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웨인 다이어 / 이재석
출판 : 불광출판사
출간 : 2022.02.15
예전에 누군가에게 실수는 한 번 하기 때문에 실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며 그 지점부터는 사실 타인이 아닌 자신을 돌이켜봐야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해한 것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된다. 현재를 바꿀 수는 없으며, 그저 미래를 대비할 뿐이다. 지금껏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 바라보며 살아왔다.
해서 지금에 이르러 감히 모든 것은 필요한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지점도, 다시 하고 싶은 경험도 없다. 가장 최고의 해법으로 훌륭하게 살아왔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선택을 했던 적도 있었고,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지는 못했지만, 안타깝지만 그것이 그 당시의 내 최선이었다. 다만. 항상 스스로에게 모자람이 있음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한때는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농담삼아 툭툭 꺼내 웃을 수 있는 과거들이지만 운을 읽는 다양한 잡기를 익혔던 것에는 그런 연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소위 '타고났다'라고 말하는 자신의 기질들을 들여다볼수록 '내가 나를 닦아 피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결국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만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호오포노포노'에서 내 현실에 일어난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에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이 지점은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이를 수 있었던 지점이다.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다. 설사 그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그것이 내게 왔다는 것은 거기서 내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애를 쓰는 것은 노력하는 것과는 다르다.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두고, 그렇기에 '내'가 가장 행복하고 밝아지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고, 그렇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때는 상황이나 타인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이 좋은 방향성이라 믿고 있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 주변에서 '요즘 좋아보여'라는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렇게 쌓여가는 경험과 자기 단련은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고, 삶에 만족감과 안정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그 언젠가의 힘들었던 자신에게 고마움과 연민을 실어보내보자.
그런 것이 내가 이해한 '웨인 다이어'가 추천하는 삶이다.
- 서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만약 당신이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멈추고, 영적 에너지로 갈아탄다면 언뜻 극복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적 해결책이 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당시 나는 더 높고 빠른 영의 에너지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불러들였다.
1)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을 더 고차원적인 힘에 내맡겼다.
2) 나는 모든 일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을 보았다.
3) 나는 한시적 몸에 머무는 무한한 영혼임을 자각했다.
4) 마음을 고요히 하면서 모든 부정적인 것을 비웠다.
5) 나에게 치유 에너지를 전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6) 신과 연결된 상태를 마음속에서 유지했다.
7)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음을 없애는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했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 이 책을 쓰는 일은 나 자신을 자각하는 훈련이었다. 나는 낮고 느린 에너지 패턴에서 벗어나 영성의 인도를 받는 능력이 더욱 커졌으며, 게다가 아주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 내가 가진 가장 높은 에너지에 다가가는 연습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나는 더 가벼워졌고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연민을 느꼈다. 말 그대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제 나는 문제로 가득한 마음의 세계에서 플러그를 뽑아 영의 세계에 꽂는다. 이 책을 쓰면서 에고 ego를 벗어나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나는 혼자가 아니며 결코 혼자일 수 없음을 강하게 느꼈다. 당신도 책을 읽으며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문제에 대한 영적 해결책은 오직 당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음을 깨닫길 바란다.
- 먼저 자신의 질병과 상처에 책임을 져야 할 때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의 질병과 부조화 상태는 온전히 나의 것이다.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도 내가 책임진다."
- 에너지에는 주파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절망의 주파수에 있을 때 에너지는 낮아지고 당신은 우울해지거나 불화를 겪는다. '오늘 기분이 다운되었어'라는 말은 당신의 에너지가 이처럼 낮은 주파수 상태일 때 느끼는 절망을 가리킨다. 낮은 주파수에 계속 머무는 한, 당신은 같은 종류의 에너지를 더 많이 끌어당기게 된다. 정신적 절망에 계속 빠져 사는 사람들은 기운을 차려서 영적 에너지에 이르게 하는 빠르고 높은 주파수를 경험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비관적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낮고 느린 에너지에 계속 연료를 공급한다. "삶은 힘들다"는 말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당신의 경험이 된다. 우주의 중심 법칙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된다."
