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최준식
출판 : 모시는사람들
출간 : 2013.06.15
왜 사는 것일까를 고민하게 되면 죽는 것은 무엇일까 역시 생각하게 된다.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제목이라 읽어 보았는데, 주제 자체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에 관한 내용이다. 해서 -늘상 그러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개인적인 단상들을 남기는 정도로 마무리하려 한다.
개인적으로 카르마는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A라는 것을 체험하고 싶어졌다면 규칙 내에서의 이원성이 존재해야 한다. A가 있기 위해서는 A가 아님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A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이 공통의 목적이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당하는 경험도 겪는다. 양자의 입장을 모두 체험하여 A라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에 관한 체험은 더이상 필요해지지 않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면 체험은 반복된다. 0가 +/-로 나뉘어지는 것처럼, A를 행하는 것과 당하는 것은 사실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그것을 체감하는 '의식'에게만 시간이 느껴질 뿐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선업 또한 업이므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려면 결국 모든 업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지점까지 생각이 흐른다. 어쩌면 보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업의 고리를 돌리고 있는 이들은 아닐까.
그렇다면 경험에는 선행도 악행도 없는가? 정확하게는 그 경험에 따르는 '감정'과 '의도'가 남는 게 아닐까 싶다. 같은 진동수에 있는 영들끼리는 정상인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묘사처럼, 선과 악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결정된다.
그럼에도 생에 충실하고 윤리를 준수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해하지 못한 것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험을 통해 이해한 다음 자신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방향을 선택해 나아가는 것과, 그렇게 이해한 것들을 내려놓고 초월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모르는 것은 애초에 포기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세계 종교의 교리들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들은 그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와 사랑하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 듯 하다. 언젠가는 '악'이라는 개념조차 흐려지고 '나라면 선택하지 않을 것들'이 되어 잊혀졌으면.
고통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해본다.
- 영계는 어떤 면에서는 물질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법칙이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이다. 그런데 만일 그 법칙을 잘 모르고 있으면 그곳에 있는 동안 계속 헤매다 카르마(Karma)에 견인되어 시간이 되면 그냥 환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영계에서의 생활을 헛되이 보낸 것이 된다. 우리는 지상에서 물질의 옷을 입고 있을 때에도 할 일이 있지만 육신을 벗고 영혼 상태가 되었을 때도 할 일이 있다. 그런데 워낙 영의 세계에 무지하니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아까운 생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 시행착오를 줄여 보자는 것이다. 지상에서도 계속 배워 자신의 지력을 끌어올려야 하듯이 영계에서도 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영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알고 가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마치 먼 곳으로 여행을 갈 때 준비를 잘하고 가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이 말이다. 이런 생각들은 이번에 죽음의 미래를 가지고 수개월을 강의하면서 들었던 것들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영계에 대한 좀 더 명료한 인식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이다.
- 색깔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빛의 세계를 묘사하려고 하니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빛에 비해 칙칙하기 이를 데 없는 색깔의 언어로는 차원을 달리 하는 빛의 세계를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빛의 세계에 압도되어 황홀감을 느끼게 되고 육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까지의 삶의 행태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누구나 이런 황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살아생전에 나쁜 짓을 많이 해 마음에 공포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못한다. 대신에 그들은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 내 스스로 창조한 악령들에게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상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나타난 주관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 점이 지상과 명확하게 다르다. 지상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외계가 펼쳐지지만 영계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타난다. 이것은 앞에서 본 대로 영계가 진동으로만 구성된 에너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영계에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주체들의 에너지 진동이 맞아떨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영혼의 진급 정도가 비슷해 그 진동수가 일치해야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그 소원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것이 이곳의 법칙이다.
