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에크하르트 톨레 / 류시화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08.07.29
읽는 동안 무척 즐거웠음에도 기이할 정도로 졸렸다. 몇 장을 읽고나면 잠시 멈춰 깬 잠을 자거나 쉬어야 했다.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소화해가며 읽기 위한 몸의 반응이었다고 위안해본다.
이 책은 거의 전체에 걸쳐 '내가 아닌 것'을 감각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에고'라는 것은 '나'로 착각하기 쉬운, 일종의 '생각'이며 '집착'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비교할 것, 동일시 할 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
저자는 이것을 감각하고 분리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경고한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착각일 뿐 아니라 고통의 씨앗들이라는 것이다. 고통체에 관한 부분이 무척 인상깊었는데,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 고통체가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먹이가 필요할 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쉽게 휩쓸릴 수 있겠다고 느꼈고, 실제로 그랬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상세히 구분해주었으면 했던 부분도 있다. 고통체와 주파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힘들고 부정적인 것들만이 강조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주체가 에고일 경우에는 긍정적이고 만족스러운 것들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사실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표현해야 하겠지만. 물론 책 전반에 걸쳐 이런 구분과 주의할 착각들을 알려주고 있으나 이 부분이 걸렸다. -라는 것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그리고 완전히 체화되는 것에 관해 생각한다.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서서 완전히 이해하는 단계까지 가려면 정말 한 번의 생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없는 주고받음을 통해서 -그러나 얼마나 수없어야 하는가?- 배우려고 해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있어야 '한 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 봐야겠다.
- 인류는 의식의 변화를 위한 준비가 되었는가? 식물이 꽃을 피운 것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것에 비하면 단지 창백한 그림자에 불과한 그런 근본적이고 심오한 변화를? 인간 존재는 조건 지어진 마음의 불투명성을 버리고 수정이나 보석처럼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올 만큼 투명해질 수 있는가?
-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즉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흥미로운 책이 아니다. 흥미롭다는 것은 당신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마음속에서 생각이나 관념들을 가지고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당신 자신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당신의 의식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책이다.
- 깨어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어 있지 않은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다. 곧 자신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에고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또한 그 깨어 있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도록 만드는, 집단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 책이 에고의 주된 특징들을 보여주고, 그것들이 집단과 개인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여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것은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 번째는, 에고의 밑바탕에 있는 마음의 근본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알아차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때 에고는 당신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도록 계속해서 속임수를 쓸 것이다. 이것은 당신인 것처럼 가장하는 허구의 존재인 에고가 당신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알아차림 자체가 깨어남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무의식을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이미 의식의 등장이고 깨어남이다. 어둠에 대항해 싸울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은 에고와 싸울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의식의 빛이다. 당신이 바로 그 빛이다.
- '나'라는 단어는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가장 큰 실수와 가장 깊은 진리를 나타낸다. 관습적인 사용법에서 '나'라는 단어는 '나를', '나의', '내 것', '나 자신' 등과 함께) 가장 자주 사용될 뿐 아니라 가장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이다. 나날의 정상적인 대화에서 '나'라는 단어는 하나의 근본적인 실수, 곧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 자기 존재에 대한 허구의 느낌을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에고이다. 시간과 공간의 실체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이 환영의 자아를 '의식이 일으키는 시각적인 환영'이라고 불렀다. 그 가공의 자아가 이후의 모든 해석의 기초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에 대한 모든 잘못되고 왜곡된 해석, 모든 생각과 반응과 관계의 기초가 된다. 당신이 살아가는 현실은 그 환영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반가운 소식은 이것이다. 당신이 환영을 환영으로 인식할 때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환영의 인식은 곧 환영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것의 생존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실체로 잘못 받아들이는 것에만 달려 있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알아차리는 순간, 진정으로 '나인 것' 이 모습을 나타낸다. 당신이 이 장과 다음 장을 주의 깊게 읽어 나갈 때 일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 반면에 동일시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은 구조적인 문제다. 그것이 에고의 마음이 기능하는 기본 방식 중 하나다. 역설적이게도, 이른바 소비 사회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외부의 사물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에고의 만족은 짧고, 더 많은 것을 찾고, 계속 사고 소비해 나간다. 물론 우리의 표면적인 자아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물질 차원에서는 사물들은 우리의 삶에 필수적이고 떨쳐 버릴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는 집, 옷, 가구, 도구와 연장, 교통시설 등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삶에는 그것들이 가진 본래의 아름다움과 양질의 특성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사물들의 세계를 경멸할 것이 아니라 존중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사물은 순수 존재를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형상을 초월한 한 '생명'에서 나온 일시적인 형상들이다. 모든 사물, 모든 육체, 모든 형상이 그 근원에서 나왔다. 고대 문화에서는 세상 만물, 심지어 무생물이라 불리는 것들까지도 그 안에 영이 내재해 있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마음속 추상적인 관념들에 의해 무뎌진 세상을 살아갈 때, 더 이상 우주의 생동감을 느낄 수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실체 속에서 살지 않고 관념 속 세계에서 살아간다.
-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아를 크게 할 수단으로 사물들을 사용한다면, 다시 말해 그것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그 사물들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에고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끊임없이 사물과의 동일시를 추구하는 에고는 사물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사로잡힘을 낳으며, 이것이 다시 우리의 소비 사회와 경제 구조를 탄생시킨다. 이곳에서는 발전의 유일한 척도가 언제나 더 많이'이다. 더 많은 것과 끝없는 성장을 원하는 이 점검되지 않은 추구는 하나의 기능장애이고 병이다. 그것은 암에 걸린 세포가 나타내는 것과 똑같은 기능장애이다. 암세포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을 증식시키는 일이다. 결국 자신이 일부이기도 한 그 유기체를 파괴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어떤 경제 전문가들은 성장의 개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경기 후퇴마저도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부른다.
- 당신은 상대방에 대한 마음속 이미지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마음속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현재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따라서 '본래의 나'가 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전혀 아니라, 당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당신이 생각하는 상대방과 관계 맺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만든 관념적인 이미지가 자신이 창조해 낸 상대방에 대한 관념적인 이미지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 또한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마음 역시 아마도 같은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에고에 바탕을 둔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실제로는 마음이 만들어 낸 네 개의 관념 속 모습들의 관계이다. 그것들은 결국에는 허구에 불과한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 속에 그토록 많은 갈등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관계는 사라지고 없다.
- 에고는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 생각이 당신을 더 많이 고통스럽게 한다. 그것은 진리의 왜곡이다.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이다. 진리는 고통을 초월하려면 먼저 고통에게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 보통은 생각이 앞서고 감정이 뒤따르는 반면에 고통체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거꾸로 된 방식이다. 고통체로부터 나온 감정이 재빨리 당신의 생각을 통제하며, 그 고통체에 의해 일단 마음이 점령당하면 당신의 생각은 부정적이 된다. 당신의 머릿속 목소리는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삶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또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도록 도울 것이다.
- 고통체가 일어날 때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때마다 고통체의 부정적인 감정 에너지의 일부는 그대로 불태워져 현존의 에너지로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고통계의 먼지는 서둘러 철수해 다시 일어날 더 좋은 기회를, 즉 당신의 의식이 덜 깨어 있는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 고통체에게 일어날 더 좋은 기회는 아마도 당신이 술 몇 잔을 마신 후나 폭력적인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처럼 당신이 현존을 잃어버릴 때일 것이다. 짜증과 걱정 같은 사소한 부정적인 감정도 고통체가 되돌아올 수 있는 현관문이 될 수 있다. 고통체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무의식이다. 그것은 현존의 빛은 견디지 못한다.
- 처음에는 고통체가 인류에게 새로운 의식이 일어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점령하고, 생각을 조종하고 왜곡시키고, 당신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당신의 에너지 장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검은 구름처럼 느껴질 것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고통체는 당신을 무의식 상태로 몰아가기 쉽다. 생각이나 감정과 완전히 동일시되는 것이다. 고통체는 당신을 반발하게 만들고, 자신의 마음속과 세상 속에 불행이 더 커지도록 의도된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불행이 커짐에 따라 그것은 당신의 삶에 큰 혼란을 야기한다. 신체는 그 스트레스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고, 병이나 다른 기능장애를 발전시킬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고통체에 의해 야기된 어떤 사고의 피해자가 되거나, 심각한 갈등 상황이나 드라마에 연루되거나, 물리적인 폭력의 가해자가 될 것이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너무 심해져서 당신은 더 이상 불행한 자아와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고통체는 그 가짜 자아의 일부이다.