- 기뻐하라. 높은 수준의 영적 자각에 이른 사람은 언제나 행복해 보인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나의 활력 상태는 나의 영적 자각의 수준을 보여주는 믿을만한 지표다. 활력과 즐거움, 만족감을 크게 느낄수록 내가 영성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떤 기분으로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 불안, 고뇌, 상처, 우울, 좌절 등이라면 당신은 지금 영적으로 단절된 상태다. 이것은 지금 당신의 개인적 에너지장이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힘에 오염되었다는 의미다.
- "이 남자도, 그의 부모도 죄를 짓지 않았다. 그의 삶 속에서 신이하시는 일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우리는 죄와 벌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훈련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죄와 벌의 관념은 우리가 연약하고 잘못된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지닌 힘을 앗아가는 관점이다. 그보다 우리의 힘을 북돋는 관점이 있다. 우리에게 닥친 시련을 교훈을 얻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다. 지금과 다른 선택을 내리는 기회로 보는 것이다. 죄책감에 빠져 벌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는 끔찍한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문제에 대한 영적 해결책에 다가는 것은 해결책의 개념에 집중하는 것이다. 죄책감에 빠진 죄인은 움직임을 잃고 수동적인 관성에 머문다. 당신이 죄스런 행동을 지었다면 그 행동을 높은 의식 수준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로 여겨라. 그럴 때 자신에게 책임을 지며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또 이런 일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의 우화에 나오는 제자들은 남자가 눈이 먼 이유가 그의 삶에 관련된 누군가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는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행은 인간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불행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무한과의 합일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예수는 남자가 눈먼 이유가 누군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님을 제자들에게 거듭 상기시켰다.
- 당신은 모든 꽃과 모든 창조물, 모든 사람 등 어디에서나 신이 펼쳐져 있음을 본다. 이러한 합일 의식 수준에서는 당신을 희생자로 여기고 바깥의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던 내면의 속삭임이 떨어져 나간다. 이 빠르게 진동하는 주파수를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하면 에고 의식이나 집단의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게 된다. 이제 당신이 우주에 전하는 메시지는 "나에게 달라, 달라, 달라!"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줄 수 있을까?"로 바뀐다. 그러면 우주도 거울처럼 화답한다.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줄까?” 합일 의식 상태에 이르면 당신이 처한 삶의 여건이 더 이상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 낮은 수준의 진동에 대한 반응이 질병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삶의 모든 영역에 커다란 구멍을 낸다. 이 구멍을 통해 문제가 지닌 낮은 주파수가 들어오고, 우리의 몸을 망가뜨렸던 것처럼 인간관계와 가족 그리고 직업에까지 심각한 해를 입힌다. 낮은 주파수가 머문 것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지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런 마음가짐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낮은 주파수를 제거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 성공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 제 역할을 다 하는 사람은 가지고 싶은 것을 자신의 삶에 끌어오는 능력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진실이다. 성공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고 문제에 짓눌려 사는 사람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자기 삶으로 끌어오지 못한다. 두 집단을 차례로 살펴보자. 이것은 당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두느냐, 어떤 주파수에 당신의 내적 에너지를 공급하느냐의 문제다.
- 이제 위 장면을 염두에 두고 당신의 '생각'이 살면서 원하는 것을 얻는 데 필요한 '돈'이라고 해보자. 당신의 욕망, 요구, 의도, 열정도 모두 생각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만약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생각을 둔다면, 그것이 아무리 부정적으로 느껴져도 당신은 원하지 않는 것을 토대로 행동할 것이다. 그러면 원하지 않는 것이 당신의 삶에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당신 집에 끔찍한 가구나 당신 취향이 아닌 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물건들이 당신의 집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리석게도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귀한 돈을 써버렸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생각'이라는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신의 마음은 매일 6만 가지 생각을 한다. 이 생각들을 살펴보라. 당신의 생각 가운데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운이 없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이번 감기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 내가 산 주식은 곤두박질칠 거야, 지금까지 늘 그랬으니까. 계약이 성사되지 못할 거야. 영화관의 좋은 자리는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이 음식을 먹으면 뱃살이 10킬로그램은 늘겠군. 담배를 끊는 건 불가능해. 비 때문에 야유회를 망칠 거야."