- 영계에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처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직전에 어떤 생을 살았는가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안내령이나 빛의 존재의 도움을 받든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하든지 직전 생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자기가 생전에 갖고 있는 흑심이나 행했던 악행을 아무리 감추려 해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한다. 자신이 행한 나쁜 일은 물론 속마음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 이렇게 점검해 보면 이때 확실한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몸을 벗고 또 다른 세상인 영계로 들어올 때에 갖고 오는 것은 생전에 행한 모든 것, 즉 업보뿐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이나 자신이 이룩해 놓은 일, 명예 등은 죽으면서 모두 지상에 남겨두지만 자신이 그 일을 했을 때의 동기, 즉 그때의 마음가짐은 영혼 안에 저장되어 같이 온다는 사실을 바로 이곳에서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 이번 장의 제목은 다소 의외일 것이다. 본인이 죽어 영계에 왔는데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니 말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의외로 많은 영혼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에서 시행착오를 범한다고 한다. 그곳에서 공연히 헤매지 않으려면 영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
- 이와 같이 우리는 영계에서도 지상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지만 그 환경은 사실 물질계와는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영계의 환경은 지상 물질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영혼이 사념(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어떤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내 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지상에 살던 집을 생각하면 그 집이 내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고 지상에서 알던 사람을 생각하면 그 모습이 내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믿기 어렵지만 영계는 이런 원리로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원리를 모르는 영혼은 자신이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낸다는 것이다. 직전 생을 살았던 지상에서 하던 생각을 하면 지상에서와 똑같은 삶이 그대로 내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 이렇게 보면 영혼이 한정 없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상에서 보다 더 자유가 제약될 수도 있다. 영계에서 영혼들은 사념의 세계에만 갇혀있어서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영혼이 안내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자신의 인지 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곳은 마음을 낼 수 없으니 가 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지상에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곳이라도 '우연' 한 기회에 갈 수 있다. 미지의 세계나 사람을 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육신이 있기 때문에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환생하는 것은 영계에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이다.
- 영계에는 새로운 장소에 갈 수 없다는 제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파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같거나 매우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파동의 영혼들끼리만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영혼의 진급 정도가 비슷하고 유사한 흥미나 성향을 가진 영혼들끼리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영혼들이 서로에게 주파수를 맞추면 그 즉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만나고 싶은 영혼이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그 만남은 성사되지 않는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상 세계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상에서 배울 게 남아 있는 영혼에게는 이 지상이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이 사정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고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보겠지만 여기서 다룰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영혼에 대해서이다. 지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다시 말해 환생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영혼에 대해서는 이미 불교 교리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깨달은 성인에게도 등급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중에 아나함(범어로는 '아나가민')이라는 이름의 성인이 있는데 한자로는 불환(不還) 혹은 불래(不來)라고 한다. 그 뜻은 말 그대로 '지상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 용어로 하면 이 고통 많은(오죽하면 고통의 바다라고 했겠는가) 욕계(지상)에 더 이상 오지 않고 미세한 의식의 영역인 색계 혹은 무색계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 수도를 계속해 마지막 목표인 아라한(깨달은 이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이 아나함이다.
- 재미있는 것은 아나함 바로 밑 등급에 있는 사다함(범어로는 '사카다가미')이라는 성인이다. 사다함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신라의 화랑 중에 대가야를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이름이 바로 사다함이기 때문이다. 사다함은 원래 지상에 한 번만 더 환생하면 되는 성인을 말한다. 그래서 한자로는 일왕래(一往來)라고 한다. 이 등급에 속한 사람은 지상에 한 번만 더 오면 자신의 업보를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이 경지도 대단한 경지이다. 앞으로 몇 생을 더 거듭해서 환생을 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가 보면 영원히 오르지 못할 경지처럼 보인다.
