕설도 종교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을까? 아니면 인종이나 대소변, 또는 아예 새로운 무언가였을까? 학자들도 알지 못한다. 
 

-  폭력의 결과로 커크는 아마도 인간을 제물로 바쳤으며, 어쩌면 식인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인류학자들의 초기 기록을 보면 마르키즈 제도에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과학자 제임스 페인 James Payne은 인간 제물이 만성적인 폭력의 당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일반적인 고정관념과 달리, 인간 제물은 남태평양이나 그들의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상 모든 주요 종교가 한때는 종교적 의식의 하나로 살인을 저질렀다. 이는 인간 제물이 특정 종교의 가르침과는 거의 상관이 없으며, 그보다는 만성적인 폭력으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라고 페인은 설명했다. 잦은 폭력은 두 가지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 생명의 가치를 낮춘다. 둘째, 폭력이 어디에나 만연하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신이 폭력을 좋아한다고 믿게 된다. 따라서 생명의 가치가 그리 큰 것이 아니니 신을 기쁘게 하려고 목숨 하나쯤을 내놓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1779년 쿡 선장이 하와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동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이미 장거리 항해를 대체로 그만둔 상태였기 때문에 커크가 어떻게 항해를 배웠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쿡 선장의 엔데버 Endeavour 호에 탔던 타히티 출신 항해사 투파이아 Tupaia가 들려준 이야기, 그리고 1932년 미크로네시아의 사타왈 Satawal섬에서 태어난 전통 항해사 마우 피아일루그 Mau Piailug의 이야기와 경험을 토대로 학자들은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종합할 수 있었다.

- 피아일루그가 할아버지에게 남태평양의 항구, 바람, 해류를 배웠던 것처럼 커크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항해하는 법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커크는 별을 보고 길을 찾는 법을 배웠다. 투파이아의 경험담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커크가 받은 교육은 모닥불 옆에 앉아 별자리를 익히는 것보다는 천문학 박사 과정을 밟는 것에 더 가까웠다. 쿡 선장의 엔데버호를 타는 동안 투파이아는 소시에테 제도, 오스트랄 제도, 쿡 제도, 사모아, 통가, 피지의 방위, 항해시간, 위험한 암초의 위치, 항구, 족장 등에 대한 정보를 전부 알려주었다. 투파이아는 1,000만 제곱마일에 달하는 남태평양과 130개의 섬을 다 기억하고 지도를 그리거나 구술했다. 엔데버호의 해군 사관 생도였던 조셉 마라 Joseph Marra는 투파이아를 두고 "진짜 천재"라고 묘사했는데, 외국 문화에 그다지 개방적이지 않았던 무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어마어마한 칭찬이었다.

 

- 폴리네시아 문화에는 문자도, 지도도 없었기 때문에 커크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머릿속에 담아야 했다. 별의 정체와 움직임을 알고, 어떤 계절에 그 별들이 나타나는지, 언제 사라지는지, 그리고 어떤 별이 어느 섬 위에서 제일 높이 뜨는지도 알아야 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항해 능력에 대해 쿡 선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똑똑한 사람들은 어떤 달에, 어떤 별이, 하늘의 어디에서, 언제 수평선 위로 떠 오를 것인지를 말할 수 있었다. 또한 일 년 중 어느 때에 각각의 별이 언제 뜨고 지는지를 꽤 정확하게, 유럽의 천문학자들이라면 듣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알았다."

 

- 커크가 어느 정도 항해술을 익히고 나면 나이 많은 항해사들이 커크를 시험했다. 혼자서 바다로 나가 항해를 해야 했으며 길을 잃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키즈 제도의 이웃 섬들까지 자주 항해했는데, 타히티까지 1,368km 거리를 가로질렀을 가능성도 크다. 그의 배는 때때로 '카누'라고 불리지만, 나는 이것이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서양 사람들이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항해 능력을 얕잡아 보았으며, 그들이 하와이에 간 것은 우연한 사고였을 뿐이라는 추측이 퍼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로 '카누'는 잔잔한 호수에서 하루쯤 나들이나 할 때 타는 것이지만 커크의 배는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지붕이 없는 고대의 선체와 구두로 전해지는 역사를 토대로 보면, 커크의 이른바 '카누'는 길이 24.4m짜리 이중 선체의 쌍동선 범선으로, 난로와 최소 둘 이상의 돛, 그리고 갑판 위에는 쉼터까지 완벽하게 갖춘 가히 위력적인 배였다. 나는 그것을 '엔터프라이즈 Enterprise 호'라고 부르겠다.

- 커크는 거대한 타마누 나무로 엔터프라이즈 호의 선체를 짓고, 나무판을 깊게 해서 배의 적재 능력을 높였다. 코코넛 껍질로 돛을 지지하는 밧줄을 엮었고, 야자나무 잎사귀로는 거대한 돛을 만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배를 만드는 데 엄청나게 많은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섬 탐험은 단지 폴리네시아 문화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조직 차원의 원칙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완성된 엔터프라이즈호는 사람 40명과 수개월을 버틸 수 있는 음식과 코코넛 껍데기에 담은 물을 실을 수 있었다. 물 무게만 해도 4,536kg이 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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