- 당신이 고통체에 점령당할 때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할 때마다, 그것은 당신의 에고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에고로 변한다. 고통체가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에고를 필요로 하듯이, 고통체는 에고가 동일시하는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부정적인 결합은 결국 고통체가 너무 무거워져서, 에고가 그것을 통해 커지는 대신 고통체의 강한 에너지의 맹공격을 받고 서서히 손상되어 간다. 전기 장치가 전류에 의해 힘을 얻고 작동하지만, 전압이 너무 높으면 그것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는 것처럼.
- 강한 고통체를 지닌 사람들은 종종 삶이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는다. 더 이상의 고통, 더 이상의 인간 드라마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어떤 이는 이것을 솔직하고 단순하게, 자신은 "불행한 것에 지쳤다."고 표현했다. 내가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때 내면의 평화가 그들의 최우선 사항이 된다.
- 그 문장이 암시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다른 어떤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너의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라."
- 우리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간밤의 꿈은 사라진다. 우리는 말한다. "아, 단지 꿈이었군. 실제가 아니었어." 하지만 꿈속의 무엇인가는 실제였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그것이 단지 또 다른 꿈이 아닐까 의심한다. 지금도 당신은 작년에 떠났던 휴가 여행이나 어제 있었던 인간 드라마를 되돌아보며 그것이 지난밤의 꿈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발견한다.
- 꿈이 있고, 꿈을 꾸는 자가 있다. 꿈은 형상들의 일시적인 놀이다. 세상이 그것이다. 상대적으로는 실재하지만,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 꿈꾸는 자, 절대적 실체가 있다. 그 안에서 형상들은 오고 간다. 꿈꾸는 자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은 그 꿈의 일부이다. 꿈꾸는 자는 그 꿈이 나타나는, 그 꿈을 가능하게 만드는 토대이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 배후의 절대적인 것, 시간 배후의 영원, 형상들 내부와 배후의 의식이다. 꿈꾸는 자는 의식 그 자체, 본래의 자신이다.
-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목적이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날 때, 에고가 창조한 지구 차원의 드라마는 막을 내리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꿈이 일어난다. 이것이 새로운 지구다.
- 어떻게 하면 나의 내면적인 목적에 대한 깨달음에서 외부 차원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발견하는 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외부적인 목적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며, 어떤 외부적인 목적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러다가 다른 목적으로 대체된다. 깨어 있음이라는 내면적인 목적에 어느 정도 충실한가에 따라 당신 삶의 외부적 환경 역시 크게 다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과거와의 갑작스러운, 또는 점진적인 단절이 찾아온다. 그들의 일, 생활환경, 관계들, 모든 것들이 심오한 변화를 겪는다. 그 변화의 일부는 결정을 내리는 고뇌스러운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인식을 통해 그들 자신이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내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며, 그 결정은 말하자면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것은 자각을 통해서 오며 생각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 당신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병원 같은 작업 환경이나 삶의 환경에서 걸어 나온다. 따라서 외부 차원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옳은지 발견하기 전에,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이 깨어 있는 의식에 어울리는 일일까 발견하기 전에, 당신은 먼저 무엇이 옳지 않은지, 어떤 일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지, 무엇이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어울리지 않는지 발견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 또 다른 종류의 변화들은 외부로부터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 우연한 만남이 당신의 삶에 새로운 기회와 확장을 가져다준다. 오랫동안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나 갈등이 사라진다. 당신의 친구들도 당신과 더불어 이 내면적인 변화를 경험하거나, 아니면 당신의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어떤 관계들은 끝나고, 또 어떤 관계는 깊어진다. 당신은 일을 그만둘 수도 있고, 자신의 분야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배우자가 당신을 떠나거나, 새로운 차원의 관계에 도달할 수도 있다. 어떤 변화들은 표면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날 하나의 공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 여기 당신의 삶 속에 권한과 창조적인 확장을 가져다줄 하나의 영적 수행이 있다. 자신이 자주 행하는 매일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목록으로 만들라. 당신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짜증 나고, 스트레스받는다고 여기는 활동들도 포함시키라. 하지만 당신이 몹시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일들은 포함시키지 말라. 이것은 당신이 하는 일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중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 목록은 일터로 가고 오는 것, 시장을 보는 것, 빨래를 하는 것, 또는 매일의 일과 중에서 당신이 지루하거나 스트레스받는다고 느끼는 것들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당신이 그 행위들을 할 때마다 그것들이 깨어 있음의 도구가 되게 하라. 당신이 하는 일 속에 온전히 존재하고, 그 활동들 배후에 있는 당신 내면의 그 깨어 있음, 살아 있는 침묵을 느껴 보라. 머지않아 당신은 스트레스받고 지루해하고 짜증 내면서 하는 대신 그러한 높아진 자각 상태 속에서 당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즐거워져 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이 즐기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외부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내면의 의식 차원이다. 이것은 당신이 행하고 있는 일 속에서 순수 존재의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다. 만일 당신의 삶에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거나 너무 스트레스받거나 지루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직 그 차원을 당신 삶 속으로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직 당신 삶의 주된 목적이 아닌 것이다.
-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자신들의 주된 목적이 이 세상 속에 의식의 빛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발견하고, 무엇을 하든지 의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함에 따라 새로운 지구가 시작된다. 순수 존재의 기쁨은 깨어 있는 의식에서 오는 기쁨이다.
- 인간 존재의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꽃은 현실적인 목적에 관계없이, 즉 어떤 식으로든 생존과 연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가치를 인정한 최초의 사물이 되었다. 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가, 시인, 신비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꽃을 보며 명상하고 꽃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붓다는 어느 날 꽃 한 송이를 들어 그것을 응시하면서 '침묵의 법문'을 했다고 전해진다. 잠시 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마하가섭이라 불리는 수행승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 법문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세상은 전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 미소, 즉 그의 깨달음은 이후 스물여덟 명 스승들의 계보를 거쳐 선의 기원이 되었다.
-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인간은 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 인간 본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 최초의 인식은 인간 의식의 진화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기쁨과 사랑의 감정이 바로 그 인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꽃은 우리 안의 가장 고결하고 성스러운 것의 형상화, 궁극적으로는 우리 내면의 형상을 초월한 부분이 형상화된 것을 상징했다. 풀과 나무에서 나타났지만 풀과 나무보다 더 덧없고, 더 신령하고, 더 섬세한 꽃은 다른 영역에서 온 메신저, 물질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 따라서 한 송이 꽃 , 하나의 수정, 한 마리 새를 마음속에서 이름 붙이지 않고 깨어 있는 눈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형상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문이 된다. 비록 작은 틈일지라도 내면에서 영적인 세계로의 문이 열린다. '깨달음'을 경험한 이 세 가지 생명 형태가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의식의 진화에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가 그것이다. 연꽃 속의 보석이 불교의 중심 상징이 된 이유, 흰 비둘기가 기독교에서 성령을 상징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 존재들은 인간이라는 종에게 일어나도록 운명 지어진, 지구 전체 차원의 더 심오한 의식의 변화를 위한 토대가 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영적인 깨어남이 그것이다.
- 이 책은 준비된 자만을 깨울 수 있다. 아직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남에 따라 집단의식 속에 탄력이 생겨날 것이며 다른 이들도 더 쉽게 깨어날 것이다. 만일 깨어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가길 바란다. 깨어날 때 비로소 깨어남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한순간의 짧은 자각만으로도 깨어남의 과정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며, 그 과정은 되돌릴 수 없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한순간의 자각이 일어날 것이다. 또 많은 이들에게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그 과정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닫도록 도울 것이다. 어떤 이는 그 과정이 상실과 고통을 통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영적인 스승이나 가르침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의식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영적인 책들을 읽음으로써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또는 위에서 말한 몇 가지가 합쳐져서 그 과정이 일어날 수도 있다.