-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하던 것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일정한 과제를 안고 태어난다. 이 과제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각각의 영혼이 어떤 사건을 겪든, 또 누구를 만나든 그것은 모두 그의 배움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영역에서 다음 생을 디자인할 때 자신은 결코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을 자기가 자유롭게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생애에서 겪는 사건은 대부분 자유의지가 아니라 카르마에 따라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기 생을 정할 때 누구나 좋은 환경에 태어나고 싶겠지만 업보를 탕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택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출생 환경이 형편없이 나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지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
- 여기서 다시 다스칼로스나 마르티누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에 따르면 카르마 법칙은 정점을 향한 영혼의 진화를 위해 존재한다. 이 정점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개개 영혼이 지혜와 사랑을 닦아 자아의 이기적인 욕망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식의 근원인 우주 의식과 하나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근본 목표는 무한히 먼 곳에 존재한다. 인류 역사에서 이곳에 도달한 사람은 붓다나 예수를 위시해서 지극히 적은 숫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이 우주(혹은 신적인 지성)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원래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카르마 혹은 업보에 대해 가장 잘못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벌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으니 이런 업보를 받지' 하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스칼로스 같은 사람은 명확하게 '인생에 벌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존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벌이 아니라 '경험' 뿐이라고 한다. 이는 대단히 탁월한 견해이다. 우주적 조정자 혹은 지성은 카르마라는 법칙을 통해 개개 영혼들이 진화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우주의 법칙을 깨달아 간다.
- 이 같은 카르마에 관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것은 카르마가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이니 그 의미를 알아내야 한다. 만일 사건의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몇 생을 두고 비슷한 사건이 계속될 터이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카르마를 벗어나면서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 여기까지 영계에 대해 열심히 천착해 왔지만 사실 이 책은 영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초점이 모여지기 때문이다. 현생의 삶은 죽음 너머의 삶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에 두 종류의 삶을 동시에 생각해보자고 한 것이다. 그래야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그런데 이리저리 에둘러 왔지만 결론은 상식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종교에서 제시한 대로 살면 된다. 우리가 이 생을 마치고 육신을 벗은 다음 영계로 가져가는 것은 딱 두 가지뿐이다. 이 두 가지를 불교 식으로 말하면 지혜와 자비이고 유대-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배움과 사랑이다(이슬람교도 같다). 이걸 딱 한 글자로 표현하면 '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업, 즉 카르마만 가지고 세상을 뜨는데, 좋은 업을 갖고 가기 위해서는 세계 종교가 가르친 대로 살면 된다.
-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게다. '사후 문제는 그때 가서 부딪혀도 늦지 않을 텐데 왜 벌써부터 알아야 하는가', '지금은 지상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게 더 합당한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이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물질계와 영계는 둘이 아니라서 어느 하나만 알면 충분한 지혜를 갖출 수 없다. 두 세계를 제대로 알아야 우리의 삶이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 사후 세계에 대해서 공부해 그곳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게 되면 지상에서의 삶이 바뀐다. 확실하게 알면 확실하게 바뀐다. 나중에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우리의 삶에는 카르마, 즉 업보의 법칙이 추호도 빈틈없이 작용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행복이 오든 불행이 닥치든 그것은 모두 자신이 행한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점을 바로 알면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나쁜 짓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나 자신에게도 유익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진리를 지상 세계의 삶에만 충실해서는 알기가 어렵다. 지상은 물질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반면 영계는 에너지 세계이기 때문에 그 반응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래서 금세 카르마가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다.
- 유럽에서 근사체험을 연구한 학자 알버트 하임(Allbert Heim, 1849~1937)에게서도 비슷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는 산에서 실족해서 조난당한 사람을 예로 들었다. 산을 오르던 사람이 실수로 산에서 미끄러지면서 추락하면 그 광경을 목격한 동료들은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는 등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동료가 죽게 되니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겠다. 그런데 정작 사고를 당한 사람은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사고가 진행되는 것을 겪는다고 한다. 물론 실족을 해서 떨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크게 놀라지만 목숨이 결정적으로 위태로워지는 아주 위중한 상태가 되면 금세 체념이 되면서 위에서 본 것 같은 편안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이 현상은 생리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기 직전이 되면 다량의 호르몬이 나온다고 한다. 이 호르몬은 뇌에서 나오는 엔도르핀으로서 모르핀처럼 마약 성분이 강해 진통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우리가 몸을 벗기 직전에 이 호르몬이 나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는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 좀 더 안정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자연의 배려로 생각된다.
