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노나리]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일루젼 2022. 4. 2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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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노나리
출판 : 에쎄 
출간 : 2009.11.16 


       

이랑의 책에서 '노나리'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찾아 읽었다. 최초로 그린란드를 소개하는 한국어 서적이라 집필하며 신경을 많이 썼다는 2009년의 저자. 그 이후로 코로나 상황이 오기 전 2018년 정도에는 아이슬란드/그린란드 오로라 여행이 꽤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 약 1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한 모양이다. 

 

이 책은 저자가 EBS의 계약직 조연출로 50여 일간 그린란드 다큐 촬영을 다녀와 엮어낸 여행기이다. 어떤 부분은 저자의 생각과 다르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공감되기도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눈에 담아온 그린란드를 읽어 나가다 보면 한 번쯤 떠나고 싶어 진다. 컵라면 하나에 만원 단위의 가격이 메겨진다 하더라도. 

 

즐겁게 읽었고, 아름답게 감상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교정 시 발견하지 못한 듯한 오타/비문이 꽤 있었고, 사진 아래 각주처럼 넣은 글씨의 크기가 너무 작아 읽기가 조금 힘들었다. 일각고래, 바다표범, 썰매개 등의 처우에 관한 내용은 생각이 다를 수 있는 부분이고, 현지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한 만큼 호불호는 갈릴 수 있더라도 읽어두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인종에 관해서는 글쎄. 현지인들의 삶에 관한 부분은 오래전 읽었던 <오래된 미래>의 라다크 사람들이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모습과 겹쳤다. 아마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획일화되어가는 가치관과 고정된 삶의 양식 속에, 가장 나은 대안을 찾는다면 어떤 형태가 가능할까? 원치 않는 그림이 현실이 되기 전에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 노나리의 역작을 읽으면서 질문 한 가지가 떠오른다.
"세상에서 양을 가장 많이 키우고 있는 나라는?"
호주-뉴질랜드라고 답한다면 '땡!’이다. 정답은 중국이다. 가끔 상식은 우리들의 허를 찌르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린란드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저 남극과 비슷한 북극곰의 나라쯤으로 알고 있진 않을까? 아직도 에스키모가 이글루에서 살고 있는 곳으로 착각하고 있진 않을까? 그렇다면 이 책을 강추하고 싶다. 아마 미지의 땅 그린란드에 대한 국내 최초의 종합 보고서가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상상해본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캥거루수아크에서 북극 순록과 사향소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는 모습을 감상하고 나르사수아크 양 농장에서 푸르른 초지를 거닐며 나르사크에서 수십만 년 된 빙하로 만든 맥주를 마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남부 카코톡 마을 광장에서 이뉴이트 젊은이들과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 그린란드, 그러나 원주민인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Greenland Inuit이 부르는 본디 이름은 아니다. 그린란드란 이 땅에 잠시 머물렀던 북유럽계 바이킹이 붙인 이름일 뿐, 원주민들이 부르는 이 땅의 본명은 칼라릿 누낫 Kalaallit Nunaat, 그들 모국어인 그린란드어로 '사람의 땅 Land of the Greenlanders'이라는 뜻이다.  

 

- 워낙 넓은 땅덩어리에 워낙 적은 수의 사람들이 살다 보니, 그린란드 자연의 너른 품은 미미한 숫자의 인간들이 유발하는 오염 정도야 너끈하게 자체 정화시켜왔을 터. 그린란드 사람들이 지금껏 환경보호의 중요성이나 그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도래했다. 대대적인 국토 개발은 필연적으로 심각한 그리고 지속적인 환경오염을 초래할 것이다. 제아무리 그린란드의 대자연이라도 이 모두를 소화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 전 세계적으로 히트 친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이란 다큐멘터리가 썩 잘 만들어진 자기 홍보용 영화에 불과하다며 코웃음 치던 나 역시, '환경보호 하자는 데 나쁠게 어디 있겠냐'는 안일한 생각에 그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는 'CO² 배출 줄이기 = 지구온난화 방지 = 환경보호'라는 등식을 머릿속에 막연히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BBC 다큐멘터리 '위대한 지구온난화 사기극 The Great Global Warming Swindle'은 그런 나를 두고 '꽤나 멍청하다'고 꼬집고 있었다. 지구온난화 이슈에 정치적으로 접근한 부분은 그야말로 신선했다. 우파였던 영국의 대처 수상이 강성했던 전국 탄광 노동조합 NUM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자국의 과학자들에게 지구온난화의 주된 원인이 석탄과 석유를 태울 때 발생하는 CO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게 하여 그것을 이슈화시키고, 그 대안으로 원자력발전을 독려하면서부터 지구온난화와 CO²의 관련성이 기정 사실화되었다는 주장이었다.  

