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24)

[필립 리브] 아서왕, 여기 잠들다

일루젼 2022. 2. 12.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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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필립 리브 / 오정아

원제 : Here lies Arthur
출판 : 부키 
출간 : 2010.08.13 


       

재미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미 알려진 아더왕의 전설에서 '이야기의 힘을 한꺼풀 벗겨낸다면 어떨까?'라고 묻는 듯한 소설이었다. 

요정도, 신도, 환상과 마법도 없이 현실적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훌륭한 소설이 되었다. 저자가 보여주는 구차하고 비겁한 현실의 이야기 속으로 홀린 듯이 빠져들어 읽게 만든다. 이 소설 속의 아서는 위대한 왕이라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했던 패거리의 수장에 가까운데, 개인적으로는 <라스트 듀얼>의 '카루주'가 겹쳐 보였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현실로 구현해낼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 실제의 경험은 비참하고 남루하더라도 그의 이야기 속의 자신은 고결하고 이상적이다. 어쩐지, 정말 그랬던 것 같은 기분이 실제로 그러했다는 자기 확신이 될 때 전설이 잉태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독자들에게 영상을 거꾸로 돌리듯 민낯에 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그것 또한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빠져들게 되는 현실감 넘치는 환상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끝. 


- 마르딘이 내 팔을 잡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네가 해 줄 일이 있단다. 그위나."
나는 말이 바닥에 떨어뜨려 놓은 거무스름한 똥 덩어리들로 눈길을 돌렸다. 저걸 치우라는 것일까.
마르딘이 입을 뗐다. "네가 나와 함께 아서를 돕게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니? 아서에게는 지금 징표가 필요하단다. 이곳 남쪽의 습한 황무지 언덕은 아일랜드인 하나가 다스리는데, 그는 밴 영주의 사람이란다. 그가 주인을 대신해 복수를 택한다면 힘든 싸움이 될뿐더러 괜한 목숨만 잃게 되는 것이지. 하지만 아서를 영지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환영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거든. 아서도 서쪽에 동맹국을 두면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고 말이다. 아일랜드인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이더구나.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방패에 예수의 표징이 없는 사람은 믿지 않을 거야. 아일랜드인이 다스리는 언덕에서는 새로운 신의 율법이 모든 걸 지배하니까. 막 내린 첫눈처럼 얄팍하게 언덕을 덮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예쁜 침대보 같지. 조금만 파 보아도 금세 옛날 신과 옛날 방식이 드러나거든."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신에 대해서 저토록 불경스러운 말을 하다니 틀림없이 불운이 닥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얼른 성호를 그어 악마를 쫓았다. 새로운 신이든 옛날 신이든 신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 신들이 아서에게 무언가 선물을 할 거란다." 안장 뒤에 놓인 가죽과 옷감들을 뒤적거리며 마르딘이 계속 말을 이었다. "신들이 아서의 편이라는 표징 말이다."
"어떤 종류의 표징이요?"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보여 주마."
마르딘이 빠른 손놀림으로 천으로 감싼 기다란 꾸러미의 고리를 풀었다. 황금색을 띤 무언가가 불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검의 자루. 지금까지 그리 많은 검을 본 건 아니어도 이것이 특별한 검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루의 끝과 가로대는 적금(赤金)이고, 돌돌 말리고 소용돌이치는 무늬가 흐릿한 금속으로 세공되었다. 자루에는 은으로 된 선이 칭칭 휘감겼다. 주름진 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칼날이 물처럼 반짝거렸다.
"검은 아서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란다. 전투를 위해서만 그런 게 아니야.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지. 저 옛날 픽트족과 스콧족에게서 우릴 구한 아르토리우스 카스투스의 상징이 바로 바위에 꽂힌 검이거든. 아서는 자신이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단다. 그리고 이제 다른 세계의 신들이 이 검을 아서에게 보낼 거야. 과거에 아르토리우스를 사랑한 것처럼 아서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마르딘이 내게 만져 보라는 듯 검을 쭉 내밀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 잠이 덜 깬 나는 의아했다. 무거운 검을 들고 바들거리던 지저분한 내 손을 보고 어떻게 속아 넘어갈 수가 있을까. 사람이란 무릇 보려고 하는 것만 보는 존재란 걸 그때는 아직 몰랐다. 

