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존 마크 코머
원제 : The Ruthless Elimination of Hurry
출판 : 두란노서원
출간 : 2021.08.18
너무 삶에 매몰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찾아 읽었는데, 멈춤과 집중이 너무 불교나 뉴에이지적인 색채를 띤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적합할 듯 하다. 내 입장에서는 저자가 기독교적인 편향성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좀 불편했지만 -불교와의 비교를 넣치 않았어도 충분했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목사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일 듯 하다.
바쁘다는 것은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의미이고, 즉 뭔가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쉴새 없이 밀어닥치는 일들에 허덕이다 보면 문득 '이 모든 것에 끝은 있는가? 죽지 않는 한 계속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잠시 멈춰서서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뭔지 생각해보라는 메세지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저자가 목회자여서인지 글이 설교/강론처럼 구어적으로 수월하게 읽혔다. 번득이는 느낌은 없었지만 보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속도를 줄이고 의도적인 고요함을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마침 무척 바쁜 일정을 보내고 난 뒤라 좀 더 각별했다.
기독교에 거부감이 없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바쁨의 핵심은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바쁨에서 벗어나면 좋은 점은 단순히 즐거운 수준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침착하고 효과적으로 또한 강력하고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조금의 바쁨도 없이 사는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바쁘게 살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품어야 한다. 한 번에 하루씩 살기로, 오늘을 살기로."
- 한국 태생의 독일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 The Burnout Society>라는 책을 대다수 서구인들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로 마무리한다.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 이는 인간이 태양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순간이었다. 이는 인간이 자신과 주변 환경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새로운 증거였다. 하지만 그 지배가 온갖 버거운 요구들을 하는 기계의 지배 아래로 스스로 들어간 대가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태양이 일과 쉼의 리듬을 통제할 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통제 아래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계는 하나님과 달리 우리를 혹사하는 주인인 고용주의 통제 아래에 있다.
- 시인 메리 올리버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평생 영적 구도자로 살아왔다. 그도 비슷한 말을 했다. "관심은 헌신의 시작이다." 우리 마음의 관심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데서 예배와 기쁨이 시작된다. 마음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은, 예수님의 도제로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주된 임무이며, 동시에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주된 표적이다.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이 현대 세상은 우리의 내적 삶을 무너뜨리려고 작정한 하나의 공모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상황의 이면에 단순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아무런 경각심 없이 디지털 세상을 바삐 뛰어다니면 그것은 사탄의 일을 도와주는 꼴이다.
(리뷰자 주 : 이번 주에 읽은 <고양이>, <크레이빙 마인드>, <슬로우 영성>에서 모두 메리 올리버가 등장하는데, 그녀의 시집을 한 권 읽어봐야겠다.)
- 그러다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면서 해가 진 뒤에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부터 충격적인 통계를 소개한다. 에디슨 이전에는 사람들이 평균 11시간을 잤다. 그렇다. 11시간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했다는 위대한 남녀들의 위인전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 존 웨슬리, 찰스 스펄전 같은 위인들이 그러했다. 그런 위인전을 읽고서 '정말 나보다 신앙이 훨씬 좋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들이 저녁 7시에 잠자리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9 시간을 푹 자고 일어나 새벽에 달리 무슨 할 일이 있었겠는가. 이제 최소한 미국에서는 평균 수면 시간이 약 7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불과 1세기 반 만에 수면 시간이 4시간 정도나 줄어든 것이다. 우리가 종일 피곤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 우리는 아미시 공동체를 이상화하는데, 내가 볼 때는 좀 과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문명의 이기를 모두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알아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세상에 나타나면 그들은 사이드라인에서 그것을 관찰한다. 마치 새로운 약을 투입한 실험실 쥐를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우리를 관찰한다. "이것이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줄까? 우리를 병들게 만들까? 이익이 많은가? 손해가 많은가?" 그들은 우리가 인간 실험에 자원하도록 놔둔다. 그런 다음, 온 공동체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다. 자동차의 경우, 그들은 소비주의로 인해 끈끈한 공동체가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잃고 망가질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리뷰자 주 : 아미시. 럼스프링가(Rumspringa)라는 특별한 성인식 의례가 존재한다. 외부 세계와 거의 단절되다시피한 전통적 공동체 생활을 하며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
-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관심은 가장 희소한 자원이다.
