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브라이언 피어스] 깨어있음 -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탐구

일루젼 2022. 4. 22.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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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브라이언 피어스 / 박문성

원제 : We Walk the Path Together
출판 : 불광출판사 
출간 : 2021.12.27 


              

각 장이 하나의 설교/설법처럼 이어지는 책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나누지 않고 영성의 관점에서 각자의 다른 점과 유사한 점을 다룬다. 그러나 그것들이 결코 다른 방향으로 이어져있지는 않음을 강조한다. 

 

시작과 끝은 같은 지점이다. 그러나 그 둘을 잇고 걸어가는 경로가 다를 뿐이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고 죽지만 그 사이를 채운 삶은 개별적이듯이. 그러나 그 삶에는 반드시 연결된 다른 유정한 존재들이 존재하듯이. 

 

'깨어있음'을 위한 수행이나 일화보다는 다소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데, 그런 점에서 원제를 조금 더 살려서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가 강조되었으면 좀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매 호흡에 집중하고, 현재에 충실하고, 주변과 이웃을 연민과 사랑으로 감싸고 이해하도록 노력하도록 하라.

 

저자는 사랑하므로 고통을 감수하는 것과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와 불교의 큰 방향적 차이라고 설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과연 큰 차이인지 의문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라면 전자겠지만, 자타의 구분을 내려놓은 차원에서는 후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정해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답'인 지점에 충실하면 된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인 순간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다음에서야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 또한 '현재'에 충실하는 방법이다.  

 


 

- "하느님은 스스로 발설되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발설되기도 하고 발설되지 않기도 한다."라는 에크하르트의 말을 처음 듣고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마음 챙김 수행과 관상 명상을 하면서 '발설되지 않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태이가 가르치는 명상수행을 하면서 신비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맛보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에크하르트와 태이를 형제로 받아들였다. 두 스승은 내가 그리스도교와 도미니코 수도회 영성이 전해준 관상기도 전통에 뿌리내리고 견고하게 머물 수 있게 했다. 태이는 영성수련이 실제로 즐겁고 자유롭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는 붓다와 예수를 형제라고 부른다. 같은 맥락에서 에크하르트와 태이는 나의 형님들이다.  

 

-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영성생활을 통한 자유와 환희를 만끽할 수 없다. 태이는 마음 챙김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영성적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일상의 수행에 뿌리내리게 했다. 이것은 균형 잡힌 영성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태이는 영성생활을 입출금 내역이 적힌 통장을 보듯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먼 미래에 사용할 충분한 잔고가 통장에 있으니 하느님이 구원할 것으로 기대하며 수행하면 안 된다. 영성생활은 먼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담보하는 저축이 아니다. 영성생활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 순간을 위해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삶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유용하다. 그대가 산만하여 마음이 몸과 함께 있지 않는다면, 자신이 삶과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 마음 챙김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고 몸과 마음이 합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모든 순간을 깊게 사는 능력이다."

 

- 선사 루벤 하비토는 말한다. 관심을 지금 여기에 끌어당겨 집중하는 선 수행은 복음이 지닌 본래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하느님 나라는 다양한 일과를 행하는 매일의 삶 한가운데 이미 존재한다." 두 종교가 강조하는 철학적 주제는 명확히 다르다. 불교는 매 순간의 삶, 즉 찰나를 강조한다. 삶의 매 순간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궁극적 깨달음을 추구한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비전통에 본래 있던 옛 통찰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죽음 이후의 삶을 과도하게 염려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영성적 집착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그렇게 계속 걱정하면 자유를 잃게 된다.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인도 가톨릭교회의 안소니 드멜로 Anthony DeMello 신부는 인도 문화에서 풍요로운 지혜를 인용하면서 가르쳤다. 그중 스승과 제자가 나누는 유쾌한 담화는 정신적으로 깨어 있음의 가치를 잘 보여 준다.

(제자) 제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스승)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그대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제자) 일출에 제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 깨달음도 그렇다. 그러니 최소한의 것만을 행하라.