- 하지만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 욕망, 권력욕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기능장애가 아니라 그것들 역시 기능장애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간 존재 각자의 마음 깊이 뿌리내린,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환상이 그 기능장애이다. 많은 영적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영적 수행들은 대개 실패로 끝이 난다. 그 기능장애의 뿌리까지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려움, 욕망, 권력욕은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다.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훌륭하고 고결한 행동이지만,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그것은 결국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똑같은 기능장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좀 더 눈치채기 힘든 정교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더 크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그러한 노력 역시 자신이 관념 속에서 '나'라고 여기고 있는 이미지를 더 크게, 그리고 더 강하게 만들려는 욕망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좋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이미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해 그것이 나타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 상태에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만이 나타날 수 있다.
- 인간이 내면의 현실과 의식 상태에 먼저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외부 현실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할 때, 즉 새로운 지구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공산주의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숭고한 사상에서 영감을 얻어 출발했지만 결국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왔다. 모든 인간 존재의 내면에 있는 '에고'라는 기능장애에 대한 청사진을 포함시키지 않고 계획을 세운 것이다.
- 인류의 오래된 종교와 영적 전통들은 한 가지 통찰에서 일치한다. 우리의 정상적인' 마음 상태는 하나의 근본적인 결함으로 망가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조건의 본질에 대한 이 통찰, 이 '나쁜 소식'으로부터 두 번째 통찰이 일어난다. 인간 의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반가운 소식이 그것이다. 힌두교 가르침에서는, 때로는 불교에서도, 이 변화를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것은 구원이며, 불교에서는 고통의 끝이다. 해탈과 견성도 이 의식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예술 작품, 과학, 기술 발전이 아니라 자신의 기능장애, 자신의 정신이상을 자각한 데 있다. 먼 과거에 이미 그러한 자각이 몇 사람에게 일어났다. 2천6백 년 전 인도에 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그것을 본 최초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훗날 붓다라는 이름이 그에게 주어졌다. '붓다'는 단순히 '깨어난 자'를 의미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깨어난 스승 한 명이 중국에서 출현했다. 그의 이름은 노자였다. 그는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깊이 있는 영적 서적 중 한 권인 도덕경에 자신의 가르침을 남겼다.
- 물론 자신의 정신이상 증세를 자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온전한 정신의 나타남이며, 치료와 초월의 시작이다. 그 무렵 최초의 꽃이 시험적으로 얼굴을 내밀 듯이 새로운 의식 차원이 지구 행성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드문 개인들은 그들의 동시대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죄에 대해, 고통과 환상에 대해 말했다. "그대들이 살고 있는 방식을 보라. 그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그대들이 만들어 내는 고통을 보라." 그런 다음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 존재가 가진 집단적인 악몽으로부터 깨어날 가능성을 가리켜 보였다. 그들은 그 길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인간의 깨어남에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들이었지만, 세상은 아직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동시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들에게도 많은 부분이 잘못 이해되었다. 단순하고 강력한 가르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기록한 제자들에게조차 왜곡되고 틀리게 해석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본래의 가르침과는 아무 관계없는 많은 것들이 덧붙여졌다.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한 결과였다. 어떤 스승들은 웃음거리가 되고, 매도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가 하면 몇몇 스승들은 신으로 숭배되었다. 인간 마음의 기능장애를 넘어서는 길, 집단적인 정신이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가리켜 보인 가르침들은 철저히 왜곡되거나 그것들마저 정신이상의 일부가 되었다.
- 많은 사람들의 삶의 대부분이 사물에 대한 도를 넘은 집착으로 소비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병적 증상 중 하나가 물질 과잉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자기 본래의 삶을 느끼지 못할 때 사물들로 삶을 채우려고 시도하기 쉽다. 하나의 영적 수행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제안하고 싶다. 자신이 사물들의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한번 관찰해 보라. 특히 당신이 '내 것'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있는 사물들과의 관계를, 예를 들어, 당신이 느끼는 자신의 가치가 자신이 소유한 사물들에 좌우되지 않는가? 민감하고 솔직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정한 물건이 당신에게 중요한 인물 또는 우월한 사람이라는 미묘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가?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당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는가? 다른 사람들 눈에, 그리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의 눈에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무심코 자신이 소유한 물건들을 언급하거나 과시하지는 않는가? 또한 누군가가 당신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거나 자신의 소중한 소유물을 잃었을 때 당신은 화가 나거나 불쾌해지거나 자신의 존재감이 작아지는 것을 느끼지는 않는가?
- 그렇다면 소유물에 자부심을 갖거나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해 불쾌감을 갖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자부심, 돋보이려는 욕구, '남보다 더 많이'를 통해 자아를 크게 하려는 노력, 남보다 더 적게 가짐으로써 존재가 축소되는 느낌 등은 옳지도 틀리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에고일 뿐이다. 에고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무의식 상태일 뿐이다. 자신 안에서 에고를 관찰할 때, 당신은 이미 그것을 뛰어넘기 시작한 것이다. 에고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자신 안에서 에고의 행동을 발견할 때 미소 지으라. 때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가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이 상태에 사로잡혀 살아올 수 있었을까 하고, 무엇보다도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 에고를 자기 개인의 문제로 여긴다면 그것은 단지 더 큰 에고일 뿐이다.
-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면에 아무런 소유물 가방이, 즉 아무런 자기 동일시가 없음을 뜻한다. 그들 안에 '나'의 의미를 부여한 어떤 사물도, '나'라는 어떤 생각의 형태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모든 자기 동일시를 내려놓고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 찾아오는 순수 존재의 단순하지만 심오한 기쁨이 그것이다.
- 동서양 어디서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오랜 영적 수행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소유를 버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에고는 그 즉시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동일시할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를테면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초월한, 따라서 남들보다 우월하고 더 영적인 사람이라는 마음속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할 것이다. 세상에는 모든 소유를 버렸지만 백만장자보다 더 큰 에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종류의 동일시를 빼앗아 버리면 에고는 재빨리 다른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에고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 줄 무엇인가가 있는 한 무엇과 동일시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소비주의에 반대하거나 개인 소유에 반대하는 것 역시 소유물과의 동일시를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생각의 형태, 또 다른 마음의 입장일 수도 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만들 수 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자신은 옳고 남은 틀리다고 만드는 것이 에고의 주된 방식 중 하나이자 무의식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 에고의 내용물은 변할지 모르지만, 에고를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마음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가정하는 것 중 하나는, 소유라는 허구를 통해 물체를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물체가 가진 겉으로 보이는 견고함과 영구성이 자신의 존재에도 견고함과 영구성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특히 건물에 적용되며, 토지에는 더 많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땅은 당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파괴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어리석음은 땅의 경우 훨씬 더 분명하다. 백인 정착민 시절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그들에게 종이를 내밀며 서명하게 했을 때, 그들은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땅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에 속해 있지, 땅이 그들에게 속해 있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 에고는 소유와 존재를 동등하게 여긴다. 나는 소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이 소유할수록 나는 존재감이 더 커진다. 에고는 비교를 먹고 산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로 변해 버린다.
- 눈을 감고 손바닥 안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느껴 보라. 머리로 묻지 말라. 머리는 "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 하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머리는 또, "이런 것보다 더 흥미 있는 주제를 나한테 줘."하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머리에게 묻는 대신 손으로 직접 내려가라. 이 말은 손바닥 안의 미묘한 생명력을 느껴 보라는 뜻이다. 그것이 거기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단지 손바닥으로 의식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처음에는 찌릿찌릿한 작은 감각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러다가 기 또는 생명력이 느껴질 것이다. 잠시 동안 손바닥에 계속해서 주의를 집중하면, 그 기의 느낌이 더 강해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눈을 감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 글을 읽음과 동시에 자신의 '내부의 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은 발로 내려가 그곳에 1분여 동안 의식을 집중해 보라. 그리고 손과 발을 동시에 느껴 보라. 그런 다음 신체의 다른 부분들, 다리와 팔과 배와 가슴을 동시에 느껴보라. 하나의 전체적인 생명력으로 내부의 몸을 느낄 때까지.
