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김성환] 이상한 부엌의 마법사 - 어느 푸드 스토리텔러가 차리는 음식과 사람 이야기

일루젼 2022. 3. 15.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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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성환
출판 : 이매진 
출간 : 2021.02.12 


       

21년 3월에 구매했던 책이 지금 나타났다. 음. 

얼마 전 읽은 <헌책방 기담 수집가>에서 책탑이 무너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지 그 순간에 무엇이 잘못되어 나온 결과는 아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뒤엉켜 있다가 어떤 사소한 계기를 통해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 책방 한쪽에 탑처럼 쌓아둔 거대한 책더미가 와르르 무너진 것처럼 말이다."

 

"집에 책을 켜켜이 쌓아놓고 사는 사람이라면 로쟈의 말이 결코 난센스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때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웃을 수 없었다."

 

나도 남 일이 아니다 싶어 조그맣게 웃었는데... 아예 웃지 말았어야 했을까?

다 읽은 책들은 나름의 기준으로 소장 여부를 결정해서 추리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이미 질러놓은 책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말이다.

 

늦은 오후. 주문이 들어온 책을 찾고 있었다. 판매용 책들은 보통 따로 보관하기에 쉽게 찾아서 돌아서는데, 느끼지는 못했지만 팔꿈치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옆에서 읽으려고 빼뒀던 책들이 원성 어린 비명을 지르듯이 쏟아진다.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려다 등 뒤도 건드릴까 봐 발만 살짝 움직여 피했다. 하. 

 

와르르 무너진 책탑 앞에서 며칠 전에 웃은 일을 후회하며 잠시 망연히 서있었다. 판매할 책들은 다치지 않았다는 점과 발등이 무사하다는 점에 감사하며. 다시 정리하던 와중에 이 책이 눈에 띄었다. 표지를 보자마자 무척 반가웠기 때문에 바로 꺼내 읽었다. 제목이 무척 궁금해서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샀던 책인데, 지금껏 구매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니 내심 반성하면서. 

 

이 책은 정체가 모호하다. 에세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요리서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저자 개인의 일화와 경험담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충분히 따라 해 볼 수 있을 법한 (혹은 그렇게 해보라고 유혹하는 듯한) 간단한 레시피와 과정 사진이 실려있고, 꽤 훌륭한 완성 사진도 실려있다. 소개하고 있는 요리들이 모두 무척 매력적인 것도 특징이다. 조금은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이국적인 요리도 있고, 너무나 친숙한데도 알고 보니 오해하고 있었던 요리도 있다. 

 

(지금은 <트라토리아 몰토>지만, 과거 홍대 <마고>일 때 처음 맛본 계란 노른자 까르보나라가 생각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까르보나라 하면 크림소스를 떠올리지만, 원조(?) 이탈리아 카르보나라는 오일도 크림도 아닌 노른자로만 만든다. 그래서 반드시 따뜻할 때 먹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미국에서도 크림파와 노른자파가 치열하게 다투는 모양이다.)  

 

단순한 소개가 아니다. 조리법이나 요리의 이름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식자재는 어째서 그렇게 선택했는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매끄럽게 설명해나간다. 다른 미식 도서처럼 학술적인 설명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치 관객 앞에서 요리하는 오픈 키친의 셰프처럼 설명은 설명대로, 요리는 요리대로 풀어나간다. 그 안에 저자의 경험담과 일화들이 녹아들어 무척 재미있었다. (읽다 보면 매우 배가 고파진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다.)

 

그런데, 취미로 요리를 하는데 집에 고기 분쇄기에 반죽기가 있다고...?

너무 본격적인데? 

 

아. 실컷 읽다 보니 요리학교를 졸업한 진짜(?) 요리사였다. 하지만 저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음식 이야기꾼 food storyteller'라고 칭한다.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다양한 매체와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영역에서 나름의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깊게 사랑하는 일은, 그리고 그 사랑을 키워가는 일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오면, 무척 재미있다. 서문에서 허브와 위치크래프트가 자신을 요리의 길로 이끌었다고 고백하는 저자에게 무척 흥미가 일었는데, 그건 이 돌고 돈 길의 시작점이었을 뿐이다. 본문은 충실하게 물질계(?)의 요리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즐겁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시면 된다. 

 

추천.

 


   

요즘은 요리하는 남자가 매력 있다고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취미로 음식을 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제 또래들은 어릴 때부터 '남자가 소꿉장난하면 고추 떨어진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받으며 자랐거든요. 과자나 샌드위치 등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덩치 커다란 남정네가 어쩌다 요리를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가벼운 질문에는 여성 잡지 요리 기사를 따라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짧게 답했습니다. 더 긴 이야깃거리가 필요할 때는 우연치 않게 들른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에서 맛본 환상의 티라미수와 그 맛을 재현하려다가 겪은 긴 여정을 각색해 들려줬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마법에 걸려 요리를 시작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어쩌다 가끔 진짜 이유를 털어놓아도 대부분 이렇게 반응했죠. 

"마술이요? 주머니에서 비둘기 꺼내는 거?"
"게임 좋아하세요? 불덩이 던지고 번개 떨어트리는 마법?"