- 잘 따라오고 있는가? 좋다. 전혀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리고 전기가 주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특정 인물들의 삶을 본받기(혹은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들이 한 말이나 이례적인 행동이 아니라 매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을 본받고, 그들의 습관을 우리의 습관으로, 그들의 일과를 우리의 일과로, 그들의 가치를 우리의 가치로 받아들여야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특정 법대에 가면 우리도 그 법대를 가야 한다. 그들이 하루에 한 시간씩 독서를 하면 우리도 하루에 한 시간씩 독서를 해야 한다. 그들이 아침 식사를 걸렀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먹던 바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를 모방해야 한다. 현재의 우리는 이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습관 하나하나가 쌓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복리효과처럼 작용해 하나의 삶을 만들어 낸다.
- 훈련은 힘을 얻는 방법이다. 영적 훈련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현재 '직접적인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결국 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영적 훈련도 힘을 얻는 방법이다. 하지만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힘(의지력)을 사용할 뿐 아니라 자신보다 훨씬 더 큰 힘, 즉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 내적인 소음은 이런 것을 말한다. 멈추지 않는 머릿속 대화,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 친구와 나눴던 불미스러운 대화를 계속해서 되새기는 것, 거리에서 본 여자나 남자에 관한 음란한 생각, 성적인 공상, 누군가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복수하는 상상, '~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으로 자신의 기쁨과 평안을 깨뜨리는 것, 가상의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곱씹는 것, 미래의 재난을 예상하는 것, 현실을 이상(理想)에 비추어서 생각하는 것, 완벽한 삶을 꿈꾸다가 현재 삶을 망치는 것.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혼란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그 안에 온갖 것을 쑤셔 넣는 것과도 같다. 많은 사람이 독성 있는 정신의 패턴에 갇혀 있다.
- 외적인 소음은 잠재우기가 쉽다. 그냥 휴대폰을 끄면 된다. 라디오 전원을 끄면 된다. 소파에 누우면 된다. 공원을 걸으면 된다. 심지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어쨌든 쉽다. 하지만 내적인 소음은? 이 소음은 전혀 다른 짐승이다. 반드시 길들여야만 하는 들짐승이다. 전원을 끄는 스위치 따위는 없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침묵은 두 가지 종류의 침묵을 아우른 것이다.
-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라는 책에서 침묵을 자신들의 일에 대한 큰 위협으로 여겨 이를 경계하는 악마들을 그리고 있다.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마귀의 영역을 "소음의 왕국"으로 부르며 "마침내 온 우주를 소음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 우리가 SNS나 잡지에 실린 라이프스타일 광고를 통해 접하는 이미지들을 생각해 보라. 브런치와 커피가 탁자에 놓여 있고 바닥에는 리넨 천이 깔려 있는 방에서 킹사이즈 침대 위에 한가로이 누워 있는 커플, 해변에서 최신 유행하는 수영복을 입고 와인과 치즈를 즐기는 그림 같은 장면, 창밖에 내리는 비를 구경하며 소파에서 기타를 치는 스무 살 젊은이, 신상 잠옷, 오리털 이불, 가구... 무엇을 판매하는 그 모든 이미지는 하나같이 안식일의 이미지다. 바로, 멈춤의 이미지. 기업의 마케팅 부서나 잡지사들은 우리가 이런 멈춤의 삶을 갈망하지만 전혀 그런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우리의 불만족을 자극한다. 아이러니는 이런 삶을 살기 위해 굳이 고급 잠옷이나 수제 담요에 비싼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안식일을 가지면 된다. 그냥 멈추면 된다. 그냥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삶의 속도를 늦춰 숨을 돌리면 된다.