 

-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분석과 과학적 데이터들이 제시됐는데, 결국 이 다큐멘터리의 결론은 '지구온난화는 분명 일어나고 있지만 CO만을 그 원인으로 지명하기엔 근거가 부족하며, 인간이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미하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얻은 결론은 '똑바로 정신 차리고 내 머리로 생각하지 않으면 여론과 미디어에 휩쓸리는 건 순식간이며 심지어 내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낸 것조차 교묘한 조작에 당한 것일 수도 있다'는 다소 암울한 음모론과, 결국 내 스스로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하고 전문 연구의 최전선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앨 고어가 맞는지 BBC가 맞는지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란 회의론이었다. 

 

- 정보는 매일매일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연구 결과나 통계, 여론 등 그럴듯한 말을 달고 나타나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고 설득한다. 나는 과연 그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참인지 가려내고 읽어낼 능력을 갖추었는가. 그린란드를 방문하여 현장을 직접 살펴보고 온난화에 대해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릴 만한, 지금 같은 행운은 매번 찾아오지 않으며, 대세를 따라 표류하기란 너무나 쉽다. 나는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머리로 판단하는, 다소 불편한 삶을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 더불어 기똥찬 반전이 있다. 정작 그린란드는 빙산으로 물도 만들기 전에 술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남부의 작은 마을 나르삭 Narag에는 2005년경부터 빙산을 녹인 물로 맥주를 만들어온 '그린란드 브루하우스 Greenland Brewhouse'가 있다. 독일에서 직수입한 보릿가루와 호프를 넣고 바다에서 채취해온 빙산 조각을 녹여 갓 만들어낸 ‘그린란드 비어'의 맛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무공해 청정수로 만들고, 대량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맥주에 비해 맛이 훨씬 더 깔끔하다"는 맥주 공장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시음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 장면로 그린란드에 머무는 동안 맥주 맛을 비교 분석하겠다는 일념 하에 그린란드 비어와 덴마크 수입 맥주 ‘투보르그 TURORC'를 번갈아가며 부지런히 마셨는데, 확실히 그린란드 비어의 진하고 개운한 맛을 따라올 만한 것이 없다.  

 

- 노을 아래 아름다운 빙산과 파란 빙산. 빙산은 대게 흰색이지만 그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방산은 얼음 안에 기포를 품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 기포가 빠져나갈수록 빙산의 흰색은 점점 푸른 빛을 띄게 된다. 한 번은 운 좋게 희귀하다는 파란 방산, 한국의 가을 하늘보다 더 새파란 빙산도 봤다. 아마 이렇게 파래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대다수의 빙산은 벌써 다 녹아버리기 때문에 보기 드문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 여름 한철이 지나면 온 땅과 바다가 얼어붙어 개썰매 없이는 이동도 사냥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개를 묶어두고 지키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 배가 불러 힘이 남으면 서로 싸워 물어 죽이기 때문에, 겨우 생존할 만큼만 먹이를 준다. 혹독한 추위가 생사를 위협하는 가운데 썰매를 달리면서 다친 개를 돌보거나 죽은 개를 따로 거둘 여유가 생길 리 만무하다. 오히려 나와 나머지 개들의 안위를 위해서는 뒤처진 개는 버리고 한시바삐 목적지로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이들 썰매개는 야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야말로 '야수들'로, 애완용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린란드 인들이 썰매개들을 굶기고 채찍질하는 것은 야생마에게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얹는 것과 비슷하다.  

