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존 A. 샌포드] 무의식의 유혹 -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

일루젼 2022. 4. 2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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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존 A. 샌포드 / 노혜숙

원제 : Invisible Partners

출판 : 아니마 
출간 : 2019.07.22 

 

       

어딘가에서 이 책을 소개하는 내용을 접하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유튜브였는지 글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어볼 책 목록이 이미 수 백 권이 훌쩍 넘어가고 있어서 도서관에서는 그때그때 눈에 띄는 순서대로 골라 읽고 있다.

 

개인적으로 조금 신기했던 건, 원래는 이 책을 읽으려고 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지구별 가이드>를 대출하러 갔었는데 해당 서가에 책이 없었다. 신간도 아니었고 대출 중도 아니었던 터라, 누군가 지금 관내에서 읽고 있나 보다 하고 목록을 살펴보다 이 책이 눈에 띄어 골랐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꺼내러 갔더니 3권 정도 옆에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지구별 가이드>가 꽂혀 있었다! (두 책의 분류기호는 182.23과 189.2로 서가가 달랐다) 

 

'뭐지? 이 두 권은 같이 읽어야 하나? 지금 읽어야 할 것 같네' 하고 다른 책들을 포기하고 대출해왔는데, 즐겁게 읽혔다. 내용 자체는 융의 '아니마 & 아니무스'를 접해 본 적이 있다면 완전히 신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상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깔끔한 문장들이 읽기 편했다. 또 '적극적 상상법'에 관한 실천 방법이 흥미로웠는데, 세 가지 모두 일상 중에 자주 하고 있는 방법들이라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첫 번째는 꿈 기록하기. '루시드 드림'이 궁금해서 꿈 일기를 기록하며 연습해봤었다. 몇 차례 연이어 성공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꿈에서 당분간은 쉬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지금은 간략하게 메모만 남겨두고 있다. (모두 딜드. 와일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계속 노력한다면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최근 꿈은 일상적인 내용인 경우 현실에서 핵심 키워드는 거의 그대로 일어나기도 하고, 상징적인 꿈인 경우는 꿈 안에서 메시지를 깨닫고 깨는 편이다. 

 

두 번째는 백일몽, 또는 공상의 영역인데 이건 특정 성향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취미일 것이고.

 

세 번째 역시 내면에서 자신의 특정 인격 또는 대화를 시도하고 싶은 상대를 두고 대화를 나누곤 한다. 대부분의 생각이 일종의 '대화' 형태라는 것만 눈치채면 의도적으로 할 수 있다. 상대를 소환해서 대화하는 경우는 누군가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을 때나, 화를 삭이기 위해 시도하는 편인데 주의할 점은 '나'와 '상대' 모두에 이입해서 최소 두 차례 이상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 입장에서는 진행이 안 된다면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읽을 책은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지구별 가이드>.

 


   

 


내 안의 또 다른 성性 밖을 바라보는 자, 
꿈을 꾸고 안을 돌아보는 자, 
깨어난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예지력이 생긴다.

무의식은 의식이 될 때까지
우리를 끌고 다닐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뭔가에 저항을 하면 그 힘은 지속된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알게 해 준다.

두 물질이 만나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둘 다 변화된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가 하는 선택이다.

우리 자신의 어둠을 알면 
다른 사람의 어둠을 이해할 수 있다.

우울은 검은 옷을 입은 여자와도 같다. 
그녀가 나타나면 밖으로 쫓아내지 마라. 
그녀를 초대해서 자리를 내어주고 
손님처럼 대접하고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가 자면서 꾸는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내밀한 성역 안에 
숨겨진 작은 문과 같다

꿈은
우리에게 의식적인 자아가 생기기 전의
원시 우주를 여행하게 한다.

- 카를 구스타프 융 -

 

 

- 그렇다고 해서 투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투사는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축적되어 온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는 것으로, 개인이 의도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의식에 의해 이성에게 투사된다. 이러한 투사를 인식하면 상대방과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고 인격을 성숙하게 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현실적인 기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이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이다. 투사는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투사를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법이 중요할 뿐이다. 

 

- 융 학파 분석가인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는 <동화 속 여성성 The Feminine in Fairy Tales>에서 결혼 생활을 위협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투사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결혼과 가정생활의 경계를 벗어나 밖으로 흘러넘치는 창조적 에너지가 있다면 그것은 주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투사된다. 새로운 이성에게 마음이 끌리고 매혹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는 우리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가 결혼을 잘못한 것인가? 지금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결혼생활로는 충족되지 못하는 창조적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아마 현실적인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 여자의 아니무스가 갖고 있는 위험한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로는 구약성서의 외경인 <토비트서 The Book of Tobit>에 나오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 사라의 이야기가 있다. 