- 일주일을 '7일'로 정한 틀을 바꾼 가장 최근의 사례는 프랑스혁명 때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변경했다. 당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재난이 일어났다. 경제가 붕괴하고 자살률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생산성? 생산성도 곤두박질했다. 바쁨과 생산성 사이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이 수없이 증명되었다. 사실, 일주일에 특정 시간 이상 일하면 생산성이 곤두박질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몇 시간인지 아는가? 50시간이다. 놀랍게도 그 시간은 약 6일간의 노동 시간에 해당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70시간을 일한 노동자들과 55시간을 일한 노동자들의 생산성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 '샤밧 Sabbath(안식일)'이라는 영단어는 히브리어 '샤바트'에서 왔다. 문자적으로 이는 '멈추다'라는 뜻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멈추는 날이다. 일을 멈추고, 욕구를 멈추고, 걱정을 멈추는 날이다.
- 앞서 말했듯이 히브리어 '샤바트'는 '멈추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즐기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멈춘다는 뜻 외에 하나님의 세상 속에서 그분과 우리의 삶을 즐긴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안식일은 하루 동안 하나님의 본을 따라 멈추고 즐기는 것이다. 세상을 즐기는 것이다. 그 세상 속에서 우리 삶을 즐기는 것이다.
- 바로는 필시 미국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애굽처럼 우리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 위에 세워진 제국이다. 미국의 경우(다른 많은 나라도 마찬가지), 실질적으로 그렇다. 나아가 우리는 노예를 부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할 방법까지 찾았다. 우리는 노예제도가 1865년에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단지 해외로 이전시켰을 뿐이다.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마음에 걸리지 않는 곳으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2,800만 명의 노예들이 있다. 18세기 대륙 간 노예무역으로 팔려 간 노예보다 더 많다. 필시 당신의 집에도 노예들이 생산한 제품이 가득할 것이다. 티셔츠, 구두, 벽에 걸린 시계, 바나나까지 노예들이 생산한 제품 천지다. 그래서인지 경제학자들은 글로벌 경제 시스템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그린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로 그런 그림을 "전 세계 부의 피라미드"라 부른다. 피라미드 맨 꼭대기는 세계 부의 45.9퍼센트를 소유한 인류의 0.7퍼센트다. 그들은 자동차를 몰고 컴퓨터를 소유하고 신발을 한 켤레 이상 갖고 있는(그리고 무려 5천 원에 달하는 커피를 마시며 이 책을 읽는) '엄청난 부자들'이다. 맨 아래는? 전 세계 부의 겨우 2.7퍼센트를 소유한 세계 인구의 70. 1퍼센트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의 양말과 신발, 스마트폰, 도시락통을 만드는 이들.
-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잔다.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성경책을 읽는다. 좀 더 기도한다.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야기를 나누고 소리 내어 웃는다. 여름에는 공원에서 산책을 한다. 겨울에는 모닥불을 피운다. 소파에 파묻혀 좋은 소설에 빠져든다. 서로 꼭 껴안는다. 낮잠을 잔다. 유대에는 "샤바트 슐러프"라고 심지어 안식일 낮잠을 지칭하는 표현까지 있다. 우리는 안식일에 잠을 많이 잔다. 사랑을 나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창가에 가만히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치 매주 스트레스가 좀 덜한 성탄절을 보내는 기분이다. 안식일을 반쯤 지나다 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 내 영혼이 내 몸을 따라잡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난다. 줄기차게 계속되는 회의, 이메일, 트위터, 사람 사이의 갈등, 인생의 어려움으로 녹초가 된 내 안의 깊은 부분이 되살아난다. 자유를 느낀다.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크게 되어야 할 필요성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 사회를 노예로 전락시키는 악한 '쉼 없음'의 영에서 자유로워진다. 대신, 다른 영, 곧 평온한 쉼의 성령이 내 존재 전체를 감싸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으로 충분함을 느낀다.
