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오쇼 / 박형진
출판 : 젠토피아
출간 : 2017.09.25
홍신자 씨의 <아주 오래된 선물>을 읽고 나서 오쇼에 관한 책도 한 권쯤 읽고 싶어져 선택했다. 라디오의 등의 매체에서 질답 형식으로 진행된 오쇼의 답변과 강연을 정리한 책으로, 명상에 관한 방법도 몇 가지 소개하고 있지만 실천 수행법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만큼 -혹은 그 이상- 중요하다고 말한다. 삶은 길게는 몇십 년의 이르는 시간동안 이어지지만 죽음은 단 한 순간의 찰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무리를 제대로 맺지 못하면 우리는 긴 시간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티베트 <사자의 서>와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는데 '완전한 죽음'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죽어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소멸과 합일에 대해 때로는 모순되게, 때로는 명료하게 이야기했다.
외면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언젠가 확실하게 맞을 것이라면- 거기에만 얽매여 집착하는 태도도 문제가 되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모른 체 하는 태도도 좋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 읽은 저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 고정된 영원이 있건, 계절의 순환처럼 순환하건, 그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의 전체로서 탈하건 모든 종교는 죽음과 그 이후를 말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종교를 가진 이는 죽음을 접하는 때에 웃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최소한 그가 정말 좋은 곳으로 갔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아쉬움과 슬픔보다는 그의 평안을 위해 기뻐하고 축복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얄팍한 생각.
산 자 중에서는 이번 생에 죽어본 자는 없으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 따라서 대면의 순간 누구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해서 사는 동안 조금씩 친숙해져 둠으로써 그 당황과 공포를 조금이라도 덜어두고자 하는 정도-혹은 그 이상-로써 충분히 의미가 있는 담론이라 생각한다.
- 외부에서 빌려온 믿음들로 자신을 채우지 않고 스스로 계속 찾고 탐구하다 보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는 절대로 믿지 않는 불신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명심하라. 믿음과 불신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대가 이미 믿게 되었을 때, 그렇게 자신과 타인을 모두 기만했을 때에만 불신이 생겨난다. 믿음이 이미 자리를 잡았을 때에만 불신이 생겨난다. 불신은 곧 믿음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 그대는 성취하지도 못하고 깨어있지도 못하고 지혜도 얻지 못한 채로 죽어가고 있다. 그저 나이를 먹은 채로 죽는다. 지혜를 얻은 깨달은 존재는 죽음도 진정으로 죽는다. 이것이 바로 카비르가 말한 죽음의 예술이다. 그러나 그대는 타인의 도움을 외치며 의사와 약에 의존하며 무력한 상태에서 죽는다.
-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사라진다. 물질적인 부분은 사라지지만 비물질적인 부분, 즉 마음이라는 부분은 하나의 진동으로 남는다. 그 진동이 방출되고 송출된다. 이제 이 진동은 적절한 준비가 되어있는 자궁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어떤 자기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에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실질적인 것은 사라질 필요가 없다. 에너지의 전이만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에고의 자루가 또다시 도약한다는 점이다.
- 시간이 죽음이고 죽음이 시간이다. 죽음을 더 많이 의식할수록 시간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하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해 덜 의식하게 되면 시간에 대해서도 덜 의식하게 된다.
- 그럼 자신의 삶을 살라. 매 순간이 영원함으로 전환되도록 완전한 자유 속에서 강렬한 삶을 살라. 한 순간을 강렬하게 산다면, 그 순간은 영원함으로 전환된다. 순간을 강렬하게 살면 수평적인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수직적인 삶으로 움직여가게 된다.
- 거기엔 춤의 속성이 있다.
- 선택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무선택으로 머무는 것이 바로 선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천국과 지옥, 삶과 죽음, 낮과 밤, 여름과 겨울처럼 만물을 있는 그대로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선은 선택의 철학이 아니다. 선은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선택을 하게 되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늘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잘 살펴보라. 뭔가를 선택하게 되면 그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계속 붙잡혀있게 된다. 선택받지 않은 것은 거부되고 억압되기 때문이다. 선택받지 않은 것은 복수를 열망하게 된다. 어느 날 느슨해진 틈을 타서 준비를 하고 있던 그 부분이 복수심으로 폭발할 것이다.
- "나는 하루 종일 움직이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물결 위에 계속 출렁이는 달과 같다." 물결은 계속 출렁인다. 나는 하루 종일 움직이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 주변에 늘 큰 움직임이 일어나지만, 자기 자신의 중심-태풍의 눈-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고통이나 쾌락, 행복이나 불행,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 그대는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다. 그것은 늘 똑같다! 그것은 늘 같은 상태이다. 그 맛도 늘 똑같다. 그것은 영원하다.