- 내가 '내부의 몸'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실제로는 육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에너지, 형상과 형상 없음을 잇는 다리이다. 가능한 한 자주 내부의 몸을 느끼는 습관을 가져 보라. 얼마 후, 당신은 그것을 느끼기 위해 더 이상 눈을 감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면의 몸을 느낄 수 있는지 보라. 어쩌면 역설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내부의 몸과 접촉할 때 당신은 더 이상 육체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도 않게 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형상을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형상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 형상 없음으로 향한다. 이 형상 없음을 우리는 순수 존재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이 당신 존재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몸을 자각하는 그 행위가 당신을 지금 이 순간에 닻을 내리게 할 뿐 아니라, 에고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출구 역할을 한다. 이것은 또한 면역 기능과 스스로를 치유하는 몸의 능력을 강화시켜 준다.
- 에고는 언제나 형상과의 동일시 과정에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형상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고, 그럼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단지 물질적인 대상이나 육체만이 형상이 아니다. 사물이나 육체처럼 바깥 세계에 있는 형상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의식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형태들이다. 생각은 하나의 에너지 형태이다. 물질보다 더 미세하고 밀도가 덜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 역시 하나의 형태이다. 머릿속에서 절대로 말을 멈추지 않는 목소리라고 당신이 알고 있는 그것은 사실 그칠 줄 모르는 강박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모든 생각들마다 당신의 주의를 완전히 흡수해 버릴 때 당신은 그 머릿속 목소리와, 그리고 그 목소리들과 함께 따라오는 감정들과 완전히 동일시된다. 따라서 각각의 생각과 감정들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이때 당신은 그 생각과 감정들의 형태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에고의 움켜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당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이기고자 하는 에고의 욕구이다. 무의식 바로 아래쪽 차원에서 당신은 소리 지르고 고함을 치고 있으며, 그것보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물리적인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 화는 불평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마음속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행위와 함께 찾아오는 감정이다. 이것은 에고에게 더 강한 에너지를 준다. 화는 기분이 나쁘고, 불쾌하고, 불만스럽고, 감정에 상처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탐욕, 그들의 부정직함, 진실성 부족, 그들이 현재 행동하는 것, 그들이 과거에 행한 것, 그들이 말한 것, 그들이 하지 않은 것, 그들이 했어야 하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등에 대해 계속 화를 낸다. 에고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눈감아 주는 대신, 당신은 그것을 그들의 존재 자체로 여겨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당신 안의 무의식,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당신이 상대방 안에서 발견해 내는 그 '잘못'이 실제로는 그곳에 있지도 않은 경우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 탓이며, 적을 만들어 자신의 옳음과 우월함을 주장하도록 조건 지어진 마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경우는 그 잘못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잘못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들은 다 제외시킴으로써 당신은 그것을 확대시킨다. 또한 당신이 반응하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것을 당신은 자기 자신 안에서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에고에 반응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당신 자신 안의 에고를 뛰어넘는 가장 좋은 방법일 뿐 아니라, 인간 공동의 에고를 해체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이 에고에서 나오는 것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만, 그것이 인간이 공동으로 가진 기능장애의 표현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만, 당신은 그것에 대해 무반응 상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만, 마치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인 양 반응하려는 충동이 사라진다. 에고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온전한 정신이란 조건 지어진 상태와는 반대로 조건 지어져 있지 않은 의식이다. 때로는 깊은 무의식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질적인 단계를 밟아야만 할 때도 있다. 이것은 그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을 가장 잘 보호하는 길은 깨어 있는 의식을 갖는 일이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의 무의식을 개인적인 문제로 분류한다면 그 누군가는 적이 되며, 이것이 곧 에고이다. 무반응은 허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무반응의 다른 말은 용서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당신은 에고를 꿰뚫고 모든 인간 존재 안에 있는 온전한 정신을 그 사람의 본질로 여긴다. 에고는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화내기를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 할 것을 상황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상황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 그 모습들이 벗겨지면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연출된 모습들이 벗겨진 적나라한 에고, 그것의 고통체, 그리고 이제는 분노로 변한 좌절된 욕망이 그곳에 있다. 그 분노는 거의 대부분 배우자나 연인을 향해 있다. 마음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과 결핍감을 제거하는 일에 실패한 데서 오는 분노이다. 이 두려움과 결핍감은 에고의 자아개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 모든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사랑에 빠진다."고 부르는 그것은 대개 에고의 결핍감과 욕구가 극대화된 것이다. 당신은 상대방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중독된다. 그것은 아무런 결핍감도 갖지 않은 진정한 사랑과는 관계가 없다. 사랑의 전통적인 개념에 대해 스페인 어는 가장 정직하다. "떼 뀌에로."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을 원한다."이다. 한편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만을 지닌 "떼 아모."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아마도 진정한 사랑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난 알아야 한다." 또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난 알 필요가 있다."가 혼란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만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일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스스로에게 존재감을 주기 위해 관념적으로 자신에 대한 정의를 찾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가? 자기 존재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하나의 '생각'을 찾는 일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만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을 때, 정체성 혼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그것은 사라진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 당신은 실제로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가 된다. 그것은 생각으로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보다 진정한 자기 자신에 더 가까워진다. 생각을 통해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을 제한하는 일이다.
- 물론 이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능들을 수행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적 능력과 신체적인 능력에 관한 한, 지식과 기술과 재능과 에너지 차원에서 인간 존재는 매우 다양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기능이 아니다. 그 기능과 너무도 동일시된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지배해 자신이 연출하는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다. 어떤 모습을 연출할 때 무의식이 된다. 하나의 모습을 연출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그 인식이 당신과 그 모습 사이에 하나의 공간을 탄생시킨다.
- 자식들을 통제하려는 부모의 강박관념 뒤에 있는 무의식적인 가정과 심리적인 동기들을 의식 밖으로 꺼내 소리가 들리게 하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난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네가 성취해 주길 바란다. 난 네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중요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너를 통해 나 역시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난 너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내가 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네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결국 내 소망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난 너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난 너를 사랑하며, 내가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계속해서 사랑할 것이다."
무의식 속의 이러한 동기들을 의식 속으로 꺼내 놓으면, 당신은 그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즉시 깨달을 것이다. 그것들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에고를 보게 될 것이고, 마음의 기능장애도 마찬가지로 볼 것이다. 나와 대화한 부모들은 갑자기 깨닫는다. "이런 세상에, 지금까지 나가 해오고 있었던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일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그것의 어리석음까지 보게 된다. 그때 그 무의식적인 방식은 저절로 끝이 난다. 자각은 변화를 위한 가장 뛰어난 매개체다.
- 만일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말하지 말라. 그들이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에고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을 전보다 더 무의식 상태로 만들 것이다. 에고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에고이며 그들의 본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이 인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에고의 방식은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해도, 당신이 그것에 마음속으로 반대하지 않을 때 거의 기적적으로 사라진다. 반대는 그것에게 새로워진 힘을 줄 뿐이다. 부모의 행동에 반발할 필요가 없다. 반대하지 않는다 해도, 오히려 자비심을 갖고, 다시 말해 그것을 그들 개인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 또한 부모에 대한 당신 자신의 습관적인 반응들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 그 반응들 뒤에 있는 당신 자신의 무의식적인 가정과 기대들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 "나의 부모는 내가 하는 일들에 찬성해야 한다. 나를 이해해야 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 그런가? 왜 그들이 그래야만 하는가? 사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식은 아직 자각의 차원까지 진화의 도약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역할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 하지만 부모님의 승인과 이해를 얻지 못하면 내 자신이 행복하거나 편안하지 않다." 정말 그런가? 부모가 인정하고 안하고가 당신의 본래 존재에 어떤 차이를 가져다주는가? 그러한 살펴보지 않은 가정들이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낳고, 많은 불필요한 불행의 원인이 된다.