 

서양에는 진지하게 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법 이야기를 바탕으로 신비학을 깊이 파고들기도 하고, 고대 이집트에서 하던 주술을 연마하는 이들도 있죠. 제 경우는 고등학생 때 게임 전문 가게에 재고로 남아 있던 타로 카드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비디오 게임이나 보드 게임 등을 파는 가게였는데, 진열장 한구석에 놓인 타로카드 한 벌이 이상하게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결국 오랫동안 용돈을 모아 사려고 벼르던 게임 대신 그 점치는 카드를 사들고 왔죠. 가볍게 그날그날 운세나 보려고 시작한 카드 점을 깊이 파고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타로 카드에 딸린 영어 설명서를 사전 찾아가며 해석하는 정도였지만, 각각의 카드가 상징하는 의미나 카드 뒤에 숨은 배경 지식을 찾으면서 다른 마법 분야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와 구약 성경 신비주의인 '카발라', 숫자의 배치와 결합으로 신비한 힘을 이끌어낸다는 '수비학', 천사와 악마의 진정한 이름을 알아내는 데 온 힘을 쏟는 '에노키안', 인문학적 관점에서 마법을 풀어낸 '황금 가지', 앨리스터 크로울리와 프란츠 바돈을 비롯한 숱한 마법사들의 이야기까지. 어떤 분야는 아무리 봐도 황당무계한 소리라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만, 몇몇 분야는 과학적 근거는 없더라도 심신의 안정과 평화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고, 간혹 실생활에서 써먹기 좋은 분야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점성술과 약초를 이용한 주술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흔히 위치크래프트 또는 '위카 wicca(남자 마녀)'라고 부릅니다. 마녀의 주술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처음 들을 때는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며 아이들을 납치하는 마귀할멈과 중세의 가혹한 마녀사냥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기성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심리적 영적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방편으로 보는 쪽이 더 타당합니다. 앞날이 불안할 때,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대신 집에서 향 피우고 카드를 뒤집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할까요. 저도 타로 카드와 수정구 깔아놓고, 허브티 끓여 마시고, 부적 만들고, 향도 여러 가지 태워가며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찾아온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냈죠. 

그때는 한국에서 다양한 허브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동네 꽃집이나 길거리 용달차에서 허브 화분을 팔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일 향 나는 민트 종류만 있더군요. 씨앗이나 모종을 구해서 직접 기르기로 결심하고, 아파트 베란다에 허브 화분을 하나둘 늘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관찰 일기를 쓰느라 강낭콩 기른 일이 전부인 원예 초보인데 실내 정원 가꾸기가 잘될 리가 없었죠. 애꿎은 허브 화분을 몇 개 죽이고 나서야 원예 동호회에 들어가 허브를 공부하면서 어설프게 위카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가치관을 바꿔놓은 허브는 바로 바질입니다. 동글동글한 타원형 이파리가 귀엽지만, 라틴어로 왕을 뜻하는 '바실리우스 Basilius'가 어원일 정도로 옛날부터 중요하게 여긴 식물입니다. 이탈리아 국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색에서 바질이 녹색, 모차렐라가 흰색, 토마토가 빨간색을 맡을 정도로, 바질은 카프레제 샐러드나 마르게리타 피자처럼 이탈리아 느낌 물씬 풍기는 요리를 만들 때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재료죠. 

처음에는 바질 특유의 향기가 익숙하지 않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주술적으로 바질은 나쁜 기운을 막고, 지갑이나 금고에 말린 바질 잎을 넣어두면 돈을 불러오는 부적도 되기 때문에, 화분 하나를 기르면서 가끔 뜯어서 위치크래프트에 사용하는 수준이었죠. 그래서 다른 허브들은 조금만 자라도 냉큼 잘라서 허브티를 끓이거나 방향제를 만들지만, 바질은 혼자서 웃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허브 동호회 정모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에서 바질 한 줄기 얹어놓고 피자 가격을 두 배로 받아. 그런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그때는 감히 피자를 만들 생각은 못하고 시판용 스파게티와 토마토소스 위에 바질을 듬뿍 뜯어서 뿌려 먹었죠. 토마토와 바질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조화를 맛보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뜹니다.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으면 초록색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받은 충격하고 비슷했죠. 토마토소스의 시고 짠맛에 바질의 향이 살짝 덮인 정도인데도 완전히 새로운 풍미를 만드는 연금술의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듯했어요. 그렇게 허브와 향신료,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죠.

 

- 미지의 영역을 향한 호기심이 나를 마법의 세계로 이끌었다면, 바질은 요리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넓혀줄 또 하나의 마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열쇠였으니까요. 싱싱한 바질 한 잎을 줄기에서 뗄 때의 감촉, 매끈하면서도 부드러운 잎사귀를 잘게 찢으면 훅 풍겨오는 상큼한 향기, 붉은 토마토소스 위에 뿌리면 더 선명해 보이는 신선한 녹색, 살짝 뿌려도 구리를 금으로 바꾸듯 향기를 더해 음식을 빛나게 만드는 미친 존재감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서 마법 같은 한 접시의 요리를 만들고, 재료에 얽힌 추억들이 만찬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식탁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그럴수록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마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평소에 늘 먹는 연꽃 떡도 좋았지만 빙탕후루가 최고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빙탕후루를 먹을 수 있게 되었죠. 그때 제가 어땠을까요, 십황자 님? 실망했어요. 완전히 실망했죠! 한순간, 이건 먹을 게 못 된다. 연꽃 떡보다 맛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입맛도 변했다는 것을 모른 채 지난날의 기억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었던 거예요. 저 자신의 기억에 속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지요.