- 오쇼는 자신의 일에 대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새로운 인류를 '조르바 붓다 Zorba the Buddha'로 규정했는데, 이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세속적인 기쁨과 고타마 붓다의 평온함이 조화를 이룬 인간상을 말한다.
- "아닙니다. 이 상황을 보니 더 확신이 듭니다. 저 때문에 슬퍼하지 마소서. 저는 온전히 깨어있는 상태로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제 아버지가 백 년의 삶에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면 여기에 더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아흔아홉 명의 형제들을 보니 아무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시간을 낭비해야 하나요? 저는 적어도 아버지 부탁을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백 년을 더 누리도록 해주소서.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을 보니 한 가지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 년을 살아도 만족하지 못할 거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 떠나나 90년 뒤에 떠나나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저를 데려가 주소서."
- 왕자가 산야신을 보게 되면 이렇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왜 그는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그는 주변에 그토록 무심하고 동떨어져 보이는 것인가? 그의 눈빛, 그의 분위기, 그의 모습은 보통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러면 세상을 등지는 문제, 결국 죽음의 문제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일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무도 회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죽어서 장례 행렬이 지나가면, 엄마는 아이를 집에 불러들이고 문을 닫아버린다.
- 서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닦고 치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메이크업을 해준다. 이런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 생겨났다.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얼굴에 화장을 해서 뺨에 붉은빛이 돌고 얼굴에서는 광채가 난다. 아주 고요한 공간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리뷰자 주 : 케이틀린 도티는 오쇼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화장하는 것을 보기 위해 화장터에 취업했던 것은 붓다의 3개월 간 화장하는 시신을 바라보라는 말을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죽음이 축제가 되기를 원했었다는 발언에서도 연관성이 보인다.)
- 나의 가르침은 이렇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뭔가를 믿으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의심이 생기면 그저 의심을 품어라! 그것을 숨길 필요가 전혀 없다. 사실 의심을 수용하고 의심이 더 큰 탐구가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의심을 수많은 질문으로 전환하라. 그러면 결국 질문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물음표를 붙이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의심은 믿음을 찾는 일이 아니다. 의심이란 신비로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헤아리려는 끈질긴 노력을 의미한다.
- 삶의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죽음이 왔을 때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는 곧 속세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쓸모없는 짐을 모두 내려놓게 될 것이다. 이 유치한 장난감을 모두 던져버릴 수 있게 되리라. 이제 그런 사람은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그런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날 자격이 주어진다.
- 그러나 붓다는 영혼은 없으며 단지 연속성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저녁에 초에 불을 붙였을 때와 아침에 그 촛불을 껐을 때 그대에게 질문을 묻는 것과 같다. 과연 그대는 저녁에 피웠던 똑같은 촛불을 아침에 끄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촛불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속성은 있다. 밤에 초에 불을 붙였을 때 그 불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불꽃은 계속해서 사라진다. 그것은 다른 불꽃으로 계속 대체된다. 그 대체 간격이 너무 짧아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복잡한 실험기계로는 그 간격을 관찰할 수 있다. 하나의 불꽃이 꺼지면 다른 불꽃이 피어나고 계속 그 과정이 이어진다. 간격이 매우 짧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그 간격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리뷰자 주 : 무엇이 불꽃이고 무엇이 초인가. 그리고 매 순간 점멸하는 불꽃과 연속성으로 이어지는 '불꽃'은 무엇인가.)
- 그렇다면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은 점점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잠에 빠져들지 않고 주의를 깊게 기울이면서도 생각이 없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면 모든 것이 명쾌해진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생각들'의 부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들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따로 분리된 실존적 존재가 아니다.
- 사랑을 할 때엔 깊게 사랑하라. 그러면 시간은 사라진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신의 연인이나 친한 벗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음악을 깊게 사랑하면 시간이 멈춘다. 미적인 감각이 있어서 장미꽃을 깊게 바라보다 보면 시간은 사라진다.
- 물방울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순간에 녹아들어라. 사소한 일들이다. 집안 청소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옷을 빨고 아침 산책을 가는 일을 모두 전체적으로 행하라. 그러면 다른 어떤 명상도 필요가 없다.
- 내가 그대의 죽음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대의 평생을 전기문으로 기록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대의 모든 삶이 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번개가 치듯 스치는 바로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그대는 모든 것을 드러낸다. 인색한 사람은 주먹을 꽉 쥔 상태로 죽는다. 죽고 싶지 않아서, 편히 쉬고 싶지 않아서 여전히 삶에 매달리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애정이 넘치는 사람은 주먹을 편 상태로 죽는다. 자신이 삶을 나눴듯이 죽음이라는 황홀경을 나누고자 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완전히 깨인 상태, 온전한 자각의 상태로 살아왔는지를 그 사람의 얼굴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랬다면 그의 얼굴에는 밝은 빛이 맴돌 것이다. 그의 몸 주변에는 오라 aura가 있을 것이다.