 

'한편 일곱 번 결혼을 해서 일곱 번 남편을 잃은 사라라는 여인이 메대에 살고 있었다. 그녀가 결혼식을 치르고 신방에 들어갈 때마다 악마 아스모데우스가 그녀의 몸에 들어와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신랑의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었다. 사라 역시 하느님에게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혹한 운명에서 구해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 하지만 바로 그러한 부정적인 측면이 우리로 하여금 결국 온전한 인격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인도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부정적 영향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남자의 경우 뚜렷한 이유 없이 우울해지거나 강박적으로 성적 환상에 휘말리거나 하는 이유가 내면의 아니마라는 심혼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에는 어떤 단정적인 의견이나 원망하는 마음이 의식으로 들어올 때 그것이 정말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아니무스라는 심혼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비로소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외부의 누군가에게 투사된 내용을 거두어들이고 그릇된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다. 

 

- 다시 말하지만, 투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투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마치 외부의 누군가에게 자신을 투사해서 우리에게 존재를 알리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투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투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 자신과 내면의 인격을 분리하는 작업을 시작한다면 그 부정적인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를테면 아니마가 불러내는 기분, 아니무스가 주장하는 의견을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남자는 아니마의 투사를 인식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적절히 표현한다면 우울하고 화가 나는 감정에서 헤어날 수 있다. 아니마는 남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남자가 자신의 정서적인 측면을 의식할 수 있다면 결국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 여자도 마찬가지로 아니무스의 부정적 비판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 부정적인 아니무스는 마치 융통성 없고 편협한 남자와도 같다. 아니무스가 개인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쏟아내는 진부한 의견에 굴복하지 말고 이렇게 타일러보자. "사실 내 입장은 이러이러하다. 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 더 이상 나에게 반대하지 말기 바란다." 

 

- 남자가 아니마와 대화하듯이, 여자 역시 자신의 여성성을 지키면서 남성의 분별력을 가진 아니무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내면의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 여자의 경우 아니무스는 종종 처음에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즉, 어떤 생각이나 관념이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인식이 된다. 그러한 자동적인 생각과 관념의 흐름을 인격화해서 대화를 시작하면 된다. 카스티예호는 아니무스와 대화할 때 여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하면 좀 더 수월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아니무스는 이런저런 의견과 생각과 계획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때론 막무가내로 뭔가를 주장할 것이다. 여자는 이런 아니무스에게 단호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아니무스와 대화를 할 때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긍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면 아니무스는 단지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사실들만 열거해서 보여줄 것이다. 

-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아니무스 역시 두 가지 이미지로 투사될 수 있다. 여자가 두 남자에게 동시에 끌린다면 각각의 남자에게서 자신의 아니무스 이미지가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속성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자신의 아니무스가 투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두 남자와 심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한 남자를 택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왼쪽 팔이나 오른쪽 팔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여자가 아니무스의 투사를 인식하고 환상에서 벗어나 두 남자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남자를 선택해서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젊은 여자가 여러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느 부모는 딸이 지나치게 자주 애인을 바꾸는 것을 걱정해서 나에게 상담을 받아보라고 보냈다. ... 그녀에게는 여러 남자를 거치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단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여자가 만일 젊은 시절에 낭만적인 사랑을 해보지 못한 채 정략적인 결혼을 한다면 뒤늦게 현실로 이루지 못한 환상을 좇아갈지도 모른다. 

 

- 하지만 제임스 힐먼은 이러한 융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힐먼은 아니마가 단지 남자의 여성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아니무스 역시 단지 여자의 남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마는 원형이며, '원형은 여성이나 남성 중 어느 한쪽에만 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원형으로서의 아니마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양성의 개념(남성의 의식과 여성의 의식을 서로 반대의 개념으로 보는)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여자의 심리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여자 역시 자신의 내면에서 여성적 영혼인 아니마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여자들이 공허감을 느낄 때는 자신의 영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성적 측면을 무시할 때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여자 역시 남성적인 용기와 이성을 배우는 과정에서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여자들이 학문적 연구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남자들과 경쟁을 하느라 여성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에서 멀어지는 경험을 한다. 