- 비록 결국에는 고통이 에고를 무너뜨리지만, 그러나 당신이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고통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인류는 언젠가는 고통을 넘어가야만 하는 운명이긴 하지만 에고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에고의 많은 잘못된 가정 중 하나, 에고의 여러 망상 중 하나는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 그 생각이 당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로도 옮겨진다. "내 아이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그 생각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다. 고통은 하나의 소중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의식의 진화와 에고를 불태워 버리는 일이 그것이다. 십자가 위의 사람은 하나의 전형이다. 그는 모든 남자, 모든 여자다. 고통에 저항하는 한, 그 저항이 더 많은 에고를 만들어 내고 그 에고들은 또다시 불태워져야만 하기 때문에 과정이 더 느려진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그 과정에 속도가 붙는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때 당신은 자신을 위해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는 당신의 자녀나 부모 등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도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때, 그 고통 한가운데서 이미 형질 변경이 일어난다. 고통의 불꽃이 의식의 빛이 되는 것이다.
- 많은 아이들은 부모를 향한 분노와 원망을 숨기고 있다. 원인은 주로 그 관계 속에 진정성이 없는 데 있다. 아이는 부모가 아무리 공들여 부모 역할을 한다 해도 하나의 역할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 존재로서 옆에 있어 주기를 갈망한다. 당신은 자식을 위해 온갖 옳은 일들과 최선의 것을 해줄 수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사실 존재를 무시한다면 행위는 결코 충분할 수 없다. 에고는 순수한 '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행위를 통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에고의 지배하에 있게 되면, 더 많이 행위를 쌓아감으로써 마침내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자신이 완전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단지 행위 속에 자신을 잃어버릴 뿐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존재에 뿌리내리지 않은 모든 문명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다. 분주한 가정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의 관계 속으로 순수 존재를 가져올 수 있는가? 열쇠는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일이다. 두 종류의 관심이 있다. 하나는 형상에 바탕을 둔 관심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형상을 초월한 관심이다. 형상에 기초한 관심은 어떤 식으로든 늘 행위나 평가와 연결되어 있다.
- "그 시간이 지나면 영영 사라져 버리는 가련한 배우, 아무 의미도 없는 소음과 노여움으로 가득한, 바보 천치의 이야기." <맥베드>의 대사이다.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는 텔레비전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에고로 가득한 이 세상의 연극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즉, 그 연극들은 이 행성에 갈수록 더 많은 고통을 창조하며, 고통은 비록 에고가 만들어 낸 것이긴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에고를 부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고통은 에고가 스스로를 불태워 버리는 불꽃이다.
- 역할을 연기하는 세상에서, 마음이 만든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깊은 중심부로부터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본래 모습 이상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시도하지도 않으며, 단순히 그들 자신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텔레비전과 언론 매체와 경제계에도 존재한다. 그들이야말로 특별한 이들이고, 이 세상에 진정한 차이를 가져다주는 이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새로운 의식을 가져오는 이들이다. 무엇을 하든 그들은 힘을 갖는데, 그들의 행위가 전체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그들이 하는 일보다 멀리, 그들의 기능보다 더 멀리까지 미친다.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꾸미지 않는 그들의 현존만으로도 접촉하는 사람마다 영향을 받아 변화를 경험한다. 당신이 어떤 모습을 연출하지 않을 때, 그것은 당신이 하는 일속에 자아(에고)가 없음을 의미한다. 당신의 자아를 보호하거나 강화하려는 제2의 목표가 없다. 그 결과 당신의 행위들은 훨씬 더 큰 힘을 갖는다. 당신은 그 상황에 온전히 집중한다. 당신은 그 순간과 하나가 된다. 당신은 특별히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완전히 자기 자신일 때 당신은 가장 강하고, 가장 뛰어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연출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고 자연발생적인 나라고 불리는 모습이다. 이렇게 또는 저렇게 되려고 노력하자마자 당신은 하나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다. "다만 너 자신이 돼라."는 것은 좋은 조언이지만, 또한 잘못 인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이 들어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디 보자.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될 수 있지?" 또 다른 모습이 들어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될 수 있지?"는 사실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 '어떻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미 '본래의 나'인데 불필요한 짐을 얹지 말라.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완전히 편안할 수 있다면, 그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인간 뒤의 그 순수한 '있음', 이미 규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가능성의 장이 그것이다.
-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당신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것을 포기하라. 그때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당신에 대해 정의 내리는 것에 관심 갖지 말라. 그들이 당신을 정의 내릴 때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한계를 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사람들과 만날 때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로 그곳에 있지 말고, 깨어 있는 현존으로 있으라.
- 에고는 왜 늘 어떤 모습을 연기하는가? 확인해 보지도 않은 하나의 가정, 하나의 근본적인 망상, 하나의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다. 그 생각은 이것이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다른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뒤따른다. 나는 완전한 나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하나의 모습을 연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더 많은 존재감을 갖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당신은 본래의 존재 이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형상과 마음속 형상 밑바탕에서 당신은 '큰 생명과 하나, 순수한 '있음'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상 속에서는 당신은 언제나 어떤 사람에게는 열등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우월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는, 당신은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 참된 자존과 진정한 겸손은 그 깨달음으로부터 온다. 에고의 눈에는 자존과 겸손은 대립된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그 둘은 하나이며 같다.
- 에고는 진실에 화내는 것을 좋아한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타타타(여여)라고 불렀다.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이 타타타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반대하는 것이 에고의 두드러진 성향 중 하나다. 그것은 에고에게 먹이를 주는 부정적인 상태, 에고가 사랑하는 불행을 창조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당신은 자신과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지상에 지옥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 채 고통을 창조하는 것 - 이것이 무의식적인 삶의 특징이다. 이것이 에고의 완전한 지배 속에 살아가는 삶이다.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에고의 무능력은 놀라울 정도이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에고는 자신이 남에게 비난하는 그 일을 그대로 하면서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지적하면 에고는 화를 내면서 부정하고, 영리한 논리를 펼 것이며,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라는 작전을 쓸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회사들이 그렇게 하고, 정부가 그렇게 한다.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에고는 소리를 지르거나 신체적인 폭력에 기댈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한 말의 깊은 지혜를 이것을 믿게 한다. 때로는 한 조직체나 국가 전체가 이 피해망상적인 믿음 위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에고의 두려움과 불신,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나와 그들의 '다름'을 강조하고 그 결점을 그들의 존재와 동일시해 버리는 에고의 성향이 점점 발전해 상대방을 비인간적인 괴물들로 만든다. 에고는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딜레마는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에고의 목소리다. 피해망상증 환자는 그 지옥을 가장 극심하게 경험하는 것이지만, 에고의 행동 양식에 지배당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어느 정도는 느낄 것이다. 당신 안의 에고가 더 강할수록, 당신의 생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 삶의 주요 문제들의 원인일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삶도 힘들게 만들 가능성 역시 크다. 하지만 물론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우리가 피해망상증이라고 부르는 이 정신질환은 또 다른 증상을 나타낸다. 물론 이 증상은 모든 에고가 가진 특징이며, 피해망상증에서는 그것이 더 극단적인 형태를 취할 뿐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박해받고 감시당하고 협박당한다고 더 많이 믿을수록,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만물이 자기 둘레를 돌고 있다는 착각 역시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상상 속 중심인물로서 그는 더욱더 자신을 특별하고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이 희생자이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당한다는 믿음은 그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한다. 망상에 빠진 이 이야기 속에서 그는 종종 자신에게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구원하거나 악의 무리들을 물리칠 미래의 영웅 역할을 부여한다.