 

- 마르딘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그의 말을 전부 믿는 사람들을 보니 우스웠다. 하지만 더욱 우스운 건 마르딘이 그들에게 그 호수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였다. 호수에서 손이 솟아올라 아름다운 검을 아서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도 우스운 건, 내가 그들에게 진실을 들려준다 해도 그들은 내 말이 아닌 마르딘의 말을 믿을 거라는 점이었다.

"모두가 이야기를 좋아하지." 마르딘이 늘 하는 말이었다. 아서가 무엇을 하건 마르딘은 그걸 단순하고 명확한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귀 기울여 듣고는 가슴 깊이 간직하다가 시시때때로 꺼내어 윤이 나게 닦아서 친구들과 자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로.  
"이야기로 바꾸지 못할 일이란 이 세상에 없단다." 궁과 저택을 전전하며 언덕을 달리던 그해 여름 마르딘이 말하곤 했다. "아서가 어떠한 악행을 저질러도 나는 그걸 고귀한 행동으로 바꾸어서 아서를 더욱 명망 높고 두려운 존재로 만들 수 있단다. 이야기가 정말로 훌륭하다면 아서에게 세금을 바치느라 굶주리는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거야. 난 아서의 명성을 건강하게 보전하는 이야기 짜는 의사인 것이지."

- 그해 가을, 불가에 둘러앉은 우리에게 마르딘이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시 만난 베드위르 뿐 아니라 다른 소년들과 아서의 전사들도 함께 앉은자리였다. 마르딘은 아일랜드인의 일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의 할아버지들이 렌스터에서 건너올 때 함께 가지고 온 옛날이야기들을 전해 들었다. 고대 아일랜드 신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마르딘이 신 대신 아서를 넣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자 아일랜드인들조차 처음 듣는 얘기인 양 푹 빠져들었다. 

- 어느 해 크리스마스였지. 아서가 충직한 부하들을 위해 바로 이궁에서 연회를 열었다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거대한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눈 섞인 서풍이 거세게 들이닥치면서 눈과 함께 녹색으로 감싸인 거인이 들어왔어. 녹색 망토, 녹색 튜닉, 녹색 장화, 녹색 레깅스에 월계수 이파리 비슷한 모양의 기다란 녹색 미들이 달린 갑옷을 입은 거인이었어. 허리에는 녹색 검을 찼으며 머리칼과 수염 모두 녹색이었지. 얼굴은 물론 입 안의 이마저도 한여름 도토리처럼 녹색이었다네. 
"우두머리는 어디 있지?" 안에 모인 사람들을 휘 둘러보며 거인이 물었지. (아마 그의 목소리도 다른 곳들처럼 녹색이었을 거다.) 

아서가 일어서는 걸 보더니 녹색 인간이 다시 입을 열었어. "너의 용맹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아서. 네 부하들의 용기도 널리 알려져 있지. 로마 황제도 그 소문을 듣고 밤마다 두려움으로 벌벌 떤다더구나. 너희들이 쳐들어와서 썩어 빠진 제국을 사과 따듯 간단하게 따내버릴까 봐서 말이다." (여기서 물론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그러니까."하고 녹색 인간이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마르딘이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환호하고 웃던 걸 멈추고 눈이 동그래져서 그에게 더욱 바짝 다가가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난 너의 그 유명한 용기를 시험코자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그러고는 커다란 도끼를 꺼내 드는데, 도끼 자루는 온통 녹색 이끼로 뒤덮였고, 도끼날은 봄날의 호수처럼 녹색을 띤 은색으로 번쩍거렸지. 거인이 도끼를 불가의 판석 위에다 쨍강하고 내려놓았어.  