(제자) 스승님은 그렇다면 영성수련을 왜 가르쳐 주신 겁니까?

(스승) 그것은 태양이 떠오를 때, 그대가 잠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하느님의 빛을 보는 것과 깨어 있음이라는 주제는 밀접하게 관련된다. 에크하르트는 "신이 비추는 빛이 영혼에 떠올라 아침을 밝힌다."라고 설교한다. 영성 여정을 하는 날이 경과할수록 우리는 외부로부터 비추는 빛을 점점 덜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 잔치에서 영혼의 불꽃은 신이 비추는 빛을 머금는다.  

 

- 언제나 현존하는 하느님이 비추는 빛을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는 것이 마음 챙김 mindfulness 또는 깨어 있음 wakefulness 수행이다. 하지만 영성적 무지로 인해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것을 항상 인식하지는 못한다. 에크하르트는 이 주제를 수련자에게 가르쳤다. 

- 에크하르트는 마음 챙김을 '민첩한 인식'이라고 정의한다. 민첩한 인식을 갖고 수행하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인지한다. 다른 전통의 스승들처럼, 에크하르트는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집중한 채로 살아가는 것, 즉 현재의 순간에 숨겨진 경이로움을 보기 위해 방심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태이도 비슷하게 말한다. 그는 각각의 그리고 모든 순간에 깊이 들여다보기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상기시킨다. 태이는 이것이 이해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해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명상은 어떤 것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고 어떤 것을 깊이 만나는 것이다." 
   

- 사미승으로서 처음 익힌 수행법은 숨쉬기였다. 즉 마음을 다해 매 호흡을 하는 것,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깊이 침잠하면 실재의 본질을 볼 수 있다. 그 통찰을 통해 고통과 번뇌에서 해방된다. 어느 정도의 평화는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만나는 법을 알면 된다. 불교도에게 평화를 만나는 가장 기본적인 수행은 의식하며 숨쉬기다. 서구인이 호흡법을 다시 배울 때 동양의 수행법이 도움이 된다. 숨쉬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고 현재 순간에만 할 수 있다. 어제 또는 내일 숨은 쉴 수 없고 지금 여기서만 숨쉬기가 가능하다. "인생살이로부터 또는 세상으로부터 상실감과 소외감과 낙오되었음을 느끼는 매 순간, 그리고 절망과 분노와 불안감에 당황하는 매 순간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행법을 익혀야 한다. 참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동수단은 마음을 다한 숨쉬기다." 태이의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생기가 넘친다. 

  

- 에크하르트는 성령을 하느님의 손에 비유한다. 그 손은 뻗어 나와서 우리의 삶과 호흡, 우리의 일과 놀이라는 평범함을 어루만진다. 달리 말해, 하느님은 성령의 결합시키는 힘을 통해 극적이고 특별한 방식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것들로 우리를 어루만진다. 태이도 말한다.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다. 그렇기에 매일 마음을 다해 살아야 하며, 매 순간을 성심성의껏 살게 하는 성령과 함께해야 한다."

 

- 태이는 임제 선사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일상에서 실천하는 영성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탈했다는 것 혹은 깨달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일상에서 [그대로] 살면 된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 된다."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다. 성령은 평범한 일상의 매 순간에 작용한다. 즉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작용한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하느님의 힘인 성령과 교류하며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면 매 순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기회다.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이의 볼을 쓰다듬듯 성령의 첫 손길은 부드럽다. 
 

- 하느님의 힘이 일상을 어루만진다는 해석은 태이의 마음챙김 수행이 가르치는 바와 비슷하다. 그는 일상에서 성령과 함께하는 삶을 마음 챙김 수행과 연결시킨다. "성령은 일종의 힘이다. 그것은 존재, 이해, 동의, 사랑, 치유 등을 가능케 하는 마음 챙김의 힘이다." 태이는 성령과 마음 챙김을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영성적이란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가. 그가 하느님 또는 이욕에 대한 훌륭한 논문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쓴 것에 너무나도 쉽게 집착하곤 한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 또는 느낌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참되고 살아 있는 하느님은 놓치게 된다. 태이도 붓다에 집착하는 태도를 경고한다. "그대가 사찰에 가면 붓다를 볼 수 있다고 믿으면 참된 붓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참된 붓다가 아닌 청동이나 구리로 만든 붓다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붓다가 아니다."  