 

- 제임스 힐먼은 남자의 아니마 투사를 받아들이고 반영하는 능력이 뛰어난 여자들을 '아니마 여자'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런 여자가 남자를 매혹시키는 이유는 마치 비어 있는 그릇처럼 남자가 투사하는 아니마를 그대로 담아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힐먼은 이런 여자가 완전히 비어있는 그릇이 아니며 단지 아니마라고 불리는 기본적인 여성성에 좀 더 가까운 유형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개인적인 인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형적인 여성성이 특별히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융은 '적극적 상상법(active imagination)'이라는 기법을 개발했다. 적극적 상상법은 명상을 하면서 무의식 속 심혼의 이미지를 응시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며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내면과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는 것이다. 적극적 상상은 프로이트가 정신적 도구로 중요하게 사용했던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과 다르다. 프로이트의 자유 연상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며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과거의 경험이나 정신적 외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이에 반하여 융의 적극적 상상은 이미지가 제멋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융은 자유 연상법이 개인이 갖고 있는 콤플렉스를 보여주는 작용을 하지만 구체적인 증세를 탐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적극적 상상은 특정한 이미지나 경험에 주목하면서 그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떠올림으로써 당면한 심리적 문제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미지로부터 마음의 평온을 찾아 초월한 상태로 들어가는 명상과도 다르다. 적극적 상상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무의식에 잠재된 이미지들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적극적인 행위다. 다만 어떤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배제한다. 이 방법은 우리의 자아가 분명하게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 첫 번째는 꿈에서 출발하는 방법이다. 꿈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 그 꿈을 기억하는 대로 적어 내려간다. 이 방법은 특히 꿈을 꾸다가 어떤 상황이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깨어난 경우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꿈의 내용이 중간에 중단되는 이유는 무의식이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적극적 상상을 해서 그 꿈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언가에 쫓겨 계속 도망을 가고 있는 도중에 꿈이 끝나고 잠에서 깨어났다면, 적극적 상상을 통해 그 꿈속으로 돌아가서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용기를 내어 추적자를 대면하고 승부를 겨루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이야기로 끝을 맺을 수 있다. 

- 두 번째 방법은 환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득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자면서 꿈을 꾸는 것은 무의식의 내용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끊임없이 상징이나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의도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예를 들어 문득 집에 도둑이 침입하거나 어떤 재난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강렬한 성적 환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한 감정이나 환상을 취해서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해보자.  

 

- 세 번째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우리가 매일 마음속으로 하는 독백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사실 많은 시간 우리 자신과 토론을 하면서 보낸다. 어떤 문제로 갈등을 느낄 때 잠시 멈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내면에서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다투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내면의 대화는 종종 마치 법정에서 열리는 재판 과정과도 같은 양상을 띤다. 어떤 비판적인 목소리가 우리를 추궁하면서 죄를 물을 뿐 아니라 유죄 판결까지 내리려고 한다. 그 목소리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으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불쑥 들어오는데, 여자 안에서는 보통 남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고 남자 안에서는 여성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 목소리가 비난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기분이 우울해지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열등감에 빠진다. 자칫 방심해서 그 목소리와 동화되어 버리면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목소리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구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다.  

 

-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적극적 상상을 시작할 때는 머릿속에 좀처럼 떠나려고 하지 않는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 것으로 출발한다. 글로 적는 것은 듣고 있는 목소리를 인격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목소리를 예를 들어 '검사', '점수 기록원', '구경꾼', '외로운 여자' 등으로 인격화해 보자. 물론 그 목소리가 이야기하는 내용과 부합하는 인격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인격화된 목소리와 나누는 대화를 종이 위에 글로 옮기면 좀 더 분명하게 그 목소리에 답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입장을 주장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결국 그 목소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이야기는 사실 근거가 없으며,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일반적인 통념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손에 펜을 들고 글을 쓰는 행동은 우리의 자아를 강화하고 의식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파괴적인 힘에 당당하게 맞서는 힘이 생긴다. 어둠 속에 숨어서 움직이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서 함부로 날뛰는 내면의 적에게 조목조목 반격을 가할 수 있다. 