 

- 이야기가 끝나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고, 그것과 똑같은 표정이 내 얼굴 위에도 얹혀 있음을 느꼈다. 마법에 걸린 표정.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마르딘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믿었다는 말이 아니다. 녹색 인간이 이곳에 발을 들이거나, 잘린 머리를 손에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간 적 따위는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방금 들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느꼈다. 아서마저 그렇게 느꼈다. 곁에는 쿠나이드를, 발치에는 사냥개 카발을 거느리고 자신의 커다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은 아서마저도.  

 

- 짧은 순간, 현실의 아서와 이야기 속의 아서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 "너처럼 주제넘은 종자는 아마 세상에 둘도 없을 게다. 무슨 전갈인지는 알아서 무엇하게? 멍청한 소년이 질문을 퍼붓다가 돌로 변한 얘기도 못 들어보았느냐?"
파수꾼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일어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우리는 말을 달려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쿠아이 술리스로 가는 내내 나는 아서와 주인님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걱정스레 짐작해 보았다.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까? 아서가 아쿠아이 술리스를 차지하려는 것일까? 미래의 일을 안달한다고 해서 닥칠 일이 닥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자꾸 미래로 달아났다. 마르딘과 함께 지내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예전에 나는 미래를 생각하거나 걱정한 적이 거의 없었다. 과거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현재의 순간을 살아갈 뿐이었다. 지금 배불리 먹고 두들겨 맞지만 않으면 행복했다. 추우면 불행하고 아프면 겁이 났지만,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짐승들만큼이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걷는 짐승, 마르딘이 바꿔 놓기 전에는 그게 바로 나였다.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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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 탄 사내들이 누구냐 하면 말이다. 아서의 전투부대란다. 아서라는 이름은 들어 봤지?"
물론 들어 보았다. 우리 마을에서 그를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아서는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거인과 격투를 벌이고, 처녀들을 구하고, 악마보다도 한 수 위인 사내. 말을 타고 쳐들어와서 남의 외양간에 불을 지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분이 우리 마을에 뭐 하러 와요?" 마르딘이 웃으면서 턱을 긁적거렸다. 제일 쉬운 답을 찾아내려고 머리를 짜내는 듯이. 마침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서가 네 주인인 밴 영주에게 영토를 보호해 주는 대가로 금과 공물을 요구했거든. 하지만 밴 영주는 대가가 너무 많다며 거절했단다. 어리석은 행동이었지. 결국 아서가 몸소 그의 재산을 거두어 가려고 달려왔지. 그리고 아서는 내게 도움을 바란단다. 나는 아서의 전투부대와 함께 다니면서 아서를 위해 이야기를 만들지. 아서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며칠 전에 나는 무리에서 떨어져 다른 길로 이 땅을 두루두루 돌아보면서 여기까지 왔단다. 지역의 형세를 꿰뚫고 있으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절반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거든. 어떤 땐 아예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어지기도 하지."

 

- 그즈음엔 나도 아서의 부대를 굽어 살피는 모든 신과 정령에 관해 알게 되었다. 겉보기에 아서의 전사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방패에는 이를 알리는 못 문양이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목에는 십자가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알파와 오메가를 상징하는 양철 메달이 달랑거렸다. 이 상징을 발견한 신이 적의 검을 막아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걸고 다니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물론 신심이 두터운 자들도 있었다. 밤마다 기도를 드리는 카이는 아서가 적장의 머리를 연못으로 던지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많은 전사들이 옛 신들의 심기 또한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편이었다. 안개와 강이 많은 땅에 살면서 옛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속에 머무는 호수의 여인, 나무와 돌에 깃든 작은 신들. 새로운 신이 각광받으면서 잠잠해지고 위축되긴 했어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붉은 머리를 한 구리와 고지대 황야인 그위네드에서 온 구리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신인 사냥꾼 누드(Nudd)에 비하면 그리스도는 약해 빠지고 여자 같다고 비웃었다. 