 

-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에 대한 집착의 위험 또는 유사한 함정을 경고한다. 그것은 진리를 얻거나 깨닫는 특정 방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게 집착하면 우리는 궁극적 실재를 보지 못한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이것 또는 저것이 되려 하거나, 이것 또는 저것을 가지려는 것을 그만둬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이곳 또는 저곳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게 된다. 그대가 모든 것이다."  

 

-  그래서 고통만이 증가한다. 하지만 그런 고통조차도 우리의 스승이 된다. 그것을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고통은 사랑과 집착에서 온다. 내가 덧없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나와 내 마음은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이 함께 사랑하길 원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처음에는 에크하르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라'는 단순한 공식을 차용한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훨씬 더 섬세하다. 에크하르트는 불교 고승과 같은 말을 계속한다. "모든 슬픔은 상실이 내게서 빼앗아간 [것들에] 대한 집착에 기인한다. 내가 외적인 사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내가 외적인 사물을 좋아한다는 확실한 징조다. 그리고 내가 슬픔과 고통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확실한 징조다. [그러면] 나는 피조물을 향해 돌아선다. [그렇게 나는] 모든 위로의 원천인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런데 내가 슬프고 비통한 것이 놀랄 일이겠는가?" 태이는 슬픔과 비통을 들여다보면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전에 무척 사랑스럽게 느꼈던 것이 실제로 슬픔과 고통만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 고통을 겪은 덕분에 가야 할 길은 더욱 명확해진다. 

 

- 에크하르트가 고통의 원인인 사물에 대한 욕구와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욕구된 사물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 것을 주목하자. 그가 말한 것처럼, 고통은 외적인 것을 즐기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그런] 외적인 것을 잃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이다. 그렇기에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고통받는 것에 너무 놀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림자에 집착하다가, 다음날 그것들이 사라지면 침울해한다. 이것을 알고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이라도 붙들지 말고, 오직 현재 순간에 은총을 통해 주어진 선물을 즐겨야 한다. 

 

- 태이가 권하는 '깊이 들여다보기'는 영성 여정에서 유용한 나침판이다. 그것은 집착에서 생긴 고통을 극복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적 자유라는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돕는다. 그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와 같다. 즉 그대를 참된 자아로부터 멀어지게 유인한 것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리고 그것에 귀 기울여 보라.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 뿌리가 어디까지 내리 뻗어 있는지.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지. 이는 말한다. 그대가 일단 모든 것을 뒤엉키게 만드는 뿌리인 산만함, 고통, 슬픔을 인지했다면, 그것을 향해 미소를 지어라. 그것을 품에 꼭 안아라. 그리고 조용히 그것을 내려놓아라. 

- 우리가 깊이 들여다보면 이해를 배운다. 우리는 고통 또는 고통의 원인과 대화하고 그 대화에서 얻은 답에 귀 기울임으로써 다양한 통찰을 얻는다. 그 이해와 통찰이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귀향길을 인도한다. 태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해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물결은 자기가 다른 물결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결들은 각자 고유한 고통을 받는다. 그대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형제자매도 고통을 받는다. 그들도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대는 그들에 대한 비난을 멈출 것이다."  

 

- 이해는 열쇠다. 그것은 고통이라는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다. 이해를 얻는 수행을 포기하면, 그대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해는 우리와 다른 중생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참된 이해를 지닐 때만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 불교도는 멈추어 서서 평정한 상태로 깊이 들여다보는 명상을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우리 각자는 이해의 씨앗을 지녔다. 그 씨앗이 곧 하느님이다. 그것이 곧 붓다다.  