- 부정적인 생각의 목록이 수천 페이지나 계속된다. 당신의 생각은 행동의 원천이 되는 에너지다. 당신의 생각이 원하지 않는 것에 머물면 당신은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 계속해서 당신의 삶에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당신의 삶에 나타나길 바라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을 중단하라. 그럴 때 당신은 더 빠르고 영적인 에너지로 갈아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낡은 습관을 바꿀 수 있을까? 당신의 생각이 원하지 않는 것에 집중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생각이라도 결국엔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당신의 삶에서 실제로 현실화된다는 사실을 떠올려라. 그러면서 잠시 멈추어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다시 말해, 당신의 관절염이 점점 악화된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분명히 당신은 관절염이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을 '의도적'으로 바꾸어본다. 즉 "이 관절염은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렇게 하면 마침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더 빠른 에너지인 새로운 의도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러면 새로운 의도가 당신의 현실이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관절염의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당신은 관절염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관절염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적 중의 기적이자 일종의 에너지 시스템인 당신의 몸은 당신의 생각에 반응할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당신이 살아온 내력이 당신의 현재 모습이다."
- 나는 여기서 '의도'라는 말을 매우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원하는 것에 생각을 묶어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스스로 결핍 상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당신에게 제안하는 것은 바라는 상태에서 요청하는 상태로, 의도하는 상태로, 마침내 열정에 이르기까지 사다리를 오르라는 것이다. 열정을 가지고 의도에 따라 행동할 때 마침내 당신은 그것을 창조할 것이다.
- 원하지 않는 것에서 에너지를 거두고, 원하는 것에 에너지를 향하는 순간, 우주가 나와 공명하며 높고 빠른 에너지를 나의 내면에 만들어냈다. 당신도 이 방법을 사용해보라. 통제 불가라고 믿는 조건화된 일과 관련한 힘겨운 상황에서 말이다.
- 당신의 생각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상태에 있는가? 그렇다면 설령 그 상태가 정말로 마음에 안 들더라도 당신은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후회하고 싫어해도 그래 왔던 대로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문제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에 그대로 머물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는 창조하려는 것에 에너지를 쏟는 법을 잘 모른다. "미친 짓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대로 하면서 지금과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 당신이 무수한 실패와 문제를 낳은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하자. 그 문제들 가운데는 당신이 끊임없이 희생자라고 느끼는 실패한 인간관계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빠져 있던 중독 행위에서 벗어났어도 여전히 집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흥청망청 돈을 날비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을 수도 있고, 몸 여기저기를 돌아가며 아픈 만성 질환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껏 늘 그랬어." 이것은 익숙한 것에 내면을 집중하고 있어서 믿지 않은 것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경우다. 하지만 모든 문제에는 영적 해결책이 존재한다. 당신의 주파수를 높이는 과정을 지금 바로 시작하라. "나는 지금껏 늘 그랬어"라고 말하며 정당화했던 느리고 낮은 물질 에너지는 이제 버려두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당신이 원하지도 않는 문제에 내면의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빠져 있게 할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이 두 요인을 각각 '가장 큰 환영' 그리고 '당신의 개인적 역사 없애기'라고 부르겠다.
- 당신의 개인적 역사를 내려놓으라. 그것은 지금까지 당신이 해왔던 방식이며 여전히 지니고 다니는 낮은 에너지의 생각에 불과하다. 오늘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는 더 이상 그 방식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의 문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나온 과거에 머물며 현재에 처한 어려움을 과거의 탓으로 돌리거나 혹은 개인적 역사에 사로잡힌 채 그것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지나 온 흔적과 모든 개인적 역사는 당신의 오늘을 위해 일어나야 했던 일이다.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이렇게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그 일들은 벌써 끝났다. 그러니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받아들여라.