 

- 마르딘은 어떨까? 그는 어떤 신도 믿지 않았다. 머릿속은 마법이나 놀라운 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해도, 그중 어떤 것도 진짜로 믿지 않았다. 한 번은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신은 없단다, 그윈. 유령이나 정령 같은 것도 없어. 오로지 자신이 만들어 낸 두려움이나 희망이 있을 따름이지. 신이란 건 어린애들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단다. 자신에게 거는 속임수나 마찬가지야. 삶에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뭔가 믿으시긴 하잖아요." 마르딘의 목에 걸린 온갖 부적과 장식물들을 쳐다보면서 내가 말했다.
마르딘이 껄껄 웃었다. "이것들 말이냐? 그저 전시용일 뿐이란다. 단순한 인간들은 이걸 보고 내가 다른 이들보다 신과 더욱 가까운 줄 알거든. 그러니 길에서 강도를 당할 염려도 없지. 두려워서 건드리지 못하니까. 하지만 신을 믿느냐고? 무언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는 생각한단다. 하지만 신이 우리를 굽어 살핀다는 말은 믿지 않아. 올바른 희생 제물을 바치면 도와주고 그렇지 않으면 짓밟아 버린다는 말도 마찬가지야. 내게 힘을 주는 건 믿음이 아니라 자유란다. 다른 이들이 믿는 신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걸 이용해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게 해 주거든." 
그건 내가 직접 목격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딘이 말하는 그런 종류의 자유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신도 믿지 않고 사는 건 내게 망토를 걸치지 않고 겨울을 나는 것과도 같았다.  
 

- 그날 저녁, 우리는 숙소로 차지한 집 안에 모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불가에 둘러앉아 꾸벅꾸벅 조는 틈을 타, 베드위르와 나는 도시의 이름과도 연관이 있는 치유의 샘들을 구경하러 갔다(아쿠아이 술리스는 '술리스의 물'이라는 뜻으로, 술리스는 켈트족과 로마인이 섬기던 여신 중 하나다. 옮긴이). 언젠가 마르딘이 그 샘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부터 호기심이 일었지만, 혼자 가고 싶지 않아 베드위르를 꾀어낸 참이었다. 주민들은 우리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아서의 부하에게야 덤벼들지 못하겠지만, 미로처럼 얽힌 길에서 소년 하나와 마주친다면 거뜬히 손봐 주고도 남을 터였다. 베드위르는 물론 주민들의 증오가 얼마나 깊은지 눈치채지 못했다. 자기처럼 잘생기고 용감한 젊은이를 누군가 증오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메드로우트를 졸라서 받아낸 망토를 걸치고 허리에는 검을 찬 채 성큼성큼 걸었다. 베드위르가 두려운 건 유령들뿐이었다. 

 