- 그런데 많은 경우 노환으로 죽든 사고로 죽든 마지막에는 많은 유체적 고통을 겪는다. 그런 고통을 겪으면 영혼이 육신을 벗어날 때 좋지 않은 상태가 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영계에서의 첫 번째 상태는 이 세상에서 죽기 직전의 상태가 그대로 반영되므로, 어떤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근사체험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이 영계에서의 첫 번째 상태는 육신의 마지막 상태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몸을 벗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진즉에 붓다나 원불교의 교주인 소태산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일념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죽음 직전에 엔도르핀이 뇌에서 나오는 것은 이 마지막 일념을 편안하게 갖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영계를 들어설 때 좋은 마음으로 들어서야 제 갈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 법이다. 굳이 영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슨 일을 하든 첫 번째 상태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 이런 점에서 사후생에 대한 믿음을 갖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요할 뿐만 아니라 흔쾌히 맞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죽음을 맞이해 몸을 벗는 일이 얼마나 홀가분한 것인가를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비유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은 잠수복의 비유였다. 육신을 벗는다는 것은 잠수복을 벗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이 모든 것은 영계를 지상의 물질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잘못된 생각이다. 영계는 에너지의 공간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간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물질계와 영계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그런데 굳이 말한다면 물질계는 영계보다 차원이 낮기 때문에 차원이 높은 영계가 차원이 낮은 물질계를 감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쌍방통행은 되지 않고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차원이 높은 영계에서는 물질계를 관찰하고 교통 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사체험자들은 육신을 빠져나와 영혼의 상태가 되었을 때 물질계를 다 볼 수 있었지만 육신을 가진 물질계의 사람들은 그들의 영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물론 극소수의 예외도 있다).
- 지금까지 거론된 수많은 영계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영계는 1차 영역과 2차 영역, 두 개의 영역으로 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1차 영역은 우리가 영혼이 되어 도달하는 첫 번째 영역으로, 일종의 준비 단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직전의 전생을 정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습이다. 물론 예습도 필요하지만 복습을 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 행한 수많은 일들을 복습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에서 복습만 하는 것은 아니고 치유나 휴식도 같이 하게 된다.
- 영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영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어떤 지역에 처음으로 여행가게 될 때 그곳에 대한 전체 지도를 펼쳐 보는 것과 같다. 그래야 자신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그 전체 흐름을 알고 새로운 곳을 갈 때 생기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영계에 대해 밝혀 놓은 것을 보면 말하는 이마다 제각각인 것을 알 수 있다. 영계는 각자의 의식에 따라 그에 맞게 펼쳐지니 사람마다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게다가 각 종교마다, 각 문화권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다를 터이니 처음 영계에 대한 설명을 접한 사람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설명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이 우주가 33천으로 구성되었다'는 식으로 아주 복잡한 세계를 설파하고 있어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승려들도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 그런가 하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이 3층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약 경전 중 <고린도 후서>에 나오는 바울의 체험에서도 나온다. 그가 탈혼해 3층의 하늘(3층천)에 갔다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근사(임사) 체험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향으로 생각되는데, 개신교 최고의 신비가인 스베덴보리는 천국(천계)도 3층으로 되어 있고 지옥(하계)도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다스칼로스나 마르티누스 역시 각기 층수는 다르지만 영계가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 이렇게 다양한 설 때문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지만 영계와 관련해 사람들이 가장 잘못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영계가 하늘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저 타계한 부모나 배우자, 혹은 자식을 생각할 때 하늘 높은 곳을 쳐다보며 그리워한다. 물론 영계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지만 영계가 물리적인 공간처럼 존재한다는 생각도 큰 오해이다.