- 주변 사람들은 당신에게 원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는다. 당신 주위의 사람들은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기대를 한다. 당신에 대한 기대를 계속 상기시키는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난다고 하자. 이때 당신은 화를 내면서도 그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는 한, 당신 또한 그것을 계속 끌어오게 된다.
- 당신이 접해 있는 에너지장에 영향을 미치는 두 번째 요인은 '당신이 허용하는 바깥 요인'이다. 당신의 신체 에너지 공간에 어떤 사람을 들어오게 하는가? 해로운 사람을 들인다면 당신의 행복감은 줄어들 것이다. 감기든 사람이 당신의 면전에서 재채기하면 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에너지장을 오염시키지 않으려면 어떤 사람들과 어울릴지 신중해야 한다. 몇 해 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 교훈을 터득했다.
- 느린 에너지로 당신의 생활공간을 오염시키고 어지럽히는 사람과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 단, 한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우선 낮은 에너지의 사람이 당신의 생활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다음, 더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여 그의 낮은 에너지를 중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상대의 낮은 에너지를 중화시키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나의 에너지가 소모되고, 그 피로감으로 다시 낮은 에너지에 젖어드는 악순환이 일어나므로 조심해야 한다. 당신의 삶에 부정적 요소를 가져오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겠다고 결심하고, 당신의 신체 에너지장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당신의 신체 공간을 수시로 침범해 들어오는 부정성과 낮은 에너지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신에게 불안, 수치심, 우울, 두려움, 불평불만, 무관심, 스트레스, 걱정, 분노, 죄책감 등의 낮은 에너지 패턴을 끌어오는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당신이 자신의 불행에 동참하기를 바라면서 당신의 삶을 매일 자신들이 경험하는 문제들로 가득 채우려 한다. 지금 어떤 에너지장이 당신의 에너지 몸에 영향을 주는지 자각하라. 그리고 깨끗한 생활공간을 위협하는 모든 해로움에서 거리를 두겠다고 다짐하라. 당신의 생활공간이 침범당했다고 느낀다면 즉각 행동하라. 우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한 다음, 반대의 행동을 취하라. 호흡을 관찰하며 길고 느리게 산소를 들이쉬라. 그런 다음 친절과 사랑의 생각을 의식적으로 내보내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을 침범하는 에너지 힘에서 거리를 두라.
- 사랑과 평화와 같은 높은 영적 에너지를 지닌 사람들이 당신의 신체 에너지장 속으로 들어오도록 노력하라. 그게 여의치 않다면, 당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에너지와 거리를 두되 되도록 고요한 방법을 사용하라. 내면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이유도 이와 같다.
-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하면 사람들은 당신을 속이려 들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고 있는 한, 당신의 에너지장은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 머문다.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하면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라는 낮은 에너지를 가진 자들이 몰려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높고 빠른 영적 에너지의 내면의 평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적 가치에 진실하게 머물더라도 당신을 속이려는 사람들은 당신의 지위를 존경하고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럴수록 당신의 가장 높은 자아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그들을 대하라. 그러면 사람들에게 속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당신이 평온과 행복을 누리면 사람들은 질투할 것이다. 그래도 행복하라. 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주 되새긴다. 행복이 바로 길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반응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는 것은 나의 행복의 원천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격이다. 행복은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엇이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 같은 외부 조건으로는 행복을 구할 수 없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당신의 삶에 관계한 모든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라. 스스로가 깨끗한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당신의 에너지장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 사람들이 질투하거나 흠을 잡거나 당신에 관해 험한 말을 하더라도 당신 스스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이 발산하는 행복이 당신을 향한 질투 섞인 옹졸한 에너지장에 영향을 미쳐 그들마저 행복에 젖어들게 할 수 있다.