 

- 고대 이뉴이트인들이 창안한 개썰매의 핵심 기술 중 하나는 바로 매듭이다. 적을 때는 대여섯 마리부터 많을 때는 열댓 마리의 개들이 썰매 하나를 끄는데, 그 수가 많다 보니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자연히 개들을 묶은 끈이 서로 뒤엉키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 끈의 끝부분에 매듭을 지은 후 이들 매듭을 모아 또 하나의 큰 매듭으로 묶어 전체적으로 보면 부채꼴 모양을 만드는데, 매듭짓는 방식이 워낙 복잡한 터라 곁에서 지켜봐도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꽁꽁 묶인 듯 보이는 저 매듭 하나만 쥐고 몇 번 세게 탁탁 털어내기만 하면 뒤엉켰던 끈들이 다 풀려버린다. 이는 추운 날씨에 손이 얼어도 쉽게 썰매를 통솔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 마냥 신나고 재미있게만 보이는 개썰매이지만, 현지인들조차도 썰매에 앉을 땐 언제든 뛰어내릴 수 있는 자세를 고수한다. 동물을 이용한 수단이기에 변수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 마리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면 자칫 썰매가 전복되거나 눈 속에 처박힐 수 있다. 주인 없는 개썰매가 돌아오는 경우도 이따금씩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린란드 인들이 여전히 스노모빌을 마다하고 개썰매를 고집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스노모빌은 운행 중에 고장이 나거나 연료가 떨어지면 손쓸 방도가 없지만, 개썰매는 개 한두 마리가 다친다 해도 나머지 개들이 있어 다소 느리게나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먹이를 얻을 곳은 집 밖에 없기 때문에 개들은 최선을 다해 귀환한다. 심지어 개 주인이 몸을 다치거나 기절해서 개들을 통솔할 수 없는 경우라도, 썰매 위에만 올라타고 있으면 어떻게든 집에 도착하게 돼 있다. 또한 무작정 돌진하는 스노모빌과 달리, 개들은 얼음이 녹아 위험한 곳을 먼저 감지하고 멈추어버리기 때문에 훨씬 안전하기도 하다. 따라서 스노모빌은 가까운 곳에 사냥을 갈 때, 산을 오를 때, 혹은 재미를 위해서 탈 뿐, 그린란드 전역을 종횡무진하며 사람들의 삶을 보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개썰매다. 

 

- 이 지루함은 혹독한 추위와 어두움 때문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는 날이 잦은 기나긴 겨울 동안 극에 달하는데, 사람들은 집집마다 산더미같이 쌓아둔 DVD를 보며 마음을 달래다가도 그 견딜 수 없는 침울함에 때로 폭력적이거나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곤 한다. 심지어 이 '계절적 감정 장애'를 따로 지칭하는 단어 '부담' 혹은 '짐'이라는 뜻의 '페레로르네크 perlerorneq'가 있을 정도여서, 적지 않은 수의 이주 정착민들은 매번 만만치 않은 비용을 들여서라도 계절에 따라 자기 나라와 그린란드를 오고 가며 삶을 버텨낸다. 

 

-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한여름 밤의 하얀 악몽은 그러나 아주 잠깐이다. 북극의 여름은 짧다. 태양을 피하고만 싶던 계절은 곧 태양이 절실하여 치를 떠는 북국의 겨울로 이어지고, 그 이름도 생소한 '흑주黑晝' - 해가 뜨지 않는 '검은 낮'이 찾아든다. 태양의 빛뿐 아니라 온기 역시 사라져버리는 이 시기, 어둑한 낮과 깜깜한 밤은 죽음 같은 잠을 부르고, 꽝꽝 얼어붙는 북극의 혹한은 시가마저 새카맣게 얼리려 들겠지. 