-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서구 사회에서 물질주의가 주된 의미체계로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그는 무신론이 아니라 쇼핑이 문화적 기독교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소비를 하면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혹은 파는) 것들에서 정체성을 얻는다. 많은 사람이 입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내가 사는 것이 곧 나다"라고 믿는다. 즉 그들은 자신이 입는 옷,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모는 자동차, 사는 동네, 사용하는 전자기기에서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들에게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자체다.
- 나치는 프로이트의 개념들을 차용하여 (프로이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로 볼 때 아이러니한 사실) 자신들의 선전 기계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성이 아니라 독일의 "무의식적 충동"을 공략했다. 히틀러는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인간 감정(욕구와 두려움)에 불을 지피는 데 누구보다도 탁월했다. 전쟁이 끝나고 프로이트의 개념들을 미국에서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로이트의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였다. 전쟁 당시 정보부 관리였던 그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는 나치가 전쟁 상황에서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면, 평시에 기업가들과 정치인들도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개념을 "PRPublic Relations"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소위 "미국 광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에 관해서 들어 본 적이 없는가? 대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그는 프로파간다(Propaganda)라는 책에서 많은 것을 예측했다.
"조직화된 습관들과 여론을 의식적이고도 지능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요소다. 사회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기제를 조작하는 자들은 국가를 진정으로 통치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형성한다."
- 목표는 옷장이나 창고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근심을 낳고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쓸데없는 잡동사니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번에는 잡동사니에 관한 정의를 보자.
내 삶에 가치를 더해 주지 않는 모든 것.
기쁨을 일으키지 않는 모든 것.
너무 작은 공간을 차지한 너무 많은 것.
더 이상 사용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 모든 것.
여기서 목표는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도제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다. 혹시 '이건 부자들이나 들어야 할 말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은 단순한 삶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삶'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을 읽지 않는다. 정의를 위해 기도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가난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하지만 연봉이 25,000달러 이상이라면 세계 인구 가운데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어간다. 34,000달러 이상이라면 무려 상위 1퍼센트 안이다. 죄책감을 심어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 나는 오랫동안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부유한 사람들을 적잖이 아는데, 이 구절이 그들을 향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물론 우리는 집이 있었지만 휴가라고 해 봐야 캠핑을 가거나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는 것이 전부였다. 내 옷은 유명 브랜드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싸구려 신발을 신었다고 아이들이 심하게 놀렸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거의 외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부유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세계적인 빈곤을 전혀 몰랐을 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다른 인종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설령 내가 부자가 아니라 해도(나는 분명 부자다) 열외가 아니다. 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대부분은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사실, 그분의 청중 가운데 대다수는 가난한 축이었다.
- 먼저, 몇 가지 원칙과 그에 따른 실천 방안을 살펴보자. 분명히 달하지만 이것들은 수칙 rule이 아니라 원칙 prineciple이다. 그만큼 자유롭다. 내가 가장 중시하는 열두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1. 구매하기 전에 그 품목의 진짜 비용을 따져 보라.
2. 구매하기 전에, 이것을 사면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거나 지구 환경에 해를 끼치는 것인지를 따져 보라.
3. 절대 충동적으로 구매하지 말라.
4. 물건을 살 때 더 좋은 것들로 적게 사라.
5. 할 수 있다면 공유하라.
6. 나누는 습관을 기르라.
7. 예산에 따라 살라.
8. 소유하지 않고도 즐기는 법을 배우라.
9. 피조세계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라.
10. 소박한 즐거움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라.
11. 광고가 선전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르라.
12. 물질주의 정신에 맞서는 즐거운 반란을 주도하라.
- 이 수칙들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이다. 당신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만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 뭐든 좋으니 목록을 만들어서 실천하라.
속도를 높이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삶은 바로 우리 코앞에 있다. 우리가 즐겨 주기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삶에서 바쁨을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하듯 이것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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