- 각자 자신들의 생각과 너무도 동일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생각들은 '나'의 의미가 부여된 마음의 자세로 굳어진다.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와 생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내가 나의 의견(생각)을 방어할 때, 나는 마치 나 자신을 방어하는 것처럼 느끼고 행동한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마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며, 따라서 나의 감정들은 이러한 무의식적인 믿음을 반영할 것이다. 당연히 그것들은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기분 상하고, 화가 나고, 방어적이고, 공격적이 된다. 나는 내 존재가 소멸되지 않도록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승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환영이다. 에고는 생각과 입장이 '본래의 나'와 아무 관계가 없음을 알지 못한다. 에고는 그 자체가 관찰되지 않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 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진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라. 다만 자신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중단하라." 무슨 의미인가? 자신의 생각과의 동일시를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때 생각 너머의 순수 존재가 자연적으로 나타난다. 누구나 에고로부터 자유로운 순간들이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예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완전히 에고로부터 자유롭다. 그들 자신은 그것을 모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일은 하나의 영적 수행이 된다. 그들은 일을 할 때는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며, 개인적인 생활에서는 상대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떨어진다. 이것은 그들의 현존과 깨어 있음이 그들 삶의 한 영역에만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에고를 추구함 없이, 그 순간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에 충분히 반응하면서 감탄할 정도로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는 교사, 화가, 간호사, 의사, 과학자, 사회 활동가, 식당 종업원, 미용사, 사업가, 판매원들을 나는 많이 만나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하나가 되고, 지금 이 순간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이 봉사하는 사람들이나 일과 하나가 된다. 그러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그들이 수행하는 일을 뛰어넘는다. 그들은 그들과 접촉하는 모든 이들의 에고를 작아지게 한다. 그들과 만나면 때로는 단단한 에고를 지닌 사람들조차 긴장을 풀고 방어막을 내려놓기 시작하며, 그들이 연기하던 모습들을 벗어 놓는다. 에고 없이 일하는 그런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일에 특별히 성공적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이 하는 일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행성의 미래를 건설하고 있는 사람이다.
-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 기술적으로 뛰어날지 모르지만, 그들의 에고가 끊임없이 일을 가로막는 사람들도 나는 많이 만나 왔다. 그들은 주의력의 일부분만을 일에 집중하고, 나머지 부분은 자신을 향해 있다. 그들의 에고는 개인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면 화를 내는 데 에너지를 낭비한다. 그리고 아무리 인정받아도 결코 충분할 수가 없다.
- 감정 역시 실제 상황과 사건에 대한 반응일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마음의 해석이라는 필터, 생각의 필터를 통해 본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즉 좋고 나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내 것이고 내 것이 아니라는 등의 마음의 관념들을 통과한 후의 반응인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차가 도난당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당신은 아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차'인 경우에는 몹시 당황할 것이다. '나의'라는 마음속 작은 관념이 얼마나 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는 놀라울 정도이다.
- 몸은 매우 지성적이긴 하지만, 실제 상황과 생각의 차이를 구분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모든 생각에 마치 실제 상황인 것처럼 반응한다. 그것이 단지 하나의 생각일 뿐임을 알지 못한다. 걱정과 두려움에 찬 생각은 몸에게 "나는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설령 밤에 따뜻하고 안락한 침대에 누워 있을지라도 몸은 그것에 따라 반응할 수밖에 없다. 심장이 빨라지고, 근육이 수축하며, 호흡이 격해진다. 이렇듯 에너지가 고조되지만, 위험은 단지 마음속 상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에 그 에너지는 배출될 출구가 없다.
- 고통체는 오직 부정적인 생각만을 먹고 산다. 오직 그 생각들만이 자신의 에너지와 주파수가 맞기 때문이다.
- 세상 만물은 끊임없는 운동으로 진동하는 에너지 장이다.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 손에 들고 있는 책은 견고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의 감각기관이 그것들이 진동하는 주파수를 그런 식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분자, 원자, 전자, 아원자 입자들의 쉼 없는 운동일뿐이다. 그 입자들이 함께 모여 당신이 의자, 책, 나무, 육체로 지각하는 것을 창조한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특정한 범위의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 진동(운동)이다. 생각은 물질보다 높은 주파수로 진동하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똑같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생각들은 그들 자체의 주파수 범위를 가지고 있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그 범위의 아래쪽 영역, 긍정적인 생각들은 그 범위의 위쪽 영역에 해당된다. 고통체의 진동 주파수는 부정적인 생각들의 주파수와 공명한다. 그 생각들만이 고통체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많은 사람들은 전 생애에 걸쳐 에고에 갇힌 채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다.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그 자리에서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그들의 이름, 직업, 개인적인 경력, 신체의 모습과 상태, 그들이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좀 더 진화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그들 자신을 불멸의 영혼 또는 신의 영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가? 아니면 마음의 내용물에 영적으로 들리는 개념들을 몇 가지 덧보탠 것에 불과한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한 묶음의 사상이나 믿음들을 채택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들어가는 일이다. 영적 사상과 믿음들은 잘하면 유익한 방향 표지판이 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당신의 무의식 속에 강하게 뿌리내린, 자신이 누구라고 하는 핵심 관념들을 제거할 만한 힘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조건 지어진 인간 마음의 일부인 그것들을, 자신을 깊이 안다는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무슨 사상이 떠다니고 있는가 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 안에서 실종되는 대신, 순수한 '있음'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 당신이 자신을 누구라고 이해하는가에 따라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자신의 삶에 무엇이 중요한가가 결정된다. 그리고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들은 당신의 감정을 흔들어 놓거나 방해하는 힘을 가질 것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당신이 얼마나 깊이 자신을 알고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당신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는 당신이 말하거나 믿는 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행동과 반응이 당신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것을 잘 드러내 준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어질 것이다. "나를 가장 당황하게 하고 혼란시키는 것들은 무엇인가?" 만일 작은 것들이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정확히 그것이다. 즉, 작다. 그것이 당신의 무의식적인 믿음일 것이다. 무엇이 작은 것들인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이 작은 것들이다. 모든 것들이 덧없기 때문이다.
-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불멸의 영이라는 것을 안다." 또는 "나는 이 미친 세상에 지쳤다. 평화가 내가 원하는 전부다. 단, 전화벨이 울리고 나쁜 소식을 전해 주기 전까지는." 주식 시장이 무너졌다. 거래가 수포로 돌아갔다. 자동차를 도난당했다. 시어머니가 오셨다. 여행이 취소되고, 계약이 깨졌다. 사랑하는 애인이 떠났다.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것이 당신 잘못이라고 말한다. 갑자기 분노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난 이것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어." 당신은 비난하고, 탓하고,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거나 합리화한다. 이 모든 것이 자동 조종 장치처럼 일어난다. 한순간 전만 해도 당신이 원하는 전부라고 말한 내면의 평화보다 지금은 분명히 다른 무엇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또한 당신은 더 이상 불멸의 영이 아니다. 그 거래, 그 금액, 그 계약, 그 손실 또는 손실의 위협이 더 중요하다. 누구에게? 당신이 자신이라고 말한 그 불멸의 영에게? 아니다. '나'에게다. 덧없는 물건들 속에서 안전과 만족을 추구하고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고 화를 내는 작은 나에게. 이제 적어도 당신은 스스로를 진정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 만일 평화가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평화를 선택할 것이다. 만일 평화가 그 어떤 것보다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이 자신이 하나의 '작은 나'가 아니라 큰 영이라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도전해 오는 사람들이나 상황과 마주쳤을 때 에고로써 반응하지 않고 완벽하게 깨어 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그것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과 자신을 분리시키기보다는, 그때 당신의 깨어 있음으로부터 하나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작은 나)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의식)가 반응할 것이다. 그것은 힘이 있고, 효과적이며, 어떤 사람이나 상황도 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 실제로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스스로를 오랫동안 속일 수 없음을 세상은 언제나 확인시켜 준다. 당신이 무엇을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세상이 금방 드러나게 한다. 특히 도전이 일어났을 때 당신이 사람들이나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당신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가를 가장 잘 나타내 준다.
- 자신에 대한 시각이 더 제한되어 있을수록, 더 좁고 에고 중심적일수록, 당신은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에고 중심의 한계, 그 무의식을 더 많이 볼 것이다. 그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더 많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잘못이라고 당신이 해석하는 그것이 당신의 눈에는 그들의 존재 자체나 다름없다. 이것은 당신이 그들 안에서 오직 에고만을 보며, 그렇게 해서 당신 자신 속의 에고를 강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에고 너머'를 보는 대신, 당신은 '에고'를 보고 있다. 그 에고를 바라보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 안의 에고다.