-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1차 영역은 지상과 똑같다. 지상에서처럼 똑같은 (사념으로 만든) 육신을 가지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밥을 먹고, 포도주도 마신다. 만일 1차 영역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모른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이 뚱딴지처럼 들릴 것이다. 우리는 육신을 벗고 영으로만 된 세계에 갔는데 지상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하니 이해할 수없을 테지만 스베덴보리는 정확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분명 영계에 갔다 온 사람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스칼로스가 제시하는 예는 더 극적이다. 그의 친구 중에 한 사람인 노름꾼이 죽은 모양이다. 그런데 다스칼로스가 영체로 되어 가 보니 그 사람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여전히 지상에서 자신이 노름하던 더러운 찻집을 사념으로 만들어 놓고 노름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친구를 구해 주고자 그를 데리고 나와 멋진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국을 보여주면 그 노름방에서 나올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이리라. 그랬더니 그 노름꾼 친구는 '이런 곳은 너무 심심하다'고 하면서 다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노름방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 전생에 과수원을 하던 어떤 사람은 영계에 와서도 과수원을 만들어 놓고 비가 안 올까 걱정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영계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전생에서 하던 일의 습력(智力) 때문에 여전히 미망에 빠져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런 일이 지상에서는 가능하다. 지상은 물질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만날 때에 물질과 물질이 만나는 것이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두 사람이 만난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의 영혼의 진급 정도가 크게 차이가 난다 해도 물질이라는 육신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도 사람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뇌에 사뭇 다른 파동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해도 겉으로는 느낄 수 없으니 괜찮다는 것이다(물론 마음을 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계에서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절대로 붓다 같은 성인을 만날 수 없다. 에너지 파동의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인연만 닿는다면 붓다 같은 최고의 영혼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에게서 가르침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점 때문에 영계에서는 지상과 또 다른 일이 발생한다. 영계에서는 생각이 외부 환경에 즉시 영향을 줄 수 있는 반면 지상의 물질계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 역시 에너지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영계와 물질적인 지상계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영계에서는 자신의 생각으로 나무를 만들었다면 다시 생각을 달리함으로써 그 나무의 모습을 바꿀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한순간에 없앨 수도 있다. 이런 것이 지상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지상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변화를 가하는 힘이 너무 약하고 느려서 그것을 알아챌 수 없을 뿐이다. 물질은 대단히 강고한데 생각은 물질의 강고함을 흔들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영계에서는 동전을 자기가 만들고 생각으로 그것을 옮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지상에서는 생각으로 물질인 동전을 움직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동전을 옮기겠다고 생각했을 때 동전에 미치는 힘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염력이 발생하여 동전에 닿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 에너지로는 무거운 동전을 옮기는 일이 불가능하다 (지상에서 동전을 옮기려면 반드시 손으로 해야 한다).
- 그러면 어떻게 생각이 이와 같이 물질화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마르티누스는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영계에는 지상과는 다른 형태의 물질이 있다. 그는 이것을 영적 물질(spiritual matter)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아주 가볍고 일시적인 성질이 있다. 이 물질은 영혼이 어떤 생각을 갖고 집중하면 보이는데 그것은 이 물질이 영혼의 아주 작은 생각에도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소망하면 그것이 바로 나타난다. 그러다 집중한 생각을 거두면 곧 사라진다. 여기서 마르티누스는 물질이라는 말을 썼지만 에너지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원래 에너지와 물질은 같은 본질의 다른 양태 아닌가? 그래서 전자나 양자 같은 소립자 영역에서는 에너지 단위로 질량을 표시하는 것이다.