-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명상이다. 그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 외에 다른 모든 두려움도 사라진다. 그런 두려움은 뿌리로부터 멀리 뻗어 나와 있지만 여전히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곁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가장 강력한 폭풍에 맞서며 호탕하게 웃는 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이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 한 가지만 이해하라. 내가 해방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대가 뭐든지 바꿔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라고 느끼던지 간에 그것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라는 뜻이다. 자신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파이터가 되어라. 그런 전체성을 통해서 그대는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전체성을 던진 것에 대한 보답이다. 그대는 일부러 뭔가를 할 필요가 없다. 보답은 저절로 올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랑스럽다고 느끼는 일에 전념하라. 그 안으로 완전히 빠져들어라. 분열을 만들지 말라. 50대 50으로 구분하지 말라.
-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육체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는 자신이 육체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대의 속성은 달라진다. 육체의 안쪽에 있지만 육체가 아니다. 육체의 내면에 있지만 육체의 존재가 아니다. 이것이 이 명상법의 첫 번째 핵심이다. 그다음 그대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자신의 육체,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대는 자신의 마음 안으로 깊게 들어간다. 내면에는 아홉 개의 층이 존재하며, 이제 무의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그러니 명심하라. 그대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부모, 친지, 친구들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이 죽어갈 때면, 이 두 가지에 눈을 뜨게 도와주어라. 첫 번째, 그들은 물리적인 육체가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것에 쉽게 눈을 뜰 수 있다. 두 번째는 약간 어렵지만 첫 번째 단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두 번째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가 두 번째 육체가 아니며, 두 육체 모두를 초월한다는 자각이다. 그는 순수한 자유, 순수한 자각의 존재이다. 그가 두 번째 단계를 거쳤다면, 그대는 그 사람 주변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요한 침묵이 아니라 더 생기가 넘치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는 기적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슬퍼해야 할 이 죽음의 시간이 축제의 순간으로 바뀐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고 압도될 것이다.
- 그가 두 번째 단계를 밟았다면 그의 죽음은 마지막 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티베트의 경전에서는 그것을 '위대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제 그는 다른 감옥의 형태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람이 죽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대가 수용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열린 상태라면 그대의 에너지도 상승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여러 요인에 달려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지, 그가 어떤 에너지를 가졌었는지. 그가 분노와 폭력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문을 닫는 게 좋다. 그의 억눌렸던 분노와 폭력성이 방출되어서 그대에게 들어오는 모든 에너지로 불필요하게 고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대는 그 사람 옆에서 당연히 조용해진다. 아무도 소란을 피우거나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충격에 빠뜨리는 신비한 현상이다.
- 동양에서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미리 선포해서 마지막 선물인 그의 에너지를 제자들이 나눠가질 수 있게 한다. 그는 자기 사람들, 즉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준 제자들 틈에서 죽고 싶어 한다. 그는 평생 간직해 온 보물인 아름다운 느낌들을 제자들에게 뿌려준다. 죽어가는 사람, 혹은 죽은 사람을 깊게 주시하라.
- 이 우화는 사람이 평생 모아 온 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발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너지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떤 형태를 갖는지는 그 사람, 그의 인격, 평생 그가 해왔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
- 그래서 인도의 3대 종교인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는 죽은 사람의 육체를 가능한 한 빨리 화장해서 사람들에게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들을 퍼뜨리지 않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추한 것들을 억누르고 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오직 성자들만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유일한 예외이다. 성자들의 시신은 특정한 묘지에 묻어서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게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시신은 최대한 빨리 화장된다.
- 에너지는 물이 그렇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위로 향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명심하라. 에너지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교환될 수 있다 그 사람이 사악한 성격을 가졌다면 그를 피하는 게 낫다. 그대는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 그와 반대로 그가 그대를 돕게 될 것이다. 다만 그 도움이라는 것은 그대의 가슴과 존재에 악의 씨앗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를 피하는 게 낫다. 그러나 그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한 사람이라면 기본적인 것은 그대가 그를 사랑하고 그에 대한 연민이 있을 때 그대의 에너지를 그에게 쏟아부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지막 기회이다. 그에게 선물을 안겨줄 또 다른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나은 선물은 있을 수 없다. 이 선물이 그에게 앞으로의 여정을 바꾸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고요함과 평화로움 속에서 죽는다면, 더 나은 삶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주의를 깊게 기울여야 한다. 명상을 하더라도 히틀러와 같은 사람을 도와주면 안 된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를 뛰어넘는 일이다. 그대는 그런 사람에게 에너지를 줄 수 없다. 그가 그대에게 에너지를 주게 될 것이다. 그대가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더 쉬워질 것이다.