- 동화 지음, 전정은 옮김, <보보경심>, 파란샘, 2013

 

 

- 미트볼은 레시피가 다양합니다. 고기만 뭉치는가 하면 향신료에 견과류까지 섞기도 하죠. 레시피에 맞춰 재료를 준비하면 잘 섞어서 찰기가 생길 때까지 치대며 반죽합니다. 대랑 생산을 하는 시판 미트볼하고 맛의 차이가 이런 데서 비롯됩니다. 공장제 미트볼은 번거롭게 치대는 대신 젤라틴을 써서 찰기를 보강하기도 하죠. 평범한 미트볼이라면 여기서 끝내도 되지만, 이탈리아식 미트볼을 만들려면 재료를 더 넣어야 합니다. 싱싱한 파슬리 잎을 잘게 잘라 듬뿍 넣고 이탈리아식 시즈닝을 팍팍 뿌립니다. 이탈리아 요리를 만들 때 주로 쓰는 허브들을 모아서 이탈리아식 시즈닝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오레가노, 마조람, 타임, 바질, 로즈마리, 세이지가 들어갑니다. 미트볼만 먹으면 낯선 향이 강하지만 토마토소스 하고 섞이면 효과가 엄청나죠. 강한 산미의 토마토와 허브향이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만듭니다. 

- 서로 다른 두 재료가 섞여 새로운 경지를 열 때면 요리도 연금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흔히 연금술은 납을 금으로 바꾼다고 허풍을 쳐서 왕과 영주들에게 돈을 받아 내던 사기꾼들의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알고 보니 인간의 영혼과 지혜를 물질계에 대입시켜 금속의 불순물을 제거해 타락한 마음을 정화하고 정신을 바꾸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기술이더군요. 불노불사의 만병통치약이 목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음양의 조화를 기둥으로 정신을 단련하는 도교의 연단술도 비슷합니다.

- 추운 겨울에 채소를 먹으려고 보관하던 피클이다 보니 그 역사는 수천 년이고 레시피도 아주 다양합니다. 기본이 되는 오이 피클을 미국에서는 '빵과 버터 피클'이라고 부르는데,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공황 때 저렴한 오이 피클을 빵과 버터만큼이나 자주 먹은 때문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패닝 Fanning 가족'이 오이 피클 사업에 성공하기 전에 가족이 만든 피클을 이웃 농가가 만든 빵이나 버터하고 물물 교환해서 먹고 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번역한 소설에서 '빵과 버터로 만든 피클'이라는 대목을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 "끓어라, 끓어라, 파스타 냄비야

나에게 따뜻하고 맛있는 파스타를 끓여주렴

배는 고프고 이제는 저녁 먹을 시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파스타를 끓여다오."

 

- 토미 데 파올라 지음, 장윤환 옮김, <마법사 노나 할머니>, 문선사, 1984

 

마법 주문이지만 아름다운 시 같네요. 동화 <마법사 노나 할머니>에서 누군가 이 노래를 부르면 커다란 냄비가 저절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맛있는 파스타를 한가득 만듭니다. 어린 마음에 금은보화가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보다 이 냄비가 더 탐났죠. 마법의 냄비는 없으니 파스타가 먹고 싶다면 직접 끓일 수밖에 없습니다.  

(리뷰자 주 : 안돼... 문선사 앓이 병이 다시 시작되려 한다...)

- 특정 품종의 식재료를 쓰지 않으면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 있습니다. 리소토를 만들 때는 아보리오 쌀이 필수이고 파스타에는 듀럼밀로 만든 세몰리나 밀가루가 꼭 필요합니다. 일반 밀가루를 쓰면 칼국수가 되기 십상이거든요. 세몰리나 밀가루만 쓰면 뻑뻑하고, 더블 제로(도피오 제로) 등급 밀가루와 세몰리나 밀가루를 알맞게 섞으면 결과물이 좋아집니다. 더블 제로 밀가루는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만들 때 주로 쓰는데, 밀기울 함량이 가장 낮아서 입자가 고운 중력분입니다. 밀가루만 준비되면 다른 재료는 구하기 쉽습니다. 싱싱한 달걀과 소금이 전부니까요.
 
- 요리를 취미 삼아 하던 무렵에는 돈이 생기지도 않는데 왜 정성을 쏟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돌이켜 보면,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가장 큰 이유는 아니라는 사실에 놀랍니다. 맛있는 요리를 많이 만들어봤지만, 그중에서 자주 만드는 요리는 극소수고, 아무리 맛있어도 한 번 만들고 그만두는 요리도 있죠. 

- 요리를 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은 호기심과 불신입니다. 책이나 영화 등에서 요리에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먼저 호기심이 생깁니다. 저건 무슨 맛일까, 저런 재료를 쓰면 어떤 맛이 날까, 저런 요리법은 어떻게 맛이 달라지게 할까 하는 궁금증이죠. 그 뒤로 파는 요리를 향한 불신이 찾아옵니다. 티라미수에 마스카포네 100퍼센트를 넣은 맛이 궁금한데 빵집에서는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를 섞을 거야, 홀랜다이즈 소스에 타라곤을 우려낸 화이트 와인을 넣는 가게는 찾기 힘들 거야, 저 가게에서 파는 햄은 방부제와 발색제를 넣을 거야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맛이 궁금한 요리가 생기면 직접 도전해보고 싶어요. 항상 레스토랑에 갈 수는 없으니까요. 숙련도가 떨어지더라도 시간과 예산, 정성으로 부족한 점을 메꿔가며, 직접 만듭니다. 하인즈에서 만들어 깡통으로 파는 제품 대신 직접 만든 데미그라스 소스도 시작은 호기심과 불신이었죠. 