- 그래서 앞에서 마르티누스가 이 영역은 초물리적인 광선과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영역은 빛과 파동 혹은 에너지의 진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바로 이것들이 영혼의 생각이나 바람에 따라 명멸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혼이 자기가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의견도 일치한다. 영혼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지상에서와 같은 용모에 같은 주위 환경을 만들어 놓고 살고 있으면, 천사가 와서 '당신은 죽었으니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어서 영계의 삶을 준비하라'고 조언을 한다. 마르티누스는 이 영역을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 영역은 '개인의 심적 우주(personal mental universe)'이고 '습관적인 관념이나 생각(habitual conceptions and thoughts)'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갇히면 '마음의 감옥(mental prison)'이 된다. 다스칼로스의 예에 나오는 노름꾼이나 과수원 주인은 모두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에 갇혀 자신이 감옥에 있는 줄도 모르는 것이다(사실 영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지상에서도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 그러나 신비가들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는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스스로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다른 식으로 해결을 모색하거나, 또 뛰어난 영혼들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 영역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이 영역을 가급적 빨리 벗어나려면 객관적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원리를 잘 아는 영혼들은 이 영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다음 영역으로 간다는 것이다.
(리뷰자 주 : 자각몽 훈련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닐까?)
- 여기에 다스칼로스는 한술 더 뜬다. 본인과 같이 높은 수준의 영혼에게만 해당되겠지만 영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옥과 천당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 지닌 진동수를 더 끌어올리면 주위가 천당이 되고 반대로 끌어내리면 바로 지옥이 되기 때문이다. 진동수를 올리면 높은 진동수의 영혼을 만날 테니 천당이 되는 것이고 진동수를 끌어내리면 그와 유사한 저급한 영들과 조우하게 될 테니 그곳이 그대로 지옥이 된다. 그러니까 그가 직접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만 변할 뿐인 것이다.
- 그러나 영계에서는 자기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곳은 갈 수 없는 것처럼 생전에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영혼은 만날 수 없다. 아울러 자신과 진동수가 다른 영혼들 역시 만날 수 없다. 이 때문에 자신보다 저급한 영혼을 만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고급 영혼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이 고급령들이 자신의 진동수를 낮춰 우리들에게 맞춘다면 그들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러기 전에는 이들을 만날 수 없다.
- 그런데 지상은 다르다. 어느 누구도 인연만 닿는다면 붓다나 예수 같은 최고의 성인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최고의 영혼들은 영계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다. 그 진동수가 무한대이기 때문에 발광 정도를 가히 예측하기 힘들다. 이런 분들은 영계에서 우리의 탁한 에너지의 진동수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그 높은 진동수를 육체가 가려주기 때문에 그분들을 만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서 그분들을 직접 뵙고 그 가르침이나 에너지를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의 진화가 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이런 속도감을 영계에서는 느끼기 힘들다. 이런 상황을 통해 보면 우리는 지상계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지 알 수 있다(지상의 삶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더디게 전진할 수밖에 없다).
(리뷰자 주 : 천장도 바닥도 없이.)
- 그런데 이들의 얼굴을 보면, 죽은 시체처럼 검거나 불타고 있고 혹은 사마귀 같은 것이 나 있어 흉측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어떤 때는 얼굴은 아예 안 보이고 털이나 뼈, 이빨만 있어 괴물처럼 보이는데 말에는 분노 복수의 감정만 담겨 있다고 한다. 이런 묘사가 유치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것을 우리 내면에 있는 온갖 음흉하고 나쁜 생각이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보이는 것은 천국의 밝은 빛, 다시 말해 진동수가 빠른 빛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자기들끼리는 정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사정이 그러니까 그런 낮은 영혼들끼리 아무렇지도 않게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나쁜 얼굴을 가진 조폭들끼리는 아무 탈 없이 잘 사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지옥에 간 영혼들은 모두 그들이 자청해서 간 것이지 신 같은 외적인 존재가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기에게 맞는 곳을 찾다가 지옥에서 나오는 욕정과 증오의 기운을 느끼고 동조한 나머지 본인 스스로 그곳으로 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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