 

- 그 목소리는 또한 우리에게 깨달음과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를 비난하고 의지를 무참하게 밟아버리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있다면, 빛나는 지혜와 영감을 주는 긍정적인 목소리가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목소리를 '스피리투스 파밀리아리스 spiritus familiaris', '집 귀신'이라고 불렀고 소크라테스는 '다이몬 daimon'이라고 불렀는데, 부정적 의미의 '악마'가 아니라 '천재성' 또는 '영감'을 의미했다. 종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수호천사나 성령이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러한 긍정적 심혼을 우리의 자기가 인격화된 존재에 비유할 수 있다. 자기라는 우리 내면의 심혼과 관계를 맺는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무의식의 지혜에 접근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적극적 상상을 글로 쓰라고 하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글로 쓰면 현실감이 생길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속이지 못한다. 이를테면, 불쾌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슬그머니 그것을 피해 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따금 다시 읽어보면서 기억을 새롭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극적 상상을 할 당시에 생각지 못했던 것을 나중에 깨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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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예로, 어떤 이성에게 왠지 모를 끌림을 느낀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우리를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신비스러운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아니마를 투사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아니무스를 투사한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긍정적인 아니마를 투사하면 그 여자는 그에게 행복과 은총을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여신이자 에로틱한 환상과 성적 갈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그 여자와 함께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것처럼 느낀다. 이때 그 여자의 본모습은 남자의 무의식이 선망하는 이상적인 여신의 이미지에 의해 가려진다.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는 속담이 바로 이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 남자로부터 아니마의 투사를 받는 여자는 처음에는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뭔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이 투사한 아니마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때마다 못마땅해하거나 질투를 한다. 남자가 여자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자신이 투사한 아니마의 이미지를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자는 남자가 만들어놓은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또한 남자의 성적 접근이 사랑이 아닌 강박적인 행동으로 느껴져서 두려워진다. 남자는 성관계를 통해 잠시나마 여자와 하나가 되고자 하지만 여자는 심리적 갈등을 먼저 해결하기를 원한다. 이런 엇갈린 시도는 두 사람 사이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 그러다 보면 긍정적인 투사는 어느 날인가부터 부정적인 투사로 바뀐다. 여자에게 투사되던 긍정적인 아니마 대신 부정적인 아니마가 투사되면 남자는 여자가 하는 모든 행동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한때 여신처럼 고귀하게 여겨지던 여자는 이제 그를 괴롭히는 마녀가 된다. 이때 남자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여성적인 측면에서 비롯된다. 여자도 역시 남자에게 자신의 아니무스를 투사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긍정적 아니무스의 이미지를 투사하면 그 남자는 그 여자의 구원자이며 영웅이 된다. 여자는 그가 이상적인 연인이며 완벽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그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찾은 것처럼 느낀다. 이런 투사가 일어나면 여자의 눈에 남자가 실제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들 듯이 그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하게 된다. 하지만 여자가 아니무스를 투사하는 남자는 알고 보면 그다지 훌륭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기가 쉽다.  
 

- 그런 여자들을 일컬어서 '융의 부인들' 혹은 '발키리들'(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오딘 신의 12 신녀 - 옮긴이 주)이란 별명이 생겨나기도 했다. 융은 여자들이 자신에게 매혹되는 것을 아니무스가 투사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환영에 대한 세미나 2부 The Visions Seminars, Part 2>에서 그는 여자들로부터 아니무스의 투사를 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어떤 여자가 나에게 아니무스를 투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내 안에 시신이 들어 있는 무덤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시신은 아주 무겁기 짝이 없다. 결국 나는 온갖 해충이 득실거리는 무덤이 된다. 마치 애벌레의 몸에 말벌의 알들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 알들은 부화를 하면서 안에서부터 애벌레를 파먹기 시작한다. 아주 징그럽고 께름칙한 느낌이다.' 

 

- 여자로부터 아니무스의 투사를 받는 남자, 또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아니마의 투사를 받는 여자는 자신에게 투사되는 이미지를 자신의 본모습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며 만일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투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에 갇혀서 더 이상 자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이처럼 투사를 통해 때로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때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석이 또 다른 자석과 만나서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물리치는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을 느끼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혐오감을 갖게 된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에게 은총을 내리기도 하고 파멸시키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투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 이러한 투사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무의식의 내용만이 투사가 되며, 일단 의식으로 들어온 내용은 투사가 될 수 없다. 즉,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으로 들어오면 투사는 중단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의식의 내용은 투사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의식과 만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투사를 인식하면 우리의 무의식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포함해서 우리 자신의 그림자 인격을 인식하는 것은 인격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다. 다른 사람에게서 보는 어두운 측면들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할 때 투사가 멈추어지면서 내면의 성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단지 '사랑에 빠진 느낌'에만 기초한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없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남녀가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허물없이 지내다 보면 얼마 안 가 상대방이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투사가 거두어져 환상에서 깨어나면 상대방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고 평범해 보인다. 그러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투사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매혹적인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사랑의 불꽃이 꺼져버린다.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로 갈등이 생기면 언제라도 부정적인 투사가 일어날 수 있다. 매력적이고 근사하게만 보이던 사람에게서 결함과 부족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때의 영웅이 이제는 실망감을 주고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괴물이 된다. 그래서 남녀는 종종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린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완벽한 행복감을 선사하는 또 다른 이성을 찾아 헤맬 것인가? 