- 좋은 재료를 써서 완성한 바질 페스토는 뚜껑을 여는 순간 강한 바질 냄새가 코를 때립니다. 싱싱한 바질 덕분이죠. 바질 잎을 피자 위에 얹어 먹을 때는 토마토소스 향에 합쳐지면서 섬세한 소프라노와 테너 듀엣곡을 듣는 느낌이라면, 바질 페스토는 힘이 넘치는 바리톤 솔로의 노래를 듣는 기분입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동네 슈퍼마켓만 가도 싱싱한 바질을 구할 수 있어 무척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생 바질을 구하기 어려워서 직접 키워 먹었는데 말이죠. 미국 마트 채소 코너에서 뿌리까지 살아 있는 바질을 봉지째 팔기 때문에 사 와서 물병에 꽂으면 며칠 동안 생생합니다. 

- 모차렐라 치즈는 지역 농장에서 만든 신선한 녀석으로 준비했습니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노력에 견줘 차이가 크지 않아 기피하는 메뉴가 됐습니다. 모차렐라 치즈도 고급품을 쓰려고 하면 이탈리아에서 인증 마크를 받은 제품을 넣어야 합니다. 이탈리아 정부에서 인정하는 나폴리 피자에는 반드시 지역 인증 마크를 받은 모차렐라 치즈를 쓰게 돼 있죠. 올리브유처럼 피디오 PDO 내지는 피지아이 PGI 마크가 붙은 제품을 쓰면 되는데, 유통 기한이 매우 긴 파르메산 치즈나 올리브유하고 다르게 모차렐라 치즈는 신선할 때 써야 해서 구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먼 곳의 명품보다 지척의 흔한 물건'이 더 나은 경우죠. 
 
- 문제는 바로 그 제대로 된 발사믹 식초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대로 된 치즈나 올리브유보다도 더 구하기 힘든 재료가 진짜 발사믹 식초입니다. 가게에 널린 게 발사믹 식초인데 무슨 소리냐 싶지만, 오리지널 발사믹 식초는 전 세계에서 딱 두 군데, 이탈리아의 모데나 지역과 레지오 에밀리아 지역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 게다가 지역 특산품이라 거품이 끼었다고 보기도 애매한데, 발사믹 식초를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주 까다롭거든요. 다른 재료가 전혀 섞이지 않은 100퍼센트 포도즙을 30일 정도 끓인 뒤 와인을 숙성할 때처럼 나무통에 넣어둡니다. 마트에서 발사믹 식초를 찾아 원재료 목록을 보면 와인 식초에다가 심지어 캐러멜 소스까지 들어 있는데, 제대로 만든 발사믹 식초는 포도즙 100퍼센트입니다. 처음에는 커다란 나무통에서 숙성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포도즙이 자연적으로 증발해 양이 줄어들면 더 작은 나무통으로 옮겨 담습니다.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합니다. 발사믹 식초 고유의 향과 맛을 내려고 옮겨 담을 때마다 나무통 재질이 바뀌고, 당연히 시간도 무진장 오래 걸립니다.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 데 12년 넘게 걸리고, 양도 처음 들어가는 포도즙에 견주면 아주 적습니다.

- 전통 방법으로 만든 발사믹 식초는 유리병 모양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모데나 지역의 발사믹 식초는 전구를 받침대 위에 세워둔 모양이고,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나오는 발사믹 식초는 튤립을 엎어놓은 모양인데, 이 유리병 디자인은 특허를 내놓은 덕에 다른 발사믹 식초 브랜드가 쓸 수 없거든요. 제대로 만든 제품을 찾아내는 일과 이 제품을 사서 쓰는 일은 또 별개 문제입니다. 가장 숙성 기간이 짧은 12년 산도 100밀리리터 한 병당 가격이 거의 10만 원 정도니까요. 25년 묵은 발사믹 식초는 15만 원은 가볍게 넘어가기 때문에 한 방울 한 방울 손을 벌벌 떨며 씁니다. 

- 흔히들 프랑스 요리는 수준급 요리 기술이 필요해서 만들기 힘들고, 이탈리아 요리는 재료가 특별해서 만들기 힘들다고 하는데 그 말이 실감 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허풍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 디오피 DOP 인증 제품과 슈퍼마켓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제품을 비교하면 아무리 요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대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맛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공장에서 만든 중국산 배추김치만 먹다가 인간문화재 명인이 만든 김치를 먹었을 때 느낌이라고 할까요. 푸아그라나 철갑상어 알처럼 접하기 힘든 비싼 재료가 아니라 평소에 쉽게 접해온 음식일수록 제대로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 받는 충격이 더 큽니다. 

- 이런 음식은 식당에서 찾아보기 어렵죠. 일반 레스토랑이라면 재료 원가부터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올리브유와 치즈, 발사믹 식초를 모조리 디오피 인증받은 최고급품으로 만든다면 조그만 샐러드 한 접시에 최소 2~3만 원은 받아야 할 테니까요. 샐러드 한 접시에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으려면 다른 요리도 수준을 높여야 하고, 가게 인테리어나 컨셉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대다수 식당에서는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홈쿡의 이점이 발휘되죠. 원가를 따지지 않고 최고급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서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 먹는 것도 직접 요리를 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니까요. 