- 우리는 평소와 달리 전쟁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모두의 마음속에 진짜 전쟁의 기억이 너무도 또렷하게 남아서 영웅담이나 시 같은 것이 마법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서마저 우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채 앉아서 까만 어둠 속으로 춤추며 날아가는 불똥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다들 불가로 바짝 다가앉았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는 유령들이 떠돌고 있을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마르딘이 하프를 꺼내 왔고, 전사들이 보인 용감무쌍한 행동들을 나열하며 그날의 전투를 이야기로 짜내기 시작했다. 모든 전사의 이름이 불렸다. 심지어 베드위르의 이름도 나왔다. 마르딘은 이야기에 익살을 섞기도 했다. 오와인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아서를 도우러 온 천사인 줄 알고 적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더라는 둥, 카이가 어찌나 못생겼는지 아서를 도우러 온 악마인 줄 알고 줄행랑을 치더라는 둥.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전쟁의 공포가 서서히 걷혀 갔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전쟁을 마르딘이 말한 대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아서가 빛나는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 "사람들은 널 알아보지 못해. 우리가 떠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곳 사람들이 옛날 로마 황제처럼 네 얼굴을 본뜬 조각상이라도 세워 두었을 것 같으냐? 넌 여자 옷을 입고 긴 머리를 치렁거리며 돌아갈 거야. 소녀처럼 걷고 소녀처럼 말할 거고,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저 아가씨는 그윈과 조금 닮은 것 같은데'. 혹시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난 사람들한테 널 그윈의 친척이라고 얘기할 거다. 그럼 더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을 게야."
"하지만 전 소녀처럼 걷거나 말하는 법을 모르잖아요. 여자들이 하는 일도 해야 할 텐데..." 나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 벌리고 여자들이 하는 일들이 어떤 게 있는지 열심히 생각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었다. "바느질, 뜨개질, 실잣기, 술 담그기... 이런 걸 전혀 할 줄 모르는 저를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렇다면 배워야겠구나."
"아무리 배워도 절대 잘하지 못할 거예요. 느려 터지고 서툴 거라고요."
"그위나." 마르딘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어떤 대꾸도 허용하지 않는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너는 곧 아가씨가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아서의 전투부대와 어울리는 것이 그 부인의 궁에서 천을 짜며 온갖 실수를 다 저지르는 것보다 더 괴상해 보일 거다."
 

- 마음 한구석으로는 페레디르에게 모든 공을 넘긴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걸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받은 페레디르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페레디르 같은 사람에게 오래 화를 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너무나 솔직했고, 너무나 환하게 미소 지었으며, 너무나 잘생겼다. 나는 도시를 향해 걷는 내내 젖은 머리칼 사이로 그를 훔쳐보았다. 그러면서 한없이 안타까웠다. 머지않아 전사로서 삶을 시작하면 허세와 무기를 앞세우고 그 다정한 성품을 숨기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므로.

 

- 나는 페레디르 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지 못하고, 보고 나서도 본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공포가 밀려왔다. 이들이 서로의 마음에 지핀 이 불길이 언젠가는 둘 모두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운이 따르지 않으면 나 또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아서는 자신의 꼴을 우습게 만든 사람에겐 가차 없으니까. 

 

- 전투가 있었던 장소를 지나서 계속 언덕 위로 올라갔다. 우리 전사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페레디르의 말처럼 우리 빼고는 정말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게 아닌가 겁이 더럭 났다. 침착하라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유령 생각이 떠오르자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이 뒤따라 달려오면서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분풀이를 할 것만 같았다. 차가운 손들이 쭉 뻗어 나와 머리칼을 잡아채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야기꾼으로 살면 바로 이런 게 문제다. 청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으로 제멋대로 기어든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에는 즐거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서를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색슨족과 맞서 싸운 브리튼인 군사령관이라고 보는가 하면, 브리튼의 황제 같은 인물이었다고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훨씬 이전 시대를 산 인물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베드위르와 카이의 이름은 아서에 관한 초기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베드위르는 나중에 베디비어 경이 되지만 그의 힘과 영웅적인 행동들은 란슬롯에게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 카이는 아서의 형제 또는 이복형제인 케이 경이 되었는데, 종종 무례하고 천박한 인물로 그려진다. 페레디르는 웨일스 신화와 전설 모음집 <마비노기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이다. 이후 중세 로망스 문학에서 아서의 기사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자 성배를 찾는 퍼시발로 변모한다. (맞다. 몇 군데 기록에서는 퍼시발이 정말로 어린 시절에 여자 옷을 입고 자란 것으로 그려진다.) 마르딘은 후기 이야기에 등장하는 멀린의 원형이며, 실제로 존재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6세기 후반에 같은 이름의 시인이 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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