 

- 낯선 사람과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남신과 여신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남신과 여신의 빛나고 고귀한 자태를 영원히 유지하지 못한다. 아름답기만 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철저하게 이기적인 심리 상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좋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짐짓 놀라면서 재빨리 떨쳐버리려고 할 것이다. 어떤 식의 생각을 하든지, 이것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하고 살면서 복잡하게 뒤얽힌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보상 심리이므로 각자 개인적으로 좀 더 성숙하고 독립적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 부부가 각자 개성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의지하지 않고 정신적인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개성이 충돌할 때는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두 사람이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면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관계를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인종, 종교, 교육 환경이 같은 사람들이 좀 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취미생활을 함께 하거나 공동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역시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거나 경제적 목표를 함께 달성하는 것도 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 된다. 버다 헤이슬러 Verda Heisler는 <결혼을 통한 개성화 Individuation through Marriage>라는 논문에서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부분의 적고 많음에 따라 관계가 얼마나 견고해지거나 느슨해지는지를 단순하지만 분명한 그림으로 보여준다. 

- 키르케와 세이렌은 남자들의 내면에서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쾌락이나 음악으로 남자들을 유혹해서 무의식 상태에 빠트린다. 그리고 유혹에 넘어가서 무력해진 남자들을 인정사정없이 파괴한다.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든 것이나 세이렌이 남자들의 몸을 갈가리 찢는 것은 아니마의 치명적인 힘이 남자의 의식을 파괴하고 무의식 상태로 빠져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오디세우스가 키르케를 물리치고 선원들을 마법에서 풀려나게 한 것이나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위험성에 대해 알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는 환상이 떠오른다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메시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는 무엇보다 먼저 현재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랑에 수동적인 남자들은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감정과 관계의 측면에서 미성숙한 어른 아이인 채로 남아 아내를 연인이 아닌 어머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남자의 마음속에서는 아니마가 온갖 종류의 환상을 불러와서 동요를 일으킨다. 이것은 그의 아니마가 그에게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불만을 표시하는 방법일지 모른다. 또는, 배우자와 사랑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자신을 속이고 있다면,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켜서 결혼 관계를 좀 더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외도 사실이 드러나서 찾아오는 부부들을 상담해 보면 종종 그들이 결혼생활에서 느끼는 만족이나 불만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성적 환상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 작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그러한 환상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성욕은 육체적 긴장을 해소하고 신체 접촉을 통해 친밀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타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정신적 심리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의 성적 환상 속에 나타나는 여자의 이미지는 그의 잃어버린 반쪽, 그가 완전해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인격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 따라서 성적 환상이 일어날 때는 그 배경에 의식과 연결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의식은 온전한 개성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을 열정적인 에로스로 표현한다. 우리 내면의 인격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에로스의 강력한 힘만이 그 모두를 하나로 합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 환상은 우리의 자아의식에게 온전한 인격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성적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환상에 휘말리거나 집착하는 상태에서 자유로워지고 의식의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동성애자에 대해 학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이야기로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전설에 의하면, 소년이 사춘기가 되면 달이 한 손에는 활과 화살을 다른 손에는 여자의 질빵(짐을 넣어 어깨에 걸어서 메는 주머니 옮긴 이 주)을 들고 나타나 내민다고 한다. 만일 소년이 활과 화살에 손을 뻗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달은 소년에게 질빵을 건네준다. 그러면 그 소년은 베르다쉬가 된다. 융 심리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소년이 자신을 활과 화살로 상징되는 남성성과 동화하지 못하면 아니마의 손안에 떨어지는 것이다. 베르다쉬는 특별한 옷을 입고 부족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한다. 중매쟁이 역할을 하거나, 전투에 참가하는 대신 전사들을 따라다니며 부상자를 치료하기도 한다. 베르다쉬의 존재는 인디언 사회에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을 비웃거나 경시하는 일은 없었으며 단지 특별한 유형의 남자들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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