- 당신이 오늘 행한 선행을 사람들은 내일이면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행복과 마찬가지로, 선행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정수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선행을 하는 이유로 타인의 인정이나 감사를 구하지 말라.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가슴에서 영이 지시하는 대로 타인을 위해 행동하라. 영은 사랑, 친절, 연결 등의 빠른 에너지에 뿌리를 둔다. 당신의 영은 가슴의 에너지를 표현하라고 촉구한다. 반면, 물질계의 에고는 삶이 경쟁이라도 되는 양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보상받기 위한 어떤 것을 행하라고 재촉한다. 당신의 영에 귀를 기울여라.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라. 이는 사랑과 선행이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
- 나는 여기서 '적'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시인 헨리 W. 롱펠로는 말했다. "적이 간직한 비밀의 역사를 읽는다면 그들 각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향한 적의가 누그러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품을 때 낮은 에너지장에 머무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낮은 에너지장에 있을 때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난다. 만약 분노와 증오 등이 일어나는 인간관계라고 판단된다면 당신은 그 관계를 돌아보아야 한다. 분노와 증오의 생각을 받아들임, 친절, 활기, 사랑의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우선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아차리고, 그다음 사랑을 보내는 능력을 연습해야 한다. 마음이 맑아지면 당신의 적은 친구가 될 것이며, 나아가 스승이 될 수도 있다. 최악의 적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당신이 느끼는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살펴보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적은 당신을 영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를 선사해서 해결책을 제공한다.
- 증오를 사랑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은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를 성취한 것이다. 사실 나에겐 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고, 증오할 만한 사람도 없지만 인생의 굴곡을 거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실망한 일이 있다. 어떤 사람은 빌려 간 돈을 갚지 않았고, 어떤 이는 약속을 깨트렸다. 어떤 사람은 나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갔다. 어떤 이는 나를 욕했으며, 나에 관한 루머를 퍼트리고 다녔다. 내 물건을 훔쳐 간 이도 있었다. 나는 붓다의 말을 떠올리며 그들 모두에게 사랑을 보낸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증오에서 벗어난 상태로 살 수 있다." 내가 낮은 에너지를 지닌 문제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생각의 이런 전환 때문이었다.
- 영적으로 느끼려고 시도할 때 당신은 장벽을 세우게 된다. 이때 당신의 에고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당신이 주변 사람보다 더 영적일 때 당신을 칭찬하고, 반대로 주변 사람보다 영적이지 못하면 당신을 비난한다. 에고는 당신의 영성을 설명하고 방어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시간과 여러 상황에서 당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느끼는지 모니터링한다. 단순히 당신이 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채고 그런 당신의 일부를 의식에 초대하는 것으로도 당신의 에너지 수준은 영의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얼마만큼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가?"라는 게임에 뛰어든다면 에고는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우월한지를 평가하려 들것이다. 더 영적인 느낌이 일어나면 에고는 당신이 상위 범주에 속한다고 여기며 상대보다 높은 '영적 점수'를 얻으려 애쓸 것이다. 당신은 이런 우월의식에 빠진 낮은 진동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적인 느낌을 느끼려고 애쓰지 말라. 그저 영성 자체가 돼라.
-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면 깊은 곳에서 평화로운 존재임을 깨닫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이 내면의 존재가 승무원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몸처럼 골격 구조에 덮여 있다고 설명했다. "평화의 마음 상태가 아닌 사람은 누구든지 당신의 참된 존재 영역에 들이지 마세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들이 당신의 몸이나 승무원복 같은 겉모습에만 영향을 주게 하세요. 당신 내면의 자아는 평화에 머물러야 합니다." 나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한 그녀는 불쾌한 기색을 누그러뜨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승객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화풀이하듯 노려보는 승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웃음으로 대꾸해주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그녀는 평화의 마음을 일으켜 자신의 영혼에 침입했던 불쾌한 기운을 비켜 갔던 것이다.
- 당신이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고 느낄 때다. 이때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갖지 못하게 하는 외부의 힘을 비난하기 쉽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런 상황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라. 이런 눈을 가질 때 당신은 평온함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믿음직하고 진실한 평화의 도구가 된다.