- 깊은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에고와 관련된 모습만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당신이 반응하는 것이 당신 자신 안에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오직 당신 자신 안에만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당신은 자신의 에고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 단계에서 당신은 또한 깨달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당신은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것을 멈추게 된다.
- "사람들은 나를 조종하고, 나를 이용하려고 해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들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은 이렇다. "나는 많은 것이 모자라는 '작은 나'이며, 그 모자람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 기본적인 오해가 그들의 모든 관계에 기능장애를 야기한다. 그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믿으며, 또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모든 현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가공의 느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상황을 나쁘게 돌아가게 하고, 모든 관계를 망쳐 놓는다. 만일 그 결핍의 생각이 그것이 돈이든, 인정받는 일이든, 사랑이든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존재의 일부가 되었다면, 당신은 언제나 결핍을 경험할 것이다. 당신의 삶 속에 이미 있는 좋은 것의 존재를 인정하기보다, 당신이 바라보는 것은 결핍뿐이다. 당신 삶 속에 이미 있는 좋은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모든 풍요로움의 토대이다. 사실은 이렇다. 이 세상이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당신 자신이 그것을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깊은 곳에서 당신은 자신이 왜소하며 세상에 줄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몇 주 동안 다음과 같은 것을 시도하면서 당신의 현실이 어떻게 바뀌는가 보라.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주지 않는 것들, 예를 들어 칭찬, 감사하는 마음, 도움, 애정 어린 관심 같은 것들을 당신이 먼저 사람들에게 주라. 당신은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그렇다면 마치 자신이 이미 그것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그것들이 당신에게 올 것이다. 그때, 당신이 주기 시작하자마자 당신은 받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주지 않는 것은 받을 수 없다.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결정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주지 않고 있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이미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흘러나가도록 스스로 허락하지 않고서는 당신은 자신이 그것을 갖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것은 풍요로움도 포함하고 있다. 흘러나가는 것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결정하는 법칙을 예수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곧 후하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
- 자기 주위 모든 곳에 있는 풍요로움을 알아차리는 그 눈은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풍요로움까지 일깨운다. 그것을 밖으로 흘러나오게 하라. 낯선 사람에게 미소 지을 때, 그곳에 이미 에너지의 미세한 흘러나감이 있다. 당신은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에게 종종 물으라.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지? 이 사람, 이 상황에 어떻게 하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지?"
- 풍요로움을 느끼기 위해 당신이 꼭 무엇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일관되게 풍요로움을 느끼면 사물들이 당신에게로 올 것이다. 그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풍요로움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온다. 불공평하게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풍요와 결핍은 먼저 내면의 상태이며, 그것이 당신에게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당신은 어쩌면 자신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두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다지 좋은 인간이 아니라는 비밀스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당신이다. 당신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 당신이다.
- 삶에 습관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예."로 바뀔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이 있는 그대로 일어나도록 당신이 허락할 때마다 당신은 에고뿐 아니라 시간을 사라지게 한다. 에고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즉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에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직후의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순간과 우호적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어떤 것도 에고를 오랫동안 만족시키지 못한다. 에고가 당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한, 불행해지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 존재하는 것은 모두, 또는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형상이다. 당신이 내면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한, 그 형상들은, 바꿔 말해 세상은 뚫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그 장벽은 당신을 형상을 초월한 본래의 존재로부터 분리시킨다. 당신의 본래 존재인 형상 없는 '생명'으로부터 당신을 분리시킨다.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형상에게 내면으로부터 긍정을 보낼 때, 바로 그 형상들 자체가 형상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 된다. 이때 신과 세상 사이의 분리가 사라진다.
- '생명'이 지금 이 순간에 취하는 형상에 반발할 때, 당신이 지금의 순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하나의 장애로, 또는 하나의 적으로 취급할 때, 당신은 형상과의 자기 동일시를, 즉 에고를 강화시킨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고는 반발하는 것이다. 반발이란 무엇인가? 반응하는 것에 중독이 되는 것이다. 더 많이 반발할수록 당신은 더 많이 형상과 묶이게 된다. 형상과 더 많이 동일시될수록 에고는 더 강해진다. 그때 당신의 순수 존재(순수한 '있음')는 형상을 통해 더 이상 비쳐 나오지 않거나 아주 희미하게만 비쳐 나올 뿐이다. 형상에 대한 무저항을 통해 당신 안에 형상을 초월한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현존이다. 짧은 수명을 가진 당신의 형상, '그 사람' 보다 훨씬 큰 침묵의 힘이다. 그것은 형상들의 세계 속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은 당신 자신이다.
- 무저항은 우주의 가장 큰 힘으로 가는 열쇠다. 그것을 통해 의식(영)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무엇이 존재하든 무엇이 일어나는, 형상에 대한 마음속 무저항은 형상의 절대적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저항은 세상과 세상 속 일들을 더 현실적이고 더 견고하게 보이도록 만들며, 실제보다 더 오래 가게 만든다. 형상을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에고도 마찬가지다. 마음속 저항은 세상과 에고에게 무게와 절대적인 중요성을 안겨주며, 이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상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이때 형상의 놀이는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잘못 인식되며, 그것이 당신의 인식일 때 그것은 당신의 현실이 된다.
- 일어나는 많은 일들, 삶이 취하는 많은 형상들은 덧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 모두가 무상하다. 사물들, 육체와 에고들, 사건들, 상황들, 생각들, 감정들, 욕망들, 야망들, 두려움들, 인간관계의 드라마들... 그것들은 가장 중요한 것처럼 가장하고서 왔다가는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가버린다. 그것들이 나온 무의 세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것들은 정말 실재하는 것들이었을까? 정말로 그것들은 하나의 꿈, 형상의 꿈 이상이었을까?
- 각 사람의 삶에는 형상의 차원에서 성장과 확대를 추구할 때가 있다. 이것은 육체적인 허약함이나 금전적인 결핍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고 힘쓰는 때이며,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획득하는 때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 삶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다주는 때이다. 이것은 음악 작품이나 미술 작업일 수도 있고, 저술활동, 봉사와 역할, 또는 당신이 설립해 큰 공헌을 세운 사업체나 단체일 수도 있다.
-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 당신의 주의력이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되어 있을 때, 그 현존이 흘러들어와 당신이 하는 일을 변형시킬 것이다. 그 안에 깊이와 힘이 생겨날 것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목적(돈, 특권, 승리)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를 위한 것일 때, 당신이 하는 일에 기쁨과 생명력이 있을 때,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그리고 물론 지금이 순간과 우호적이 되지 않고서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에 물들지 않은 효과적인 행위를 위한 기초다.
- 신이 우주공간을 바라보면서 경이로움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 불가사의한 신비 앞에서 마음 깊이 경외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설명과 이름표를 붙이려는 욕망을 잠시 동안 멈추고, 그곳에 떠 있는 물체들만이 아니라 우주공간 자체의 무한한 깊이를 자각했음을 의미한다. 고요한 내면으로 들어가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존재하는 우주의 광대무변함을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다. 그 경외감은 그곳에 수십억 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담고 있는 무한한 깊이로부터 온다. 물론 당신은 공간을 볼 수도 없고, 듣거나 만지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논리적으로 들리는 이 질문은 이미 그 안에 근본적인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공간의 본질은 '무' 이므로,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이다. 오직 물체, 형상만이 존재한다. 그것을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물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해 보자. 공간에 이끌리는 어떤 것이 당신 안에 있다고 하자.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각한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자각할 아무런 것도 없는데 어떻게 공간을 자각한단 말인가?
- 사람들의 말에 언제나 "그런가?" 하고만 반응한 선승의 이야기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전혀 마음의 저항을 하지 않는, 일어나는 일들과 하나가 되는 자세를 보여준다. 변함없이 "아마도." 하고 간단히 말하는 지혜로운 남자의 이야기는 판단하지 않는 지혜를 말해 준다. 그리고 이 반지 이야기는 모든 형상과 모습들의 무상함을 가리키며, 무상함의 인식은 무집착으로 인도한다. 무저항, 무판단, 무집착은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이다.