-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대가 과연 어떤 도움이 될 만한 것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모른다. 그러므로 차라리 무지함 속에 머물러라. 거짓된 지식, 남에게서 빌려온 지식을 끌어들이지 말라. 죽음이 오면 그것과 함께 하라. 존재 전체로서 죽음을 직면하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 생각하게 되면 그대는 그 상황을 회피하게 되고 그곳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생각하지 말라. 죽음과 함께 존재하라.
- 삶은 매우 불확실하고 우발적이다. 사실 누구나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따라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걱정하지 말라. '왜'라는 것은 없다. '왜?'라는 질문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답변은 신비로운 것을 합리화하려는 위로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합리화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 누구를 위로하는 문제에 관심이 없다. 이러한 위로는 위험한 장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완충제 뒤에 숨기는 일에 불과하다.
-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구도를 시작할 수 있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누가 삶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어떤 만족이 있고 일들이 진행되고 꽃들이 피어나고 삶에서 성공을 거두고 삶이 야망과 성취로 가득 채워진다면 누가 진리와 신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삶에 대한 이런 공허함만이 진정으로 인간을 신리를 향한 구도의 길로 이끈다. 죽음도 초월하는 진라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
- 그러면 아이는 스스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답변을 탐구할 것이다. 절대로 답변을 해주지 말라. 그것이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실천해온 가장 큰 재앙이자 가장 위험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답변을 해줄 때 매우 거만한 태도를 취한다. 겸손함을 모두 내던져버린다. 우리는 삶이 미지의 상태라는 것을 망각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지만, 삶은 여전히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지만, 그것은 아직도 미지의 상태로 머물러있다. 삶의 '아무도 알 수 없는' 면모는 삶의 가장 근원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아왔지만, 삶의 그런 미지의 속성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인간의 지식은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고 오늘날 많은 것이 알려졌다. 수많은 논문과 책들이 인간의 지식에 덧붙여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근원적인 것은 여전히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 그 근원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고 무기력해진다. 따라서 아이가 삶의 그러한 신비를 더욱더 많이 느끼게 도와주어라.
- 자신에게 물어보라. 아픈 사람은 누구인가?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늙은 사람은 누구인가? 계속 질문을 던져라. 그러면 점차 그대는 '아파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늙은 사람은 내가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명심하라. 이러한 발견은 남에 의해 주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답변을 얻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어디선가 들어봤고 경전에서 읽어봤고 수많은 스승들로부터 들어봤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이미 안다고 여긴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답변을 끌어내서는 안 된다. 그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속으로 계속 질문을 웅얼거려라.
- 그리고 서둘러 답을 찾지 말라. 그런 답은 틀리기 마련이다. 영리하게 머리를 굴려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맞다. 나는 영혼이다. 이것은 육체이고 가짜이다." 그런 대답이 자기 내면으로부터 저절로 나오게 하라. 기억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실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것은 말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통찰로서 나와야 한다. 그것은 사토리, 일별, 자각으로써 나와야 한다. 그 차이를 알겠는가? 기억으로부터 뭔가가 나오면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된다. 나는 그대가 자신의 두통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내일 그대는 다시 시도해볼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누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라. 기억으로부터 답변이 나올 것이다. "너는 고통스럽지 않다. 너는 주시자이며 초월의 영혼이다." 그것을 조심하라. 그것은 기억으로부터 나온 답변이다.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 당장 던져버려라!
- "마음의 정수는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라. 그 이상은 필요 없다. 아무것도 갈구하지 말라. 끝이 없는 그대의 끝은 푸른 하늘에 눈꽃이 녹아 사라지는 것과 같다." 걱정할 건 하나도 없다. 그대는 푸른 하늘에 눈꽃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죽는 게 아니라 그저 사라진다. 그렇다. 그대는 한 개인의 형태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 형태는 무형의 것으로 사라실 것이다. 눈꽃이 푸른 하늘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대는 그곳에서 더 많은 게 될 것이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사라질 때, 강물이 죽는 게 아니다. 강은 바다가 되어 더 크고 넓고 거대하고 영원한 존재가 된다.
- 명심하라. '삶'은 명사가 아니다. '죽음'도 명사가 아니다. '삶과'죽음'은 모두 동사이다.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삶과 죽음 모두 하나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밟는 주체는 누구인가? 두 개의 바퀴를 지닌 이 수레를 움직이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순례자는 누구인가? 여러 형태를 거쳐 여행하고 있는 이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그 본질적인 마음, 그 무심의 속성, 거울과 같은 그런 속성, 그런 주시를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발견해야 한다. 삶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그 질문, 그 구도를 위해 바쳐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대는 많은 돈과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지만, 결국 그대는 아무런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거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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