- 이런 사람들은 누구라도 당신이 평화의 도구가 되도록 돕는 당신의 가장 큰 스승임을 기억하라. 그렇다. 이들은 당신의 안내자이며 당신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한다. 누군가가 당신이 느끼는 무질서와 혼란의 원인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이때는 그 사람이 당신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라. 당신이 아직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 말이다. 당신이 평화의 도구가 되려면 당신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떠올리게 해주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평화에 흠뻑 빠진 상태이며, 평화로 둘러싸인 상태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을 평화의 상태에서 멀어지게 한 모든 사람이 당신의 스승이다. 그는 당신이 평화로워지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
- 당신 자신과 평화를 유지하라. 당신이 갖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 자신과 평화롭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줄 수 없다. 평화를 주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없다. 당신의 모든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용서한다는 결단을 내려라. 과거의 실수에 대한 자기 파괴적 죄책감을 내려놓고,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당신의 여정에도 가치가 있음을 알라. 자신과 평화로울 때 지금까지 당신이 한 모든 일을 잘 살펴볼 수 있고, 그러면서 그 모든 경험은 더 높은 영적 주파수에 이르는 데 필요한 에너지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신은 실제로 모든 영적 향상이 일어나기 전에 언제나 재앙과 같은 일이 선행한다는 사실과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원치 않는 사건들이 결국엔 필요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왜 그럴까? 그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으며, 우주라는 지적 시스템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당신이 이전의 당신보다 향상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자신과 평화를 유지할 이유가 된다. 자신에게 향하는 질책, 죄책감, 실망감, 자기 증오, 분노는 당신을 평화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 직접적인 경험 없이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이점을 설명할 때 망고를 자주 사용한다. 대규모 청중을 상대로 강연할 때 나는 간단한 실험을 위해서 망고를 먹어본 적이 없는 지원자를 무대 위로 초대한다. 그런 다음 망고의 맛을 아는 사람이 그 지원자에게 망고의 맛을 설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망고 맛을 전달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노력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결론은 망고의 맛을 말로 전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원자는 언제나 망고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간다.
- 이 망고 실험은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가지게 하는 능력에 대한 비유이다. 망고를 먹어본 경험이 없으면 망고 맛을 제대로 알 수 없듯이 전체성으로서의 신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면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증언과 경험에 의지해 믿음을 가지려 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을 아무리 열망하더라도 언제나 의심이 남을 것이다. 이때 당신은 망고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과 같은 입장이다. 다른 사람의 말과 경험을 통해 신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가져가기란 불가능하다. 신과 의식적으로 접촉하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 방법으로 영적 에너지의 높고 빠른 주파수에 대해 알려는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영적인 의식을 당신 스스로 '알' 때 의심의 여지는 조금도 남지 않는다. 당신은 이 앞의 상태에 항상 접속해 있는 영적인 차원에서 살기 위해 점점 더 노력할 것이다. 내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의 영적 의식에 대한 앎을 말한다. 이 얇은 외부의 자료를 가지고 입증하거나 증명할 수 없다. 이 믿음을 당신 스스로 알게 될 때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영적 해결책에 이를 수 있게 된다.
- 이 영적인 힘과 의식적으로 접촉할 때 당신은 파괴되지도 않고 결코 태어나거나 죽지도 않는 무엇이 언제나 이 순간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형태나 경계도 없다. 이것을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의 승인을 받을 필요도 없다. 모든 생명의 우주적이고 영적인 근원에 관해 다른 이와 논쟁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지금 시합에 참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것이다. 칼 융에 따르면 한 사람이 무한과 맺는 관계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잠시 시간을 내어 당신이 무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라. 나의 믿음은 매우 개인적인 문제다. 높은 영의 힘에 대한 나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며 상대에게 납득시키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다. 게다가 그런 시도는 나 자신을 영에서 멀어지게 해서 나를 에고의 세계에 더 깊이 밀어 넣을 뿐이다. 나의 믿음을 방어하고 주장하는 순간, 자기 정당성의 영역에 들어서고 만다. 그 즉시 의심에 빠져 영적 의식에 다가가지 못한다. 이 말을 기억하자. "영은 생명을 주지만, 육체는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것도 계산할 수 없다."