 

-  이 물설고 척박한 곳에 사는 게 고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자연 속에서 사냥하며 사는 삶이 자신에겐 가장 적합하다고 답했다. 그린란드 전통 발효음식인 키비오크(깃털을 제거하지 않은 바다쇠오리를 바다표범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넣고 돌무더기로 덮어두었다가, 몇 개월이 지나 발효가 되면 꺼내어 깃털을 벗겨내고 먹는 그린란드 전통 음식. 그린란드 태생의 가장 위대한 탐험가라고 일컬어지는 크누드 라스문센이 키비오크를 잘못 먹어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루머도 있다)를 만드는 데 묵묵히 열중한다. 이렇듯 현지의 삶을 고수하면서 만족을 찾으려 하기에, 낯설디 낯선 동양인이지만 그는 이곳 그린란드에 제법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었다. 

 

- 한국이 싫었다. 남들과 비슷해지려 안간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에서의 피곤한 삶, 오지랖 넓은 것을 '정'이란 단어로 치환해버리는 한국인들과의 끈적끈적한 인간관계, 도전하기보다는 안주하라고 충고하는 한국사회의 보수성이 지긋지긋했다. 한국 땅을 떠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아, 언제나 더 먼 곳, 더 낯선 곳을 꿈꾸며 닥치는 대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세상 어디를 가도 한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게 여행지 곳곳에서 마주치는 한국인 여행객들, 세계 어느 오지 구석에도 자리 잡아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인은 바로 나였다. 내 안에 한국이 있고, 한국의 문제들이 내 안에 있었다. 남들과 비슷해지려 안간힘 쓰는 것, 정이란 이름으로 오지랖 넓게 구는 것, 도전이 두려워 마냥 안주하려는 것은 바로 나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살과 피를 부인할 수 없듯,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게 그 지긋지긋한 것들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을 빚어낸 유전자요, 나를 구성하는 세포였다.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내 안에 한국이 있는 한, 세상 천지 어디를 간들 한국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끔찍한 결론은 이미 처음부터 내려져 있던 것이었다. 

 

- 왜 하필 그린란드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는 왜 그린란드에 오고 싶어 했을까.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나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낯선 땅에서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버릴 수 없다면 어떻게든 보듬어 안고, 피할 수 없다면 정면승부를 겨루는 게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이대로 영영 도망치는 게, 정말 불가능한 것인지. 나를 나라고 규정짓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건 정말 부질없는 꿈일 뿐인지. 세상 끝으로 나를 쫓아냈다. 그곳에서 만난 이에게 진실을 물었다. 그러나 모두 버리고 가장 멀고도 낯선 땅으로 스스로를 추방했던 그조차도 끝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 바다쇠오리는 펭귄을 꼭 빼닮았다. 펭귄은 날지 못한다. 그러나 바다쇠오리는 난다. 저와 닮은 바다쇠오리의 비상을 보고 저도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펭귄이 있다. 저와 닮았지만 하늘을 날 줄 아는 바다쇠오리의 날개에 자꾸만 그물을 던지던 펭귄이 있다. 하늘을 자유로이 누비던 바다쇠오리가 무려 '포충망'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걸려든다. 그렇게 꾸역꾸역, 바다쇠오리들을 잡아들인다. 그러나 아무리 잡아들인들 펭귄은 바다쇠오리가 될 수 없고, 펭귄은 날지 못한다. 