 

- 서양에서 자주 하는 말 중에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가 있습니다. 식인종 주방에 걸릴 표현 같지만,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하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다(Tell me what you eat, and I will tell you what you are)'는 말이 줄어서 생긴 격언이죠.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 Anthelme Brillatt Savarin이라는 프랑스 법관이 한 말입니다.

 

- 브리야 사바랭은 유명한 판사이자 정치가이면서 엄청난 미식가였습니다. 먹는 걸 정말 좋아해서 법률책은 안 쓰고 <미각의 생리학 Physiologie du gout>이라는 음식 관련 책까지 낼 정도였죠. 브리야 사바랭은 이 격언을 통해 사람들에게 식습관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반영한다는 점을 알리고, 올바른 식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뭘 먹는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먹는 것들이 무엇을 먹는지도 중요합니다. 무농약, 유기농, 유전자 조작 물질 무첨가 같은 단어들이 먹거리를 포장하는 데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린 현실 자체가 그 증거죠. 이런 모습은 소고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 그랑 마르니에가 워낙 가격대가 높다 보니 비슷한 오렌지 술인 쿠앵트로를 쓰는 곳도 많은데, 아무래도 코냑 베이스 브랜디가 갖는 특유의 깊이를 따라오지는 못합니다. 플람베는 엄밀히 따지면 술에 불을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술이 증발하며 생기는 알콜 증기에 불을 붙이는 셈이고, 그렇다 보니 처음 시도하는 사람은 갑자기 솟아오르는 불길에 깜짝 놀랍니다. 당황하면 사고가 터질 확률이 더 높아지니 '불은 언젠가는 꺼지게 돼 있다'는 믿음을 갖고 침착하게 계속 프라이팬을 움직입니다. 


- 크레이프 수제트의 기원은 크게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여배우 쉬잔느 라이헨베르크 Suzanne Reichenberg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수제트라는 예명을 쓰던 쉬잔느는 연극에서 크레이프를 만드는 배역을 맡았는데,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 실제로 크레이프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레스토랑에서 연극 소품으로 쓸 크레이프를 샀습니다. 크레이프를 만들어 납품하던 마리보 레스토랑의 주인은 차갑게 식은 크레이프를 먹어야 하는 배우들을 위해 브랜다를 붓고 불을 붙여 따뜻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장면이 관객들에게도 호응을 얻으면서 유명한 요리가 됐죠. 

-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전속 요리사 앙리 샤르팡티에 Henri charpentier가 몬테카를로의 카페에서 견습 웨이터로 일하던 무렵 실수로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나중에 에드워드 7세가 되는 영국 왕세자가 수제트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인하고 카페에 들러서 크레이프를 주문했는데, 열네 살인 어린 앙리가 너무 긴장하고 서두른 탓에 크레이프 위에 오렌지 술을 쏟고, 그것도 모자라 불까지 붙여버립니다. 아이고 망했다 싶어서 걱정하다가 막상 불을 끈 뒤 맛을 보니 뜻밖에 맛있어서 그대로 내놓습니다. 이 요리가 마음에 든 에드워드 왕자는 함께 자리한 여인의 이름을 따 크레이프 수제트라고 명명했다죠. 열네 살짜리 견습 웨이터에게 영국 왕자를 서빙하라고 맡기는 상황이 말이 되느냐며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원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요리 뒷이야기는 진실성보다는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중요하죠. 

- 과일 퓌레를 식히는 동안 크렘 앙글레즈를 만듭니다. 얼리기 전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면 됩니다. 만드는 과정이 똑같거든요. 크렘 앙글레즈는 '영국식 크림'이라는 뜻의 프랑스 말입니다. 프랑스 요리에서 많이 쓰는데, 영국에서 처음 만들었죠. 영국 사람들이 제과 제빵에 능숙했다면 '크렘 앙글레즈'는 '잉글리쉬 크림'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영국 사람들은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 요리에 걸맞게 크림을 그대로 퍼먹었고, 프랑스 사람들은 화려한 케이크와 과자에 크림을 활용하면서 크렘 앙글레즈라는 말이 더 널리 퍼졌습니다.

- 우유와 생크림을 1 대 1로 섞어 김이 올라올 정도로 가열하면서 바닐라빈을 긁어 넣고, 달걀노른자는 설탕 한 컵을 붓고 거품기에 돌려 크림으로 만듭니다. 달걀노른자에 데운 우유를 조금씩 부으면서 거품기를 돌리면 크렘 앙글레즈가 완성됩니다. 아이스크림은 대충 거품 내서 기계에 넣어 얼려도 되지만, 크렘 앙글레즈는 정성 들여 거품을 내야 합니다. 주거에 묻힌 다음 손가락으로 한 번 스윽 긁을 때 흔적이 고스란히 남을 정도로 되직해야 하거든요.

 

- 처음에는 바바리인 크림이라고 해서 '야만인 barberian' 크림이라니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현대 프랑스 요리의 기초를 세운 전설적인 요리사 잉토 카렘 Antonin Careme이 독일 바이에른 주(바바리아 지역)를 여행하다가 개발해서 붙은 이름이더군요. 