- 자신의 꿈을 믿고 꾸준히 추구한다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심의 불길을 꺼뜨릴 수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이라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라. 나아가 알 수 없는 것은 이미 알려진 것보다 더욱 위대하다는 믿음을 가져라. 불교 경전에서 읽은 글귀이다. "올바른 방향을 향해 있다면 이제 당신이 할 일은 계속해서 걷는 일뿐이다."
- 기도는 신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다. 기도의 목적은 신에게 영향을 미쳐 당신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언제나 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스스로 떠올리는 데 있다. 덴마크의 저명한 신학자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기도는 신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기도하는 자를 변화시킬 수는 있다." 기도를 할 때 일어나는 변화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모든 의심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도를 통해 내 안의 침묵하는 거주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내 존재의 근원인 영의 높고 빠른 주파수와 교류한다. 나는 결코 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부탁하지 않는다.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문제를 해결해주며 친구를 치료해 달라고 빌지 않는다. 나는 신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의 삶에서 문제와 성가신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물질계를 영의 세계보다 높은 차원의 실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면서 나는 무한한 영의 세계가 지금 이 순간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 지금의 이 현존을 믿으면서 보잘것없는 에고의 요구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즉각 평화와 평온의 세계에 들어간다. 나는 성 프란치스코의 조언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신에게 기도할 땐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 자기만의 기도는 영적 의식, 즉 신과 다시 연결해준다. 좋을 때나 싫을 때나 기도하라. 문제가 생겼을 때든 축복과 평화를 느낄 때든 기도하라. 기도는 당신에게 사랑, 평화, 친절, 용서가 본질을 이루는 빠른 영적 진동과 교류할 것을 떠올리게 한다. 칼릴 지브란은 말했다. "고뇌와 결핍 속에서도 기도하라. 기쁨으로 충만하고 풍요의 나날일 때도 기도하라." 이렇게 신과 교류하면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의심에도 대처할 수 있는 불멸의 믿음이 생긴다.
- 누군가 우울함에 집착하고 싶다고 하면 분명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삶은 불공평하고, 내가 느끼는 슬픔의 원인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느낌을 오랜 시간 조건화한 나머지 우리는 절망을 습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들에 계속 매여 있으면 자기 연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연민은 결국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우리가 절망에 계속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절망 속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우울감에 스스로 책임지는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평생토록 이어온 삶의 패턴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절망은 안락하게 괴로움을 겪게 한다. 이 점에서 절망은 그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다.
- 특정한 물건이나 특정한 사람이 없으면 행복하거나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하다. 마치 처음부터 불행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듯하다. 그들의 삶의 태도는 나의 것이 없으면, 특정한 사람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우정이 없으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족과 결핍을 자신의 절망에 대한 변명으로 여기도록 조건화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정도는 달라도 이런 믿음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정도의 집착을 키워 왔다. 이 집착이 절망의 근원이며, 우리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근거로 자신의 우울을 정당화한다. 실제로 어떤 것을 얻으면 우리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잃을지 모른다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실제로 잃으면 절망한다!
-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다. 스스로 그것을 다시 프로그래밍하고 영원히 낮은 에너지 상태의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집착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집착은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환영에 불과하고 당신이 실재한다고 믿을 뿐이다. 집착이 없는 상태에서 축복 속에 사는 일은 정말로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있어야만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연습을 하라. 그런 말과 생각을 일몰과 하늘을 나는 새와 꽃이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을 대하는 태도로 바꾸어라. 당신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것이다. 그것들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둘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상태로 그것들을 즐길 것이다. 이렇게 하라. 그러면 필요한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에 생기는 절망이 힘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 집착을 제거하려면 그것을 단순히 내려놓아야 한다. 당신이 불행한 이유가 당신의 삶에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틀렸음을 거듭 상기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 이런 생각을 해보자. 고통은 당신이 그것을 더 이상 고통으로 여기지 않을 때 끝이 난다고 말이다. 인도의 성자 시반다(시바난다 사라스와티)의 말이다. "고통 속에서 즐기는 훈련을 하라. 모든 것이 그의 향상과 고양을 위해 신이 행한 것이라고 생각하라. 고통을 당신이 신을 기억하도록 신이 보낸 메신저로 맞이하라. 그러면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괴로움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다. 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고통과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을 특히 결론에 유념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라, 다시 말해서 영적 에너지로 옮겨가면 당신이 절망하는 그것은 사라진다. 괴로움은 오히려 멋진 축복이 된다. 고통은 당신이 신에게 돌아가도록 가르친다.