- 캥거루수아크의 풍광은 마치 내가 그린란드가 아니라 미국 중서부 지방 어느 구석에 있을 법한 퇴락한 사막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해안가에 위치하여 해양 기후의 특징을 띠는, 평균 습도 30~40퍼센트의 결코 건조하지 않은 여타 그린란드 도시들과는 달리, 캥거루수아크는 해변에서 내륙 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마치 시베리아 한복판에서나 볼 법한 전형적인 내륙 기후의 특색을 보인다. 습도는 10~12퍼센트에 그치고, 여름엔 따뜻하나 겨울엔 영하 40도까지 떨어져 지상의 물뿐 아니라 공기 중의 물까지 얼려버리므로 기후는 극도로 건조해진다. 축축한 빙하가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캥거루수아크는 항상 메말라 있고, 겨우내 찬 공기에 빙하가 그 몸집을 불려 갈수록 공기 중 수분이 줄어드는 탓에 더욱 메말라간다. 빙하는 온천지 풀썩풀썩 휘날리는 모래를 만들어내는 주범이기도 하다. 빙하가 흐르는 길목에 있던 바위와 자갈들이 움직이는 빙하 아래로 끌려들어가 오랜 시간 거대한 압력으로 갈리며 종국엔 고운 모래가 되기 때문이다. 수동 기어를 단 낡은 랜드로버에 몸을 싣고 바싹 마른 벌판 위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릴라 치면, 꼭 사막에 온 기분에 길가에 드문드문 선 관목들 사이로 선인장을 본 것 같은 착각을 하다가도, 문득 눈을 들면 먼발치에 빙하가 시푸르게 빛나고 있어 아연실색하고 마는 것이다. 북극과 모기, 북극과 사막.  

 

- 그뿐만이 아니다. 슈퍼마켓에는 아가들 까까 옆에 엽총을 걸어두고 팔고, 사람들은 빙산이 떠있는 바닷가를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활보하며, 말린 바다표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최신 기종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할아버지가 있다. 이질적인 것들이 지극히 당연하게 공존하는 현장.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파란 하늘 아래 가로등이 어둠을 밝히고, 토르소와 튜바, 의자 모양의 구름이 하늘에 나란히 떠 있는 그의 그림 속 기이한 세계가 바로 여기에 현현하고 있었다. 물론 시각적 충격을 의도하여 일부러 극적인 대비를 이끌어내는 그의 그림과는 달리, 그린란드 속 공존에는 모기나 사막처럼 따져보자면 다들 타당한 이유가 있다. 

 

- 이역만리에서, 이질적인 풍광을 눈앞에 두고도 화두의 끝은 결국 나의 삶, 나의 일상으로 안착한다. 그러나 이토록 영감 가득한 풍광 역시, 정작 여기 사람들에겐 단지 일상의 한 부분, 너무나 익숙한 삶의 현장에 불과하다. 그네들은 당연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우리네 일상으로부터 오히려 신선한 충격을 받으리라. '남의 일상'은 언제나 '나의 일상'을 반추하게 한다. 남의 일상 속 어떤 순간으로부터 마치 인생을 관통하는 진리라도 이끌어낼 듯 유난을 떨다가, 언제나 그저 습관적으로 영위해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했던 나의 일상 매 순간에도 똑같이 깨달음이 깃들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북극곰 대신 모기가 득실거리고 빙하 사이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북극, 이 초현실보다도 더 초현실적이고 픽션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현실 앞에서 소소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의 현실을 더욱 직면한다. 그러므로 길을 떠난다. 멀리 헤매고 난 후에야 늘 곁에 머무르고 있던 파랑새를 발견할 수 있듯, 일상의 위대함은 일상에서 한 걸음 떨어진 때에 가장 가슴 시리게 와닿으니. 

 

-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0년 8월, 미국의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4개의 원자폭탄 모두를 회수했다는 당시 미국 측 성명과는 달리, 폭탄 한 개가 아직 회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심지어 미국은 덴마크와 그린란드 몰래 사라진 폭탄을 찾기 위해 '폭탄이 떨어진 장소의 해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까낙 지역 주변 해역에 잠수함 '스타 3호'를 보내기까지 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500그램에서 1.8킬로그램 사이의 플루토늄이 아직 회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시인했지만 폭탄의 거취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며, 졸지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폭탄을 떠안고 살게 된 그린란드 인들이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이 생존권의 위협은 여태 별다른 주목도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너무나 간단히 묵살되고 있는 중이다. 
 