- 샤를로트 루스는 앙토냉 카렘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일할 무렵 만든 케이크입니다. 예전 고용주인 조지 4세의 딸 샤를로트 공주의 이름을 따고, 현재 고용주인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뒤에 프랑스 말로 러시아 사람이라는 뜻의 '루스 Russe'를 붙여서 탄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에는 향수병에 걸려 고향을 그리워하던 앙토냉 카렘이 '샤를로트 파리지엔느', 곧 '파리 사람의 샤를로트 케이크'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러시아 황제의 눈치를 봐서 샤를로트 루스로 고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 서머싯 몸 William Somerset Maugham이 쓴 소설은 잘 쓴 글인데도 좋아하기는 힘듭니다. <인간의 굴레> (1915)에서 주인공 필립이 밀드레드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이나 <인생의 베일> (1925)에서 바람난 아내에게 복수하려고 중국 오지에 들어가서 콜레라에 걸려 죽는 월터를 보면 숨넘어갈 듯 갑갑해지죠. 그런 서머셋 몸의 소설 중에도 주인공의 '지질함'은 변함없지만 부담 없이 읽을 만한 재미있는 글이 한 편 있는데 단편소설 <점심 The luncheon>입니다. 주인공은 작가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신세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잠시 만나서 문학에 관해 토론하며 점심 대접을 받고 싶다는 팬레터를 거절하지 못합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중년 여성 팬을 만난 주인공은 속으로 점심값을 걱정하다가 점심엔 많이 먹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요리만 먹겠다며 연어를 주문하더니, 연어를 기다리는 동안 캐비아를 주문하고, 캐비아에 곁들일 샴페인을 주문하고, 파리에 왔으니 아스파라거스를 안 먹고 가면 섭섭하다며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하고,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마지막에는 제철도 아닌 복숭아를 집어먹으며 작가의 한 달 치 식비를 거덜 냅니다.

 

- 주인공을 절망시킨 메뉴인 연어와 아스파라거스를 만들어봅니다. 소설에 나오는 레스토랑의 이름은 '포요트 Foyot'입니다. 파리의 상원 의원들이나 드나드는 고급 레스토랑인데, 1938년에 폐점해 메뉴와 레시피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프랑스 요리의 대가인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Auguste Escoffier의 레시피를 참조합니다. 물에 채소와 향신료를 넣고 끓여 육수를 만듭니다. 쿠르부용 court bouillon이라고 하는 이 육수는 프랑스식 해산물 요리에 빠지지 않습니다. 연어를 삶을 때는 식초를 넣은 쿠르부용을, 조개 등을 삶을 때는 와인과 레몬이 들어간 쿠르부용을 만드는 등 해산물에 따라서 재료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쿠르부용으로 해산물을 삶으면 채소와 허브의 맛이 재료에 배어들 뿐 아니라 산성화 된 육수 덕에 재료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프랑스식 요리법의 특징이 밑 준비부터 완성까지 단계마다 숨은 맛을 내는 재료를 쓰면서 맛의 깊이를 만든다는 점입니다. 언뜻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조그만 정성들이 모여서 평범한 식당 메뉴와 프랑스식 레스토랑 요리를 다르게 만들죠. 요리를 할 때마다 되뇝니다. "작은 정성이 큰 차이를 만든다." 

- 마들렌은 이름아 마들렌인 요리사가 프랑스 왕 루이 15세에게 만들어 바친 조개 모양 과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루이 15세는 조개 모양 과자가 마음에 들어 과자에 요리사 이름을 붙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들렌이 조개껍질 모양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해서, 저는 성 야고보에 얽힌 전설이 더 마음에 듭니다. 

- 성 야고보는 영어로 세인트 제임스, 프랑스어로 생자크, 스페인어로는 산티아고죠. 기독교를 전파하러 예루살렘에서 스페인까지 순례를 떠난 성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교한 뒤 성자로 추존됩니다. 제자들이 성 야고보의 관을 바다에 띄우자 어디선가 나타난 조개들이 시신을 덮어 보호해 스페인까지 떠내려갔다고 하죠. 성 야고보가 물에 빠진 기사를 구했는데 기사의 온몸에 조개가 가득 붙어 있었다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뒤 조개는 성 야고보의 상징이 됐고, 프랑스에서는 생자크가 조개 요리를 뜻할 정도입니다. 오랜 세월 성 야고보를 기리는 많은 순례자들이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820킬로미터나 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순례자들은 몸에 지니고 다니던 조개껍질을 교회에 보여주며 순례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프랑스 로렌 지방에 살던 마들렌이라는 요리사도 빵을 구워 순례자들을 대접했는데, 성 야고보를 기리기 위해 조개 모양으로 만든 한 일이 마들렌의 시초라는 설도 있죠. 

 

- 지금 사는 집은 집세에 전기세가 포함된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네 시간을 꽉 채워 끓입니다. 중간중간 졸아들면 남은 와인을 마저 붓습니다. 식힌 다음 냉장고에 넣어 하루 묵히고, 다음날 다시 끓여서 먹습니다. 맛있게 먹으려면 재우는 데 하루, 끓이는 데 반나절, 묵히는 데 하루 해서 거의 사흘은 걸리네요. 그 과정에서 와인을 계속 졸이며 맛의 에센스를 농축시키는 기분, 오랫동안 꾸준히 위에 뜨는 기름을 걷어낸 끝에 기름기가 떠다니지 않는 국물을 볼 때의 개운함, 시간이 지나 모든 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이 경지에 다다르면 요리는 식재료를 조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여러 재료를 증류하고 정화하던 중세 연금술사들처럼 최상의 뭔가를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완벽함을 추구하는 의례라는 느낌이 듭니다. 