- 생각해보면 한때 나의 삶에서 절망과 괴로움을 일으킨 많은 일들이 실은 내가 가장 크게 성장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신에 대한 헌신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기도 하다. 그 경험을 통해 내가 겪는 괴로움의 목적이 나의 에고를 불태워 없앰으로써 순수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 삶의 바닥들은 내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에너지를 제공했다. 우리는 괴로움의 한가운데서 지금의 경험이 영적 향상에 이르는 전주곡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안다면 시반다가 말한 것처럼 '고통' 속에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고통의 한가운데서 축복을 발견하라. 이것은 절망을 제거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당신이 커다란 괴로움을 느낄 때, 일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때 잠시 멈추어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 그런 다음 당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마음을 열고 절망의 드라마가 계속해서 펼쳐지는 동안 어떤 좋은 것이 나타나는지 보라. 침묵에 주파수를 맞추면 절망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절망의 생각을 내려놓을 때 당신은 더 높고 빠른 에너지를 불러들여 마침내 절망이라는 환영을 대체할 것이다.
- 당신 자신에게 진실하라. 진실에 머물라. 진실에 머물면서 당신이 만나는 모든 것에 진실을 적용하라. 그러면 빛의 성품인 자유를 보게 될 것이다. 진실이 아닌 거짓을 연습할 때마다 당신이라는 시스템으로 오염원을 초대하는 것이다. 이때 당신은 빛을 가리며 어둠을 향해 다가간다.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며 당신에게 불평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어둠에 처한 사람들에게 진실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확고하게 다짐하라. 당신이 자신들을 사탕발림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때 그들도 당신의 말에 귀를 열 것이다.
- 빛은 진실이다. 당신 자신에게 언제나 진실하라. 부도덕하고 유해한 행동 등 당신의 모든 어둠을 삶에서 당장 몰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그리고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인정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 이것을 셰익스피어보다 잘 표현한 이도 없을 것이다. "그대 자신에게 진실하라."
- 슬픔을 주는 사람에게서 배워라. 그렇다, 영의 에너지보다 낮은 에너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당신이 얻는 유익함이 있다. 낮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은 당신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당신이 아직 스스로를 단련하지 못했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기쁨과 평화를 선택할 기회를 선사한다. 그들이 슬픔을 드러낼 때 당신은 슬픔의 에너지를 극복해 삶의 지침으로 삼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 슬픔의 모든 경험은 더 높은 마음의 깨달음으로 가는 문이 되어준다. 그러므로 그런 기회가 나타나면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라.
- <바가바드 기타>라는 신성한 책에 나오는 강력한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오래된 고전 이야기에서 전사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신)와 이야기를 나누며 '깨달은 자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한 신의 답에 나의 생각을 덧붙여보았다. 당신도 아르주나가 떠올리는 생각을 음미해보기 바란다. (에크낫 이스워런의 번역을 사용했다.)
아르주나 : 오 크리슈나여, 언제나 지혜 속에서 살며 큰 자아를 인식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그들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앉으며 어떻게 움직입니까?
스리 크리슈나 : 그 지혜 속에서 사는 이들은 모든 것에서 자신을 보며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을 봅니다. 사랑의 신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가슴을 괴롭히는 이기적 욕망과 감각적 열망을 남김없이 불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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