- 현대 사회학은 더 이상 사회 병폐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인식하지 않으며, 베버리지 보고서가 궁핍·무지·불결·나태·질병 등 사회 문제의 5대 악을 근절하는 방안으로 먼저 제안하는 것도 개개인의 회개와 교화가 아닌 사회복지 제도, 즉 시스템의 변화다. 그린란드 북동부 까낙 지방의 알코올 문제 해법은 적절한 제도의 구축과 실행이 사회 양태를 얼마나 크게 좌우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 고생깨나 한 것 같은데 막상 귀국할 때 보니 살이 피둥피둥 쪄 있더라는 무시무시한 진실과 대면한다. 나를 살찌운 건 팔 할이 쓰레기다. 그동안의 고된 육체노동이 무색할 만큼... 다소 과격한 듯한 표현이지만,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으로 점철된 그린란드 식탁을 달리 형용할 길이 없다. 식사 때마다 고문이라도 당하는 기분, 참혹하다. 살기 위해 먹어야 했던 것들이 이제 두툼한 뱃살의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그린란드의 슈퍼마켓은 수입식품으로 넘쳐난다. 이 땅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되는 먹거리란 양, 사향소, 순록 등 몇몇 육류와 수산물, 그리고 최근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감자 정도가 전부이니, 슈퍼마켓에 진열된 먹거리의 대부분이 수입품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 먹는 즐거움이 사라진다. 매 끼니 이어지는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의 향연에 토기가 밀려오고, 고칼로리 저영양 식단을 따라 뒤룩뒤룩 붙는 군살에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생야채와 생과일은 이미 시든 상태에서 진열되어 더더욱 시들어가는 통에 가뜩이나 손대기가 꺼림칙한 데다 가격까지 터무니없이 높다. 그를 대체하고자 과일주스나 신선한 우유라도 찾자니, 그린란드 인들의 입맛은 이미 옛날부터 설탕물에 색소와 과일향을 첨가한 주스와 멸균우유에 길들여져, 생과일 즙을 낸 주스나 신선 한 우유는 수입해오지 않는단다. 이렇듯 '쓰레기'로 가득한 그린란드 식탁은 해외여행의 묘미가 현지만의 독특한 음식, 현지인들이 평소 즐기는 음식을 섭렵해보는 데 있다고 여기는 나 같은 사람에겐 재앙이나 다름없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현지인들도 그렇게 먹고 산다니 우리도 똑같이 따라먹는 수밖에. 결국 그린란드 체류 50일 내내, 방부제와 첨가제로 범벅된 데다 눈 돌아가게 비싸기까지 한 이 쓰레기들을 위장 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 바쁜 현대사회,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이 꾸준히 소비되는 거야 어느 나라인들 비슷한 사정이겠지만, 그게 꼼짝없이 주식이 되어버리고 그에 별다른 대안조차 없는 이 땅 사람들의 삶이란 과연 괜찮은 걸까. 이뉴이트 전통 식단의 '건강한 지방'을 대체한 쓰레기 지방의 과다 섭취로, 당장 그린란드 사회의 당뇨와 비만율이 치솟고 있다. 물론 이는 외면적으로 곧잘 드러나는 부작용이라 벌써부터 그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해결 방안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내면적이고도 본질적인 부작용, 좀처럼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쉬이 주목받지 못하기에 어쩌면 당뇨나 비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부작용이 있었으니, 50일간 쓰레기 식단을 고수하며 가장 못 견디게 힘들었던 건, 두툼한 뱃살이 아니라 어쩐지 피폐해져 버린 삶이었다.  

 

- 쓰레기 식단이 혀를 죽여버린다. 혀는 늘 접하는 음식에 길들여지기 마련이고,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에 익숙해진 혀는 저도 모르는 새 언젠가부터 공장에서 조미한 맛을 정답이라 여기며 ‘공장의 맛'을 추구하게 된다.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은 또한 '요리'라는 과정을 철저히 생략해버린다. 좋은 재료를 골라 정성껏 다듬고, 향료와 양념의 조화를 추구하여, 마침내 인간 몸의 균형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예술활동 일체가 단번에 부정된다. 미각의 획일화는 음식의 맛과 멋에 대한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요리의 부재는 요리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의성과 새로운 도전의 여지마저 없애버린다. 맛과 멋, 창의성과 도전이 사라진 음식은 생존을 위해 섭취해야 할 무언가에 불과하며,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섭취하는 행위'로 그 가치가 끌어내려진다.