 

- 중국의 유명 문필가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고 좋은 글씨를 썼다고 해서 '능서불택필 能書不擇筆’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생겼죠. 저는 '실력이 부족하면 좋은 도구라도 써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초보 주제에 소화도 제대로 못하는 비싼 도구를 사서 '개발에 편자' 소리를 듣는 일도 꼴불견이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주방 용품이라면 하나 장만하는 편이 몇 년에 걸친 연습 없이도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을 만드는 비결이니까요. 다만 점점 얇아지는 지갑과 지갑 두께에 반비례해 쌓이기만 하는 갖가지 도구들을 놓을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은 있지만요. 

 

- 바로 이런 소소한 고급스러움이 저를 만화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수십만 원짜리 '앤티크 글라스'를 물 잔으로 내놓는 가게, 프랑스 결혼식에나 쓰이는 케이크를 크리스마스 파티용으로 주문하고 설탕 시럽도 빼놓지 않는 아줌마, 한 입만 먹어보고도 파티셰가 예전에 일한 가게를 알아채는 할머니,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케이크 옆에 대충 꽃을 뿌려놓지 않고 꽃꽂이를 공부해서 스카비오사랑 라일락이랑 다이아몬드 릴리로 부케를 만드는 주인공까지, 단지 비싸다거나 명품이라는 이유로 물건을 고르지 않고 음식과 물건에 스민 깊이를 이해하며, 자기의 취향과 미학에 맞는 선택을 하는 삶이 멋있어 보였죠. 이 만화를 보면서 느낀 동경, 그리고 저 경지에 들어서면 보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이 여러 음식을 맛보고 직접 요리를 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됐습니다.  

 

- 잘 쌓아 올린 크로캉 부슈를 나눠 먹다 보니 예전에 몇 번 만든 어설픈 슈크림 무더기들이 떠오르며 더 성장한 나를 실감합니다.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아 떡이 된 슈, 기껏 만들었더니 냉장고 안에서 반나절만에 녹아내린 설탕 그물,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찐득찐득한 괴물체가 된 가나슈, 몇 번을 반복해도 중간에 무너지는 바람에 결국 그만둔 크로캉 부슈 쌓기까지, 기억 속 실패의 그림자 때문인지 반짝이는 크로캉 부슈가 더 높고 눈부시게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면 나를 위한 생일 케이크로 딱 알맞다 싶기도 하네요. 소설 <무탄트 메시지>(2003)에서 '참사람 부족'들이 그렇듯이 단순히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행위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일을 축하하는 행위가 훨씬 의미 있으니까요.

- 뗏목의 완성도는 콩소메 수프의 성패에 직결됩니다. 잘 만들어진 뗏목이 효과적으로 단백질 분자를 끌어모으거든요. 너무 높은 온도로 팔팔 끓이면 단백질이 분해돼 수프를 다시 뿌옇게 만드니 온도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요리 초보는 콩소메를 끓일 때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흔히 하는 3대 실수가 레시피 마음대로 바꾸기, 중간에 간 보기 생략, 무조건 강한 불로 요리하기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조그만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시간 없다고 온도를 높인 학생들은 결국 계란탕을 앞에 두고 좌절했습니다. 

(리뷰자 주 : 요리가 아니어도 기본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3대 실수라고 생각한다. 멋대로 바꿔하기, 중간에 확인하기 생략, 무조건 빠른 결과 추구.)

 - 잘 끓인 콩소메는 수프 그릇 바닥에 가라앉은 가니쉬 재료가 다 보인다고 합니다. 진짜 잘 만든 콩소메는 한술 더 뜹니다. 큰 병에 채운 다음 그 밑에 신문을 깔아도 기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니까요. 병 아래 깔아놓은 신문의 글자가 보입니다. 이번 콩소메는 아주 잘 만들어졌네요. 

- 중세 프랑스에서 어느 주방장이 깐깐한 귀족 주인에게 양심을 품고 '어디 한번 굶어봐라' 하면서 재료를 수프 냄비에 다 쓸어 넣고 도망쳤습니다. 나중에 와서 보니 맑은 국물이 끓고 있었고, 아주 맛있어서 까다로운 귀족 주인도 만족하면서 상을 내렸다고 하죠. 콩소메 수프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재료 준비부터 불 조절까지 신경 쓸 일 투성이라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을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 밀가루, 콘밀, 소금, 설탕, 베이킹파우더, 달걀, 우유를 섞어 반죽을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재료는 콘밀과 베이킹파우더입니다. 콘밀은 콘도그의 거칠한 질감을 만듭니다. 밀가루 반죽으로 소시지를 감싸고 오븐에 굽는 소시지빵은 콘도그라고 하지 않습니다. '담요 속의 돼지 pig in the blanket'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부르죠. 베이킹파우더는 반죽을 부풀려서 부드럽게 하고 빵 사이로 공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듭니다. 베이킹파우더 없이 콘도그를 튀기다가 안쪽 공기가 팽창해 터지는 바람에 기름이 튀어 화상 입는 사람들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소시지에 나무 막대기를 꽂고 옥수수 전분에 한 바퀴 굴려서 반죽이 잘 묻게 합니다. 가게라면 커다란 통에 콘도그 반죽을 가득 채워놓지만, 집에서는 재료를 아끼려고 길쭉한 유리컵에 채워서 소시지를 그 안에 푹 담그는 방법을 씁니다. 

(리뷰자 주 : 한국에서 부르는 핫도그는 사실 콘도그가 정확한 명칭이라고 한다. 미국에선 스테프 핫도그 같은 형태가 핫도그라고.)