- 반지에 새겨진 그 글귀는 삶의 좋은 것들에 즐거워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고통의 시간에 약간의 위안을 제공하는 의미도 아니다. 더 깊은 목적이 있다. 모든 상황의 덧없음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덧없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형상이 가진 무상함의 속성이다. 모든 형상의 무상함을 자각할 때, 그것들에 대한 집착은 줄어들며,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된다. 무상함을 알고 변화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면 세상의 즐거움이 이어지는 동안 상실의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없이 그것을 즐길 수가 있다. 집착하지 않을 때, 당신은 당신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갇히지 않고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갖게 된다.
- 다음의 대화는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는 사람들과 내가 그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대화들을 압축한 내용이다. 무엇인가가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존재와 공명하고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일 때,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일치할 때, 그것은 진실한 것이다. 내가 사람들의 주의력을 먼저 그들의 내면적인 목적, 가장 근본적인 목적으로 이끄는 이유가 그것이다.
-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 삶에 어떤 변화를 원한다. 나는 삶의 확장을 원한다.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풍요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원한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엇인가를 하기 원한다. 하지만 만일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가?
- 지금 당신의 목적은 이곳에 앉아 나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이곳이고,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어떤 일을 하기 전까지는, 그때는 또 그 일이 당신의 목적이 된다.
- 그래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더 깊은 의미가 흘러들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근본 목적과 일치하는 삶이 아니면 어떤 외부적인 목적을 발견한다 해도, 설령 그것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일지라도 모두가 에고의 일이며 시간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머지않아 그것은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무엇을 하든 만일 당신이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을 무시한다면, 설령 그것이 영적인 일처럼 보일지라도 에고는 당신이 그것을 하는 방식 속으로 끼어들 것이고, 그러면 수단이 목적을 오염시킬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들로 포장되어 있다."는 격언은 이 진리를 가리킨다. 바꿔 말해, 목적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것들이 나오는 의식상태가 근본적인 것이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완성하는 일은 새로운 현실, 새로운 지구를 위해 기초를 놓는 일이다. 일단 그 기초가 놓이면, 당신의 외부적인 목적은 영적인 힘으로 채워진다. 당신의 목적과 의도들이 우주의 진화 추진력과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당신 삶의 첫째 목적의 핵심에는 생각과 자각의 분리가 놓여있으며, 그것은 시간의 부정을 통해 일어난다. 물론 우리는 약속을 정하거나 여행을 계획하는 것처럼 지금 실질적인 목적들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적인 시간은 삶의 완전함을 미래에서 추구하려는,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습관이다. 그것은 발견되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에 접근하는 유일한 지점인 현재의 순간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하는 일과 당신이 있는 곳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당신은 시간을 부정하게 된다. 이것은 크나큰 힘을 갖는다.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시간을 부정할 때,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 사이에, 존재와 행위 사이에 연결이 이루어진다. 시간을 부정할 때, 에고를 부정하게 된다. 무엇을 하든 당신은 특별히 잘할 것이다. 행동 그 자체에 당신의 주의력의 초점이 모아지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의 행동은 의식이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된다. 이것은 전화번호부를 넘기거나 방 안을 걷는 일처럼 가장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깊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주된 목적은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일이다. 이차적인 목적이 전화번호를 찾는 것이다. 방 안을 거니는 주된 목적은 방 안을 거니는 일이다. 그 이차적인 목적이 방 반대편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이 책을 집어 드는 순간, 그것이 당신의 주된 목적이 된다.
- 당신의 존재의 본질은 의식이다. 의식(당신)이 생각과 완전히 동일시되어 본질과 본성을 망각할 때, 의식은 생각 속에 그 자신을 잃어버린다. 에고의 첫 번째 동기인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형태와 동일시될 때, 의식은 그 형태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린다. 또한 행위와 동일시되고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반응과 동일시될 때, 의식은 그 자신을 잃어버린다. 모든 생각, 모든 욕망이나 두려움, 모든 행위와 반응들은 그때 허구의 자아개념을 갖게 된다. 이 허구의 자아는 순수한 '있음'이 주는 단순한 기쁨을 느낄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쾌락을 추구하고, 때로는 쾌락을 대신하기 위해 고통까지 추구한다. 이것은 순수한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본래 존재를 망각한 상태에서는 모든 성공은 지나가는 망상 이상의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성취하는 당신은 곧 다시 불행해질 것이고, 아니면 새로운 문제나 딜레마가 당신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을 것이다.
-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기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에고가 더 이상 당신의 삶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적인 안정을 원하는 심리적인 욕구는 줄어든다. 외부적인 안정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당신은 그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있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할 수 있다. 불확실성과 편안해졌을 때, 무한한 가능성이 당신의 삶에 열린다. 그것은 두려움이 더 이상 당신이 하는 일을 지배하는 요인이 아님을 의미한다. 변화를 가져오는 행동을 두려움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로마의 철학자 타키투스는 정확히 관찰했다. 안정을 위한 욕망은 모든 위대하고 고귀한 일에 저항한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그것은 두려움으로 변한다. 만일 불확실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것은 더 커진 생명력, 깨어 있음, 창조성으로 바뀐다.
- 한 개인의 삶에서 돌아가는 운동, 즉 형상의 약해짐과 해체는 그것이 늙음, 질병, 장애, 상실, 또는 어떤 종류의 개인적 비극을 통해 일어나는 관계없이 영적인 눈뜸의 큰 가능성을 함께 데리고 온다. 의식이 형상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문화에는 영적 진리가 매우 적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의 기회로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형상의 붕괴가 그들이나 그들과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날 때, 그들은 그것이 대단히 잘못된 일이며,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 우리의 문명에는 인간 조건에 대한 크나큰 무지가 자리 잡고 있다. 영적으로 무지할수록 더 많이 고통받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서양에서 죽음은 하나의 추상 개념 이상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형상이 분해 시점으로 다가갈 때 그 인간 형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다. 그래서 노쇠하고 늙은 사람들은 대부분 요양원에 격리된다. 다른 더 오래된 문화들에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는 시신이 소위 문명국가들에서는 감추어진다. 아주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 아니면 고인의 시신을 보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불법이다. 나아가 그들은 장례식 때 고인의 얼굴을 분장하기까지 한다. 위생적으로 처리된 죽음만을 보도록 허락되는 것이다.
- 죽음이 그들에게 단지 하나의 추상 개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상의 분해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접근해 올 때 충격과 몰이해, 절망, 큰 두려움이 밀려온다. 어떤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삶이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던 의미와 목적들은 쌓아 올리고, 이루고, 세우고, 지키는 것과 관계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만족과 관계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외부로 향하는 운동, 형상과의 동일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에고와 관계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외부로 향하는 운동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전통적으로 영적 차원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틀어오는 것은 정확히 늙음의 습격 또는 상실과 개인적인 비극을 통해서다. 말하자면 내면적인 목적은 외부적인 목적이 붕괴되고 에고의 껍질이 갈라지기 시작할 때만 나타난다. 그러한 사건들은 형상의 분해를 향해 돌아가는 운동의 시작을 상징한다. 고대 문화들에서는 이 과정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늙은 사람들이 존경받고 존중받았다. 그들은 지혜의 저장고였으며, 깊이의 차원을 제공했다. 그러한 것이 없었으면 어떤 문명도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 당신이 하는 일로부터 오지 않는다. 기쁨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며, 그리하여 당신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기쁨이 당신이 하는 일로부터 온다는 오해는 정상적이지만 위험하다. 왜냐하면 기쁨이 하나의 행위나 일 같은 무엇인가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세상이 당신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끝없는 좌절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상이 그들에게 주고 있지 않은 것이다.
- 그렇다면 당신이 하는 일과 기쁨의 상태는 무슨 관계인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행할 때, 그 행위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닐 때 그것이 어떤 행위는 당신은 즐길 것이다. 당신이 실제로 즐기는 것은 당신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강한 생명력의 느낌이다. 그 생명력이 당신 존재와 하나다. 이것은 당신이 무엇인가를 즐기면서 행할 때, 실제로는 역동적인 측면에서 순수한 '있음'의 기쁨을 경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즐기면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당신을 모든 창조의 배후에 있는 힘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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