 

- 음식에는 철학이 담겨 있다. 단지 배를 채우고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 무언가를 먹는 것은 동물들의 행위다. 따라서 어떤 음식을 먹느냐라는 화두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고민이요, 음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바로 인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다. 요리는 철학이다. 재료를 선별하고, 구입하고, 조리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요리하는 이의 철학이 반영된다. 음식에 철학이 부재하고 요리라는 철학이 생략될 때 먹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먹는 즐거움이 사라질 때 식문화는 퇴보하며 삶의 질 역시 퇴보해버린다. 먹는 즐거움이란 단순한 쾌락의 무거운 의미, 그것을 깨달은 이제야 왜 그린란드에서의 내 삶이 그토록 피폐했던가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쓰레기 음식 속에 격리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보고 나서야, 삼시 세 끼 어떤 것을 내 속에 어떻게 집어넣느냐에 따라 내 몸이, 내 정신이, 그리고 내 삶이 좌우된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친다. 우리네 식문화가, 그 삶의 근간이 현대 산업사회를 거치며 어떤 위협에 노출되었던가를 피부로 느껴본 이제야 비로소, '웰빙'이 세계적 추세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십분 공감하게 된다.  


- 웰빙 열풍으로 한때 산업화의 산물인 가공식품이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할 건강한 음식,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음식이 절실해지자, 각 나라들은 먹거리를 두고 본격적으로 문화 경합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는 샴페인 명칭을 독점하기 위해 지적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고, 한일 양국 간에 김치와 기무치 사이에 표준 획득을 둘러싸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그린란드 역시 '청정지역'이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빙하수 개발과 유기농 먹거리 생산에 주력하며 이 흐름에 몸을 싣고 있으나, 정작 청정지역 그린란드는 여전히 쓰레기 음식의 홍수에 고립되어 있다. 마치 최신 유행을 따른답시고 그린란드에서 찌워온 두툼한 뱃살은 무시한 채, 들어가지도 않는 스키니진을 무작정 쑤셔 넣어 입을 수밖에 없는 내 꼴을 보는 것 같다. 나는 하루빨리 뱃살부터 빼서 유행에 제대로 합류하겠노라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데, 그린란드는 이 얄궂은 아이러니를 과연 어떻게 해결해나갈 예정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머물게 된 불편한 공간. 그런데 어느새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그 난처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가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음악을 애써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찬찬히 집 안을 둘러보면서, 도대체 이유가 무얼까 곰곰이 따져본다. 건물 자체나 가구는 별로 낡은 것 없이 깔끔했고, 웬만한 세간도 다 마련되어 있다. 잘 살펴보니 그리 어질러져있지도, 지저분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행하고, 무언가 굉장히 무질서하다. 내 기분마저 덩달아 묘하게 행하고 산만해지는 것 같아 더는 머물고 싶지 않구나, 라는 결론에 미친 그제야 불현듯 깨닫는다. 이 집에는 안락함과 안정감이 배제되어 있구나... 

 

- 공간은 삶을 규정한다. 아무리 번쩍번쩍한 집인들 그곳이 단지 비바람을 피하고 먹고 자고 씻을 장소에 불과하다면, 그 안에 사는 누군가의 삶 역시 간신히 본능을 충족해가며 영위하는 수준에 그칠 뿐 더 이상 풍요로워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더 좋은 집을 욕망하며 자꾸만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려는 이유도, 집, 나아가 집이 위치한 지역까지, 단순히 살아가는 곳이 아닌 삶의 터전이자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은 그가 사는 집에 반영된다. 가구를 어떤 방향으로 배치하고 창문에 커튼을 다느냐 마느냐 등의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는 단순히 심미안이나 경제력의 문제가 아닌, 생활의 패턴, 나아가 삶의 철학까지 오롯이 비춰내는 거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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