 

-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진흙을 우리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집착하지 말자.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연꽃을 가꿀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다.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날 수 있으면, 내 안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 이욕이 의미하는 것은 진흙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미지의 어둠에 우리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즉 연꽃이 피어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참으로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녔다면, 진흙탕 같은 세계 한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예수가 치유한 소경처럼 부르짖을 것이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복음 10장 51절) 

 

- 그것은 적어도 일상적 희생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필요한 어떤 고통도 받지 않고 사랑할 방법이 있을 것 같은 희미한 희망과 믿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그런 비밀스러운 희망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기만적 욕구가 자신의 믿음 체계에 견고하게 뿌리내리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완벽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에 중독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잠재적 신념에 따라 살아간다. 그것은 커다란 정서적 고통의 원인이고, 당연히 언제나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만 집중한다. 언젠가는 치유를 위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왜곡된 믿음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즉 상처 입은 자기 마음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여정은 아주 고통스럽지만, 해방을 발견하게 된다. 고통이 없는 것은 완벽한 관계가 아니다. 완벽한 관계는 연민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나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착한 사마리아인(루카복음 10장 36절)의 비유에서 예수가 한 질문이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할 것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연민이 생긴다. 연민을 선택한 삶을 살면, 우리는 이미 사랑이 고통을 수반할 가능성을 받아들인 삶을 사는 것이다. 자녀를 키워 본 부모에게 이것은 그리 대단한 계시가 아니라 그저 삶의 현실일 뿐이다. 태이는 "사랑은 고통에서 생겨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 자기학대가 아니다. 모든 훌륭한 영성 전통에 있는 깊은 통찰이다.  

 

- 예수는 자기에게 닥치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가장 심오한 자유를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이욕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면 삶이 충만하고 자유롭게 된다. 삶에 따라오는 고난과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상황에서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신뢰를 갖는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이다. 에크하르트는 약간 유머를 곁들이며 내적 자유를 향한 길로 나아가라고 촉구한다. "마음에 오직 하느님만을 간직하라. 그리고 주저하지 말고 전진하라. ... 화가가 그림의 모든 터치를 구상한 다음에야 첫 번째 붓 터치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첫걸음을 내딛고 그것을 따라 계속 나아가라. 그러면 그대는 바른 장소에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 태이는 불교 전통에서 유사한 교의를 떠올린다. 물론 붓다의 생애에는 부활 사건이 없지만, 역사적인 붓다의 부재를 대신해서 영성적인 몸이 남아 있다. "입멸할 때가 다가오자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른 몸에 접촉하라고 권고했다. 그것은 붓다 가르침의 몸, 즉 다르마 카야 dharmakaya 또는 법신法身이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은 후, 붓다는 제자들에게 법신을 안식처로 삼으라고 권고한다. 붓다는 말한다. "육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사용해 왔다. 나는 또한 더 중요한 나의 법신을 그대들에게 주었다. 행복을 위해서 그대들은 법신이 살아 있도록 해야 한다. 즉 다르마를 갈구해야 한다. 다르마를 믿어야 한다. 다르마를 사랑해야 한다.

 

- 교류 참가자 중에서 주디스 시머 브라운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불교도로서 콜로라도주 볼더에 있는 나로파 대학의 학장이었다.
"알제리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순교, 희생, 비극, 변화라는 주제에 대한 의문입니다. 저는 알제리에 있던 수도자들이 살해 위협이 있었음에도 알제리 잔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개인적 변화'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저는 그들이 잔류한 것이 그들을 살해한 업보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가해자들에 대한 연민을 어떻게 드러내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 불교적 관점에서 그것은 연민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것이 [연민]에 있어 문제가 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영성 여정을 선택하고 걷는 우리는 누구나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모두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좀 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매일 배워 나간다. 우리는 과오와 단점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영성 여정을 걷다가 걸려 넘어지곤 한다. 그러나 그 과오와 단점이 성스러운 길을 우리에게 물려준 현명한 이들의 가르침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한계와 선조들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 길은 영원하고, 그 길은 시작과 끝이 없다. 스승들이 직접 걸었을 때처럼, 지금도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다. 우리는 과거에 범한 실수로부터 배워 나간다. 그래서 오늘 출발하는 여정에 대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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