- 소시지를 반죽에 묻혀 튀기는 조리법은 기원을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립니다. 먼저 1930년대 오리건 주의 해변에서 핫도그를 팔던 보잉턴 부부가 소나기에 핫도그 빵이 젖어 못 쓰게 되자 빵 반죽을 갖다 놓고 그 자리에서 튀겨 팔면서 콘도그가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잉턴 부부가 만든 '프론토 펍 Pronto pups'은 지금도 미국 전역에 콘도그용 반죽 재료를 공급하는 회사로 남아 있습니다. 콘도그를 프론토 펍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 다른 이야기로는 1930년대 야구장에서 핫도그 빵이 바닥나자 동네 레스토랑 주인이 남은 소시지에 생선을 튀기려던 반죽을 입히고 튀겨서 팔면서 콘도그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핫도그는 빵이 그릇인 셈이지만 콘도그는 뜨겁고 기름져 손에 쥘 수 없었죠. 팝콘 봉투나 주머니칼 같은 데 알아서 받아먹다가 누군가 아이스크림 막대기로 푹 찔러 먹으면서 콘도그가 발명됐다는 주장입니다. 

- 콘도그라고 불러야 할지 핫도그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접시에 담아 나오면 레스토랑에서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어야 할 만큼 고급스러운 맛이기 때문입니다. 만들기 전에 예상했던 추억의 핫도그 맛은 아닙니다. 쉬는 시간에 선생님 몰래 학교 담장을 넘어가 할머니가 하는 분식집에서 사 먹던 두꺼운 튀김옷에 분홍빛 어육 소시지가 겨우 반 개 파묻힌 그 핫도그 하고는 전혀 다르네요.

- 디즈니랜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해요. 콘도그는 솜사탕이나 츄러스처럼 축제나 놀이공원에서 즐기는 음식의 대명사입니다. 당연히 디즈니랜드에서도 콘도그가 어마어마하게 팔렸죠. 한 요리사가 더 맛있는 콘도그를 개발했습니다. 엄청난 노력 끝에 최고의 콘밀, 최고의 소시지, 최고의 요리법과 최적의 조합을 찾아낸 결과물이었죠. 그리고 그 콘도그는 디즈니랜드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하루 만에 가장 많은 불평을 받은 새로운 시도'로 말이죠. 관광객들은 어릴 적 피서지나 놀이공원에서 먹던 맛을 원했는데, 아무리 맛이 뛰어나도 추억 보정을 당해낼 수는 없으니까요. 더 좋은 분위기, 더 좋은 맛이 언제나 나은 선택은 아닌 듯합니다. 캠핑 가면 전문점 라멘보다 인스턴트 컵라면이 더 어울리고, 길거리 포장마차 떡볶이는 자동차 소음을 배경 음악 삼고 매연을 곁들여 먹어야 제 맛이죠. 

- 레시피를 처음 보고 두 눈을 의심했죠. 트러플 주스야 송로버섯 캔을 따면 나오는 버섯 국물을 활용하면 되지만 프랑스산 최고급 베르무트 Vermouth(와인에 허브와 향신료를 넣어 숙성한 강화 포도주)인 노일리 프랫 네 병이 통째로 들어간다니 원가 상승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집니다. 비싼 와인이 들어가서 그런지 향기는 말할 수 없이 좋지만요. 다 만든 육수는 커다란 컨테이너에 채운 뒤 필요한 만큼만 덜어서 준비합니다. 

- 요리를 배우면서 얻은 교훈은 무조건 최고의 맛을 추구하는 방식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간과 예산을 무한정 들이면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힘드니까요. 음식의 질을 유지하면서도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효율적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트러플 수프의 덮개로 쓰는 파이 반죽을 직접 만드는 대신 냉동 제품을 사서 쓰듯이 말이죠.  

- "일선보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삼재보三步를 익히자."
"일이삼으로 나간다... 재미있군요. 몇 번까지 하는 겁니까?”
농담 삼아 던진 질문에 석소봉은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상, 오행, 육합, 칠성로에 팔괘, 마지막으로 구궁보다. 거기까지 익히면 더 배울 보법은 없어. 여타의 다른 것은 다 이 아홉 가지에서 변형된 것이다. 숫자가 더 나간다고 좋을 것도 없지. 결국엔 일선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바른길이다."
"아예 일선보만 하면요?"
"도道라는 것이 원래 돌아오는 것이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갔다가 다시 단순한 곳으로 돌아오는데, 처음의 단순함과 나중의 단순함은 다른 것이라는 말이지."


- 좌백, <독행>, 1998, 시공사

 


- 무협 소설이지만 여느 철학서 못지않게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 모습을 돌아보면 처음 시아이에이에 입학했을 때보다 달라진 점은 많이 없는 듯합니다. 엄청난 요리 기술을 배우거나 혀를 단련해 절대 미각의 소유자가 되거나 하지도 않았죠. 그러나 내적인 면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가본 적 없는 레스토랑 주방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며 성장하는 보람찬 여정이었습니다. 익숙한 식칼과 냄비에서 출발해서 난생처음 보는 희귀한 주방 도구까지 손에 익히고, 전 세계의 익숙한 요리와 낯선 음식을 만들고 맛보며, 학생식당부터 고급 레스토랑까지 다양한 환경을 경험한 끝에 다시 출발선에 섭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제 앞에 펼쳐질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함과 설렘을 감출 수 없습니다. 마치 트러플 수프를 다 먹고 나면 그다음에 나올 요리가 기대되듯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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